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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2 (토) 11:53
분 류 사전2
ㆍ조회: 358      
[조선] 박세채 (브리)
박세채 朴世采 1631(인조 9)~1695(숙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ㆍ학자.

박세채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소론의 영수로 당쟁의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출신 및 관직생활

본관은 반남.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의(漪)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649년(인조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을 때, 영남의 유생 유직(柳稷)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효종이 비답(批答)에서 박세채를 꾸짖자, 이것을 계기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여 경학에만 전념할 뜻을 세웠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ㆍ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로 성리학을 연구했고 송시열과도 교류했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인에 반대하고 송시열ㆍ송준길 등과 함께 1년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경기년설(禮經朞年說)을 지지했다 (→ 색인 : 기해예송).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들이 축출당할 때 삭탈관직당하고 양근ㆍ지평ㆍ원주ㆍ금곡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기용되어 집의ㆍ이조참의ㆍ대사헌ㆍ이조판서ㆍ우참찬 등을 지냈다.

노론ㆍ소론의 분열

이무렵 서인들 가운데에는 훈척파(勳戚派)와 청의파(淸議派)라는 두 갈래의 흐름이 생겨 서로 반목했다. 이른바 노론ㆍ소론의 분쟁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훈척파는 김수항ㆍ민정중ㆍ김석주ㆍ민유중 등 남인을 내쫓는 데 공이 많고 나이가 많은 고관들이었고, 청의파는 조지겸ㆍ오도일ㆍ박태보ㆍ박태유ㆍ한태동 등 연소한 관료들로 남인들의 완전 제거와 훈척파의 전권(專權)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색인 : 붕당정치).

1682년 김익훈ㆍ김석주가 남인을 밀고하여 옥사가 발생하자, 청의파에서는 이를 무고라 하여 탄핵했다. 이때 송시열이 훈척파를 옹호하여 청의파와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나, 1683년 송시열이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존주대의(尊周大義)라 하여 시호를 높일 것을 주청한 것을 계기로 송시열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ㆍ김석주ㆍ김익훈 등을 추종하는 사람은 노론으로, 박세채ㆍ조지겸ㆍ한태동 등을 따르는 사람은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윤증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함께 학문교류 및 정치활동을 했다. 1689년 소의장씨(昭儀張氏)의 희빈 책봉문제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우의정ㆍ좌의정 등을 두루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학문과 사상

그의 학문은 당쟁의 격화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의 동요하는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당쟁의 근절을 위한 탕평론과 사회적 규범의 확립을 위한 예학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소론의 영수가 되었지만, 붕당의 화가 나라의 존립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에서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론을 제시했다.

노론ㆍ소론의 대립 과정에서 <황극탕평론 皇極蕩平論>을 발표한 것은 그러한 예였다. 한편 그의 학문적 업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예학은 양란 이후 심화된 조선 왕조의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는 사회적인 강상(綱常)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당쟁과 관련되면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예송(禮訟)의 문제는 이러한 입장에서 예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였다. 즉 성리학의 심화과정에서 예의 의식적ㆍ자율적인 준행을 강조하는 추세와 함께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 의식 속에 도통(道統) 수호와 이적 배척 및 강상의 재건이 필요해진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세채가 도통수호를 위해 <이학통록보집 理學通錄補集>ㆍ<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 등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통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유현들의 도학 연원을 밝히고, 이단을 비판ㆍ배척하기 위해 <양명학변 陽明學辨>ㆍ<천리양지설 天理良知說> 등을 저술하여 양명학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했던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의 예학은 당시 성리학자들의 예에 대한 관심과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사회 규범으로서의 가례식(家禮式)의 사례(四禮)에 관한 것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가례요해>ㆍ<가례외편>ㆍ<남계예설> 등 숙종 때에 편찬된 그의 예서는 주로 관혼상제의 사례에 관한 것들이었다. 또 <소학>ㆍ<근사록>ㆍ<대학>ㆍ<중용> 등 유교경서의 난해한 구절을 해설하는 한편 정주(程朱)의 해설을 토대로 <춘추>를 보완ㆍ서술하기도 했다.

박세채의 저술은 그의 유학사ㆍ정치사의 위치를 대변하듯이 실로 방대하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범학전편 範學全編>ㆍ<시경요의>ㆍ<춘추보편>ㆍ<남계독서기>ㆍ<대학보유변>ㆍ<심경요해 心經要解>ㆍ<학법총설學法總說>ㆍ<양명학변>ㆍ<남계수필록>ㆍ<심학지결 心學至訣>ㆍ<신수자경편 新修自敬編>ㆍ<육례의집 六禮疑輯>ㆍ<삼례의三禮儀>ㆍ<사례변절 四禮變節>ㆍ<가례요해>ㆍ<가례외편>ㆍ<남계예설>ㆍ<동유사우록>ㆍ<주자대전습유> 등이 있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참고문헌

한국유학사 : 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7
한국유학사 : 배종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조선유학사 : 현상윤, 민중서관, 1949
조선후기 남계 박세채의 예치론 <경주사학> 9 : 강신엽, 동국대학교 경주대학 국사학회, 1990
17세기 후반 박세채의 탕평책 <동국역사교육> 2 : 강신엽,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1990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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