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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28 (일)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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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107      
[사상] 유교-한국 고대의 유교 (민족)
유교(한국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세부항목

유교
유교(한국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유교(고려시대와 유교)
유교(조선 전기와 유교)
유교(조선 중기와 유교)
유교(조선 후기의 유교)
유교(참고문헌)

1. 상고시대와 유교

유교는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 여러 나라의 사회 문화와 가치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어왔다. 특히 한국은 중국과 인접해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군사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 중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이다.

그러나 한국 상고시대에 대해서는 문헌이 부족해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분야는 한중 양국의 현존하는 여러 문헌과 금석학·갑골학·고고인류학·민속학 등의 방증자료를 통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흔히 한국사상을 말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 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대학(大學)’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음사(淫祀)’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가리킨다. 같은 조에 기자(箕子)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고, 이어서 위만조선·마한·부여 등 여러 나라를 기술하고 있다.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조선·후조선·기자조선을 일컫고, 다시 위만의 기사를 기록한 뒤 삼국이 성립하기까지 열국의 분열상을 적어놓고 있다.

삼국 이전의 고조선을 상고시대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하늘과 조상을 모시는 숭천경조(崇天敬祖)의 사상이 있었다. 이 사상은 한국과 중국을 막론하고 고대에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지만, 각기 지역적 특색이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보장왕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로 중국에서 도교(道敎)를 들여왔다. 당태종이 도사 서달(敍達) 등 8인을 보내오자 이들을 유불(儒佛)보다 높이 대접하였다. 이들은 중국식 도교를 전파하고 고구려의 힘을 약하게 하려고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고래의 유풍을 변화시키고 파괴하였다.

≪삼국유사≫에는 “혹은 영석을 파괴하기도 하였다(或鑿破靈石).”는 기록이 나온다. ‘영석’에 대해 “민간에서는 ‘도제암(都帝茅)’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 성제(聖帝)께서 이 돌을 타고 상제를 조현(朝見)했기 때문이다.”고 주(註)를 달았다.

먼 옛날 상제가 하늘과 교통하는 자리로서 신성한 바위를 택해 ‘영석’·‘조천석’ 또는 ‘도제암’이라 하였으며, 훗날 영석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래의 도사들은 왜 ‘영석’을 파괴했으며, 또한 옛 성제란 어느 시대의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 까닭을 이색(李穡)의 시 〈서경 西京〉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갈 수 있다. “성(城)머리 노수는 햇빛을 가리는데/산정(山頂) 높은 누각은 멀리 바람을 이끄누나/듣건대 하늘 조회 드림에 일찍이 바위 있었다 하니/단군의 영상(英爽)하심이 군웅의 머리 되시도다(城頭老樹猶遮日 山頂高樓遠引風 聞說朝天曾有石 檀君英爽冠群雄).”고 하였다. 여기에서 ≪삼국유사≫의 옛 성제와 〈서경〉의 ‘단군’을 일치시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보면, 동 11년 단군사(檀君祠)를 세웠는데 여기에 동명사(東明祠)를 합사했다고 하면서 단군을 서편, 동명을 동편으로 모셔 모두 남면(南面)하도록 하고 봄과 가을마다 제향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백은탄(白銀灘)에 조수에 따라 바위가 드러났다 잠겼다 하는데 이름을 ‘조천석’이라 하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동명이 기린을 타고 굴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 천상에 주사(奏事)한다고 하였다. 이승휴(李承休)는 ‘천상을 왕래해 천정(天政)을 참예(參詣)하니, 조천석상의 기린자취가 그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이름이다.”고 하였다.

위의 사례를 통해 보더라도 외래의 도사들이 파괴하려 했던 고유한 전통의 상징물인 ‘영석’ 또는 ‘조천석’의 유서가 매우 오래되고, 아래로는 동명왕으로부터 멀리 상고의 단군에 이르기까지 추원(追遠)해 하늘을 숭배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신앙과 습속이 원래로부터 일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래의 제천 행사와 공동체 의식도 이와 연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일실되어 이름만 전하는 ≪해동고기 海東古記≫·≪삼한고기 三韓古記≫·≪단군기 檀君記≫·≪신지비사 神誌秘詞≫을 비롯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서도 “평양이란 본디 선인 왕검의 집이었다(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고 분명히 기록되었다.

고려의 백문보(白文寶)는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3,600년이 되었다.”고 했으며, 권근(權近)은 명 태조에게 단군의 “역년(歷年)이 천년이 넘었다.”고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 서거정(徐巨正)의 ≪동국통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그리고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海東繹史≫ 등의 중요한 사서 문전을 보면, 우리의 선인들은 적어도 고려시대(麗代)나 조선시대 때 단군조선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은 ‘신시(神市)’에서 ‘홍익인간’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에 보면 그 첫머리에 “처음에 누가 나라를 열어 풍운을 헤쳤을까, 하느님의 손이시니 이름은 단군이라 하시니라(初誰開國啓風雲 帝釋之孫名檀君).”고 하였다.

또한 그의 웅거(雄據)한 영역을 표시해 ≪본기≫의 내용으로 주를 붙여 “조선지역을 거(據)하사 왕이 되셨으니, 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夫餘)·예(濊)·맥(貊)이 모두 단군의 수(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이색의 시에 ‘단군영상관군웅(檀君英爽冠群雄)’이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동국사략 東國史略≫에서도 본래 동방에는 ‘구이(九夷)’가 있었을 뿐 군장(君長)이 없었으나, 신인(神人)이 하강함에 국인(國人)이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열어 구이를 통어(統御)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간 것이 단군조선이었다고 추측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문헌에 의거해 고조선의 사상적 인식에 도움이 되는 측면을 보고자 한다.

기자조선에 대한 언급이 한국과 중국의 고문헌에 나오고, 고구려도 기자사(箕子祠)를 두어 숭배했다는 점에서 우리 선인들은 기자조선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 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禮義)·전잠(田蠶)·직작(織作) 등과 팔조교(八條敎)를 가르쳐서 의식(衣食) 등의 생활을 개선하고 인륜 도덕으로 교화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아 문호(門戶)를 닫는 일이 없었으며, 부인이 정신(貞信)하고 음벽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앞서 고찰한 대로 이미 단군조선의 개국 이전부터 동방에는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구족(九族)이 있었는데, 단군이 임금이 되어 군재(君宰)하고 영솔(領率)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절요≫에 “동방에 견이·방이……등 구이가 있었으되 처음에는 군장이 없었다(東方有腔夷……等九夷 而初無君長).”고 했으며, ≪동사강목≫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었다. 견이(腔夷)·방이(方夷)·우이(于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라고 일컬으니 모두 토착민이었다.”고 하여 구이의 선주민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또한 그들은 “천성이 유순하고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며, 혹 변(弁)을 쓰고 비단을 입었으며, 그릇으로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 하나라 임금 태강(太康)이 실국(失國)함에 비로소 반(叛)하였다.”고 하였다.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의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신시적(神市的)’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왕검조선)의 ‘신시’와 연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소도(蘇塗)’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사한 ‘소도’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고신도적(古神道的)’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2. 삼국의 발전과 유교

[고구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연대와 작자는 미상이지만, 고구려에는 일찍이 100권에 달하는 사서로 ≪유기 留記≫를 편찬한 바 있고, 영양왕 때(600)에는 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사(古史)를 축소해 ≪신집 新集≫ 5권을 수찬하게 하였다. 고구려는 ≪유기≫·≪신집≫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사서 찬수 사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대학’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상류의 귀족층은 ‘대학’에서 교육했고, 민간의 일반 서민에게는 어디에나 공회당과 같은 학원을 세워서 경서와 무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구당서 舊唐書≫에 의하면,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 빈천하고, 짐승이나 먹이는 집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대옥(大屋)을 지어 이를 경당(蓋堂)이라 불렀으며, 미혼의 자제들이 주야로 이곳에서 글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교 경전을 통해 인문 정신을 배양하고 강용(强勇)한 상무 정신(尙武精神)을 수련함으로써 고구려는 강대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오경(五經)·삼사(三史)·≪삼국지 三國志≫·≪진춘추 晉春秋≫가 있었다(北史).” 또한 “책으로는 오경 및 ≪사기≫·≪한서≫·≪후한서≫·≪진춘추≫·≪옥편≫·≪자통 字統≫·≪자림 字林≫이 있었으며, ≪문선 文選≫을 특히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 내용은 경전(經)·사학(史)·문자학·문장학이었는데, 경학이 으뜸이자 기본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 黃鳥歌〉를 보면, ≪시경≫ 관저장(關雎章)과 내용·형식이 흡사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정치 이념과 후사(後嗣)에게 주는 고명(顧命) 등은 ≪서경≫의 요전(堯典)이나 ≪상서 商書≫에 보이는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그 밖에 ≪삼국사기≫와 같은 사서류에 나오는 사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오경과 관계되는 요소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오경 이외에 삼전(三傳)·삼례(三禮)에 이르기까지 행위 규범·사회 제도·정부 조직·율령 반포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경전의 내용이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밖에 고구려의 예속과 유교 문화와의 상관성을 지적해볼 수 있다. 혼인을 할 때 고구려에서는 재물의 교환을 수치스럽게 여겨 재폐(財幣)를 사용하지 않았고, 상례에서도 부모와 부상(夫喪)에 대해 빈소를 차리고 3년 상을 지낸 것은 유교의 ≪의례≫와 상통한다.

고구려 이전부터 구상제도(久喪制度)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가운데 어느 쪽이 시기적으로 앞서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를 보면 고구려의 예속이 유교 문화와 연관성을 가지고 발달해갔음을 살필 수 있다.

[백제]

삼국 이전에도 한사군에 근접한 지역은 중국의 유교 윤리와 흡사한 예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삼한시대에는 외부의 영향이 적었으며, 읍락(邑落)이 잡거(雜居)하였다. 비록 국읍에 통치자가 있었을지라도 통치 기구의 지배적 기능이나 예의 규범이 보편화되지 못해 각기 독립된 토속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제시대에 이르면 통치력이 널리 미쳤을 뿐 아니라, 유교적 체제가 갖추어졌다. 국가의 금령(禁令)과 법제가 뚜렷하게 되고, 중국과 비슷한 혼상례(婚喪禮)가 있었다.

재래의 소도·천신신앙·귀신숭배 등의 법속은 유교에서 말하는 교사지례(郊祀之禮)와 종묘제도의 방식으로 형태화하는 등 국가적 규모에서 유교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온조(溫祚)를 시조로 하는 백제는 본래 졸본부여(卒本夫餘)인 북방계로서 삼한시대의 마한지역으로 남하해 도읍을 위례(慰禮)·웅진(熊津)·부여로 옮겨가면서 독립 국가로 형성되었다.

백제의 온조왕은 창업 6년 만에 동명왕묘를 세웠고, 후대의 제왕들은 대체로 즉위 초년에 친사(親祀)해 의례를 행하였다.

동북으로는 고구려·신라와 대치하고 서남으로는 절해(絶海)를 대면하였던 백제는 통일국가가 되기 위해 처음부터 북방계나 남방 토착민과의 문화적 차이와 주변 열국의 이질적 성향들을 극복하고 통합해야 했다. 험난한 해양은 백제가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 수출하는 해상 교통로가 되었다.

백제는 정부 조직·행정 관서 및 행정 구역 등을 제정함에 있어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3세기에 이르러 중앙집권 국가의 체제를 상당히 갖추었던 고이왕시대(234∼286)에 중앙 관제를 육좌평(六佐平) 16관계(十六官階)로 제정하였다.

이는 ≪주례周禮≫의 6관제(六官制)에 상응하는 것이다. 고이왕이 ‘남당(南堂)’에서 정사를 보았다고 하는데, 남당제도는 임금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정사를 펴는 장소로서 ≪예기≫명당편(明堂篇)에 나오는 명당과 관계 있는 듯하다.

또한 성왕시대(523∼554)에는 10간 12지와 관계되는 내관 12부, 외관 10부로 구성되는 22부나 22담로제(首魯制)를 두었고, 오부오방제의 행정구역의 오분법에서 오행사상과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다.

백제의 사서 편찬과 학술 사상에서도 유교사상과의 관련성을 볼 수 있다. 4세기경 백제 중흥지주(中興之主) 근초고왕(346∼375)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는데 ≪서기 書記≫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박사의 칭호로 판단할 때 대학제도와 전문 학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중국의 사서인 ≪주서 周書≫ 이역전(異域傳)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와 흡사하게 “풍속이 말 타고 활쏘기를 중히 여기고, 경전과 사서를 좋아했으며, 그 중 뛰어난 이는 자못 한문을 해독해 글을 잘 지었다. 그리고 음양오행에 대해서도 이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함게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해오기도 했다는 기사로 보아 유교의 경전사상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해상 진출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학술사에서 후세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양서≫·≪주서≫와 일본의 ≪일본서기 日本書紀≫·≪고사기 古事記≫ 등에는 백제에 대한 기술이 매우 상세히 나와 있다.

더구나 백제가 중국에 보낸 표문(表文)의 내용은 매우 높았고, 중국에서 백제의 임금에게 ‘왕’ 또는 ‘장군’으로 봉했던 것으로 보아 백제와 중국(梁)과의 관계가 밀접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왕자 아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 유교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전달함으로써 왕실의 스승이 되고 일본의 학문적 시조가 되었다.

끝으로 백제의 풍속을 살펴보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근본을 같이 했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깊었다. 예속에서 혼취(婚娶)의 예는 중국과 같았고, 상제는 고구려와 같았다고 한다.

부모와 부상(夫喪)에 3년 상을 하는 것은 백제·고구려·중국에서 공통된 것이지만, 백제와 고구려에서 더 심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백제 사회에서 행했던 예속과 법제는 ‘기자팔조교(箕子八條敎)’의 법속과 내용이 비슷하다. 왕이 매년 4월 중에 천과 오제지신(五帝之神)에게 제사한다든가, 시조묘에서 사사(四祠)하였던 점은 특기할 만 하다.

그 밖에 송의 가원력(嘉元曆)을 써서 인월(寅月)로 세수(歲首)를 한 것, 의약·복서(卜筮)·점상(占相)의 술을 해독한 것, 놀이로서 투호(投壺)·저포(樗蒲)·악삭(握鷺)·농주(弄珠) 등을 쓴 것,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경의를 표한 것 등은 중국 문화와 유교 문화를 일상 생활에 활용했던 사례들이다.

[신라]

신라의 건국은 삼국 가운데 가장 이른 서기전 57년으로 되어 있다. 신라는 건국이래 일정한 국호 없이 ‘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 등으로 불리었다. 정식으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한 것은 6세기인 22대 지증왕대(503)였다.

신라는 삼한 78개 부족국가 가운데 하나의 소국으로, 지리적으로 산악이 많고 동으로 바다를 접해 교통이 불편한 외진 곳에서 스스로 성장해야만 했다. 따라서 신라가 삼국으로 정립해 국가적으로 높은 수준까지 발전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百官)의 공복을 정한 것은 법흥왕대(520)이다. 이미 백제는 고이왕 27년(260)에 관계(官階) 16품과 공복을 제정했고, 고구려는 소수림왕 3년(373)에 율령을 반포한 상태였다.

국사 편찬에서도 백제는 근초고왕 30년(375)에 ≪서기≫를 편찬했는데 반해, 신라는 진흥왕 6년(545)에 와서야 ≪국사 國史≫를 편찬하였다.

대학 설립에서도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운 반면,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문물 제도의 정비에서 대체로 200∼300년의 후진성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중국 대륙과의 문화 교류도 가장 늦었고, 고구려나 백제와의 관계도 일찍부터 개방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꾸준히 발전해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150년 간은 뚜렷이 흥륭지세(興隆之勢)의 진취적 기상을 보였다. 외래 문물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고 고래의 기질과 풍습을 오래 보존해 고유한 정신을 저력으로 유교와 불교 등 외래 문화를 섭취·융화시켰다. 이제 신라가 중국문화와 유교 문화를 어떻게 수입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첫째 신라의 유교 전래의 단서를 중국 및 고구려·백제와의 교섭 관계에서 고찰할 수 있다. 신라의 유교 전래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늦었지만, 신라에서도 이미 고구려의 대학설립(372)과 율령반포(373)가 있은 지 약 10년 뒤인 제17대 내물왕 27년(382)에 중국 전진(前奏)왕 부견(符堅)에게 사신을 파견하였다.

신라의 사신 위두(衛頭)는 부견이 동방의 일이 옛날과 다르다는 물음에 “그것은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가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내물왕 시대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백제 근초고왕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임금의 칭호를 이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꾸고, 왕권이 강화된 중앙집권제적 체제를 갖추는 등 독립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국세를 확장시키면서 고구려와 일본과도 외교를 맺는 등 국제적으로 신라의 존재를 나타내게 되었다.

19대 눌지왕 때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를 데려오고자 박제상(朴提上)을 보냈다. 그는 고구려 임금과의 대화에서 ≪춘추좌전≫과 ≪시경≫의 문구를 들어 왕(王)·패(覇)의 구별을 분명히 하면서 설복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이미 오경사상이 지식인들에게 습득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박제상은 일본에 가 있던 왕제 미사흔(未斯欣)을 권도(權道)로써 귀환시키고 순사(殉死)함으로써 그의 지략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둘째 신라는 발전해가면서 국가적 체통을 확립시키기 위해 유교 문화를 이용하였다. ≪춘추전≫과 삼례(三禮) 등의 경전에 있는 사상을 활용하였다.

22대 지증왕대에 이르면 국호를 ‘신라’라 확정하고,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으로 부르던 임금의 칭호를 중국식인 ‘왕’으로 부르도록 했고(503), 지증왕 때까지 존속되었던 옛 풍습인 순장제도를 폐지했으며(502), 상복법을 제정·공포하였다(504).

또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군주(軍主)’를 삼았고(505), 왕이 죽자 처음으로 시호를 사용해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다음 임금인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을 제정했으며(520), 연호를 사용해 ‘건원(建元)’이라 하였다(514). 이와 같은 사실에서 유교사상이 국가 제도에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신라의 고비(古碑)에 새겨진 유교사상에 대한 문자와 형상이다. 진흥왕은 신라의 중흥지조(中興之祖)로서 사방으로 경계를 확장해 서북으로는 한강하류에서 서해안에 이르렀고, 동북으로는 함남지방까지 진출해 경계를 획정하였다.

그가 남긴 네 곳의 순수비(경상남도의 창녕비, 서울의 북한산비, 함경남도의 마운령 및 황초령비)에는 ‘순풍(純風)’·‘현화(玄化)’ 등 재래의 고신도적 요소와 함께, ‘제왕건호(帝王建號)’의 취지로서 ≪논어≫ 헌문편(憲問篇)에서 인용된 “제 몸을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修己以安百姓).”는 구절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수기치인이라는 유교의 정교이념(政敎理念)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동준(李東俊)>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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