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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8 (월) 05:41
분 류 사전2
ㆍ조회: 3197      
[고대] 고대의 지방행정제도 (민족)
지방행정제도(고대의 지방행정제도)

세부항목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고대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고려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조선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근대이후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일제강점기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미군정기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대한민국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참고문헌)

[고대]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성립된 국가인 고조선(古朝鮮)의 지방 제도가 어떠했는지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지방 제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부여(夫餘)에게서 보이고 있다.

(1) 부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의하면, 부여의 지배자 계층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ㆍ우가(牛加)ㆍ저가(猪加)ㆍ구가(狗加)와 대사(大使)ㆍ대사자(大使者)ㆍ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고, 제가(諸加)는 따로 사출도(四出道)를 관할하였다. 그 관할 호수(戶數)는 수천호 또는 수백호 등 차이가 있었으며, 읍락(邑落)에는 호족(豪族)과 하호(下戶)가 있었는데, 하호는 모두 노예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여의 지방 행정 구역이라 할 수 있는 사출도가 제가, 즉 여러 부족장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것은 지방 제도의 미숙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할 것이다. 특히, 그 관할 호수가 수천호ㆍ수백호 등으로 차이가 있었다는 데에서 지방 제도가 중앙 행정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비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여에서는 제가, 즉 여러 부족장이 제각기 그들의 지배 아래 있는 호족과 하호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태의 지방 통치는 부여사회 외에 부족 연맹체 사회 단계의 어느 사회에서도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면에서 부여의 사출도 관계 기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우리 나라 고대 사회에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이 성립되고, 왕권 중심의 새로운 국가 체제가 정비되어가는 과정에서 지방 제도도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갔다.

(2) 고구려

고구려에서는 태조왕대(53∼146)에 국가체제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으며,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종래 부족 중심의 사회 질서가 붕괴되어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 뒤 고구려 사회의 발전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지방 제도의 정비와 관련해 고국천왕대(179∼196)의 조처가 주목된다. 즉, 이른바 부족 연맹체 단계의 작은 국가로서 그 자체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온 5족(族)이 방향을 표시하는 동ㆍ서ㆍ남ㆍ북ㆍ내(內)의 5부(部)로 개편된 사실이다. 족제적(族制的)인 성격이 강한 5족을 행정 구획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5부로 개편한 것은 중앙집권적인 체제 정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처럼 왕권 중심의 새로운 국가 체제 성장에 따라 중앙 귀족들의 근거지인 왕경(王京)뿐만 아니라 부족 세력의 근거지인 지방에까지 행정적인 구획이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와 같은 개편 과정에서 종래의 족제적인 전통이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이것은 여간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고구려에서는 기내(畿內)의 5부뿐만 아니라, 전국을 역시 5부로 나누었다. 부(部) 밑에 여러 성(城)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이 성들이 지방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각 부의 장관은 욕살(褥薩)이라 했으며, 그 아래 단위의 성주는 처려근지(處閭近之) 또는 도사(道使)라고 하였다.

성주들은 모두 각자 자기 관할 지역내의 행정과 군사 전반에 관한 사무 일체를 맡아보았는데, 삼국의 시대상황이 지방 제도면에 있어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 점은 삼국 공통이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평양 천도 뒤에 수도 이외에 옛 수도인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의 두 별도(別都)를 두어 삼경제(三京制)를 마련하였다.

(3) 백제

백제의 경우, 한성을 수도로 정하고 있던 시기의 지방 제도가 어떠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 천도 뒤에는 22담로(擔魯) 제도가 확정된 것이 분명하다.

≪양서 梁書≫ 백제조에 의하면, 담로의 장관으로 왕자ㆍ왕족을 봉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흥 귀족 중에서 지방의 왕이나 후(侯)로 분봉(分封)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 왕족 이외에 신흥 귀족들도 담로의 장관으로 봉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왕족 및 신흥 귀족을 각 지방의 왕ㆍ후로 분봉함으로써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일종의 봉건제적인 지방통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지방 제도는 사비(泗歷 : 지금의 부여) 천도 뒤에 큰 변화를 보였다. 즉, 22부(部)의 중앙관서와 함께 5부ㆍ5방(方)의 지방 제도가 새로이 마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수도의 오부제(五部制)는 도내(都內)를 5부로 구분하고, 각 부마다 5백명의 군대를 두었다.

그리고 지방의 오방제(五方制)는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각 방의 장관으로 방령(方領) 1인을 두었는데, 2품관인 달솔(達率)로 임명하였다.

각 방령은 1,200인 이하 7백인 이상의 군대를 통솔하였다. 또, 각 방 밑에는 10개군 또는 6, 7개군이 딸려 있었다. 군에는 군장(郡將) 3인을 두되, 4품관인 덕솔(德率)로 임명하였다. 요컨대, 사비 시대의 지방 제도는 웅진시대와는 달리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4) 신라

신라의 지방제도는 고구려ㆍ백제에 비해 형성시기가 늦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의 주군제도(州郡制度)는 505년(지증왕 6)에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이것은 이 때 본격적인 지방제도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지방제도는 영토의 비약적인 확장에 따라 점진적으로 확립되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법흥왕ㆍ진흥왕대가 주목된다.

신라시대에 있어 주(州)는 지방의 행정ㆍ군사의 거점으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최초로 실직주(悉直주 : 지금의 삼척)가 설치된 때가 바로 지증왕 6년이었다. 그 뒤 525년(법흥왕 12)에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상주)가 다시 설치되었다. 뒤이어 진흥왕이 낙동강과 한강 유역을 장악하자 다시 여러 개의 주를 신설하게 되었다.

신라의 주는 군사작전상의 필요에 따라 주치(州治)를 옮긴 것이 특색이었다. 삼국통일 이후 685년(신문왕 5)에 구주(九州)로 정비될 때까지의 주치의 변동상황을 도표화하면 〔표 1〕과 같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의 지방제도는 모두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성(城)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한편, 삼국은 모두 이러한 지방행정 조직과는 별도로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삼경제를 운영하고 있었고, 백제도 사비시대 이후에는 옛 수도인 웅진과 익산(益山)을 별도(別都)로 경영한 흔적이 있어 고구려처럼 삼경제를 채택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신라는 514년(지증왕 15)에 아시촌(阿尸村)에 소경을 설치한 이래 557년(진흥왕 18)에는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 639년(선덕여왕 8)에는 하슬라(何瑟羅 : 지금의 강릉)에 각각 소경을 설치하고 그 장관인 사신(仕臣, 또는 仕大等)을 중앙에서 파견하였다.

주와 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데 비해 소경은 지방의 정치적ㆍ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한편 주군(主郡)을 견제 감시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5) 통일신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확대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지방 행정 구획을 다시 편성하였다. 신문왕 때에 완성되는 구주ㆍ오소경(五小京)의 제도가 그것이다. 그 내용을 도표화하면 〔표 2〕, 〔표 3〕과 같다.

통일신라 시대의 지방제도상, 먼저 9주제는 지방 통치의 기본이 된 것으로서 주 밑에 군(郡), 군 밑에 현(縣)이 각각 딸려 있었다. 지방 행정 조직에 있어 주의 비중은 매우 컸다.

주의 장관은 처음에 군주(軍主)라 하다가 태종무열왕 때에 도독이라 고쳐 불렀으며, 신문왕 때에는 총관(摠管)이라 일컬었다. 주의 장관으로는 진골(眞骨)만이 임명된 것으로 보아 주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군에는 장관으로 태수(太守)가 임명되었으며, 현에는 그 격에 따라 소수(少守) 또는 현령(縣令)이 임명되었다. 현까지의 외관은 모두 중앙으로부터 임명, 파견되었다. 주ㆍ군ㆍ현 밑에는 일반적으로 촌(村)이라는 작은 행정 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행정적으로 설정된 이른바 행정촌(行政村)은 몇 개의 자연촌(自然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촌주(村主)의 관할 아래 있었다.

촌주는 그 지방의 토착 세력가 중에서 임명되었는데,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지방 행정 기관의 통제를 받았다. 이 밖에 지방의 말단행정보좌직인 주ㆍ군ㆍ현의 이(吏)도 촌주와 같이 그 지방의 토착 세력 중에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은 촌주나 주ㆍ군ㆍ현의 이(吏)들을 중앙 정부에서 통제하기 위해 상수리 제도(上守吏制度)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외주(外州)의 이(吏) 한 사람을 상경시켜 왕경(王京)의 여러 관부를 지키게 하는 제도였다. 또, 주ㆍ군ㆍ현 밑에는 향(鄕)ㆍ부곡(部曲) 등이 있었다. 신라의 향ㆍ부곡민은 촌민과는 달리 천민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6) 발해

발해의 지방 제도는 전국을 5경(京)ㆍ15부(府)ㆍ62주(주)로 구분하고 있었다. 5경은 상경(上京, 龍泉府)ㆍ중경(中京, 顯德府)ㆍ동경(東京, 龍原府)ㆍ남경(南京, 南海府)ㆍ서경(西京, 鴨綠府) 등 이었다.

5경은 발해의 왕족 및 고구려 계통의 지배적 귀족들의 필요에 의해 설치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15부는 지방 행정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징은 우선 그것이 일정한 종족(種族)의 거주지를 단위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15부는 5경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행정계통상 15부가 근간이 되고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곳을 5경으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15부 중의 몇몇은 외국과 통하는 교통로로서의 구실을 맡고 있었다.

끝으로 15부는 아래 62주를 통할하고 있었다. 따라서, 62주의 장관인 자사(刺使), 아래 현의 장관인 현승(縣丞) 등은 모두 15부 장관인 도독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하현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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