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30 (월) 23:16
분 류 사전2
ㆍ조회: 2595      
[조선] 고종 (브리)
고종 高宗 1852(철종 3)~1919. 1. 21.

조선 제26대 왕(1863~1907 재위).

자본주의 열강이 침입하는 중에 재위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황제라 칭했고,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다. 1919년에 죽었는데 그의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집권기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성헌(誠軒)·주연(珠淵). 아버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이며, 어머니는 부대부인 민씨이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철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즉위 후 10년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섭정했다. 1865년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징수했다. 1866년 프랑스인 신부와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벌한 사건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같은 해 7월에는 대동강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인들이 불태워버렸다.

1871년 지방의 농민수탈 근거지였던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이해 4월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정권은 대내적으로 봉건적 개혁정책을, 대외적으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왕권안정 및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꾀했다.

민씨집권기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으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정권은 왕비의 척족세력이 장악했다.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양호 포격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듬해인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탈피, 대외개방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한편 안으로는 개화정책을 실시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정책을 관장케 하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런 개화정책은 1882년 구식군인과 도시빈민들의 무장봉기를 낳게 하고, 대원군의 재등장을 초래했다. 민씨정권은 청 세력을 개입시켜 봉기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했다.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의 체결과 청군의 주둔으로 청에 더욱 예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민씨정권 타도, 청과의 관계 단절, 근대 자본주의국가 수립 등을 내걸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뒤 1894년 반제반봉건을 내세운 갑오농민전쟁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친일개화파·보수유생층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에 집권 개화파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홍범14조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했지만,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채 일본에 의존한 개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1895년 삼국개입에 따른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살해하고 친일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의병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은 붕괴되었다.

대한제국기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고종은 보수세력과 일부 개화파들을 끌어들여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하에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은 각종 제도개혁,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 등을 실시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의 식민지화를 승인받았다. 또한 일본은 이해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박탈과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이에 고종은 1907년(광무 1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1910년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죽었다. 독살설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저서에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능은 홍릉(洪陵)이다.

<참고문헌>

박용화전 - 고종황제와 한말정계 : 임중빈, 일조각, 1989
고종조(1867 - 1893) 민란연구 〈용암 차문섭 교수 화갑기념사학논총〉 : 김양식, 용암차문섭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89
고종대의 삼군부 연구 〈군사〉 19 : 최병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9
고종의 해아특사 파견에 관한 소고 〈문산 김삼용 박사 화갑기념〉 : 이동우, 원광대학교, 1985
한말 고종조의 토지개혁론 〈동방학지〉 41 : 김용섭,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4
고종조의 민란연구 〈인천교육대학 논문집〉 14 : 박광성, 인천대학교, 1980
한미수호조약에서 본 미 중의 대한 정책 - 고종의 비밀외교를 중심으로 〈일본학보〉 5 : 박일근, 한국일본학회, 1977
고종조 토호의 성분과 무단양태 - 1867년 암행어사 토호별단의 분석 〈한국사론〉 2 : 곽동찬, 서울대학교 국사학회, 1975
고종시대의 선조사회 〈사회과학연구〉 2 : 홍이섭, 1975
대원군의 세원확장책의 일단 - 고종조 동포 호포제 실시와 그 후폐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 한우근, 을유문화사, 1969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윗글 [근대] 근대화 (브리)
아래글 [부석사] 계단식 석단 가람의 주인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730 사찰 [길따라 바람따라] 전남 영광 불갑사 이창호 2001-04-28 2787
729 사전2 [신라] 골품제도 (두산) 이창호 2003-05-10 2768
728 사전2 [고려] 고려시대의 정치 (민족) 이창호 2003-04-28 2761
727 사찰 [선암사] 내 마음에 남은 절 - 송영방과 선암사 이창호 2001-07-26 2756
726 사료 [고려] 조준의 전제 개혁에 대한 소 이창호 2002-06-10 2716
725 사전2 [고대] 한국사4-삼국시대 역사 개관 (브리) 이창호 2003-03-15 2622
724 사찰 [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7. 최인호, 서울 봉은사 이창호 2001-05-01 2614
723 사전2 [근대] 근대화 (브리) 이창호 2003-03-10 2608
722 사전2 [조선] 고종 (브리) 이창호 2003-06-30 2595
721 사찰 [부석사] 계단식 석단 가람의 주인 이창호 2001-07-26 2573
12345678910,,,8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