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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12-08 (수)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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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19      
[조선] 조선2 (두산)
조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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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통치구조

조선왕조가 지향한 통치체제의 성격은 유교적 양반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관념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된 듯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약화되었다. 군왕은 재상(宰相)을 임명하고 재상과 정사를 협의하는 것이 주요 권한이며, 정책결정에서도 재가(裁可)하는 권한만을 가질 뿐, 주도권은 가지지 못하였고, 그 권한은 재상ㆍ언관(言官)ㆍ감찰관(監察官)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통치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주어졌다.

《경국대전》에도 재상의 부서인 의정부가 정책결정에 있어 최고의 기관임을 규정하고 있다. 태종ㆍ세조 때에 일시적으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실시되어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된 적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재상중심체제였다. 한편, 경연(經筵)제도가 있어, 의정부 재상과 홍문관ㆍ승정원의 고관이 모여 국왕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읽으면서 정책을 토론하였는데, 이것 역시 군왕의 독재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언관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구언제(求言制)ㆍ상소제(上疏制)ㆍ신문고(申聞鼓) 제도 등이 있어 언론이 크게 창달되었다. 조선은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하여 지방의 모든 군(郡)ㆍ현(縣)에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수령(守令)의 지위도 참상관(參上官)으로 높였으며, 상피제(相避制)를 실시하여 본향(本鄕)으로의 취임을 통제하고, 수령들의 토착화를 막기 위하여 임기제(任期制)를 강화하였다.

한편, 관찰사의 기능을 강화하고, 향리(鄕吏)의 지위를 약화시켰으며, 퇴직 관리들에 대한 통제를 가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에서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고 관료조직이 보다 합리적으로 조직된 것은 국민들이 토호나 향리의 사적인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국가의 공적 지배로 들어감으로써 국가기반의 확충이 보장됨을 뜻한다. 중앙집권의 강화로 교통과 통신조직이 전국적으로 짜여지고 행정능률이 개선되었다.

1. 관품

조선의 모든 관료는 동반(東班:문관)ㆍ서반(西班:무관)으로 구분되고, 이들 동ㆍ서반의 품계는 정(正)ㆍ종(從) 각 9품으로 나누어 도합 18품계를 정하여 각 관등의 품계를 일정하게 하였다. 18품계의 관등은 다시 정책결정관인 당상관(堂上官)과 행정집행관인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뉘며, 당하관은 다시 참상관ㆍ참하관으로 구분되는데, 참하관은 참외(參外)라 하여 직계가 낮은 실무자였다.

2. 중앙관제

조선의 중앙행정조직은 의정부와 6조(六曹)의 체제로 편제되었다. 의정부는 그 우두머리인 3정승, 즉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의 합좌기관(合坐機關)이다. 3정승은 국가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하고 그 합의사항을 국왕에게 품의하며, 왕의 재가는 역시 의정부를 거쳐 해당관부에 전달되었다. 이(吏)ㆍ호(戶)ㆍ예(禮)ㆍ병(兵)ㆍ형(刑)ㆍ공(工)의 6조가 각기 맡은 임무는 고려의 6부와 별 차이가 없으나, 그 기능이 보다 강화되었다.

장관을 판서(判書), 차관을 참판(參判)이라 하는데, 이들 고급 행정관원은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켰다. 이 밖에 왕명의 출납을 맡은 승정원(承政院)이 있어 그에 소속된 도승지(都承旨) 이하 6승지는 각기 6조의 행정업무를 분담하여 왕의 비서(書) 기능을 맡았으므로 때로는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기구로서 홍문관(弘文館)ㆍ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이른바 3사(三司)가 있다. 이들 3사는 정책결정 및 집행과정의 착오와 부정을 막기 위한 언관으로서, 특히 사헌부는 백관을 규찰하는 감찰관이기도 하였으며 서경(署經)이라 하여 임명된 관리의 신분ㆍ내력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를 승인하는 임무도 맡았다. 홍문관은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으로서, 경적(經籍)을 모아 정사를 토론하고 문필을 다스려서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사간원은 국왕의 정치에 대한 간쟁(諫爭)을 임무로 하였으므로, 3사는 의정부 6조의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위치에서 권력의 편중을 막았다. 그리고 국왕의 명을 받아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義禁府), 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 서울의 행정을 맡은 한성부(漢城府), 백성의 죄를 다스리는 포도청(捕盜廳) 등이 있다.

조선의 통치구조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변질되어 갔는데, 비변사(備邊司)가 정치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비변사는 초기에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을 중심으로 군무를 협의하던 임시기구였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상설기구가 되면서 문무 고위관리들의 합의기관으로 확대되고 군사는 물론 정치ㆍ외교 등 일반 정무까지도 처결하였다.

비변사에는 위로 3정승으로부터 공조를 제외한 5조판서, 5군영의 대장들, 유수(留守)ㆍ대제학 그리고 군무에 능한 현ㆍ전직고관 등 당상관 이상의 문무 고위관리가 참여하였는데, 이로써 조선 전기의 최고 정무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가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 후 대원군에 의해 비변사가 폐지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복구되었으나, 1880년 관제개혁 때 최고의 행정부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 그 밑에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장케 하고, 통리기무아문의 장관을 총리대신(總理大臣)이라 하였다. 이어서 임오군란 후 통리기무아문을 분리, 외무행정을 맡아 보는 통리아문(統理衙門:外衙門), 내무행정과 군국기무를 맡은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內衙門)을 설치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중앙에는 궁내부(宮內府)ㆍ의정부(議政府)의 2부와 내무ㆍ외무ㆍ탁지(度支)ㆍ군무(軍務)ㆍ법무ㆍ학무ㆍ공무ㆍ농상무(農商務)의 8아문을, 지방에는 8도를 고쳐 13도를 설치하였다.

곧이어 궁내부를 독립시키고, 의정부를 내각(內閣)으로 고쳐 내부ㆍ외부ㆍ탁지부ㆍ군부ㆍ법부ㆍ학부ㆍ농상공부의 7부를 직속시켜 내각의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부의 장관을 대신이라 하였다. 그 밖에 특수기관으로 감찰업무를 맡은 도찰원(都察院),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 회계를 맡은 회계심사원(會計審査院), 경찰업무를 맡은 경무청(警務廳), 최고재판소인 의금사(義禁司), 서울의 행정을 맡은 한성부 등이 설치되었다. 개화기 정치제도의 특징은 행정과 사법의 분리에 있다.

3. 지방관제

조선의 지방 행정조직은 전국을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ㆍ함길(咸吉)ㆍ평안(平安)의 8도(道)로 나누고, 그 밑에 부(府)ㆍ목(牧)ㆍ군(郡)ㆍ현(縣)을 두었다. 도에는 관찰사(觀察使)가 장관으로, 행정ㆍ군사 및 사법권을 행사하며, 수령을 지휘ㆍ감독하고, 민생을 순찰하는 감찰관의 기능도 있다. 경주ㆍ전주ㆍ개성ㆍ함흥ㆍ평양ㆍ의주 등 대도시의 책임자인 부윤(府尹), 여주(驪州) 등 20개 목의 목사(牧使), 군의 군수(郡守), 현의 현령(縣令)과 현감(縣監) 등을 수령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일반국민을 직접 다스리는 이른바 목민관(牧民官)이었으며, 그 주된 임무는 공세(貢稅)ㆍ부역(賦役) 등을 중앙으로 조달하는 일이었다.

군ㆍ현 밑에는 면ㆍ이를 두고 지방민을 면장(面長)ㆍ이정(里正)으로 임명하여 수령의 통할하에 자치토록 하였다. 지방관은 행정ㆍ사법ㆍ군사 등의 광범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나, 그들의 임기는 관찰사가 360일, 수령이 1,800일로 제한되어 있었고, 또 자기 출신지에는 임명될 수 없는 상피제가 적용되었다. 이는 지방에 거주하는 양반들, 특히 자기의 동족과 결탁한 변란이나 작폐를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군ㆍ현에는 각기 그 지방 양반들로 조직된 향청(鄕廳)이란 것이 있어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향청은 고려 말의 유향소(留鄕所)의 후신으로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있어 수령을 보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경재소(京在所)라 하여 지방양반 중 유력자를 서울에 파견하여 사무적인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지방 각 고을에는 모두 중앙의 6조를 모방한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의 6방(六房)이 있어서 사무를 나누어 맡았는데, 6방의 일을 맡은 것은 지방의 토착 향리(鄕吏:衙前)들이었다. 이들은 직무를 세습적으로 수행하거나 국가로부터 일정한 급료를 받지 못하므로 각종 부정행위가 많았는데 특히 호방(戶房)ㆍ이방(吏房)이 심하였다.

4. 군사조직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병역제(兵役制)를 정비하고 군사조직을 강화하여 국방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군역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였다. 즉, 16세 이상 60세에 이르는 양인(良人)의 장정들은 누구나 군역을 부담하여 현역군인인 정병(正兵)이 되거나 군인의 비용을 충당하는 보인(保人)이 되어야 했다. 노비(奴婢)는 권리가 없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가 없었으나 필요에 따라 특수군으로 편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에는 통수기관(統帥機關)으로 중앙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고 거기에 10위를 속하게 하였으나, 세조 때에 삼군부를 5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하여 중앙군인 5위를 지휘하게 하였다. 5위는 의흥위(義興衛:中衛)ㆍ용양위(龍x0衛:左衛)ㆍ호분위(虎賁衛:右衛)ㆍ충좌위(忠佐衛:前衛)ㆍ충무위(忠武衛:後衛)로 궁궐수비와 서울 방비를 담당하였다.

각 위(衛)는 또 5부(部)로 나뉘었고, 각 부는 4통(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밑에 여(旅)ㆍ대(隊)ㆍ오(伍)가 있었다. 지방에는 각 도(道)에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이 있어서 육군과 수군을 통할하였고, 그 밑에 여러 진(鎭)ㆍ포(浦)ㆍ보(堡)가 있다. 이들 부대에 복무하는 지방군은 양인 계층의 농민으로서 교대로 입번(立番)하고, 하번(下番) 때에는 농사에 종사하였다.

군제는 세조 때에 전국 군ㆍ현을 지역단위의 방위체제로 편성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실시되면서 중앙군과 지방군이 진(鎭)을 중심으로 일원화하였다. 따라서, 평시에는 농사짓다가, 징발되면 서울에 번상하여 시위하거나, 지방요새지로 나아가 부방(赴防)하였다. 한편, 정규군 이외에 잡색군(雜色軍)이라는 예비군이 있어서 전직관료ㆍ서리ㆍ향리ㆍ교생(校生)ㆍ노비 등 각계각층의 장정들로 하여금 평상시에는 본업에 종사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유사시에 향토방위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 발생하는 군사적인 긴급사태를 중앙에 급히 알리기 위하여 봉수제(烽燧制)가 있었고, 그 내용을 문서로 알리기 위하여 역마제(驛馬制)를 운영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전기의 군사조직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무력함이 드러나자 5군영으로 개편되었다. 즉, 선조 때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총을 쏘는 포수(砲手), 활을 쏘는 사수(射手), 창ㆍ칼을 쓰는 살수(殺手)의 3수병(三手兵)으로 편제하였는데, 이들은 모병제(募兵制)에 의한 직업군인으로서 중앙의 핵심군영이었다.

이어서 인조 때에 이괄(李适)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御營廳),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하여 총융청(摠戎廳), 남한산성의 수비를 위하여 수어청(守禦廳), 그리고 숙종 때에 수도방어를 위해 금위영(禁衛營)이 설치됨으로써 5군영으로 정비되어, 초기의 5위체제를 대신하였다. 한편, 지방군에서도 조선 후기에는 속오군(束伍軍) 체제를 취하여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오군으로 편제하고 유사시에 대처하게 하였다.

그 후 조선의 군제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3군부(三軍府)의 기능이 부활되기도 하였으나, 곧 5군영으로 복구되고 다시 1881년(고종 18) 무위영(武衛營)ㆍ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되고 아울러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여 근대적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어서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중앙에는 친위대(親衛隊)를, 지방에는 진위대(鎭衛隊)를 두었으나, 1907년 일제의 강요로 해산되었고, 구한국군의 대부분은 지방에 흩어져 항일의병으로 활약하였다.

5. 교육ㆍ과거제도

조선은 초기부터 유교주의 국가이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기관을 증설하고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확대시켰다. 인문교육기관으로 중앙에 국립대학인 성균관(成均館)을 두고, 중등교육을 위하여는 서울에 4부 학당(學堂)을, 지방에 향교(鄕校)를 설치하였다. 향교에는 각 군ㆍ현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하였다. 학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는데, 농번기에는 방학을 맞아 농사일을 돕고 농한기에는 기숙사인 재(齋)에 거처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는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서당이 있어, 훈장(訓長)ㆍ접장(接長)의 교수 아래 한자의 초보와 습자(習字)공부가 이루어졌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원(書院)이 각지에 설립되면서 선현을 제사하기도 하고 지방의 양반자제들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한편, 기술교육은 의학ㆍ역학(譯學)ㆍ산학(算學)ㆍ율학(律學)ㆍ천문학ㆍ지리학 등으로 나누어 각각 전의감(典醫監)ㆍ사역원(司譯院)ㆍ호조ㆍ형조ㆍ관상감(觀象監) 등 해당관청에서 가르쳤다. 이들 기술학은 당시 잡학(雜學)이라 하여 천시되었으며, 중인(中人) 계층의 자제가 이를 세습적으로 배워 기술관이 되었다.

교육을 이수하고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하여야 했다. 교육의 기회가 거의 양반에게 독점되었으며 과거 역시 양반들이 독점하였다. 과거에는 문과와 무과가 있다. 양반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된 문관 채용시험은 생진과(生進科:小科)와 문과(大科)의 두 단계로 나뉘었다. 생진과에는 4서 5경(四書五經)으로써 시험보는 생원과(生員科)와 시(詩)ㆍ부(賦)ㆍ표(表)ㆍ책(策) 등 문장으로 시험하는 진사과(進士科)가 있는데, 양반 자제들은 초시(初試)ㆍ복시(覆試)에 모두 합격하면 과에 따라서 생원 또는 진사라고 불렸다.

생원ㆍ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받았는데, 대과에서도 초시ㆍ복시를 통해 합격하면 전시(殿試)에서 그 등급이 결정되었다. 생진과에서는 200명, 대과에서는 33명이 선발되었다. 무관시험도 역시 초시ㆍ복시ㆍ전시를 거치는데, 초시에서는 서울과 각 도의 병영에서 200명을, 복시에서는 서울의 병조에서 행하되 28명을 선발하였는데, 이들을 선달(先達)이라 하였다.

기술관 채용을 위한 잡과에는 역과ㆍ의과ㆍ음양과ㆍ율과의 4과가 있는데, 양반의 서자나, 중인계급에서 응시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음서(蔭敍)나 취재(取才)를 거쳐서 관료가 될 수 있었으나, 이러한 경우에는 요직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와 같은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는 갑오개혁을 전후하여 크게 바뀌었다.

조정에서는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1886년 최초의 근대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園)을 설립하여 신식교육을 실시하고, 1895년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를 발표하여 소학교ㆍ중학교ㆍ사범학교ㆍ외국어학교ㆍ의학교 등을 세워 관립학교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폐단이 많았던 과거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임용법을 채용하여 종래의 양반ㆍ상민이나 문반ㆍ무반의 구별을 없앴다.

6. 형법제도

조선은 법치국가로 통일된 법전을 통해서 전국민을 조직적으로 지배하고 규율하였는데, 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국왕의 명령이었다. 왕명이 형식화된 것을 왕지(王旨) 또는 교지(敎旨)라 하고 세부사항에 관한 왕명을 전지(傳旨)라 하였으며, 각 관아에 하달된 왕명을 수교(受敎)라 하였는데, 수교로써 법조화된 것을 조례(條例)ㆍ조획(條劃)ㆍ조령(條令)이라 하였다. 초기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경제문감》을 편찬하여 왕조의 통치규범을 마련하였다.

그 후 국가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법령이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세조 때에는 조선의 법전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때 《경국대전》이 간행되었다.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의 6전(六典)으로 구성된 《경국대전》은 조선의 국가조직과 사회ㆍ경제활동에 대한 기본법전이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용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정되어 성종 때 《대전속록》이, 중종 때 《대전후속록》이, 숙종 때 《수교집록》이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이들 법전을 정리하여 《속대전》으로 간행, 그 후 정조 때에 《대전통편》, 고종 때에는 대원군에 의해 《대전회통》과 그 조례인 《육전조례》가 편찬되었다. 그 중 《대전회통》은 조선왕조 최후의 통일된 법전이다.

이들 법전에 의거하여 집행된 사법(司法)은 통치의 일환으로 근대적 의미의 민사(民事)ㆍ형사(刑事)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고, 행정의 일환으로 운영되었다. 즉, 주ㆍ부ㆍ군ㆍ현의 수령인 목사ㆍ부사ㆍ군수ㆍ현령ㆍ현감과 도의 관찰사는 행정관인 동시에 사법관으로서, 수령은 민사소송과 태형(笞刑) 이하의 형사소송을 직결하였으며, 관찰사는 관내의 사법사무를 통할하며 도형(徒刑) 이하의 형사사건을 직결하고 그 이상의 중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상급심(上級審)을 위해서는 형조ㆍ의금부ㆍ한성부의 3법사가 설치되었는데, 형조는 사법행정의 감독기관인 동시에 수령이 관장하는 일반사건에 대한 상소심(上訴審)으로서의 재심기관이며, 합의제(合議制)였다. 의금부는 왕족의 범죄ㆍ모반죄ㆍ관기문란죄 등을 처결하는 특별 형사재판기관이었고, 왕명에 의해서만 재판을 열었다. 한성부는 서울의 사법기관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전국의 토지ㆍ가옥에 관한 소송도 맡았다.

조선왕조의 형벌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태(笞)ㆍ장(杖)ㆍ도(徒)ㆍ유(流)ㆍ사(死)의 5형이 시행되었다. 형옥은 일반적으로 잔혹하게 다스려져 영조는 이를 개혁하여 압슬(壓膝)ㆍ낙형(烙刑)ㆍ묵자(墨刺)ㆍ난장(亂杖) 등을 폐지하였으나, 역적을 처벌함에는 여전히 참혹하였다. 형법제도도 갑오개혁 때에 개정되어 죄인의 연좌제(緣坐制:連坐制)가 폐지되고 고문을 금지했으며, 사법관 이외의 관리가 마음대로 구속하지 못하게 하였다.

Ⅵ. 사회구조

조선은 양반 중심의 사회였다. 양반이란, 원래 문관 벼슬을 가리키는 동반(東班)과 무관 벼슬을 가리키는 서반(西班)을 함께 부르던 말로, 관직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이것이 조선에서는 벼슬한 사람만이 아니라 벼슬을 할 수 있는 신분을 지칭하는 말로 그 뜻이 변하였다. 조선 초기에 세습신분으로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으로 나뉘었다.

양인에는 직업의 종류와 귀천에 따라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구별이 있었으나 왕권이 확고해지고, 관료조직이 정비되어 가면서 관료들은 지배층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굳혀 마침내 향리나 농민과 뚜렷이 구별되는 신분을 마련하였다. 하급관리ㆍ지방행정실무자ㆍ기술관 등은 별도로 중인(中人)신분을 이루었고, 농업ㆍ상업ㆍ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상민(常民)이 되었다. 한편, 그 밑에는 천민신분으로 노비ㆍ광대ㆍ사당ㆍ무당ㆍ창기ㆍ백정 등이 이에 속하였다. 특히 노비는 공공기관이나 개인에 소속되어 매매ㆍ증여ㆍ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의 이러한 사회적 신분은 세습되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관직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일부의 양반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관직에 종사해야만 국가로부터 경제적 혜택과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16세기 이후 정권과 관직을 둘러싸고 대립하였고, 19세기를 전후하여서는 납속책(納粟策)이나 족보의 위조, 학생을 사칭하여 양반신분에 오르고, 또는 양반과 혼인을 하여 양반이 되는 경우도 있어 양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그리하여 양반 내에서도 계층 분화가 일어났는데, 집권당파의 권세 있는 양반으로서의 권반(權班), 향촌사회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향반(鄕班)ㆍ토반(土班), 그리고 농민과 다름없이 몰락한 잔반(殘班) 등으로 나뉘어졌다. 한편, 노비들 중에서도 도망하거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혹은 국가에 곡식을 바치거나 하여 상민(常民)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1801년에는 관청에 소속된 노비가 모두 해방되고, 1894년에는 사노비까지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신분제를 폐지하여 완전히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였다.

양반 중심의 조선에서는 특히 양반들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유교적 예속과 가족제도가 운영되었다. 조선의 가족제도와 도덕ㆍ풍속은 철저하게 유교적이었다. 가족제도는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제도였으며, 유교적 효(孝)의 정신에 입각하여 가장의 권한은 절대적으로, 가장은 가족을 대표하고 거느리며, 조상에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였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과부의 재혼도 금지되었다. 대가족제도를 유지하고자 제사가 중요시되었고, 족보가 간행되었으며, 종중(宗中)의 모임이 중요시되었다. 이와 같은 유교적 예속과 사회운영을 위하여 향약이 조직, 운영되기도 하였다.

(뒤에 계속)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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