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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04 (토) 13:42
분 류 사전2
ㆍ조회: 293      
[고려] 묘청의 난=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민족)
묘청의 난 妙淸-亂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

[배경]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 이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그는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白壽翰)ㆍ정지상(鄭知常)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했고, 그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명당인 임원역(林原驛 :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大花宮)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도 많았다.

특히,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많은 나라가 조공할 것이라고 했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화궁 근처 30여 곳에 벼락이 치고, 인종의 서경 거둥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기도 하였다. 이에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김부식(金富軾)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마침내 인종은 서경 거둥을 단념, 서경 천도 계획도 그만두게 되었다.

묘청 일파의 정치적 목표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개경 귀족 대신 서경인 중심의 새 정권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금국 정벌론 등 자주적 기백과 내정 혁신의 의욕도 보였으나, 인심을 현혹시키는 얕은 속임수가 발각되고 재앙이 자주 생겨 서경 천도 계획을 배척하는 여론이 고조되어갔던 것이다.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전개]

묘청은 1135년 정월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郎) 조광(趙匡), 동 병부상서(兵部尙書) 유참(柳蓚) 등과 함께 반기를 들고, 부유수(副留守) 이하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과 서경에 와 있던 상경인(上京人 : 開京人)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차단, 서북면 내의 모든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天遣忠義)라고 하였다.

이에 정부는 김부식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임명,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먼저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백수한ㆍ정지상ㆍ김안(金安) 등을 처형, 후환을 없앴다. 그리고 좌ㆍ우ㆍ중 3군을 거느리고 평산역(平山驛)-관산역(管山驛 : 新溪)-사암역(射茅驛 : 遂安)을 거쳐 성천(成川)에 이르러 토적(討賊)의 격문을 여러 성에 보냈다. 다시 3군을 지휘해 연주(漣州 : 蓮州)를 거쳐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 安州)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들이 정부군에 호응, 협력하였고, 정세는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김부식은 7, 8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실권자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ㆍ유담ㆍ유호(柳浩 : 유담의 아들)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 등에게 주어 개경으로 보냈으나, 개경 정부는 윤첨 등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 등은 항복해도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서경 반란군은 정부의 어떠한 회유 교섭도 거절하였다. 인종이 보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김부(金阜), 내시 황문상(黃文裳)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錄事) 이덕경(李德卿)도 죽였다. 이와 함께 선요문(宣耀門)에서 다경루(多景樓)까지 강을 따라 1,730칸의 성을 쌓고, 그 사이에 여섯 문을 만들어놓았다.

[결과]

정부군은 서경성 바로 밑에까지 진격, 중ㆍ좌ㆍ우ㆍ전ㆍ후의 5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고전하였다. 이처럼 반란군은 1년 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1136년 2월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 서경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조광 등 반란군의 지도자들이 자결함으로써 반란은 끝나게 된 것이다.

[의의]

이 난의 특징은 왕권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첫째, 국호ㆍ연호 등은 제정하면서 왕을 새로 옹위하지 않은 점, 둘째, 왕에게 거사 소식을 직접 전달한 점에서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간의 다툼으로 파악될 수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 난을 낭불 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난이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  구조상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고려 권력 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개경 세력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 세력은 왕권마저 능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신 귀족 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ㆍ사회 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 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時代의 硏究(李丙燾, 乙酉文化社, 1948), 韓國史-中世篇-(李丙燾, 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1),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高麗貴族社會의 諸矛盾(金潤坤,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하현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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