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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12-08 (수)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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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1 (두산)
조선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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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개관

고려의 뒤를 이어 함경도 출신의 무장(武將)인 이성계(李成桂)가 신진 사대부(士大夫)와 협력하여 세운 왕조.

1392년 즉위한 태조(太祖)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퇴하였으며, 밖으로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이 계속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ㆍ홍건적(紅巾賊)ㆍ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높이며 중앙정계에 진출,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의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구세력인 최영(崔瑩) 일파를 숙청하고, 또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개창하니,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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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국호와 국도

조선왕조의 태조는 처음 민심의 동요를 생각하여 국호를 계속 고려라 하고 서울을 개경(開京)에 정하였으나, 곧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단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고조선(古朝鮮)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조선(朝鮮)으로 정하고 이를 1393년(태조 2) 2월 15일부터 사용하였다.

국호의 제정과 아울러 국도의 결정에 대하여도 큰 관심을 보여 태조는 계룡산(鷄龍山) 부근과 무악(毋岳:현재 서울의 서쪽), 그리고 한양(漢陽:지금의 서울)을 후보지로 삼고 중신들과 오랫동안 논의하여 마침내 94년 1월, 농업생산력이 높고 교통과 군사의 요지인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였다. 도성의 출입문으로서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을 비롯한 4대문을 세우고 이곳을 한성부(漢城府)라 이름하였다.

Ⅲ. 건국이념

조선왕조는 그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다음과 같은 3대 정책을 건국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첫째,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 중국 명(明)나라에 대하여는 종주국이라는 명분을 살려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경제적ㆍ문화적 실리를 취하고, 아울러 새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한편,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교린을 내세워 우호적인 교제로 평화유지를 꾀하였으나, 그들이 변경을 혼란시키면 무력으로 제재하였다.

둘째,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ㆍ문화ㆍ사상계의 지도적 근본이념이 되게 하여 교육ㆍ과거ㆍ의례는 유교적인 체제로 바뀌어 갔다. 셋째,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채택, 건국 초부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에 노력하였다.

Ⅳ. 왕조의 발전

조선왕조의 발전과정은 왕권의 강화, 제도의 정비, 사회구조, 대외관계의 변화에 따라 크게 6단계로 단계적 특성을 보였다.

제1기인 15세기에는 왕권이 확립되어 갔고, 제2기인 16세기에는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사회체제가 변질되어 갔으며, 제3기인 17세기는 왜란(倭亂)ㆍ호란(胡亂)으로 동요되었던 사회구조를 정비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고, 제4기인 18세기에는 정치적ㆍ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문물이 융성하였으며, 제5기인 19세기 전반기에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정치질서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사회체제가 와해되고 농촌사회가 동요하였고, 마지막 제6기인 19세기 후반기에는 문호(門戶)의 개방과 더불어 밀어닥친 세계 열강의 각축 속에서 내외의 정세가 크게 격동하였다.

1. 확립기

조선왕조의 확립기는 태조(太祖)∼성종(成宗)까지를 말한다. 태조의 치세는 이른바 창업기(創業期)로서, 국호를 정하고 도읍을 옮기며, 정치이념을 내세우고 문물제도를 정비함에 주력하였다. 이때에는 건국에 협조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이 실권을 장악하고 제도정비를 주도하였는데, 특히 조준은 전제개혁을 주관하여 새 왕조의 경제안정에 기여하였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찬하여 통치이념의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의 세력 증대는 왕실과 알력을 빚었고,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하륜(河崙)ㆍ권근(權近)의 도움을 받아 왕권중심으로 권력구조를 바꾸고, 관제를 개편하여 관료제도를 정비하였다.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강화하고 사원경제(寺院經濟)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의 재정기반을 굳혔으며, 조세ㆍ신분ㆍ호적제도를 개혁하여 양인(良人)을 늘리고 국역(國役)기반을 확대하였다. 사병혁파(私兵革罷), 신문고 설치, 사섬서(司贍署) 설치, 계미자(癸未字) 주조, 호패법(號牌法) 실시, 서얼차대(庶禽差待) 등은 이때에 이루어졌다.

태종 때에 다져진 정치ㆍ경제ㆍ군사적 안정을 바탕으로 세종 때에는 문화의 융성기를 맞았다. 세종은 모범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고자 황희(黃喜)ㆍ맹사성(孟思誠)ㆍ유관(柳寬) 등과 같은 청렴하고 노련한 재상을 등용하여 민의(民意)에 부합된 정치를 하였다. 아울러 집현전을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성삼문(成三問)ㆍ신숙주(申叔舟) 등의 젊고 재주 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고금의 문물제도를 깊이 연구하게 하여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게 하였으며,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국민복지 향상에도 유의하여 조세ㆍ형벌ㆍ의료제도를 개선하고, 의창(義倉)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측우기(測雨器)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계를 발명하였고,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활자개량에도 힘써 많은 책을 간행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의방유취(醫方類聚)》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은 이때에 펴낸 것들이다.

세종은 또한 국토확장에도 힘을 기울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지방을 개척하여 6진(六鎭)을 설치하게 하였고, 최윤덕(崔潤德)으로 하여금 서북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고, 3포(三浦)를 열어 일본과의 제한된 무역을 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ㆍ단종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고 연소하여 김종서 등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한명회(韓明澮)ㆍ양성지(梁誠之) 등의 협조를 얻어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세조(世祖)이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등을 제거하고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을 진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 부국강병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으며,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국가수입을 늘렸고, 조직적이며 통일된 법전의 마련을 위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민심을 수렴하고자 배불정책을 완화하여 원각사(圓覺寺)를 건조하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였다.

조선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다. 성종은 특히, 유학을 장려하여 홍문관(弘文館)ㆍ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하고, 서거정(徐居正) 등의 보필을 받아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여러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경국대전》을 완성, 국가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사림을 등용하며 훈구(勳舊) 세력의 강화를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건국 이후 1세기에 걸쳐 집권체제를 위한 정비작업을 일단락지었다.

2. 변질기

조선왕조의 변질기는 연산군(燕山君)∼선조(宣祖)까지를 말한다. 훈구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던 조선왕조는,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士林)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보였는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사림세력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양자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연산군의 거듭되는 실정을 계기로 무오사화(戊午士禍)ㆍ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연산군은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균형과 조화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성종과는 달리 양파를 모두 배척하여 왕권을 전제화시키려 하여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켰으며, 특히 유자광(柳子光)ㆍ임사홍(任士洪) 등의 책동으로 끝내 정치도의를 상실한 채 국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고 사치와 방탕으로 소일하다가 마침내 일부 유신(儒臣)들의 쿠데타로 쫓겨나고 중종(中宗)이 새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사림을 다시 중용하고 특히, 조광조(趙光祖)로 하여금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추진케 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부흥시켰다.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림세력의 대거 등용을 꾀하였고,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성리학적 윤리와 향촌자치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림의 정치적ㆍ사회적 지위를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여망에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의 성격이 너무도 급진적이고 과격하여 반대파의 공세를 받고 마침내 정계에서 밀려났는데,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하였던 사람들은 몇 차례에 걸친 사화로 말미암아 많은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물러나기도 하였으나, 서원(書院)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명종 때에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이들 사림들 사이에서 정권다툼이 일어나는데, 이를 당쟁(黨爭)이라 한다. 선조 때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파가 당쟁의 시작이다.

지배층의 대립으로 그때마다 옥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정치질서는 동요되어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소수 양반들에 의한 토지겸병과 농장의 확대는 국가재정을 위축시키고 이에 따라 농민의 부담이 늘어났다. 특히 공납(貢納)ㆍ군역(軍役)ㆍ환곡(還穀)에 있어서 폐단이 깊어 갔다. 또한 관료제도와 과거제도의 폐단은 양반계층을 대량으로 배출하여 신분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이 정치ㆍ경제ㆍ사회의 질서가 변질되고 국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어서 호란을 맞게 되었다. 조광조ㆍ이이(李珥)로 대표되는 16세기의 사림정치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방강화와 대외정책에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3. 정비기

조선왕조의 정비기는 광해군(光海君)∼숙종(肅宗)까지를 말한다. 1592년에 시작되어 7년간 전개된 임진왜란의 피해는 막심하여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고 농촌은 황폐화하였으며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이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왜군의 방화로 문화재의 손실도 커서 불국사ㆍ경복궁 등의 건물, 사고(史庫)의 서적 등이 소실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혁신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을 비롯한 대북파(大北派)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광해군은, 먼저 전란을 통해서 사림정치의 한계를 느끼고, 일부 사림들을 몰아내고 종친(宗親) 등의 정적을 대거 숙청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어서 전쟁으로 피폐한 산업과 재정기반을 재건하고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양전사업ㆍ호적사업을 실시하고, 동시에 성지(城池)와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또 전란 중에 질병이 많아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에 비추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불에 타버린 사고를 다시 갖추었다. 대외정책에서도, 명나라가 약해지고 북방의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하여 여진족의 후금(後金)과도 친선을 도모하는 등, 실리적이고 탄력성 있는 중립적 외교를 추구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혁신적인 정치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림들에게는 크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광해군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적 윤리에 저촉되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사림의 지지를 받은 서인(西人)에 의하여 쫓겨나고 인조(仁祖)가 즉위하였다.

인조를 옹립한 서인정권은 광해군 때의 중립적 외교정책을 지양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내세웠다.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고, 이어 국호를 청(淸)이라 하고 사대(事大)를 요구하며 1636년 다시 침입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45일간 지내다가 끝내 청나라와 화의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서인정권은 여진족과의 항쟁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의 명분을 내세워 금위영(禁衛營)ㆍ총융청(摠戎廳)ㆍ수어청(守禦廳)ㆍ어영청(禦營廳)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이를 선조 때에 마련한 훈련도감(訓鍊都監)과 더불어 5군영이라 하였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孝宗)은, 특히 북벌(北伐)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방하고 이에 협력하는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 사림들을 등용하여 군비증강에 노력하였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현종(顯宗)과 숙종은 지나친 군비증강에서 오는 재정궁핍을 타개하고, 증대된 서인세력을 견제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인(南人)들을 등용하였다. 서인과 남인은 예송논쟁(禮訟論爭)ㆍ세자책봉의 문제로 한동안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당쟁의 격화로 정계는 혼란하였고 전후 복구를 위한 시책도 미봉적이었다.

황폐된 농촌사회의 구제와 탕진된 국가재정의 보완을 위한 개혁은 먼저 토지제도의 정비로 나타났고, 이어서 수취체제를 정비하여, 그 운영에 있어 협잡의 가능성이 많은 공법(貢法)에 대신하여 인조 때 영정법(永定法), 효종 때 양척동일법(量尺同一法)을 실시하여 전세(田稅)를 1결당 4두(斗)로 통일하였다. 그리고 지방 특산물이나 수공업제품을 현물로 바치는 공법제도에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나자 쌀로 바치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일찍이 선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이래 인조 때 강원도에서, 효종 때 충청도ㆍ전라도에서, 그리고 숙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정의 노력과 더불어 민간에서도 전란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활발해졌다. 농업기술이 진전되었고 상공업계도 활성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잉여산물의 교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화폐제도도 개혁되어 인조ㆍ효종 때에 부분적인 동전(銅錢)의 주조가 있었고, 숙종 때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4. 안정기

조선왕조의 안정기는 영조(英祖)∼정조(正祖)까지를 말한다. 17세기의 조선은 두 차례의 전란을 극복하면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정치ㆍ군사ㆍ경제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어느 정도 사회가 정비되어 갔다. 18세기에는 이와 같은 사회안정을 바탕으로 국가적 노력과 사회변화가 연결되어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유통경제가 활기를 띠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사회건설을 이상으로 한 실학이 일어났으며, 서민문화(庶民文化)가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18세기의 사회발전은 영조ㆍ정조의 치적에 힘입은 바 크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표방, 당인(黨人)을 고루 등용하여 관료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고, 당인들이 장악한 군사권을 왕권에 귀속시키며, 당쟁의 소굴처럼 된 일부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한편, 《속오례의(續五禮儀)》 《속대전(續大典)》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무원록(無寃錄)》 등을 편찬하여 문물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그 부과에 있어 폐단이 많던 군역제도를 시정하고, 민의(民意)를 파악하고자 신문고제도를 부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로써 왕권이 크게 신장되었고, 관료정치가 정비되었으며, 민생안정에 기여하게 되었다.

정조 역시 영조의 왕권 강화정책을 계승ㆍ발전시켜 탕평책을 실시하는 한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정약용(丁若鏞) 등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여 학술활동을 진흥시켰으며 활자개량에도 힘써 편찬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때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대전통편(大典通編)》 《동문휘고(同文彙考)》 《전운옥편(全韻玉篇)》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탁지지(度支志)》 등이 있다.

요컨대, 18세기에는 사회변화에 대처하고 민생안정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 경주되어 중흥정치(中興政治)를 실현시켰고, 한편 서민들의 문화의식이 고양되어 민족문화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진폭이 확장되었다. 특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융성한 실학운동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서, 유교적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서서히 근대사회로 지향하는 데 기여하였다.

5. 침체기

조선왕조의 침체기는 순조(純祖)∼철종(哲宗)까지를 말한다. 영조ㆍ정조의 중흥정치로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던 조선사회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흔들리게 되었다. 세도정치의 시작은 정조 때의 홍국영(洪國榮)에서 비롯되었으나, 본격적인 세도가 시작된 것은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장인인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이다. 그의 세도와 함께 내외의 중요 관직은 그의 집안인 안동김씨(安東金氏) 일문이 독점하였다.

헌종(憲宗) 때에 조인영(趙寅永)이 세도를 부려 풍양조씨(豊壤趙氏)가 득세한 때도 있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세도는 다시 안동김씨에게로 돌아갔다. 60여 년에 걸친 세도정치로 왕권은 매우 약화되었고 부패와 부정이 급속도로 만연하여 매관매직(賣官賣職)과 회뢰(賄賂)가 공공연하게 행해졌고, 지방 각 고을에서는 탐관오리의 착취ㆍ횡령으로 국민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특히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농민들은 가난에 쪼들려 빚에 몰린 끝에 파산하여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거나 도둑떼에 들어갔다. 더구나 일문일족의 권력독점으로 양반사회제도가 밑바탕으로부터 흔들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의식이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반항을 시도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1811년 순조 때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고, 이후 민란은 더욱 확산되어 철종 때에는 삼남지방(三南地方)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이때 밖으로는 천주교와 함께 서양세력이 조선에 위협을 주었다. 이에 백성들은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하여 도교(道敎)가 유행하고 천주교와 동학(東學)에 귀의하기도 하였다.

6. 격동기

조선왕조의 격동기는 고종(高宗)∼순종(純宗)까지를 말한다.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전통사회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안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계층에 저항하는 농민세력이 성장해갔으며,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하자, 안으로는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열강의 접근에 대하여 쇄국정책으로 대항하였다. 그는 먼저 세도정치의 장본인인 안동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당파ㆍ신분ㆍ지방의 구별 없이 실력 본위로 인물을 등용하였다. 또 왕권강화를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를 폐하고 의정부(議政府)의 기능을 회복하였고, 법치질서의 정비를 위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과 《육전조례(六典條例)》를 간행하였다.

또 삼정을 바로잡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고자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하여 군포(軍布) 부담의 형평을 기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여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토록 하였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그리고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한편 외세의 침략적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강경한 쇄국정책을 단행하여 먼저 천주교에 대탄압을 가하고, 이를 구실로 조선에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접근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였다.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이어서 미국 함대의 침공도 물리치며 쇄국정책을 강화하였으나,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유림세력의 반발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하여 동학사상, 개화사상,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 자라났고, 정권을 장악한 명성황후 일파는 정치적 경륜이 부족하여 정계는 혼란만을 거듭하였다. 개화와 보수의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고, 청ㆍ일 양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서 독점적 세력을 구축하려고 각축을 벌였다. 두 차례의 정변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약화된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강화하였다.

일본의 약탈적인 무역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함께 농민층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쌀의 유출로 인한 물가의 앙등, 일본 어선의 진출에 따른 어민의 실업, 군란ㆍ정변 등에 따른 배상금 지불, 개화정책에 따르는 경비의 증대는 모두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불안한 농촌사회를 온상으로 하여 농민의 정신적 지주로 등장한 동학세력은 그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단순한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또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우며 마침내 1894년 대대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ㆍ일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동학운동을 진압하면서 조선정부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정개혁을 요구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한 갑오개혁은 정치ㆍ사회ㆍ경제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광범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한 것이었으나 개혁의 반발이 내외에서 일어났다. 특히 일본의 조선정부에 대한 간섭과 만주까지의 세력 확대는 남하정책(南下政策)을 꾸준히 추진하던 러시아의 견제를 받았다.

러시아의 세력이 대두되자 민씨정권은 배일친러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추진하여, 종두법(種痘法)을 실시하고,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하였다. 이는 국민의 배일의식(排日意識)을 크게 고취시켰고, 그 결과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배일운동이 거세게 일자, 친러파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자주권이 크게 손상되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은 조선으로부터 많은 이권을 빼앗아 갔다.

이때를 당하여 안에서는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적 각성과 근대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갔다.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일부 선각자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자주ㆍ자강과 자유ㆍ민권의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근대화운동을 추진하였다.

1897년 8월 내외의 여론으로 마침내 고종도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還宮)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왕을 황제(皇帝)라 칭하여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위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사회ㆍ경제적인 자강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의 진흥에 힘썼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하는 고종과 보수적 집권층 때문에 대한제국은 일본ㆍ러시아 사이의 흥정 대상이 되어 갔다.

마침내 1904년 러ㆍ일전쟁에서 우위를 점한 일본은 영국과 영ㆍ일동맹을,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밀약을 맺어 한국의 강점을 착실히 추진하였다. 즉, 일본은 러ㆍ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여 군사적 요지를 마음대로 점령한 데 이어 교통통신망을 장악하더니,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실시하고, 마침내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을사조약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 이른바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조선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주재하는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강행하였다. 1910년 8월 마침내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5적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막을 내렸다.

(뒤에 계속)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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