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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8 (월)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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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761      
[고려] 고려시대의 정치 (민족)
정치(고려시대의 정치)

관련항목 : 외교,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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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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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참고문헌)

1. 고려의 성립과 문벌귀족정치의 전개

약 150년에 걸친 신라 하대는 정치적 혼란기였고, 시회적 격변기였다. 이때의 혼란과 격변은 골품제의 한계와 모순을 노정시키는 것이었다.

혈연관계를 기반으로 신라사회의 구성원리ㆍ운영원리로 기능하여 온 골품제는 더 이상 유용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왕위쟁탈전의 주인공인 진골 귀족 대신 지방 출신의 호족(豪族)이 새로이 역사의 주역으로 대두하고 있었다.

해상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부(富)를 축적하거나, 군진세력(軍鎭勢力)을 배경으로 대두하거나, 또는 촌주(村主)로서의 토착적 기반으로부터 성장한 이들 호족은 약화된 신라의 통치력을 부정하고, 실제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독립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독자적 군사력과 행정기구를 지닌 그들은 성주(城主) 또는 장군(將軍)으로 자처하였다. 이러한 많은 호족들 가운데 하나인 왕권(王建)이 고려를 건국하고 새로운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그에 앞서 9세기 말의 농민반란을 계기로 반신라적인 견훤(甄萱, 892∼935)의 후백제와 궁예(弓裔, 901∼918)의 후고구려가 세워짐으로써 후삼국 시대라는 일대내란기가 개막되었는데, 후고구려, 즉 태봉(泰封)으로부터 고려를 일으킨 왕건(918∼943)이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공벌하여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것이다(936).

왕건은 송악(松嶽) 사람으로 선대부터 해상활동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인근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전형적인 호족 출신이었다.

그는 송악과 마찬가지로 옛 고구려 땅이었던 패강진(浿江鎭)을 비롯한 근기(近畿)지역의 여러 지방 출신의 세력들을 다수 규합하였고, 생민(生民)의 구제를 외치면서 가렴주구를 금지시켰고 서경(西京)을 설치,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다.

커다란 혼란과 격변의 시기는 이처럼 새 지배세력으로서의 호족세력의 대두와 현실을 직시한 정책방향에 의하여 지양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발해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고려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북진정책이 꾸준히 추진되어 청천강 너머 압록강 하류의 동쪽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호족연합정책(豪族聯合政策)을 통하여 타협적 시책을 폈으나, 광종(949∼975) 때에 이르러 과감한 개혁정치가 이루어져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새로운 관료체계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통적 통일왕조로서의 고려가 확립되었다. 고려는 신라사회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 기반 위에 당송(唐宋)의 제도를 광범위하게 수용하여 새로운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성종(981∼997) 때까지 3성ㆍ6부와 중추원을 근간으로 하는 중앙관제가 완비되고, 과거제(科擧制)와 음서제(蔭敍制:공신이나 고관의 자녀에게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을 주는 제도)가 함께 적용되는 인재등용방식이 정착되었다.

또한, 지방의 호족들을 향리(鄕吏)로 격하 개편하고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성립에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시무책(時務策)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로부터 유교적 정치이념이 고려의 정치에 바탕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새로운 통치체제가 정비되면서, 유수한 문벌귀족이 대두하였다. 성종 때로부터 시작하여 현종(1009∼1031) 때에 이르면, 근기지역의 호족 출신인 안산 김씨(安山金氏)ㆍ인주 이씨(仁州李氏)ㆍ해주 최씨(海州崔氏)ㆍ파평 윤씨(坡平尹氏)ㆍ이천 서씨(利川徐氏)ㆍ평산 박씨(平山朴氏), 그리고 신라 왕실의 후예인 경주 김씨(慶州金氏)ㆍ강릉 김씨(江陵金氏)와 육두품 출신의 경주 최씨(慶州崔氏) 등이 유력한 귀족가문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본관(本貫)을 떠나 수도인 개경(開京)에 거주하면서 높은 관직에 올라 정치적 특권을 향유하였다. 전시과체제(田柴科體制)에 입각하여 그들에게는 과전(科田:관원에게 나누어주는 토지. 一代에 한함)과 공음전시(功蔭田柴:논공행상에 의해 토지를 지급하고 세습을 인정한 제도)가 분급되고, 따로이 녹봉(祿俸)도 지급되었다. 대체로, 귀족관리들은 과거제와 음서제를 혼용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자손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었다.

유력한 귀족가문은 서로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혼인하여 외척세력으로 대두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회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이들 문벌귀족들이었고, 새로이 정비된 관료체계와 통치체제는 귀족제의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고려는 당송의 제도를 수용하여 정연한 중앙관제를 갖추었지만, 정치의 실제에서는 합의제(合議制)가 중시되었다. 3성제의 중심을 이루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들은 회의를 통하여 정책결정을 하였고, 경우에 따라 중추원(中樞院)의 추신(樞臣)과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최고위의 귀족관리였다.

왕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최종적 결정권을 보유하지만, 실제로는 귀족관리들이 합의한 정치적 사안(事案)을 확인하고, 때로는 그것을 조정하고 종합하는 구실을 하였다.

감찰기구로서 어사대(御史臺)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고, 왕의 인사권은 대성(臺省)의 서경(署經)에 의하여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이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균형과 견제의 장치였다.

고려의 귀족정치는 문종(1046∼1083) 때를 거쳐 예종(1105∼1123) 때에 이르기까지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려가 성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 세 번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지만, 끝내 그것을 격퇴시킬 수 있었고, 또한 송과의 외교관계를 고려의 처지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대외정책면에서의 사태 진전에 영향받은 바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혼란과 격변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ㆍ사회 체제를 가다듬을 수 있었던 고려인들의 역사적 경험과 정치적 역량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고, 그 기반 위에서 고려의 귀족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2. 무신란과 무신정권

고려의 귀족정치는 문신이 주도하는 것이었고, 그 이념은 유교에 기반을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본적인 틀에 반발하는 정치적 대사건이 인종(1122∼1146)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뒤이어 발생한 묘청(妙淸)의 난이었다.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서경천도운동을 벌이다가 끝내 서경에 대위국(大爲國)을 세움으로써, 유교적 이념을 정면에서 부인하면서 개경의 귀족세력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성향까지 보이는 이 난은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토벌되었거니와, 이에 뒤이어 30여년 만에 문신 위주의 정치에 반발하는 무신란이 발생하여 고려를 정치적ㆍ사회적으로 크게 뒤흔들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의종(1146∼1170) 말년에 극적으로 발생한 무신란은 고려 귀족사회에서 무신들이 지니는 열악한 지위와 처우에 대한 누적된 불만의 폭발이었다.

고려는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 문신과 군사를 맡는 무신을 각각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으로 하여 대등한 관품(官品)의 편성을 하면서도, 무신은 정3품을 상한으로 그 이상의 진급이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유사시의 최고군사지휘권은 문신이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통념상으로 무신을 낮추어 평가하여서 고려 귀족사회는 문신 위주의 지배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일찍이 현종(1009∼1031) 때에 최질(崔質)ㆍ김훈(金訓) 등의 무신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의 장악을 꾀한 바 있었지만 곧 몰락하였으며, 문벌귀족정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이와 같은 무신의 불만은 표출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자겸의 난을 겪으면서 고려의 귀족정치가 크게 동요하였다.

특히 묘청의 난을 통하여 고려 귀족정치의 기본적 틀이 도전을 받는 사태에 이르러, 문신 중심의 지배체제와 그것을 둘러싼 모순점들은 언제든지 비판당하고 문제화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의종의 과도한 향락생활로 인하여 천대받는 호위병으로 전락된 무신들은 오랫동안 쌓인 울분을 터뜨렸으며, 이것이 바로 무신란인 것이다.

이 때 무신들의 수하에 있는 군인들도 그들의 토지를 탈점당한 데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무신란의 발생에 상당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도 주목되는 바이다.

무신란은 쿠데타의 형태로 나타나 집권중인 문신귀족들을 제거시켰을 뿐 아니라, 왕을 교체하여 새로이 명종(1170∼1197)을 즉위시키고 전왕(前王)을 시해하기에 이르렀다.

정중부(鄭仲夫)를 대표로 하는 무신들이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무단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나 격심한 권력투쟁으로 공포와 불안의 20여 년이 흘렀으며, 마침내 최충헌(崔忠獻)의 대두로 안정된 무신정권이 수립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최씨 무신정권이 고종(1213∼1259) 말엽까지 4대 60여 년 동안 계속되고, 그 뒤에도 김준(金俊)과 임연(林衍)의 집권이 10년 남짓 이어지므로, 무신집권기는 약 100년간 지속되는 셈이다. 그 동안 고려의 왕실은 유지되었지만, 무신집권자는 왕의 폐립을 자행하였으며, 따라서 왕은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무신란이 발생하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ㆍ노비의 반란이 일어나 신분해방운동으로 발전하여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고려사회는 기층으로부터 흔들리는 큰 격변을 겪거니와, 정치적으로는 무신집권기에 독특한 지배기구가 성립된다는 점이 특히 주목되는 것이다.

무신란 직후에는 고위 무신들의 합의기구로서 중방이 정치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최씨정권이 수립된 다음에는 강력한 최씨집정을 중심으로 하는 새 기구가 만들어졌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교정도감(敎定都監)과 정방(政房)인데, 전자는 무신정권의 최고 막부(幕府)와 같은 것으로 최충헌 이래의 역대 무신집정은 그 장관인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서 권력을 전단할 수 있었다.

후자는 최씨집정이 그의 사제(私第)에 설치하였던 인사행정기관인바, 이를 통하여 모든 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문신들을 회유, 포섭하여, 그들을 교대로 숙위(宿衛)하게 한 서방(書房)도 흥미있는 존재였다.

군사적으로도 사병조직(私兵組織)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당초 경대승(慶大升)이 만들었던 도방(都房)이 최씨정권에 이르러 크게 확대되어 수천 명의 병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도방의 군인들은 최씨집정에 절대적 충성을 하는 사병으로서 사사로이 경제적 급부와 시혜(施惠)를 받았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최씨집정의 광대한 농장(農莊)들이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산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무신정권의 지배체제는 국가적 제도를 형식상 존치시키면서 별도로 존립하였다. 교정도감은 법제적 기구로 만들어졌던 것 같지만, 정방은 사기관(私機關)이었고, 도방은 물론 사병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기구들은 당시 고려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데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은 독자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여 100년에 걸치는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지만, 고려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인하지 못한 채, 사실상 이중체제(二重體制)를 유지시키면서 오히려 왕조체제에 기생(寄生)하는 한계성을 지녔던 셈이다.

3. 부마국체제와 권문세족

고려의 무신정권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내 붕괴되고 말았다. 최충헌에 뒤이어 최이(崔怡)가 집권한 가운데 몽고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힘겨운 항쟁을 계속하였지만, 현실을 외면한 주전일변도(主戰一邊到)의 최씨정권은 문신과 무신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이어 무신으로 권력을 장악한 김준 및 임연도 몽고와의 화해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마침내 거세됨으로써 무신집권기는 끝나고, 고려조정의 개경환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이 전복된 다음부터 몽고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여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임연과 그 아들 유무(惟茂)는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1259∼1274)의 의지로 거세되었다.

그 결과 무신정권에 충성하던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켜 개경의 고려조정과 맞서 투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결국,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삼별초를 평정함으로써 고려의 대몽항쟁은 마무리되거니와, 이로써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 큰 변혁을 초래한 무신집권기는 대외관계의 추세와 관련하여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된 셈이다.

이로부터 고려는 원(몽고)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태자가 원 세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곧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가 충렬왕(1274∼1308)인데, 이로써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이어 원의 압력에 의하여 왕과 왕실에 대한 칭호가 격하, 개칭되고, 관제도 축소, 개편되었으며, 왕은 반드시 원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이고, 그 소생이 왕위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당시 대제국으로 발전한 원을 중심으로 하여 수립된 동아시아세계의 통일적 정치질서 안에 편입된 고려는 독립왕국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부마국체제를 갖춘 채 커다란 정치적 제약을 받고 있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부마국체제가 성립되는 큰 변혁 속에서 고려의 지배세력과 통치체제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무신란으로 문신 귀족세력이 몰락하고 무신집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가 성립되었던 것인데, 또다시 격변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이다.

새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가 부마국체제를 갖추면서 대원관계(對元關係)를 정립, 유지시키는 가운데 두드러진 구실을 한 존재들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고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역인(譯人) 출신, 원에 매를 진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응방(鷹坊)의 일에 종사하였던 사람, 환관(宦官) 출신으로 원에 가서 원왕의 신임을 받은 자, 원에 자주 입조(入朝)하는 고려왕을 수행하여 친종공신(親從功臣)이 되어 출세하는 경우, 또는 원의 일본정벌에 피동적으로 참여한 고려의 장수로서 그 무재(武才)와 공로가 인정되어 원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출세하였던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대개 미천한 상태로부터 진출한 신흥세력이었지만, 높은 관직을 받고, 음서제에 의하여 그들의 지위를 세습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지배세력으로서 자리를 굳혀갔다.

물론, 새로이 구축한 경제적기반과 원과의 결탁관계가 그들의 성장을 뒷받침하여 주었다. 이러한 사정 아래에서 고려 후기의 새 정치적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이 성립되는 것이다.

권문세족은 불법적 탈점에 의하여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을 정도의 대토지소유가 고려 후기 농장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와 같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확대가 국가재정을 궁핍하게 만들고, 사회적 모순을 증대시켰다. 또한, 권문세족은 다양한 형태로 원과 결탁하였다.

우선 원의 관직을 지니는 경우인데, 그들은 직접 원에 가서 수직(受職)하기도 하였지만,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이나 만호부(萬戶府)의 관직을 받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다른 형태로, 혼인관계를 맺는 것을 들 수 있는 바, 당초 공녀(貢女) 출신으로 원의 유력자의 아내가 된 이들이 많았는데, 뒤에는 적극적으로 딸을 원의 제실(帝室)이나 유력자에게 시집보내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원과 결탁하는 목적은 원의 위세에 힘입어 고려에서의 정치적 위치를 굳히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부마국체제 아래 지배세력으로서의 권문세족의 성향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였다.

무신정권이 붕괴된 다음, 고려의 왕권은 강화되었다. 무신집정에 짓눌렸던 왕의 권위가 회복되고, 특히 강력한 원나라의 부마로서 상당한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하는 왕권의 신장은 절대적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고, 새로이 권문세족이 대두되어 그들의 독자적인 대원결탁(對元結託)이 이루어짐에 따라 왕권은 점차 실추되어 갔다.

특히 충렬왕과 충선왕, 그리고 충숙왕과 충혜왕이 원의 조처에 따라 중조(重祚:두 번 왕위에 오름)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은 가중되었다. 이에 상응하여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통한 합좌기능을 강화시키면서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뒤에 이르러 부원배(附元輩)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그에 따라서 고려의 정치기강은 크게 흔들려 혼란상을 노정시키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원의 위세에 시달리면서 4차에 걸친 입성책동(立省策動)을 경험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고려의 국가로서의 체제를 해체시키고 원의 지방행정단위인 성(省)으로 편입시키자는 움직임이었다.

그때마다 고려는 저지운동을 벌여야 하였던바, 이제현(李齊賢) 같은 사람의 활약이 컸다. 그러한 가운데, 격심한 정치적ㆍ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운동이 시도되고는 하였으니, 충선왕의 개혁정치와 충목왕 때의 정치도감(整治都監)에 의한 개혁활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당시 모순의 소재는 부원배들의 발호에 기인하였던 것인만큼 부마국체제 아래에서의 개혁은 궁극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꾸준한 현실개선에의 움직임이 부마국체제 아래의 암담한 정치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축적을 뜻하는 것임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민현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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