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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31 (월) 09:41
분 류 사전2
ㆍ조회: 515      
[조선] 효종 행장 2 (실록)
효종 대왕 행장 2

(앞에서 이음)

임진년1171) 호남(湖南)에 기근이 들자 매달 새로 생산되는 찬선(饌膳)을 올리게 되어 있는 것을 가을 추수 때까지 바치는 것을 정지하게 하였으며 공상지(供上紙)와 백면지(白綿紙)도 감하게 하였다. 뒤에 본도에 전염병이 돌아 폐농되었다는 말을 듣고 방백에게 하유하여 진구하여 살릴 수 있는 방도를 극진히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묵은 전지(田地)를 가꾸게 하였다.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에 흉년이 들었을 적에 더욱 심한 고을은 세금을 완전히 면제시켰으며, 북도(北道)와 양서(兩西)에는 등급을 나누어 사조(賜租)하였으며, 임금에게 올리는 선어(鮮魚)도 임시로 감하게 하였다. 겨울에 사옹원이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또 계속해서 두어 해 동안 감할 것을 명하였다. 사옹원이 받아들이는 생어물(生魚物)과 건어물(乾魚物) 가운데 퇴짜놓는 폐단이 많자 척량(尺量)의 한계를 감하도록 명하고 교활한 짓을 하는 것을 통렬히 금하였다.

계사년1172) 에 육진(六鎭)과 삼수ㆍ갑산이 극심한 재해를 입자 1년 동안의 조세(租稅)를 감면시켰다. 내자시(內資寺)의 공물을 이미 감면시켰기 때문에 3월 3일의 병식(餠食)은 대비전에만 올리게 명하였는데도 내자시에서 대전에도 아울러 올리니, 이에 그 관원을 파직시켰다. 예조가 각도의 삭선(朔膳)을 다시 설치하게 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삼남(三南)에 여역이 아직도 치성하여 놀랍고 두려움이 실로 절실한데 무슨 마음으로 삭선의 진상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내년의 탄일(誕日)에 있을 방물도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전남 감사가 추함(推緘)에 대해 올린 함답(緘答) 내용에, "납향(臘享)에 진공(進供)하는 노루를 각 고을에서 산 채로 잡아 감영(監營)에 보내고 있습니다." 한 것이 있었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그 폐단이 작지 않아 내 마음이 불안하니, 납향을 지내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 하고, 해도(該道)로 하여금 그 뒤로는 생포하여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을미년1173)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강계(江界) 등 25개 고을이 재해를 입자 조정에서 세금의 삼분의 일을 감면시켰는데, 감사가 다시 더 감해 줄 것을 청하니 호조에서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특별히 다 감면시켜 주도록 명하였다. 하삼도(下三道)와 동북 양도(兩道)에서 무술년과 기해년에 공납할 세폐(歲幣)의 차목(次木)이 모두 9백 40여 동(同)이고 기해년 삼남(三南)에서 공납할 상폐목(上幣木)이 88동이었는데 이를 모두 감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숫자는 새로 추쇄한 노비들의 공목(貢木)으로 충당시켰다.

북쪽 변방에서 곤궁한 나머지 자식을 낳아도 기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랍고 불쌍하게 여겨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잘 타일러 엄금하게 한 다음 각 고을의 자식을 낳은 사람에게 쌀과 장(醬)을 지급하도록 계칙하고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였다.

호서(湖西)가 임진 왜란 때에 병화(兵禍)를 당하지 않은 탓으로 대신 타도(他道)의 부역(賦役)을 감당했었으므로 본디 편중되었다고 일컬어졌었다. 신묘년에 상신 김육(金堉)의 의논을 써서 대동법을 행하게 되면서 1결에 10두씩을 거두어 들여 경외(京外)의 비용에 이바지하게 하고 다른 요역(徭役)은 없게 하자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하늘이 견고(譴告)를 보이는 변이 발생하면 계구(戒懼)가 간절하고도 지극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자문함으로써 재이를 없앨 방도를 강구하였고 자기 한 몸을 죄책함으로써 사방에 구언(求言)하였다. 피전(避殿)하고 감선(減膳)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 반드시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고쳐 주었다. 그리하여 왕옥(王獄)의 중한 죄수도 사형을 용서받는 경우가 있었다.

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는 그 고통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 비를 비는 데 쓰는 희생(犧牲)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매양 제물을 깨끗이 준비하여 몸소 사사(祀事)를 행하였는데 아무리 타는 듯이 뜨거운 무더위라 해도 관을 벗거나 허리띠를 푼 적이 없이 밤까지 계속하였으므로 그 지성에 감동되어 단비가 금방 내리기도 하였다.

무술년1174) 6월에 병을 앓기 시작하여 점점 심하여졌다. 7월에 대신(大臣)들을 연견(延見)하였는데, 왕이 전남의 바닷가 백성들에게 부역이 치우쳐서 고통스럽게 가해지고 있다고 하여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대동법을 호서에서처럼 설행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기해년1175) 봄에 또 가뭄이 들어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었으나 우근(憂勤)으로 피로가 겹친 상태에서도 자주 신료(臣僚)들을 접견하여 빠진 계책이 없이 강구하여 곡식을 옮기고 부세를 견감시키는 등 마음을 극진하게 쓰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진휼하는 즈음에는 우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부터 하였으며 경외(京外)에서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였다. 또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마을 사이를 출몰하면서 그 근만(勤慢)을 살피게 하였으며 겸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묻게 하였다. 간절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하교가 계속하여 내려지고 신칙시키는 명령이 잇따라 하달되었으므로 대소 관리들이 뛰어다니면서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보리가 날 때까지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없었다.

군병들의 원통함을 순문(詢問)하니, 백골(白骨)에게 베를 징수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를 군정(軍丁)에 충정(充定)시키기도 하고 늙었는데도 면제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어 억울한 고통이 더욱 극심하였다. 왕은 흉년이 들어 부역을 감면시키는 때에 이들에게만 유독 그대로 징수하는 것은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의의가 아니라고 하여 이에 비국으로 하여금 먼저 제도(諸道)의 감영에 저축된 포목(布木)의 숫자를 묻게 하고 바야흐로 마땅한 바를 헤아려 은혜를 베풀려고 하였는데 미처 완료하지 못하였다. 4월 20일 뒤에 병에 감염되었는데도 기우제를 설행하도록 명하였으나 미령하여 직접 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감히 스스로 마음에 편안할 수가 없어 드디어 외각(外閣)에서 재숙(齋宿)하였고 손상을 받아 병이 더하는 것을 돌보지 않은 채 한데 서서 하늘에 빌었으며 하루가 가고 밤이 새도록 관건을 벗지 않았다. 5월 4일 병세가 매우 위독해져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춘추는 41세였고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

도성(都城)의 사녀(士女)들이 눈물을 비처럼 흘리고 우레처럼 통곡하였으며 한산(閑散)한 부류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태학(太學)ㆍ사학(四學)의 생도들과 교기(郊畿)에 거처하는 사대부로서 달려와서 아침 저녁 궐문 밖에서 슬피우는 사람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었는데 성복(成服)한 뒤에야 비로소 물러갔다. 진구받았던 기민(飢民)들도 서로 이끌고 달려와 통곡했는데, 외방에서 온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궁벽한 시골 마을의 어리석은 백성들도 관정에 달려와 모여 부모가 돌아간 것처럼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염습(斂襲)할 때 대신ㆍ예관ㆍ정원ㆍ삼사가 입시했는데, 예(禮)이다.

왕은 영명(英明)하고 특달(特達)하고 강의(剛毅)하고 관후(寬厚)하였으며, 엄하고도 인자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불세출(不世出)의 자질로 큰 일을 할 뜻을 품었다.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모유(謨猷)는 개연(愷然)히 옛 도를 사모하였고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밤중에 일어나 탄식하였다. 유전(遊畋)과 성색(聲色)의 즐거움을 하나도 마음에 둔 적이 없었으며 위로 하늘의 경계를 근신(謹愼)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곤궁함을 딱하게 여겨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뜻이 독실하였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대학연의》의 숭경외(崇敬畏) 상하 권을 빼내어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들고 빈풍장(豳風章)과 무일편(無逸篇)을 아울러 병풍을 만들어 거기에 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주례(周禮)》의 십이황정(十二荒政)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있는 육정 육사(六正六邪)와 《한서(漢書)》의 자사 육조(刺史六條)도 베껴 써 오게 하여 한가할 때 열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겼으며 어진이는 목마른 듯이 구하고 재능이 있는 이는 재빨리 발탁하였으며 어진이들이 띠풀처럼 무리지어 나아왔으므로 재야에는 빠진 인재가 없었으며 선행과 절개를 표창하여 드러내어 명성을 심었다. 심지(心志)에 보존되어 있는 것은 곧 국력을 부지하여 기르고 백성을 변화시키는 공이었고, 시조(施措)에 발현된 것은 모두 근본을 공고하게 하고 국운을 영원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며, 아랫사람을 인접하여 수작(酬酢)함에 있어서는 표리(表裏)가 환히 드러나게 하였고,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문답함에 있어서는 깊고 은미한 곳까지 세밀히 분석하였으므로 비록 홍유(鴻儒)라 할지라도 따라갈 수 있는 의견이 없었다. 문장(文章)에 이르러서는 말을 하면 그대로 아름다운 글을 이루어 저절로 전칙(典則)이 완성되었으며 진초(眞草)의 서법(書法)은 새가 날듯 기묘함을 이루었으나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고 말하는 사이에도 결코 언급한 적이 없었다.

평일 담론한 것은 오직 전모(典謨)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성현의 글과 고금의 흥망에 대한 근원 및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방책에 관한 것뿐이었다. 용잠(龍潛)으로 있을 때는 술을 한없이 마셨으나 저위(儲位)에 오르면서부터는 결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필부의 일신을 망치는 것이 술에서 생기는 일이 많은데, 관직에 임한 사람의 경우는 본래 말할 것도 없다. 술로 인해 말을 실수하는 데에서도 화를 자초하기에 이르기 일쑤이니, 이보다 더 심한 해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근래 사대부들 사이에 명류(名流)라고 호칭되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것을 가지고 서로 훌륭하게 여기면서 마치 진(晋)나라의 풍속에서 예의를 지키지 않고 방임하는 것으로 명망을 얻었던 것처럼 하고 있다. 선부(選部)를 맡은 사람은 주의(注擬)할 즈음에 이러한 무리들은 다른 사람에 우선하여 기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작년에 병이 위독하여져 수저를 들지 않았으므로 외방의 특이한 별미(別味)를 올려 권하였으나 드시려 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 구복(口腹)을 충족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동요시켜 지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송(迎送)의 폐단을 염려하여 진상(進上)을 삼가지 않는 수령들에 대해서도 파출(罷黜)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약을 먹으면서 병을 치료하는 상황이었지만 한결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

무술년1176) 겨울 병이 조금 낫자 예관과 대신들이 누차 진하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악정자(樂正子)가 발을 삐었을 적에 다 나은 후에도 수개 월 동안 나오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찰이었다고 걱정하는 안색을 지었던 것처럼 하면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걱정하여 옥체(玉體)가 병들었다는 것도 잊었는데, 거의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오히려 마른 곡식이 소생토록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으니, 이는 실로 지극한 성품이 하늘이 심어준 데 뿌리하고 있는 것으로 억지로 힘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신민들이 더욱 깊이 슬퍼하는 것은, 11년 동안 정신을 가다듬고 수성(修省)하느라고 편안히 쉴 겨를이 없었던 탓으로 한 해도 향공(享供)을 받은 때가 없었고 단 열흘이라도 근심하여 괴로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바야흐로 훌륭한 통치를 도모하여 미처 풍동(風動)시키기도 전에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어진이라면 반드시 얻어야 할 수명(壽命)을 끝내 하늘이 아낌으로써 답답한 한을 품은 채 지닌 웅지를 펼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 점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우리 동방의 끝없는 통한인 것이다.

아름다운 행실과 위대한 규범은 사서에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고 광대한 규모와 아름다운 법제는 영갑(令甲)에 환히 드러나 있다. 하늘에서 타고난 대효와 어진이를 예우하는 지성은 곧 상(商)ㆍ주(周) 때보다 뛰어났고 인성(仁聲)과 덕택(德澤)이 사람에게 깊이 박힌 것은 천만 세를 흘러 전하여가도 쇠하지 않기에 충분하다. 옛날의 사실을 상고하여 보아도 들어보기가 드문 업적이었다. 아, 성대하고도 통한스럽기 그지없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신(臣) 이경석(李景奭)이 전교를 받들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6책 194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註 1126] 기미년 : 1619 광해 11년.
[註 1127] 병인년 : 1626 인조 4년.
[註 1128] 신미년 : 1631 인조 9년.
[註 1129] 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1130] 악실(堊室) : 거상자가 거처하는 방.
[註 1131]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132]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1133] 갑신년 : 1644 인조 22년.
[註 1134] 삼조(三朝) : 세 번 부모에게 문안함.
[註 1135]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1136]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1137]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1138] 정유년 : 1657 효종 8년.
[註 1139] 상체(常棣) :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어떠한 역경에 처하여서도 형제 사이에 화락(和樂)한 우애(友愛)를 지닌 것을 노래한 내용임.
[註 1140] 병신년 : 1656 효종 7년.
[註 1141]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1142]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1143]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1144]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1145] 삭서(朔書) : 매달 시험하는 글씨 시험으로, 승문원으로 하여금 40세 이하의 당하(堂下) 문신(文臣)을 초록(抄錄)하게 하여 해서(楷書)와 전서(篆書)를 시험하는 것.
[註 1146]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1147]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1148] 계사년 : 1653 효종 4년.
[註 1149] 갑오년 : 1654 효종 5년.
[註 1150]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1151] 강중(江中)의 추악한 이야기 : 항우(項羽)가 은밀히 형산왕(衡山王)과 임강왕(臨江王)을 시켜 의제(義帝)를 강 가운데서 살해한 것을 말함. 《사기(史記)》 항우 본기(項羽本紀).
[註 1152] 국을 나누어 달라고 한 이야기 : 한 고조(漢高祖)의 아버지 태공(太公)과 아내 여후(呂后)가 항우(項羽)에게 포로가 되어 있었는데, 항우가 광무(廣武)라는 곳에서 유방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큰 도마 위에 태공을 올려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태공을 삶겠다.’고 위협하니, 유방이 ‘국을 끓이거든 나에게도 한 그릇 나누어 보내라.’고 했던 일을 가리킨 말임. 《사기(史記)》 항우 본기(項羽本紀).
[註 1153] 병신년 : 1656 효종 7년.
[註 1154] 정유년 : 1657 효종 8년.
[註 1155]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1156] 한세충이 나귀를 타고 서호(西湖)에 노닌 일 : 한세충(韓世忠)이 간신(姦臣) 진회(秦檜)에게 배척당하여 웅지를 펴보지 못한 채 고향에 있는 서호를 나귀타고 술병차고 유람하면서 유유 자적하게 만년을 보낸 일을 말함.《송사(宋史)》 권364 한세충전(韓世忠傳).
[註 1157] 막수유(莫須有) : 분명하지 않은 일로 남을 무함하는 것을 말함. 송나라의 진회가 악비를 무함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켰을 적에, 한세충이 진회에게 범죄 사실을 따지자 진회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답한 데에서 온 말임. 《송사(宋史)》 권365 악비전(岳飛傳).
[註 1158]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1159]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1160]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1161] 치의(緇衣) :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편명(篇名)인데 치의는 경대부(卿大夫)들이 사조(私朝)에서 입는 옷으로, 천자가 신하를 사랑하여 옷을 지어준 것을 노래한 내용임.
[註 1162]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1163]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1164]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1165] 갑오년 : 1654 효종 5년.
[註 1166] 정유년 : 1657 효종 8년.
[註 1167]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1168]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1169] 기축년 : 1649 효종 즉위년.
[註 1170]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1171]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1172] 계사년 : 1653 효종 4년.
[註 1173]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1174]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1175]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1176] 무술년 : 1658 효종 9년.

출전 : 효종실록 효종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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