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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03 (금) 08:49
분 류 사전2
ㆍ조회: 245      
[중세] 여진 (민족)
여진 女眞

만주(滿洲) 동부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주로 송화강(松花江)ㆍ목단강(牧丹江)ㆍ흑룡강(黑龍江)유역과 동만주 해안 지방에서 살았다. 여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춘추 전국 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分婁),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ㆍ당(唐)시대에는 말갈(靺鞨)로 불렸으며, 10세기 초의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했고,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 칭하였다.

여진족은 발해 멸망 이후 그 터에 거주하면서 우리 민족과 관계를 맺었다. 즉, 발해에서 벗어난 말갈족의 흑수부(黑水部)를 여진으로 불렀던 것이다. 흑수 말갈은 거란의 통치 아래 두만강 유역에서 함경남북도 지역으로 이동해 살면서 고려에 조공을 하였다. 고려는 이들을 흑수여진ㆍ동여진(東女眞) 또는 생여직(生女直)이라 했으며, 길림성(吉林省)의 서남부, 즉 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서여진(西女眞) 또는 숙여직(熟女直)이라 하였다.

고려가 이들 두 여진과 직접적으로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왕건(王建)의 북방 개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초기에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섬겼던 여진을 회유해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었으며, 추장에게는 무산계(武散階)ㆍ향직(鄕職) 등을 주기도 하였다. 이 당시 여진인들은 활ㆍ말ㆍ모피 등을 주로 조공하고, 의류ㆍ식량ㆍ농기구ㆍ그릇 등 생활 필수품을 주로 수입해갔다.

그런데 숙종 때에 이르러 만주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고 북간도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그를 이은 조카 우야소(烏雅束)는 더 남하해 고려에 복속되었던 여진을 경략하였다. 이 때 우야소는 완안부에 따르지 않은 무리들을 추격, 함경남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해 고려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임간(林幹)을 보내 우야소를 정벌하게 했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尹瓘)을 보내어 겨우 화맹을 맺고 돌아왔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정평ㆍ장성 밖의 여진은 완안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면서 기병(騎兵)의 양성과 군량의 저축 등을 건의하였다. 이에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려 부대인 항마군(降魔軍)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였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 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까지 진출해 함주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

또한, 남쪽의 민호(民戶)를 옮기어 9성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창건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9성의 방어 자체도 어려웠고, 여진족이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해 1년 만에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1115년 우야소의 후손 아구타(阿骨打)가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러 부족을 통일해 금(金)나라를 세웠다. 1117년에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였다. 1125년(인종 3) 거란을 멸망시킨 뒤에 북송(北宋)을 멸해 중원을 점령하자,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고, 남송(南宋)과의 교류도 간섭하였다. 당시 고려의 집권자인 이자겸(李資謙) 일파는 금나라와의 타협을 통한 평화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후 고려의 북방 개척 정책은 일시 좌절되었다.

1234년(고종 21)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 지방에서 부족 단위로 할거했고 원나라ㆍ명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명나라는 송화강 유역의 여진을 해서여직(海西女直), 파저강(婆猪江 : 鴨佳江)ㆍ혼강(渾江) 유역의 여진을 건주여직(建州女直), 흑룡강 유역의 여진을 야인여직(野人女直)이라 하여 독특한 군정(軍政)으로 이들을 통치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여진 정책은 회유ㆍ무력을 사용하였다. 회유 정책으로 귀순을 장려하고 관직ㆍ토지ㆍ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다. 그리고 여진의 한 부족인 오랑캐 오도리(斡都里)가 자주 침범하자, 1406년(태종 6) 함경도 경성ㆍ경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하고 조공 무역 및 국경 무역을 허락했으며, 한양에는 북평관(北平館)까지 설치하였다. 이 당시 여진은 말ㆍ모피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식량ㆍ의복 재료ㆍ농기구ㆍ종이 등을 교환해갔다.

한편, 무력 정책으로 국경 지방에 진보(鎭堡)를 설치해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태조는 경원에 성보(城堡)와 주군(州郡)과 역참(驛站)을 두었다. 1403년에는 강계부(江界府), 1414년에는 여연군(閭延郡)을 두어 여진을 통제하였다. 세종은 4군과 6진을 개척해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을 확보하고 여기에 삼남(三南)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세조 때 남이(南怡)ㆍ어유소(魚有沼) 등이 압록강변의 여진을 토벌했고(丁亥西征), 신숙주(申叔舟)는 회령 부근의 여진을 축출하고 모린위(毛燐衛)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한(庚辰北征) 뒤 하삼도(下三道) 백성 1만명을 이주시켰다. 1479년(성종 10)에는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이 서북 방면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491년에는 도원수 허종(許琮)이 회령의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했던 동북 방면의 여진 추장 우디거(兀狄哈)의 부족을 물리쳤다.

그 뒤 여진족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약해지자 이 틈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1616년(광해군 8) 건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는 심양(瀋陽)에 후금(後金)을 세웠고, 16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淸)이라 개칭,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다. 한편, 1627년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 왕조의 항복을 받기도 했으며, 조선 왕조 말기까지 조공 관계를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仁祖實錄, 高麗時代의 歸化人硏究(朴玉杰, 成均館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87), 여진관계의 시말과 윤관의 북정(金庠基, 국사상의 제문제 4, 1959).

<민병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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