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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8-31 (화) 13:45
분 류 사전2
ㆍ조회: 361      
[행정] 진 (브리)
진 鎭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경 지대에 설치된 특별 행정 구역.

신라 시대에는 말갈(靺鞨)을 막기 위해 실직(悉直:지금의 삼척)에 북진(北鎭)을 설치했고, 782년(선덕왕 3)에는 평산(平山)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서해안의 거점으로 삼았다. 828년(흥덕왕 3)에는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이듬해에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에 당성진(唐城鎭)을, 846년(문성왕 8)에는 강화도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다.

고려 시대에도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신라와 후백제의 접경 지대에 진을 설치했다. 백제 지역에 예산진(禮山鎭), 신라 지역에 일어진(於鎭)을 설치하고 병력을 파견했다. 후삼국 통일 이후에 남쪽의 진은 모두 없애고 북쪽의 거란 및 여진과의 접경 지대인 양계에만 남아, 백령진(白翎鎭)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계 지역에 집중되었다. 1018년(현종 9) 지방제를 정비했을 때 진의 수는 28개였다.

이 진들은 성곽으로 둘러싸고 무장했으며 독립된 단위의 전투 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군현 체계와는 달리 군사 행정 체계로 속현을 거느리지 않았다. 안북(安北)과 안변(安邊)의 두 도호부(都護府)가 이러한 여러 진을 거느렸다. 후대에 점차 진이 행정 구역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면서 일반 진에는 7품 이상의 관원을 진장(鎭將)으로, 방어진(防禦鎭)에는 5품 이상의 관원을 방어진사(防禦鎭使)로 파견했다.

양계의 여러 진에 배치된 군대 병력은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에 있었다. 진은 국가 방어의 의미를 지닌 기구이기 때문에 원의 간섭기에는 진이 가진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290년(충렬왕 16) 서경에 설치했던 동녕부를 고려가 회수한 뒤 평양부 이외의 주진 명칭을 본래대로 되돌리는 조처가 취해졌다. 동계의 경우에는 원나라가 강제로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1356년(공민왕 5)에 수복하면서 이 지역에 많은 진을 설치했다.

조선 초기에는 압록강ㆍ두만강 연변과 남부 해안 지대에 여러 개의 진을 설치했다. 고려 시대인 1356년부터 경상도ㆍ전라도ㆍ양광도의 해안에 도순문사(都巡問使)와 수소(戍所)로 이어지는 방어 체제를 마련했으나, 이 체제에 문제가 있어 조선 시대인 1397년(태조 6) 그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각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폐하고 첨절제사제로 바꾸면서 진을 설치했다.

1398년 다시 도절제사를 두어 영(營)을 맡고 각 진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때의 영진군은 주로 마병이었다. 연안 지역의 진에는 이밖에 군관(軍官)ㆍ정군(正軍)ㆍ유방군(留防軍)ㆍ진속군(鎭屬軍)ㆍ패속군(牌屬軍) 등이 배치되었다. 진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의 인정(人丁) 가운데 일부를 군사력으로 하여 진군(鎭軍)을 이루어 이후 진관(鎭管) 체제가 성립되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세종 초에 여진의 압력이 강화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1432년(세종 14) 석막(石幕:富寧)에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했다. 그후 1434년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고 6진 설치에 착수했다. 특히 서북 방면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압록강 상류 지역에 국방상의 요지인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무창(武昌)ㆍ우예(虞芮)의 4군과 동북 방면의 두만강 하류 남안에 종성(鍾城)ㆍ온성(穩城)ㆍ회령(會寧)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ㆍ부령(富寧)의 6진을 설치했다.

1455년(세조 1)에는 이제까지 북방의 익군과 남방의 영진군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군사 조직을 북방의 예에 따라 군익도(軍翼道)의 체제로 통일했다. 전국의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를 다시 중ㆍ좌ㆍ우의 3익으로 편성하여 인근의 군현을 여기에 소속시킴으로써 하나의 군사 단위를 이루었다. 연해 지역에만 설치되었던 진을 내륙에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소속시켰다.

1457년 이 익군(翼軍) 체제가 진관 체제로 변경되었다. 군익도의 중첩성을 지양하고 거진(巨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진들을 여기에 속하게 해서 하나의 진관으로 편성했다. 진관 체제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있는 곳을 주진이라 하고 그 아래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거진 등의 크고 작은 진이 있어 병영(兵營) 또는 수영(水營)의 통제를 받았다.

진관 체제에서 병력의 근간은 양인 농민이었다. 이러한 진관 체제가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의 역부담 방식의 변화로 그의 근간인 병력의 확보에 문제점이 드러나,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제승방략>에 문제점이 들어나 진관 체제를 다시 복구하자는 견해도 있었으나, 속오군제를 성립시키면서 진관 체제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진관 체제에서 거진이 행정상의 단위에 설치된 데 반해 속오군의 경우에는 각 영(領)이 군사적 요새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군제상의 변화가 진의 중요성을 약화시킨 것은 아니었으나 조선 후기 병자호란 등에서 보듯이 실제의 전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진에 대한 방비의 치중도 그때그때 정세에 따라 달라졌는데, 1683년(숙종 9) 무창ㆍ자성의 2진이 설치되었다가 곧 혁파되었으며 그뒤 1788년(정조 12) 다시 무창진이 복설되었다.

그리고 해안을 통한 외세의 침투가 잦았던 고종 연간에 경강 입구, 경기 연해 지역, 강화의 진무영에 대한 집중적인 재정 지원이 있었고, 경기뿐만 아니라 연해 지역과 변방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고 새롭게 진을 설치하기도 했다.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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