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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10 (토) 17:50
분 류 사전2
ㆍ조회: 2768      
[신라] 골품제도 (두산)
골품제도 骨品制度

신라 때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진출, 혼인·의복·가옥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규제를 한 신분제도.

세습성이 강하고 신분간의 배타성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 국가 형성기 이래의 정치체제 및 사회발전 과정에서 정비되어,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장기간 존속하다가 신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이것은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여타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로 구분된다. 원래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斯盧國)의 6부(部)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村主)로 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6부체제를 특징짓는 이같은 신라 초기의 정치체제는, 지증왕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6세기 초반에 해체되었다. 520년(법흥왕 7)의 율령(律令)반포는 6부체제가 해체된 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료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온 지배층에 적용한 신분제가 골품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등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율령 반포 초기에 일반 평민을 3등분하였다가 현실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자 곧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성골과 진골 모두 왕족 출신으로 원래는 진골만 존재하였다. 그러던 것이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계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동륜의 손녀이자 진평왕(26대)의 장녀인 선덕여왕(27대)이 여자로서 왕위에 오를 때, 왕위계승의 근거를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골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29대) 김춘추는 진지왕(25대)의 손자였다. 그리고 김춘추의 아버지이자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龍樹)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생존해 있었다. 똑같이 진흥왕의 후손인 용수와 선덕 중 선덕만이 성골이었다는 점은, 용수와 구별되는 선덕여왕 계열에서 동륜을 시발점으로 하여 다른 가계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계를 신성화시킨 결과인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에서의 진종설(眞種說)과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은 이같은 성골의식이 대두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진골 아래의 6두품에서 4두품까지의 신분층 역시 경위에 진출을 할 수 있는 상급 신분층이었다. 이 가운데 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 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다소 강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得難)'으로 불릴 정도로 귀성(貴姓)이었다.

5두품과 4두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으나, 국가기관의 잡다한 실무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에 따른 신분 등급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진골의 신분이었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 등급 강등되어[族降一等]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다. 신분에 따른 관직 임명시 제기되는 하급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이 밖에도 골품제는 공복(公服)의 빛깔, 착용할 수 있는 옷감의 종류, 관(冠)의 재질, 요대(腰帶) 및 신발의 재질, 수레에 사용하는 장식품의 종류, 일상생활의 용기까지도 골품에 따라 차등 있게 구분하였다. 법흥왕대에 정비된 골품제는 삼국통일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변화하여, 문무왕 14년에는 경위와 외위의 상등관계를 정하고 양자간의 공식적인 교류를 인정하는 단일 관등체제를 형성함으로써 경주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골품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또한 통일신라시기의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신라 정치의 운영원리인 골품제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간의 왕위계승 다툼이 치열해지는 신라 하대에는 골품제가 변화된 사회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채 폐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골품제의 한계에 회의를 지닌 계층의 불만이 누적되고, 계속된 자연 재해와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 위기에 처하였다. 신라사회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골품제는 신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신라시대의 골품제가 신분제의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는 후대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신분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일반 평민이나 노비와 같은 천인에 대한 규정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모든 사회 운영이 골품제에 의해 모두 규정된 것은 아니고, 골품제는 단지 관계 진출과 같은 부문에 한정 적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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