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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2 (토) 13:27
분 류 사전2
ㆍ조회: 212      
[조선] 서울문묘 (브리)
서울문묘 文廟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소재한, 공자를 제사 지내는 조선 시대 성균관의 묘당(廟堂).

대성전 전경(1601 중건), 보물 제141호,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공자 외에도 우리나라와 중국의 선현들을 함께 모시고 제사 지내고 있다. 문묘를 세우고 거기에 강당을 마련하여 유생들로 하여금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학덕을 기리면서 학문을 연마하게 하는 제도는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도 존재했다.

조선 태조는 왕조의 개창과 함께 성균관의 직제를 공포했는데, 이는 고려 말기의 성균관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개편ㆍ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한양 천도 이후부터이다. 1394년(태조 3) 10월 국왕은 문묘의 조영을 명령했다. 이어 그해 12월에 문묘의 조영 공사에 관한 지침이 하달되었지만, 현존하는 것은 1397년에 그 터를 잡아 그 이듬해에 준공된 것이다.

이때 준공된 성균관의 총규모는 96칸이 되는데 이로써 창건 당시 문묘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묘우(廟宇) 즉 대성전을 중심으로 전면 좌우에 동무(東)와 서무(西)가 있고, 묘의 뒤쪽에는 명륜당과 그 좌우에 협실(夾室), 그리고 그 앞의 좌우에 장랑(長廊)이 있으며 명륜당의 동쪽에 청랑(廳廊)이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문묘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금 재건되었다. 특히 연산군 때와 임진왜란 시기에 큰 수난을 당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는 성균관을 폐쇄하여 유생과 문묘위판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을 유연소(遊宴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병란으로 인하여 문묘가 완전히 소실되는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04년(선조 37)에 거의 재건되었으며 그에 대한 보수는 매년 봄ㆍ가을에 행하여졌다.

문묘의 배치는 남문이 있고, 남문 안에 행랑과 연속되는 중문이 있으며, 중문 내정에 동무ㆍ서무가 좌우에 위치하고, 그 중앙의 뒤편에 대성전이 있다. 전후 건물군을 중심으로 사방에 외벽을 쌓아 구획하는 것이 일반적인 재건인데, 서울의 문묘도 이와 같이 성균관과 명륜당의 양랑(兩廊)으로 이루어졌고 그 정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문을 내었다. 해방 이후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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