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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11-30 (화)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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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83      
[조선] 탕평책 (브리)
탕평책 蕩平策

조선 영조ㆍ정조 때 왕권을 강화하고 붕당(朋黨)간의 과열된 정쟁을 지양하기 위해 편중되지 않은 인사 정책을 추진하고 각 정치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 실시한 정책.

탕평은 <상서 尙書> 안에 있는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제5조인 황극설(皇極說)에서 따온 말로, 군주의 정치 행위가 한쪽에 치우치거나 개인적 감정에 따르지 않고 지극히 공정하고 정당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정치 행위에 대한 시비 판단의 기준이 신하에게 있지 않고 군주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개념의 탕평은 영조 이전에 이미 박세채(朴世采)ㆍ최석정(崔錫鼎) 등 몇몇 신하에 의해 주창되기도 했으나, 강조되고 하나의 정책으로까지 추진되어 역사적 용어로 정착한 것은 영조 때부터이다.

사림의 공론(公論)에 의해 운영된 정치 형태인 붕당정치는 주자(朱子)의 '인군위당설'(引君爲黨說)에서 나타나듯이 신료의 도학 정치 이념이 옳다면 임금까지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붕당의 의리(義理)와 명분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공론의 주재자로서 재야의 산림(山林)이 중시되었고, 점차 군주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숙종 때에는 공론이 당론화되면서 군자당이라 인정되는 한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환국정치(換局政治)가 나타났는데, 이 과정에서 군주권이 신료들간의 당론에 휩쓸리게 되었다. 환국정치 하에서는 일당 전제를 확립하기 위해 상대 당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심하게 했으며, 급기야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붕당간에 충역(忠逆)의 시비가 벌어졌다.

숙종 말년 노론은 왕세제(뒤의 영조)를 지지하고 소론은 왕세자(뒤의 경종)를 지지하여 당론이 왕위를 선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종이 즉위한 뒤에는 노론측에서 왕세자인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하려다가, 경종의 왕위를 영조에게 전위해주고 나아가 경종의 제거까지 꾀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공격을 받았다. 이에 노론이 제거되는 이른 바 신임사화가 발생했는데 이때 노론의 주요 인물들이 역적으로 처단되었다. 따라서 왕세자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웠는데, 경종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자 영조는 즉위할 수 있었다.

영조는 즉위 전 붕당간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해 왕권마저 동요되는 정치적 파란을 겪었으므로,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위축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파붕당(破朋黨)을 통한 탕평을 내세워 정국의 안정을 도모했다. 초기의 탕평은 노론과 소론을 아울러 처리하는 양치양해(兩治兩解)라는 이름의 고식책이거나, 노론 내의 온건론인 완론(緩論)을 중심으로 공정한 자세를 견지하여 소론에 대한 보복을 억제하는 등 붕당 세력을 억제하는 소극적 방법으로 주도했다. 또한 영조 자신이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신임사화가 해결되지 않아 노ㆍ소론을 번갈아 기용하는 환국의 형태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1728년(영조 4)의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과 일부 소론의 관료층이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는데, 이로 말미암아 영조는 붕당의 타파를 기본 전제로 한 탕평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색인 : 이인좌의 난). 왕은 조문명(趙文命)ㆍ송인명(宋寅明) 등 소론 출신 탕평론자를 중용하여 각 당의 정계 진출 명분을 세워주고 노소론의 병용(倂用)에 의한 조제 보합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신임옥에 대한 시비의 절충을 시도했다.

즉 왕세제(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청했던 4대신은 기본적으로 무죄이지만 경종 제거 음모에 가담한 죄인의 친족인 이이명(李命)ㆍ김창집(金昌集)만은 유죄로 하는 1729년의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단행했다. 각 당의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탕평론자 및 노론의 완론에 의해 이것이 받아들여져 일단은 노소의 연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노론 내 완론인 홍치중(洪致中)ㆍ김재로(金在魯) 등이 소론의 탕평론자들과 같이 정권을 구성했다. 이들 탕평파는 인사 원칙으로 쌍거호대(雙擧互對)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이는 한쪽의 인물을 불러다 쓰면 반드시 그만한 직위에 그 상대당의 인물을 기용하는 것으로, 각 붕당의 의리(義理)나 공론(公論)을 부정하고 노ㆍ소론의 조제보합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침에 남인까지 포함시키지는 않아, 기본적으로 서인만의 탕평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탕평책은 1739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신임사화에 왕 자신이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선 신임사화 자체를 무고에 의한 역옥으로 판정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 노론의 명분을 점진적으로 수용해야 했다. 점차 노론의 정계 참여가 활발해지자, 1740년에 이르러 신임옥 자체를 다 무고로 파악한 경신처분(庚申處分)을 단행했다. 이는 왕권 안정을 목표로 하여 탕평책을 추진해오면서도 자신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노소 연정의 확실한 바탕 위에서 신임옥에 대한 노론 명분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반발하는 소론과 남인에 대해서는 김재로ㆍ송인명ㆍ조현명(趙顯命)ㆍ원경하(元景夏)ㆍ이주진(李周鎭) 등의 탕평파를 기용하여 무마했다. 이들 탕평파는 이전의 쌍거호대 원칙이 전혀 탕평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반성하고, 붕당 자체의 타파를 전제로 한 군주의 인물 선택은 당색을 떠나 오직 재주만 있으면 기용한다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을 주장하여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의 모든 당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탕평을 제창했다. 따라서 이들 탕평파에는 남인 오광운(吳光運)도 같이 참여했다.

이 시기 이후로 정치 세력으로서의 붕당은 의미가 없어졌고, 따라서 공론의 주재자인 산림 세력도 그 존재가 미미했다. 모든 정치적 명분이나 의리에 대한 판단은 오직 국왕만이 내릴 수 있었고, 국왕은 그러한 기준에 따르는 탕평파를 통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 탕평파에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으로 왕실과의 혼인이 이루어져 영조 말년에는 사림의 공론이나 붕당의 벌족은 쇠퇴했으나 탕평파가 새로운 세가대족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탕평파와 외척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왕위 계승에 대한 위험을 겪고 즉위했다 이 때문에 마찬가지로 당론을 지양하고 당파를 없애기 위해 계속하여 탕평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조는 완론 세력을 중심으로 한 영조와 달리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준론(峻論) 세력을 중심으로 탕평책을 폈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노론ㆍ소론 및 남인의 청류(淸類)를 등용했다. 이 시기에 붕당 차원의 의리는 부정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의리만이 용인되었다. 또 벌족의 폐단을 막기 위해 규장각을 개편하여 청선(淸選)을 중시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왕의 측근으로 활용했고, 재상의 권한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기본적으로 산림이나 척신이 배제되고 당의 이해와 관계가 없는 관료 정국을 운영한 것이었다.

탕평책의 실시는 당시의 정치 질서에 큰 변화를 초래하여, 선조 이래 약 120~130년간이나 계속되어왔던 붕당정치를 쇠퇴시키는 동시에 국왕이 정국 운영의 주체가 되었다. 물론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의 당색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적 의미를 갖지 못한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했다. 임금 자신이 적극적으로 인사권과 시비 변별권을 행사함으로써 도학을 앞세운 사림의 공론이나 산림의 권위를 더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공론 형성의 기반이던 서원을 대거 철폐하고 산림의 지시를 받아 공론을 좌우하던 이조전랑(吏曹銓郞)의 통청권을 폐지시켜 그 권한을 대폭 축소했으며, 각 정파마다 유리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던 사관(史官)직의 임용권이 임금에게로 귀속되었다.

붕당정치의 쇠퇴는 필연적으로 왕권의 신장과 임금을 중심으로한 정국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현안의 민생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과 시행을 가능하게 했다. 균역법으로 대표되는 양역 제도의 개편을 포함한 역대의 수취 체제 개편 작업이 이때에 비로소 완결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또 영조ㆍ정조대에 각종 서적 편찬을 비롯한 문예 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이런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탕평책은 정계에 참여한 권력 집단 간의 세력 균형 도모가 아니라, 신하간의 붕당행위를 배제하고 정쟁을 억제함으로써 왕권의 신장과 안정된 정국을 기초로 의리ㆍ명분보다는 민생 대책에 주력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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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탕평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 56 : 정만조, 진단학회, 1983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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