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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11 (토) 07:05
분 류 사전2
ㆍ조회: 279      
[고려] 무신정권 (두산)
무신정권 武臣政權

고려 시대 있었던 무신들의 독재 정권.

1170년 보현원에서의 난을 계기로 집권하여 출발한 무신 정권은 그후 1270년(원종 11)까지 꼭 100년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꽤 여럿의 집권자들이 교체되었고, 그에 따라 정치적 성숙도도 달라지고 있어서 보통 이를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난을 발생시킨 이의방(李義方)ㆍ정중부(鄭仲夫)로부터 이의민(李義旼)의 집권 시기를 성립기, 최충헌(崔忠獻) 등 최씨 4대의 집권기를 확립기, 그후를 붕괴기라고 할 수 있다.

1170년의 정변에서 정중부는 비교적 온건 세력이었던 데 비해 이의방과 이고(李高)는 하위직이었음에 불구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고 난의 성공 후 관직의 승진도 훨씬 급격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이의방과 이고가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곧 양자간에 다툼이 벌어져 1171년(명종 1)에 이고가 제거되고, 이의방은 온건 무장 세력과의 타협하에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친다. 그러나 그도 1174년(명종 4) 12월에 제거되어 결국 3인의 주동자 중 최후의 승리는 정중부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정중부 마저 복고의 뜻을 가진 젊은 무장인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1179년(명종 9) 9월에 제거되었다.

그러나 경대승의 이런 행동은 무신 전체를 적대 세력으로 만드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 때문에 그는 호위 세력인 도방(都房)을 설치하지만 1183년(명종 13) 7월에 병사함으로써 그의 정권은 무너지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그후 정권을 잡은 것은 천계 출신인 이의민이었다. 경대승의 정권때는 집권자의 위협으로 경주로 낙향했던 그는 경대승의 병사 후 명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집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세도를 믿고 횡포하여 크게 인심을 잃고 사소한 다툼으로 최충헌 형제와의 싸움 끝에 제거되었다(1196, 명종 26).

이처럼 성립기 약 26년 간의 무신 정권은 연속적인 또 다른 난으로 인하여 집권자가 제거되는 등 안정적이지 못하였고, 정권의 유지 또한 중방이라는 장군들의 회의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립기의 무신 정권은 1196년(명종 26) 4월에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큰 전기를 맞는다. 최충헌은 아버지의 음서를 통해 관도에 진출할 정도로 비교적 좋은 집안 출신이다. 특히 문반 출신이던 그는 공명에 뜻을 두고 있어 무신난 직후 무반직으로 사로를 바꾸어 성공해 나갔다.

결국 난의 성공으로 집권자의 자리에 오른 최충헌은 교정도감(敎定都監)과 도방 등을 통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먼저 그는 부족한 사병 조직을 보충하고자 경대승의 도방을 본따서 사적 무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기구로서 교정도감을 설치했다. 이미 집권한 후 상장군직 이외에 지주사(知奏事)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거쳐 단계적으로 승진, 1205년(희종 원년)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데, 정치 요직인 재추의 기본 관직에다 인사권을 가진 이부(吏部)ㆍ병부(兵部)와 관리 감찰권을 지닌 어사대,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원직인 상장군 등 5개의 권력직을 겸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런 국가의 공식적인 관직을 통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그는 1206년(희종 2)에는 진강후(晋康侯)에 봉함을 받고 흥녕부(興寧府-뒤에 진강부로 개칭)를 세움으로써 권력 기반을 공고히했다. 그러나 1209년(희종 5)의 암살시도를 겪은 직후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이후부터는 그것을 통해 정령을 폈던 것이다.

이처럼 최충헌은 이전 집정들과는 달리 1인 독재 권력을 확립하고 사병 조직 및 독자적인 집정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된다. 더욱이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던 점도 주목된다. 최충헌이 1219년(고종 6)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우(瑀-후에 이(怡)로 개명)가 권력을 이었다.

최우는 도방을 내외도방으로 확대 편성하고, 삼별초를 조직하여 무력 기반을 크게 확충했다. 또 교정도감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정방(政房)을 두어 사저에서 백관의 인사를 처리하는 기구를 공식화하며, 유학자들을 모아 직숙(直宿)하면서 정권 운영의 고문을 담당케한 서방(書房)도 설치하였다. 최우 집권시에는 몽고군의 침입이 개시되는 어려움을 겪지만 그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져 사망하는 1249년(고종36)까지 30년간 집권하였다.

무신 정권의 변천 표
무신 정권의 변천 표, 두산세계대백과 그림

그 이후 권력은 그의 첩자(妾子)인 항(沆)이 세습한다. 그도 기존의 정치를 답습하였지만 불과 8년 만에 병사하고 다시 최항의 첩자인 의(竩)가 4대 집정이 되었다. 하지만 천계 출생으로 조정의 신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데다가 여러차례의 실정으로 결국 자신의 가노(家奴) 출신으로 당시 별장(別將)이던 김인준(金仁俊)에 의해 1258년(고종 45)에 살해되었다. 이로써 최씨집권기는 막을 내리 되었다.

이후 김인준에 의해서 새로운 무신 정권이 성립되지만 권력은 최씨 집권기보다는 약해졌다. 더욱이 1268년(원종 9)에는 자신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친밀하던 임연(林衍)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고 다시 권력은 임연을 통해서 그 아들인 임유무(林惟茂)에게 이어지지만 결국 원(元)나라라는 외부 세력의 압력까지 겹쳐 결국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붕괴기의 무신 정권은 확립기의 최씨 집권기를 따라했지만 여러 요인으로 권력 기반을 공고히하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정확히 100년간을 이어진 무신 정권에 대하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씨 집권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면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인사권을 함부로 한다던가, 몽고군 침입시에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육지를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사실, 이때 육지의 백성들은 내버려 둔 채 강화에서 향락을 일삼은 사실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도연>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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