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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0 (일) 20:34
분 류 사전2
ㆍ조회: 1021      
[민족] 한민족 (브리)
한민족 韓民族

현재 한반도 및 그 주변의 섬에 살고 있는 몽골 계통의 단일민족.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고유의 언어와 문자체계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환경의 영향으로 한민족의 일부는 만주 남부 및 서투르키스탄, 일본 서남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색인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원

오늘날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인종은 구석기시대인 4만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 색인 : 한국사) ' 한족'(韓族)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분화한 것으로 보이는 몽골 인종, 코카서스 인종, 니그로 인종 가운데 몽골 인종에 속한다.

시베리아 일대를 원주지로 했던 몽골 인종은 다시 옛 시베리아족(옛 몽골족 또는 古아시아족)과 새 시베리아족(새 몽골족)으로 나누어지고 새 시베리아족은 알타이와 우랄 산지 일대에 흩어져 살면서 형질·문화·언어구조상으로 구분되는 2개의 어족, 즉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으로 나뉜다.

한족은 형질과 언어구조상 알타이어족에 가까우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알타이어족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터키족·몽골족·퉁구스족 등 알타이계 종족과 언어구조가 다른 부분이 많다. 알타이어족의 원주지는 알타이 산지와 바이칼 호 일대의 삼림과 초원지대로 목축과 농경이 모두 가능한 곳이었다. 기후 변화, 인구 압력 등의 요인으로 알타이어족들은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 동쪽으로는 만주에 이르는 내륙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터키족은 중앙 아시아 및 중국 북부 초원지대에, 몽골족은 몽골 고원 및 만주 북부에, 퉁구스족은 만주 동부와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이들과 구별되는 또다른 갈래였던 한족은 중국 동부 해안지대 및 만주 서남부, 한반도 일대를 생활무대로 삼게 되었다.

형성과 전개

동아시아의 동부를 자신들의 무대로 삼게 된 한족은 이 일대에서 빗살무늬토기와 간석기[磨製石器]를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문화를 성립시켰다. 밑이 둥글거나 뾰족하고 위는 벌어졌으며, 그릇 전면에 기하무늬가 장식된 빗살무늬토기와 간석기는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특징적 요소이기도 하지만, 만주·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에는 흔들림무늬[連續弧線文]가 더해져 있어 차이를 보인다.

한족 가운데 만주 서남부에 거주하던 한 갈래는 기존의 신석기문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BC 10세기경에 랴오닝식 동검을 표지적 요소로 하는 랴오닝 청동기문화를 성립·발전시켰다. 이 동검은 랴오닝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검의 봉부(鋒部) 하단에 돌기가 있고 검몸의 아랫부분은 크게 호선을 이루어 비파의 몸체를 연상하게 해 일명 비파형 동검이라고도 한다.

몽골계 종족의 오르도스식 동검이 검몸과 자루가 함께 주조된 것과 달리, 랴오닝식 동검은 검몸과 자루를 따로 만든 뒤 못 등으로 연결·고정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랴오닝 청동기문화를 성립시킨 한족의 갈래는 예족(濊族)에 속한 조선족(朝鮮族)이었다. 이들은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만주 서남부에서 한반도 중북부에 걸쳐 일대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한족의 다른 갈래인 맥족(貊族)과 한족에게도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조선족은 자신들의 세력이 크게 강화되자 이를 바탕으로 고대국가인 고조선(古朝鮮)을 세웠다. 예족의 또 한 갈래인 부여족(夫餘族)은 고조선의 성립에 자극을 받아 부여를 세웠으나 국가발전의 정도는 고조선에 미치지 못했다. 랴오닝 청동기문화는 한반도를 주무대로 하고 있던 한족의 또하나의 작은 갈래인 한족에 전파되어 보다 세련된 단계의 문화인 한국 청동기문화를 성립시켰다.

한반도를 주무대로 성장하던 한족은 한편으로는 종족의 갈래가 다른 옛 시베리아족을 흡수·동화해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방의 랴오닝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보다 발달한 청동기문화를 성립시킴으로써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했다.

만주 서남부와 한반도 일대에 걸쳐 동방청동기문화권을 성립시킨 한족의 갈래는 BC 6~5세기경부터 중국의 발달된 철기문화와 접촉하면서 서서히 철기시대로 이행되었다.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이미 어느 정도 사회 내 계급분화를 이루었던 만주 서남부와 한반도 일대의 여러 집단은 철기문화의 수용과정을 통해 계급간 분화를 심화시키면서 집단간 통합으로 보다 크고 응집력이 있는 정치체를 성립시켰다.

고구려·백제·신라는 크고 작은 다수의 정치체들 가운데 집권국가 단계에까지 이른 한족의 각 갈래들이 모체가 된 나라들이며 부여와 가야연맹은 연맹국가 단계까지 성장한 나라들이었다. 이들 나라 사이에 어느 정도의 동족의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각 나라의 건국신화 및 시조전승의 내용으로 보아 부여와 고구려는 상당히 짙은 동족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백제는 고구려와 시조가 같다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6~7세기 150여 년 간의 삼국항쟁은 삼국간의 인적·물적 교류를 증대시켰다. 삼국간의 교류 증대는 넓은 의미에서의 인종적·문화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와 사회구성상의 차이 등으로 인해 심화되어 가던 삼국 주민간의 이질성을 해소시켰다.

고구려·백제의 멸망,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국 주민을 하나의 정치체제와 문화영역 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상호간의 이질적 측면을 극복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계기로 삼한(三韓)을 하나로 통합했다는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이 문헌자료로 확인된다.

그러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성립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한족은 2개의 국가로 나누어졌다. 발해는 비한족인 말갈족이 주민의 대다수이고 한족인 고구려인이 소수인 나라였다. 발해와 통일신라가 병존한 남북국시대에는 삼국시대와 달리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지 못해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동질성의 증대가 어려웠다.

한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고려의 후삼국통일, 발해의 멸망, 고구려계 발해인의 고려에로의 대규모 유입이 이루어지는 10세기 중엽 이후부터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유민까지 포섭하여 주변의 여러 종족과 구별되면서 서로간의 의사소통에 장애가 없는 한족의 여러 갈래를 하나의 체제와 영역 안에 두게 된 것은 한민족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고 추진된 북진정책이 만주에서 남하하려는 여진·거란 등의 북방민족과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면서 옛 고구려·백제 의식은 급속히 소멸되고 혈연·문화 등의 여러 측면에서 고려인(高麗人)과 비(非)고려인을 구별하는 전근대적 의미의 민족의식이 생겨났다.

근대적 민족의식과 달리 전근대적 민족의식은 민족구성원에 대한 차등성, 즉 신분제를 전제로 성립된 것이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은 고려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고 역사의식을 심화시켜 오랜 역사에서 민족의 시조인 단군과 그가 세운 고조선을 찾아내게 했다.

고구려·부여·삼한·옥저·동예 등은 단군을 공동시조로 한 민족이된다고 서술한 〈제왕운기〉 등의 문헌은 이 시기에 보다 구체화된 민족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승하여 우리말과 일치되는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이 창제되는 조선 초기, 곧 15세기 중엽은 한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제반요건이 일단 완비되는 시기이다.

전통적인 신분체제가 변화되고 역사인식이 심화되면서 인간평등의식이 높아지던 조선 후기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식이 태동하고 발전하던 변혁의 시기였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격화되는 외세의 물결은 근대적 민족의식의 형성에 큰 자극이 되었다.

1897년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은 이러한 민족의식이 그 배경이 되었다. '대한'이란 국호는 '조선'의 정통을 계승하면서 민족구성원 전체의 통합과 자존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억압, 동화정책에 대해 한민족의 민족의식은 더욱 깊어지고 민족공동 운명체로서의 동포의식은 보편화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식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1945년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한민족은 곧이어 1민족 2국가 체제로 분단된 채 반세기에 가까워지면서 양체제 내부에서 단일민족으로서의 1민족 1국가 체제로의 회복이 요구되고 있다.

언어

민족과 민족 사이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지표는 언어이다. 특정 언어를 사용하던 한 민족이 정치적·문화적 측면에서 주변 민족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면 그것은 곧바로 그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의 확산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언어의 역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흥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 한국어는 지금까지 남은 3,000종가량의 언어 가운데 사용인구가 6,500만 명에 이르러 규모상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큰 언어이며, 중국어·일본어와 함께 동아시아의 3대 문명어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어는 언어특성상 몽골어·터키어·퉁구스어 등 알타이 제어 및 일본어와 공통된 요소가 많은 언어이나 이들 언어와 구별되는 근본적인 차이도 많아 아직 명확한 계통이 밝혀져 있지 않다. 때문에 한국어는 일본어와 함께 언어사용인구의 규모상 큰 언어이면서도 주변의 다른 언어들과 구별되는 고립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어의 역사는 한국민족의 기원 및 형성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매우 이른 시기에 알타이어계의 여러 종족에서 갈라져나온 한족이 서남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예·맥·한으로 세분되고 이들이 고조선·부여·고구려·옥저·동예·한 등의 나라로 나뉘었는데,

한국어는 고조선·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을 하나로 하는 북쪽 갈래와 한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하는 남쪽 갈래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초기 한국어의 조어를 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라고 부른다.

고구려가 서남만주와 한반도 중북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아우름에 따라 북쪽 갈래의 한국어는 고구려어로 통합되었고 남쪽 갈래의 한국어는 백제어와 신라어로 대표하게 되었다. 문헌에 남은 언어의 편린으로 보아 삼국의 언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고, 고구려어와 신라어 사이에는 방언적인 차이가 있었으며, 백제 지배층의 언어와 고구려의 언어는 사실상 같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가야어는 현존 자료상 고구려어와 친연성이 깊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계통상 부여어의 한 갈래였을 가능성이 짙다.

단일한 조어(祖語)에서 출발하여 정치적·문화적 갈래에 따라 지역적·시기적 분화의 길을 걸었던 한국어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어로 큰 줄기를 잡은 뒤,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하여 경주 중심의 신라어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고려의 후삼국통일 및 발해유민 흡수는 단일한 한국어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단일어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수도였던 개성지방의 언어를 모체로 형성된 것이다. 본래 백제·고구려의 옛 땅이었고 통일신라의 변방이던 개성어에는 삼국의 언어적 특징이 모두 담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구조의 특성상 한국어는 알타이 제어와 비교적 가까우며 특히 만주·퉁구스어와 가깝다. 두 언어의 이러한 친연성은 한민족과 퉁구스계 민족과의 역사적·지리적인 친근성과 관계가 깊은 듯하다.

언어구조상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의 닮은 점은 다음과 같다.

① 모음조화 현상이다. 한 단어 안에서 모음들이 같아지는 경향을 말하는 모음조화는 터키어와 몽골어, 만주어·퉁구스어 등 알타이 제어와 한국어에서 모두 발견된다.

②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자음, 특히 유음(流音)의 제약이다. 한국어에는 본래 'ㄹ'로 시작되는 단어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몽골어의 경우에도 'r'로 시작되는 외국어를 차용해 쓸 때, 그 앞에 모음을 덧붙이며 터키어나 퉁구스어에서도 단어의 첫머리에 'r'가 오는 것을 피하는 것이 관례이다.

③ 단어의 첫머리에 자음군(子音群)이 오지 않는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에서는 모든 단어를 모음이나 하나의 자음으로 시작하며 둘 이상의 자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가능한 한 피했다.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의 문법적 공통요소로는 먼저 교착성(膠着性)을 들 수 있다. 교착성이란 단어에 접미사를 붙여 파생이나 굴절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접미사의 연결이 매우 기계적이고 그 기능이 단일한 점은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를 세계의 다른 언어와 구별하는 특징적 요소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가 여러 가지 닮은 점을 지니고 있으나, 다른 점도 적지 않게 지적된다. 가장 큰 차이점은 경어법(敬語法)이다. 현존 문헌자료상 한국어에서의 경어법은 이미 신라어에서부터 확인된다. 한국어의 발달된 경어법은 알타이 제어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언어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것이다.

한국어에는 주격접미사가 없으나 알타이 제어에는 있다는 점과 한국어는 명령형 어미를 지니고 있지만 알타이 제어는 동사 어간 그대로를 명령형으로 쓴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어의 주격조사 '이'는 대명사 '이'에서 나온 것이며 만주어·퉁구스어에 속하는 일부 종족의 언어에서는 명령형 어미가 쉽게 발견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의 다른 언어들과는 달리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는데 이로 보아 두 계열의 언어는 매우 이른 시기에 공통의 조어(祖語)에서 갈라져나왔을 가능성이 짙다.

형질

모든 생명체는 같은 종(種)에 속해도 각기 다른 환경에서 오랜 기간 주어진 환경의 영향으로 체질적 특성에 변화가 일어난다. 인간도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계절·일광(日光)·기온·습도·기압·우량·수질·토양·음식 등 수많은 인자로 이루어진 지역환경에 따른 상이한 요소가 주는 영향이 장기간 누적되면 인간의 체격·피부·모발·홍채 등의 형질요소는 지역에 따라 차이를 가져온다.

알타이계에 속하는 한민족이 같은 알타이계인 터키·몽골·퉁구스 제족(諸族)과 구별되는 것은 이와 같은 인문지리적· 역사지리적 차이 때문이다. 한국인은 언어상으로도 알타이계 제족과 구별될 뿐아니라 체질적으로도 주변의 몽골인·일본인·중국인 등과 다른 점이 많다.

한국인의 평균(이하의 계측치는 모두 평균치) 두개(頭蓋) 용적은 남자가 1,475㏄, 여자가 1,330㏄로 대두형(大頭型)에 속하며 뇌중량 역시 남자가 1,413g, 여자가 1,268g으로 세계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 두장(頭長)은 남자가 175.0㎜, 여자가 168.2㎜이며 두폭(頭幅)은 남자가 142.4㎜, 여자가 138.6㎜이다. 이 두 계측치를 바탕으로 산출한 두지수(頭指數)는 남자가 81.5, 여자가 82.7로 두장 지름이 짧은 특이한 단두형(短頭型)에 속한다.

단두형은 서투르키스탄 일대와 알프스 지방, 한국에서만 발견된다. 반면 중국인과 일본인은 중두형(中頭型)이며 두고(頭高)는 남자가 140.0㎜, 여자가 133.3㎜로 두장고지수는 남자가 80.1, 여자가 79.4로 남녀 모두 고두형(高頭型)이다. 몽골인은 정두형(整頭型)이다.

두폭고지수는 남자가 98.5, 여자가 96.2로 남자는 약한 첨두형(尖頭型), 여자는 높은 종두형에 속하여 저두형(低頭型)인 몽골인과 구별된다. 전두최소폭(前頭最小幅)은 남자가 92.4㎜, 여자가 89.2㎜이며 전두두폭지수는 남자가 65.0, 여자가 64.3으로 남녀 모두 협액형(狹額型)이다. 일본인은 중액형(中額型)이다.

한국인의 안장(顔長)은 남자가 95.5㎜, 여자가 93.6㎜이며 협궁폭(頰弓幅)은 남자가 136.0㎜, 여자가 126.5㎜이다. 이러한 계측치에 의한 안지수(顔指數)는 남자가 90.6으로 약한 협안형(狹顔型)에 속하고, 여자는 89.4로 강한 중안형(中顔型)에 속한다. 상안고(上顔高)는 남자가 73.9㎜, 여자가 68.6㎜이다.

상안지수(上顔指數)는 남자가 54.5, 여자가 54.3으로 남녀 모두 중상안형(中上顔型)에 속한다. 중국인은 협상안형(狹上顔型)이다. 비폭(鼻幅)은 남자가 25.7㎜, 여자가 25.2㎜이고 비고(鼻高)는 남자가 53.8㎜, 여자가 49.9㎜이다. 따라서 비지수(鼻指數)는 남자가 48.2, 여자가 50.7로 남녀 모두 중비형(中鼻型)이다. 중국인은 협비형(狹鼻型)이다.

한국인의 평균신장은 남자가 167.7㎝, 여자가 155.5㎝로 남자는 상중형(上中型), 여자는 중중형(中中型)에 속한다. 따라서 한국인은 황색인종 가운데서도 큰 편에 속한다. 수지수(手指數)는 중수형(中手型), 족지수(足指數)는 중족형(中足型)이며, 상지지수(上肢指數)이다.

상체지수(上體指數)는 남녀 모두 장상체형(長上體型)이며 골격지수(骨格指數)는 단골격형(短骨格型)이다. 소마토타입에 의한 체형분류에 의하면 한국인 남자는 절반 이상이 중배엽형이고 여자는 절반 이상이 내배엽형이며 평균적으로는 남녀 모두 균형형에 해당하는 443형(444형이 완전한 균형형임)에 속한다.

민족형성에 대한 제론

민족의 개념에 대한 견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민족형성의 지표로 제기되는 요소도 공통의 언어·문화·혈연(또는 겨레의식)·지역·민족의식·국가·경제·관습·전통·종교 등 다양하다. 이들 지표적 요소 가운데 비교적 보편성을 띠는 것이 언어와 문화이며 혈연·지연 등의 요소는 민족에 따라 형성지표로 포함시키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또한 일정규모의 인간집단에서 위에 든 여러 요소가 모두 찾아진다고 해도 각 요소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형성요건을 만족시키냐에 따라 민족형성의 시기도 다르게 설정될 수 있다. 한국민족 형성시기가 학자에 따라 달리 제시되는 것도 이때문이다.

한국민족의 형성시기에 대한 기존의 제설은 크게 전근대형성설과 근대형성설로 나눌 수 있다. 전근대형성설은 민족형성의 기본요건으로 공통의 언어·문화·혈연·지역 등을 중시하는 입장으로서 BC 10세기경 예·맥·한 족이 역사무대에 나타난 시점으로 보는 설, 삼국이 하나가 된 통일신라기로 보는 설, 후삼국이 통일되고 발해유민이 합류한 고려초로 보는 설,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체계인 한글이 만들어진 조선초로 보는 설 등으로 세분화된다.

한편 근대형성설은 언어적·문화적·지역적 공동성 외에 민족의식과 경제적 공통성이라는 요소도 중시하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으로 서유럽에서의 민족개념 규정방식에 영향을 받아 제시된 견해이다.

이 설은 조선 후기의 근대지향적 문화의 발달, 역사의식의 심화, 시장경제의 활성화, 신분제의 변화와 평등의식의 발달 등의 내재적 요인과 개항을 요구하는 외세의 압력 등의 외부적 요인을 민족형성의 기본동인으로 들고 있으나 민족형성시기에 대해서는 1860년대의 대규모 민란 이후로 보는 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 및 갑오·을미 개혁시기설, 대한제국기 의병전쟁시기설, 3·1운동 이후설 등으로 다양하다.

이처럼 한국 민족 형성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민족에 대한 개념규정 및 형성요인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통합시켜 일정한 한국 민족 형성시기를 설정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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