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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01 (목)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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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168      
[삼국] 고구려 (한메)
고구려 高句麗

삼국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 서기 전후 무렵 성립되어 668년에 멸망하였으며, 한반도(韓半島) 북부와 남만주(南滿洲) 일대를 근거지로 번성하였다.

〔역사〕

<성립>

고구려족(高句麗族)은 만주(滿洲)지방에 살던 부여족(扶餘族)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으로 처음에는 쑹화강[松花江] 유역에 살았는데 BC2세기경부터 남하(南下)하여 동가강유역에서 압록강(鴨綠江) 유역에 걸친 산악지대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처음에 고구려족은 현도군의 지배권안에 있었으나, 그 지방이 산악지대이므로 중국의 지배력이 철저하지 못하였다. 민족의식에 눈뜬 이들은 중국에 대하여 꾸준한 저항을 계족하였으며, 부족간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강한 부족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집권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고주몽(高朱蒙;東明聖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桓仁지방)에 고구려를 세운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BC 37년으로 되어 있다. AD 3년 주몽의 아들유리왕 때에 수도를 국내성(國內城:지금의 通溝)지방으로 옮겼고, 제6대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 때부터 차츰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토를 넓히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209년(산상왕 13)에는 환도성(丸都城)을 축조하였다.

<외세와의 투쟁>

고구려가 일어난 땅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침입하는 중도에 위치했으므로 그들과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樂浪郡) 사이의 교통을 위협하자 당시 중국의 삼국(三國) 가운데 하나로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위(魏)나라는 장수 관구검(毋丘儉)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224년(동천왕 18)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킨 적이 있었다.

이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고구려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313년(미천왕 14)에는 400여년이나 내려 오던 낙랑군과 그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어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과 20대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을 감행하여 북(北)으로는 쑹화강, 서(西)로는 랴오허강〔遼河〕을 넘었고, 남(南)으로는 아산(牙山)과 삼척 (三陟)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환도성으로부터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남쪽으로 신라·백제와 맞서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와 겨루게 되었다.

마침내 598년(영양왕 9)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까지 쳐들어왔으나 고구려의 반격·질병·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 역시 군비를 정돈하여 612년(영양왕 23) 113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수비가 견고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양제는 따로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를 가장하고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살수(薩水:지금의 淸川江)에서 일대 반격전을 전개해서 섬멸, 30만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000여 명이었다. 한편 수군(水軍)은 7만의 병력이 300척의 배로 대동강에 이르러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영양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복병(伏兵)으로 이를 무찔렀다. 그 뒤에도 양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치려고 군대를 움직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방에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하여 중국과 대립할 뿐 아니라 북쪽의 돌궐(突厥) 등과 내왕하니 중국으로서는 큰 위협이 되었다. 수나라 다음에 일어난 당(唐)나라도 이같은 고구려를 두고 안심할 수 없어서 태종(太宗)은 644년(보장왕 3) 3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다음해 봄에 랴오허강 건너 요동성 백암성(白巖城)을 총공격하였으나 60여 일의 공격에도 고구려군은 끝까지 항전하여 태종은 마침내 후퇴하였다.

당나라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高宗)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도하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였고 군대가 막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 고종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660년 먼저 백제를 공격한 뒤 그 여세를 빌어 이듬해에 평양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멸망>

666년(보장왕 25)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 남생(男生)·남건(男健)·남산(男産)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나라의 형편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667년 이적(李勣)·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 50만,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신라군 27만이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이듬해인 668년(보장왕 27) 나당(羅唐)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마침내 항복, 보장왕과 중신들은 당나라 군대에 붙잡혀서 장안(長安)으로 갔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謹府)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와 42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제도〕

<정치>

고구려는 본디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 형성되어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부족연맹의 장(長)인 왕이 나왔으나 후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이 5부족은 항상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되었는데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부족제도가 무너짐에 따라 이들의 집단제도는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각 부족의 창을 대가(大加)라 하고 그 밑에 사자(使者)·조의(早衣)·선인(先人) 등의 벼슬을 두었는네, 이것은 옛날 중국의 경대부(卿大夫)가 거느리던 가신(家臣)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부족의 장이 아니라도 왕족에 있어서는 일가의 적통창자(嫡統長子)가 대가의 자격을 가졌는데, 이것을 고추가(古雛加)라고 불렀다. 이 밖에 전에 왕위를 차지했던 소노부의 대가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의 대가도 고추가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고추가는 백제의 길사(吉師), 신라의 거서간(居西干)과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중앙에서 임금의 지시를 받아 국정을 담당한 총리적인 벼슬이 대로(對虞)와 패자(沛者)였는데, 대로 밑에 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이 있고 그 밑에 사자 이하 선인까지 있다. 그리고 대로 위에 상가(相加)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왕가의 직속 신하가 아니라 각 부의 대가 중에서 뽑힌 일종의 대변자(代辯者)였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관직의 서열이 정비되어 국가의 기밀·법령제정·징발·관작(官爵)을 취급하는 고위관리로서 대대로(大對虞)·태대형(太大兄;莫離支)·울절(賚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鳥衣頭大兄)을 두었고 그 밑에 대사자(大使者)·대형(大兄)·발위사자(拔位使者)·상위사자(上位使者)·소형(小兄)·제헝(諸兄)·과절(過節)·부절(不節)·선인(先人 또는 仙人)을 두었다.

또 왕족이나 이에 준한 가문의 대가(大加)에게 주던 고추가는 관직명(官職名)이 되어 외빈(外賓)을 접대했는데 태대사자의 품관이 이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대막리지(大漠離支)는 대대로(大對盧), 태대막리지(大莫離支)는 태대대로의 별칭(別稱) 이었다.

<행정>

초기 5부족의 집단체제가 그대로 행정구역체제로 발전하여 동·서·남·북·중(내)의 5부로 나뉘었다. 즉 계루부는 내부(內部 또는 黃部), 소노부는 서부(西部 또는 右部), 절노부는 북부(北部 또는 後部), 순노부는 동부(東部 또는 左部), 관노부는 남부(南部 또는 前部)라 하였고 이들이 사는 행정구역을 통틀어서 내평(內評)이라 하였다.

지방도 5부(部)로 나누었고 부 밑에 성(城)이 있었다. 부의 장관을 욕살(褥薩), 성의 장관을 처려근지(悽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 하였는데, 각각 관료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고구려는 국민개병주의(國民皆兵主義)로 문무(文武)의 관리가 구분되지 않았으며 군대에는 대모달(大模達;중국의 衛將軍 같은 것)·말객(末客;중국의 郎將 같은 것) 등의 직위가 있다. 평양 이외의 국내성(지금의 通溝)·한성(漢城;지금의 載寧)을 별경(別京)으로 삼았다.

<사회·경제>

왕족과 5부의 장(長)인 대가(大加) 그 일가 친척, 그 밑에서 일을 보는 관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군사·정치·교육·제사 등을 담당하였고 농경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계급으로, 지위에 따라 의관(衣冠)도 달랐다.

농민·노예 등을 하호(下戶)라 하있는데 이들은 직접 육체노동을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부족사회의 특징은 고구려 말까지 이어져 가부장적(家父長的) 지배체제가 유지되었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대가(大加)의 회합인 제가(諸加)의 회의도 말엽까지 계속 이어졌다.

법이 매우 엄하여 반역자에게는 군중이 모인 가운데 우선 화형(火刑)을 가한 다음에 목을 베며, 재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종으로 삼았다. 전쟁에 진 자와 사람을 죽인 자, 강도 등도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어야 했고,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종으로 삼았다. 기본산업은 농업이고, 어업이 그 다음이었다.

토지는개념상으로 국가에 소속되었으나, 실제로는 왕자와 귀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이들은 토지와 아울러 농민도 지배하였다. 수공업이 발달하여 금속기구·목기(木器)·토기·혁구(革具) 등을 만들었고, 직조(織造)기술도 발달하여 세포(細布)는 화폐의 구실도 하였다.

또 고구려는 낙랑군을 정복하여 그곳의 발달된 기술을 배웠고, 철이 많이 나는 평곽(平郭;지금의 鞍山 부근)을 점령함으로써 철공업(鐵工業)이 발달되어 나라가 강성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상업은 주로 물물교환이었고 이웃나라들과도 모피(毛皮)·철구(鐵具)·세포(細布) 등의 교역이 있었다.

세금에는 2개의 종류가 있었는데,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을 세(稅)라 하여 포(布)와 곡(穀)으로 받았고, 매호(每戶)에 부과하는 것을 조(租)라 하여 곡식으로만 받았다. 세는 1명에 포 5필 또는 곡 5섬이었고, 조는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1섬, 2등은 7말, 3등은 5말이었다.

〔문화〕

<교육>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로 건국 전부터 한문이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나 372년(소수림왕 2)에 비로소 중국식 태학(太學)을 세웠고, 이해에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이 불상(佛像)·불경(佛經)·승려(僧侶)를 보내옴으로써 불교가 들어왔으며 다음해에 율령(律令)을 제정하였다.

태학에서는 중국의 고전과 아울러 무술도 가르쳤다. 이 문무일치의 교육은 후기에 들어와서 더욱 보급되어 전국 각지에 경당(局堂)이라고 하는 사립학교를 세워 미혼남자들을 모아 고전과 궁술(弓術)을 가르쳤다. 태학에는 귀족의 자제들이 들어갔고 경당에는 평민의 자제들이 들어 갔다.

<국사편찬>

한학이 퍼짐에 따라 국사(國史)도 편찬하게 되었는데,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연대와 편찬자의 이들은 알 수 없으나 《유기(留記)》라는 100권의 국사책이 일찍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이것을 추려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으나, 《유기》와 《신집》은 오늘날 모두 전하지 않는다.

<시가·음악>

고구려의 문학은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이야기의 설화문학이 전해지고,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와 을지문덕의《오언시(五言詩)》 등 몇몇 시가(詩歌)가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질 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고구려의 악기에는 관(管)·현(絃)·격타악(擊打樂)을 합하여 모두 14종이 있었으며,

악곡에는 《지서가(芝栖歌)》·《지서무(芝栖舞)》·《공후인》 등이 있었다. 또 재상 왕산악(王山岳)은 진(晉)나라로부터 들여온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곡이 넘는 악곡도 엮었다. 고구려의 음악은 수·당에도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술>

고구려의 미술은 고분(古墳)에 남아 있는 벽화(壁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抵塚) 등 초기의 그림은 표현에 있어 기법이 서툴렀으나, 화상리(花上里) 감신총償神塚) 등 중기의 그림은 섬세한 사실(寫實)의 필치로 당시의 풍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신총(四神塚) 등 후기 벽화는 강한 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웅대하고 건실한 기풍을 나타내고, 사실을 초월하여 사의(寫意)의 경지에 들어섰다. 또한 강서고분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고구려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색의 조화가 뛰어나며, 쌍영총에서 발굴된 기마상(騎馬像)·남녀입상(男女立像) 등은 당시의 풍속을 알려준다. 고분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건축기술 또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풍속>

고구려인들은 검소하고 무(武)를 숭상하여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궁궐·관청·절 등과 귀족의 집들은·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남자들은 모자를 썼는데, 특히 관료들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 하여 깃을 꽂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힌 치마를 입었고 저고리는 무릎까지 내려왔다.

상류층에서는 바둑·투호(投壺)·축국(蹴鞠) 등 중국식 놀이를 하였고, 평민들은 춤·노래·씨름·석진(石戰)을 즐겼다. 장례식은 성대히 치러졌으며 여러 가지 부장물(副葬物)을 관 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족이 있었다. 또 10월에는 동맹(同盟)이라 하여 고대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추기(秋期) 부족공동체의 대제전(大祭殿)인 국중(國中)대회를 열었다.

〔종교〕

<불교>

불교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경과 불상을 보낸 때였으나,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순도가 들어온 2년 후인 374년에는 진나라 숭러 이도(阿道)가 들어왔고, 그 다음 해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로 하여금 각각 그곳에서 불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소수림왕 다음인 고국양왕(故國讓王;재위 384∼390) 때에는 어명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라고 권장했고, 광개토왕은 즉위한 다음해인 392년 평양에 9개의 절을 더 세웠으며, 395년에는 진(秦)나라의 승려 담시(曇始)가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지고 와서 활발히 전도하였다.

576년(평원왕 18)에는 고구려의 승려 의연(義淵)이 위(魏)·제(齊) 2대의 숭통(僧統)으로 이름이 높던 법상(法上)에게 가서 불교사를 배워 왔고, 같은 시대의 승려 낭(朗)은 양(梁)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625년(영류왕 8)에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惠灌)은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벽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지묵(紙墨)·맷돌 등을 전하였다.

이밖에 영양왕 때 보덕(普德)은 백제에 옮겨가서 열반종을 창시하였으며 혜량(慧亮)은 신라에 가서 그 곳 불교에 공헌함으로써 초대 국통(國統)이 되었다.

<도교>

도교(道敎)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624년(영류왕 7)으로, 당나라 고조(高祖)의 명을 받들어 도사(道使)가 천존상(千尊像)과 도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뒤 643년(보장왕 2) 연개소문이 임금에게 권하여 당나라로부터 도사 숙달(叔達) 이하 8명을 데려다가 불사(佛寺)를 몰수해서 그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도교숭상이 표면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650년(보장왕 9) 고구려의 이름난 승려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불만을 돕고 백제로 망명하는 등 말기에 들어 점차 불교 세력이 쇠퇴하였다.

<이기동>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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