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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25 (월) 23:32
분 류 사전2
ㆍ조회: 2861      
[조선] 동인의 분열-남인과 북인 (이성무)
남인과 북인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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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조의 당쟁 2

세자 책봉 논의와 서인의 실각

심의겸과 김효원이 대립하고 있을 당시에는 동ㆍ서 양당만이 존재했다.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은 세력을 잃어 동인에게 밀렸지만, 정여립의 난 이후 정국은 좌의정 정철 등 서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동인 중의 이산해ㆍ유성룡 등도 선조의 신임을 받고는 있었다. 그러나 역시 주도권은 서인이 쥐고 있었다.

그러던 1591년(선조 24) 어느 날, 유성룡은 정철에게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고 했다. 당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이에 대신 사이에서 세작 책봉 문제가 조금씩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선조는 인빈(仁嬪) 김씨와 그녀가 낳은 신성군(信城君)에게 한창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그래서 유성룡은 서둘러 국본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정철에게 이 문제를 의논해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와 이 문제를 논의할 약속 날짜를 정했다. 그러나 이산해는 두 차례나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金公諒)에게 "정철이 장차 세자 세우기를 청하고 이어서 신성군 모자를 없애 버리려 한다"고 거짓 귀띔해 주었다. 이에 김공량은 곧바로 인빈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정철이 우리 모자를 죽이려 한다"며 하소연했다.

처음에 선조는 뜬소문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정철이 경연에서 세자 세울 것을 건의하고야 말았다.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선조는 대로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데, 네가 세자 세우기를 청하니 어쩌자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다. 이산해는 선조가 신성군을 사랑하고 있음을 김공량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이산해는 나가지 않아 없었고, 유성룡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기화로 동인들은 정철이 정권을 오로지하고 최영경 등을 억울하게 죽였다며 맹공을 퍼붓기 사작했다. 그리하여 정철은 파직되어 명천으로, 백유함은 경흥으로, 유공신은 경원으로, 이춘영은 삼수로 각기 귀양갔다. 서인들이 실세한 것이다.

반면에 영의정에는 북인의 이산해, 좌의정에는 유성룡이 임명되었다. 기축옥사에서 죽었던 최영경은 죄가 풀려 벼슬을 올려받았고, 뒤에 이발ㆍ이길ㆍ정개청 등도 사면되었다. 선조는 "간사한 성혼, 악독한 정철'(姦渾毒澈)"이라는 말까지 쓰면서 서인을 배척했다.

동인의 분열-남인과 북인

정여립 역모 사건과 기축옥사, 그리고 신묘년의 세자 책봉 논의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동인은 기축옥사를 잘못 처리한 정철을 논죄할 때, 정철분만 아니라 서인들 모두를 대거 처벌해야 한다는 이산해ㆍ정인홍 등의 강경파와 그 범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유성룡ㆍ김성일ㆍ우성전 등의 온건파로 의견이 갈렸다. 이에 강경파를 북인이라 하고 온건파를 남인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당의 조짐은 이미 그 전부터 있었다. 정여립이 이발을 통해 전랑이 되고자 할 무렵이었다.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이 반역하기 전부터 그 사람됨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벼슬길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정인홍이 이경중을 탄핵했는데, 바로 6년 뒤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에 유성룡은 이경중이 선견지명이 있었음에도 그 당시 대간들에게 반박당해 체직되고 말았다며 불만을 터드렸다. 그런데 유성룡의 그 한 마디가 조정에 파문을 일으켜 이경중 탄핵 당시의 대간이었던 정인홍은 관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와 같은 정인홍과 유성룡의 불화가 남북 분열의 한 빌미가 되었다.

한편 우성전과 이발의 대립도 남북 분열에 한몫을 했다. 우성전이 부친상을 당해 이발이 문상을 갔다. 그 때 이발은 우성전이 평양에서 데려온 기생첩이 머리를 풀고 며느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래 그 기생은 우성전의 아버지가 함종현령으로 있을 때, 평양을 왕래하다가 알게 된 여인이었다. 그 후 그가 병이 들어 사직하자 평양감사가 여인을 우성전의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이발은 아버지가 죽게 되었는데 무슨 마음으로 기생을 데려왔는지 모르겠다며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발은 북악산 아래 살고 있어서 그의 당을 북인이라 불렀고, 우성전은 남산 아래 살아서 그들 두둔하는 이들을 남인이라 했다.

남인인 유성룡 일파에는 김성일ㆍ이성중ㆍ우성전 등 퇴계 문인이 많았고 북인인 이발의 일파에는 정여립ㆍ최영경ㆍ정인홍 등 화담ㆍ남명 문인이 많았다. 이덕형 같은 경우는 본래 남인이었다. 그러나 북인 이산해의 사위였기 때문에 남ㆍ북인을 동시에 출입했는데, 북인이 점점 성해지자 남인으로 돌아섰다.

그러면 동인이 각기 남과 북으로 갈린 원인은 무엇인가? 단지 사사로운 감정 대립이 그 이유였는가? 동인은 그 구성원이 매우 다양했다. 서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결집된 반면, 동인은 서인에서 제외된 다수의 신진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화담 서경덕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황과 조식의 사상적 차이는 제자들 단계에 이르러 표면화되었고, 급기야 중앙 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중앙 정계에서 남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주로 퇴계 문인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다. 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우성전(禹性傳)ㆍ이경중(李敬中)ㆍ허성(許筬)ㆍ김수(金燧)ㆍ이광정(李光庭)ㆍ정경세(鄭經世)ㆍ김우옹(金宇顒)ㆍ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德馨)ㆍ윤승훈(尹承勳)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외의 다른 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시비 분별을 엄격히 하기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 서로 협조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남인 세력의 이러한 정치적 인식은 왜란으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어 시비 분별이 중시되던 분위기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2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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