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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8 (월)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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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832      
[고대] 고대의 정치 (민족)
정치(고대의 정치)

관련항목 : 외교, 정치사상

세부항목

정치
정치(고대의 정치)
정치(고려시대의 정치)
정치(조선시대의 정치)
정치(근ㆍ현대의 정치)
정치(참고문헌)

1. 국가의 형성과 발전

한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정치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농경활동이 활발해져서 경제생활에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고, 정복활동이 본격화됨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부족장(部族長)의 지배적 위치가 부각되어 갔다.

그리하여 신석기시대의 원시공동체사회는 해체되고, 새로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사회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부족장의 후예들이 새로운 정치사회의 지배자로 대두된다고 생각되며, 청동제무기와 지석묘는 바로 그들의 권위와 지배권력을 말해 주는 귀중한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권력의 발생과 정치사회의 성립에 따라 나타나는 최초의 국가형태를 흔히 성읍국가(城邑國家)라고 부른다.

그것은 당시 정치적 지배자가 구릉지대 위에 토성(土城)을 쌓고 살면서 성 밖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몇 개의 읍락(邑落)의 농민들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연대상으로는 보통 청동기시대의 개시시기로 잡는 기원전 10세기까지 거슬러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성읍국가로서 역사기록에 전하는 존재로는 고조선(古朝鮮)을 비롯하여 부여(夫餘)·예맥(濊貊)·진국(辰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정치형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조선사회의 일면을 말하여 준다고 여겨지는 단군신화에 의하면, 그 정치적 지배자는 제사를 아울러 담당하는 제정일치적 존재(祭政一致的存在)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었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의 보좌를 받았는데, 이들은 뒷날 고구려의 대가(大加) 밑에 있었던 가신(家臣)인 사자(使者)·조의(牲衣)·선인(先人) 등에 비견된다.

한편, 뒷날의 연맹왕국(聯盟王國) 단계에 이르러, 위씨조선(衛氏朝鮮)에서는 상(相)이나 경(卿),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가(加), 삼한에서는 신지(臣智)나 읍차(邑借)라는 명칭으로 나타나는 자들이 성읍국가 지배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읍국가는 일정한 필요성과 계기에 따라 몇 개가 연합하여 보다 큰 단위의 정치조직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연맹왕국이라는 것이다.

약탈과 전쟁이 거듭되고, 철기문화(鐵器文化)의 보급으로 경제생활에 일대변혁이 나타나는 등, 외적·내적 요인에 의하여 성읍국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국가조직의 확대 발전으로서의 연맹왕국의 성립에 도달하는 존재로서 고조선·부여·고구려 및 삼한을 들 수 있다.

연맹왕국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자연히 정치체제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왕(王)의 등장이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에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부여는 1세기에 왕의 명의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바 있으며, 역시 1세기 초에 왕망(王莽)과 대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고구려의 후(侯)도 왕의 성격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사회발전이 약간 뒤지는 남쪽의 삼한의 경우, 왕이 대두하는 것은 2세기 말로부터 3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의 일이다. 이렇게 등장하는 왕은 궁실에서 살면서 높은 정치적 지위를 누렸고, 그 명의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연맹왕국은 성읍국가시대의 소박성을 탈피하고, 본격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기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연맹왕국 단계에서 권력의 집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왕은 연맹장(聯盟長)의 성격을 지닐 뿐이었다.

연맹왕국을 구성하는 성읍국가의 독자성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따라서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 스스로의 가신을 거느리고, 읍락의 유력자인 호민(豪民)을 매개로 농민인 하호(下戶)를 지배하였다.

부여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의 제가는 성읍국가의 기반을 가진 존재들이며, 이들이 선출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왕은 흉년이 들면 갈리거나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5부족의 우두머리인 대가들은 왕과 마찬가지로 가신을 거느렸고 죄인이 생기면 이들이 협의하여 처벌하였다. 이처럼 연맹왕국체제 아래에서 사실상 정치적 실권과 경제적 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맹장으로서의 왕의 출현은 국가조직의 확대 강화와 권력의 집중화라는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방향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곧 이어서 왕권이 강화되면서 연맹왕국의 변질이 이루어지게 된다.

2. 삼국의 귀족정치

느슨하였던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조직은 권력의 집중화 경향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북쪽에서 고구려가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고 남쪽에서 삼한으로부터 백제와 신라가 대두하여 삼국의 정립으로 나아가는 추이 속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이 무렵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내적인 결속과 일원적인 국가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맹왕국을 형성하던 성읍국가의 독자성은 점차 소멸되고 연맹장의 성격을 지니던 왕이 통치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게 됨으로써 연맹왕국체제는 새로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종래 성읍국가의 지배자는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되었다. 이때 통일적인 국가체제를 뒷받침하여 주는 정신적 지주로서 불교가 수용되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은 율령(律令)의 반포로 일단락되었다. 우리 나라 고대의 율령은 모두 일실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 자체가 국가의 통치를 규정하는 성문법(成文法)의 성격을 띠는 것이 분명한 만큼, 이 단계에서 고대의 국가체제는 완비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371∼384) 때에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백제는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근초고왕(346∼375) 때에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체제를 갖추고, 이어서 침류왕 1년(384)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에 이르러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까지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4세기 중엽 이후 6세기 초엽에 걸쳐 완비되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왕과 귀족이었다.

물론 왕실이 고정되고, 왕위는 부자상속에 따라 계승되었으며, 그 정치적 권능이 확대되는 등 왕권이 뚜렷이 강화되었지만, 이와 같은 왕을 보좌하면서 때로는 견제의 구실을 하였던 귀족들의 존재가 중요하였다.

그들은 종래 그 자신이 지녔던 독립세력으로서의 강약대소(强弱大小)의 위치에 따라 일정한 신분의 귀족적 특권을 보장받게 된 사람들로서, 특정한 가문을 단위로 존재하면서 중앙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었지만, 그 지배층을 이루는 것은 왕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귀족이었다고 하겠다.

이들 귀족의 존재는 고구려의 경우 14관등(官等)의 체계 속에 그 원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으며, 백제는 유명한 8성(姓)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라의 골품제가 이 시기의 귀족제를 가장 잘 알려준다.

최고의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그리고 육두품(六頭品)·오두품(五頭品)·사두품(四頭品)에 걸친 신라 귀족층은 각기 혈연을 기반으로 가문별로 존재하면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성골은 곧 소멸되었고, 진골이 정치면이나 군사면에서 절대적 우위를 독점하는 지배세력으로서의 귀족적 지위를 향유하였다.

귀족들은 중앙의 관부(官府)들, 이를테면 백제의 6좌평(佐平)이나 내관(內官) 12부(部)와 외관 10부(部), 신라의 병부(兵部)·사정부(司正部)·품주(襄主)·위화부(位和府)·예부(禮部) 등이 행정사무를 분장하면서 국가의 통치를 구현시켰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의 실제는 관료적인 관부보다는 합의기구(合議機構)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수상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이 선출하였고, 백제에서는 재상을 정사암(政事巖)에서 투표하여 임명한 것으로 해석되는 사례들이 합의제를 시사하여 주지만, 신라의 화백(和白)이 그것을 가장 뚜렷이 알려준다.

진골 귀족 출신의 대등(大等)을 구성원으로 하는 합의체인 화백은 왕위계승·선전포고·불교승인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였는데, 상대등(上大等)을 의장으로 하는 이 회의는 만장일치제의 원칙에 따랐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정치가 전개되는 양상은 한결같지 않았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나 신라의 진흥왕과 같은 영주(英主:영명하고 뛰어난 임금)가 나타나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대대적인 영토팽창을 이룩하는가 하면,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명문귀족 출신으로서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취임하여 무단적인 독재정치를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에 밀려 공주에 천도한 백제에서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문주왕이 귀족들에게 시해당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갖추어져서 온 나라의 토지와 인간에 대한 일원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왕의 권한은 합의체제를 통하여 구현되는 강력한 귀족세력에 의하여 일면 뒷받침되고, 일면 견제당하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정치형태였다.

3. 통일신라의 전제왕권

삼국은 각기 귀족정치를 펼쳐 나가면서 대외정책에 큰 힘을 기울였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민감하였고, 중국과의 무력충돌도 거듭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삼국 상호간의 관계는 항상 미묘하고 유동적이었다.

삼국이 어떠한 공통의 유대의식을 지녔다는 확증은 쉽사리 찾아지지 않지만, 언어가 통하고 긴밀한 교섭이 거듭되는 가운데 막연하게나마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분지어 친근한 존재로서 상대방을 이해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친근감보다는 삼국 가운데 누가 통일을 이룩하고 패권을 차지할 것인가가 절실한 문제였고, 그 때문에 대립과 전쟁이 줄곧 계속되었다.

마침내 당(唐)과 손잡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대두되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백제 공벌, 고구려 공벌,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라의 당군(唐軍) 격퇴(712)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였다.

신라의 정치적·사회적 발전을 토대로 김춘추(金春秋)의 능란한 외교활동과 김유신(金庾信)의 탁월한 군사전략이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건국하여 만주지역을 차지하기 때문에 통일신라의 북방경계선은 대동강(大同江)과 원산만(元山灣)을 연결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랫동안 독립적 전통을 지니고 분립되어 온 삼국을 합쳐서 하나의 통일적 국가체제를 이룩하게 하고, 한국민족이 한덩어리가 되어 발전할 수 있는 위대한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는 의미에서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는 북쪽의 발해를 고려할 때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었던 시기로 이해되지만, 통일신라의 영토와 주민 및 그 문화가 한국사의 주류를 이룬다는 점은 명확하다고 하겠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통치체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관대하게 포섭하면서 그 귀족들은 약간 격을 낮추어 골품제 속에 일정한 신분층으로 편입시켰고, 그들 다수를 소경(小京)에 이주하게 하였다. 종전에 비하여 크게 늘어난 영토와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개편, 9주5소경제도를 확립시켰다.

그리하여 통일신라의 지방통치는 크게 강화되어 모든 촌락의 구석구석에 그 행정력이 미치게 되었던 것인바, 근래 일본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8세기 중엽의 신라 장적(帳籍)이 이를 알려준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전제왕권의 성립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루어질 무렵 김춘추는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데(태종무열왕), 이것은 상례에서 벗어난 큰 변혁이었다. 그 이후 통일사업이 완수되고 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전제화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진골인 태종무열왕에 뒤이어 그의 자손이 연이어 즉위함으로써 새로운 신라 중대(中代)의 왕통이 시작되었고, 바로 그 자손인 문무왕(661∼681)과 신문왕(681∼692)은 무자비한 귀족숙청을 통하여 세력기반을 굳혀 나가는 한편, 김씨(金氏) 안에서의 근친혼(近親婚)으로 권력의 배타적 독점을 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화백회의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결국 강력한 왕권이 대두, 전제왕권의 확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왕권의 성립에 대응하여 관료제(官僚制)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 말기에 품주로부터 개편, 신설된 집사부(執事部)는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대두하여 강력한 왕권의 행사를 뒷받침하였는데, 그 장관인 중시(中侍)는 진골 출신이지만, 임기가 3년으로 왕의 대변자 구실을 하는 관료적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 차관인 시랑(侍郎)은 특히 유교(儒敎)의 식견을 갖춘 육두품 출신의 관료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병부·조부(調部)·창부(倉部)·예부·승부(乘部)·사정부·선부(船部)·위화부·좌우이방부(左右理方部) 등의 중앙관부는 대개 삼국시대부터 있어 온 것들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관원조직이 확장되고, 관원수가 증가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중·하층의 신라관료는 상당한 수에 이르렀고, 그들 가운데 다수는 육두품 출신 유학자 관료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전제왕권은 진골귀족세력에 대한 통제 강화를 위하여 이들 육두품세력과 결탁, 유교적 정치이념을 표방하려 하였고, 이와 같은 상황 아래 국학이 설치되고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전제왕권 체제하에서 신라는 성덕왕(702∼737) 때에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기운은 경덕왕(742∼765) 때까지 계속되어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과 같은 위대한 문화적 업적을 낳았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부터 신라 전제왕권은 동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귀족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중앙관부의 명칭과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친 한화정책(漢化政策)이 이루어지지만, 바로 다음의 혜공왕(765∼780) 때에 이르러 귀족들의 반란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한화정책은 취소되고 끝내 왕은 시해당하는 것이다.

뒤이어 선덕왕(780∼785)이 즉위함으로써 신라 하대(下代)가 개막되며, 이것은 전제왕권의 시기가 끝나고 진골 귀족들의 연립정치에 의한 신라쇠망기에의 진입을 뜻한다. 이와 같은 변화의 추이 속에서 골품제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사회 질서가 배태되고 있었다.

<민현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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