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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5 (화)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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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78      
[조선] 박세당 (브리)
박세당 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ㆍ문신.

박세당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경학에서부터 경세론에 이르기까지 반주자학적인 유학 사상을 전개하여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다.

출신 및 관직 생활

본관은 반남.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ㆍ서계초수(西溪樵)ㆍ서계(西溪). 할어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문 출신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홀어머미 밑에서 원주ㆍ안동ㆍ천안 등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0세 때 비로소 글을 배웠는데도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가를 왕래하며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업을 계속했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을 하고 성균관전적이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그뒤 예조좌랑ㆍ병조좌랑ㆍ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사간원정언ㆍ사헌부지평ㆍ병조정랑,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강관, 함경북도평마평사를 두루 지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오고, 1670년에는 잠시 통진현감을 지냈다.

만년

그는 소론 계열로서 노론계의 송시열과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시 정치상의 주요 사안이었던 대청(對淸) 문제에서 온건론자로 간주되어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로부터 '오사'(五邪) 가운데 하나라고 지탄을 받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당대의 대학자ㆍ대정치가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자 정치인으로서 그 뜻을 펴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주 석천동에 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강학과 연구에 몰두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이 다시 득세를 하자, 사실상 야인이었던 그에게 호조참판ㆍ공조판서ㆍ대사헌ㆍ예조판서ㆍ이조판서ㆍ지중추부사 등 요직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1702년(숙종 28)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 비문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노론계를 자극하여 거센 반발을 일으켜 결국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 형제를 위시한 김진옥(金鎭玉)ㆍ정호(鄭澔) 등과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 180여 명의상소로 삭탈관직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이탄(李坦)ㆍ이익명(李翼明)ㆍ이인엽(李寅燁) 등 박세당의 문인들의 소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반주자학적 경학 사상

박세당은 당시 통치 이념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독창적인 학문 세계를 전개했다.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 사상은 만년에 14년에 걸쳐 저술한 <사서사변록 四書思辨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에 대한 주자의 주해에 반기를 들고, 주자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자기 나름의 주해를 붙인 것이다.

반주자학적 경전 해석의 주요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자가 '인물일체관'(人物一體觀)을 기초로 '천인상감'(天人相感)을 믿었던 데 반하여, 그는 '물아이분관'(物我二分觀)을 기초로 의인화된 하늘과의 상감(相感)을 부인했다. 인간과 분별되고 오직 인간의 역량으로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을 말함으로써, 일종의 '물리학적인 자연관'을 공고히 했다. ② 본성(本性=天理)의 선험적 본구(本具=天命)를 믿음으로써 윤리 도덕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자와는 달리 본성의 본구를 부인하여 윤리 도덕의 가변성ㆍ선택성에 대한 각성의 길을 열어놓았다. ③주자의 현실재론적(現實在論的) 시각을 배격하고 '주기적(主氣的) 경험주의' 철학을 견지했다. ④ 도심(道心) 못지 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다.

이는 백성들의 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서주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반주자학적 경전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은 당시 노론 계열로부터 "위로는 주자를 모멸하고 아래로는 송시열을 욕되게 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 사상은 정약용(丁若鏞)에게 이어져 다산경학(茶山經學)의 연원적인 역할을 했다.

노장 사상

그의 반주자학적인 사상은 노장 사상(老莊思想)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노장이 말한 '수신'과 '치인'이 유학에서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언설의 간결함과 의미의 심오함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끌어내고자 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노장의 용어를 유학의 용어로 대치하여 설명하는가 하면 사상의 내용까지 유학의 의미로 해석했다.

예컨대 노자의 '도'를 '무'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또 '이'(理) 즉 '태극'(太極)으로 설명하는 해석이라든지, '자연'이 '본성(천성)대로 하되 지나침이 없는 의미'라는 <중용>식의 해석 등이 그것이다. 그는 노장사상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해 문(文)보다 질(質)을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노장사상의 성격에 호감을 갖고 그것을 유학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히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석에 집약되어 있는데, <도덕경>의 근본 정신이 치자의 지배 욕구 포기에 있다고 보고, '무위' 또는 장자의 '무위자연'이란 치자가 사사로운 지배 욕구에 얽매이지 않고 무욕의 정치, 곧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개혁 사상

이러한 실제성 추구의 경학 사상은 경세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일종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문제 의식은 정치ㆍ경제ㆍ국방의 문제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은 무위도식하면서 당쟁에만 매달려 있는 지배 세력인 양반들에게 일반 백성이 수탈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왕이나 대신들이 먼저 성실하고 근검해야 백성들이 살기 좋다는 전제하에서 횡렴(橫斂)의 방지와 조세의 균등화, 병제의 일원화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항시 '허문'(虛文)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효를 거두는 '무실'(務實)의 정책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현실 개혁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농서 편찬이었다. 그는 조선 전기와는 다른 새로운 농서의 편찬이 요구되던 17세기의 상황에서 한전 농업(旱田農業) 중심의 농서 <색경 穡經>을 편찬했다.

이 책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과 여타의 농서를 토대로 저술한 것인데,구체적인 작물의 재배 기술 면에서뿐만 아니라 농업ㆍ농학을 보는 안목에 관해서 새로운 문제 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농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농학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으로 대표되는 주자학적인 사유 체계와 지주제 중심의 농업ㆍ농학을 벗어나 소농층이 위주가 되는 농업ㆍ농학을 수렴하고자 했다.

한편 대외 정책에서도 당시 주자학자들이 주장하던 숭명배청론(崇明排淸論)과 대립하는 입장에서 중국 대륙의 세력 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역사 속의 예로서 현실주의적인 외교 정책으로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 망하지 않은 것과, 고려말 원ㆍ명 교체기에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한 것을 들어 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당시 숭명배청론자들이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호란 왕조가 바뀌면 으레 변하게 마련이므로 청나라의 연호인 '강희'(康熙)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학통의 계승과 저서

박세당은 노론에 사문난적으로 낙인 찍히면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던 윤증(尹拯)ㆍ박세채(朴世采)ㆍ남인성ㆍ남구만ㆍ최석정(崔錫鼎) 등 소론 계열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올린 그의 학문적 업적은 조선 후기의 혁신적인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제자들로는 이익명ㆍ이인엽ㆍ이탄ㆍ이덕수(李德壽)ㆍ조태억(趙泰億) 등이 있으며, 소론의 거두인 박태보(朴泰輔)가 그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ㆍ<사변록>ㆍ<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ㆍ<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ㆍ<색경> 등이 전한다.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박세당의 생애와 학문 <국사관논총> 34 : 윤희면, 국사편찬위원회, 1992
17세기말 18세기 중엽의 신농서편찬과 소농입장의 농학사상 <조선후기농학사연구> : 김용섭, 일조각, 1988
실학의 철학적 방법론-유반계와 박서계, 이성호를 중심으로 <동방학지> 35 : 유인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3
서계 박세당의 시경론-조선후기시경론의 전개에 있어 '시경사변록'의 위치 <한국학보> 20 : 김흥규, 일지사, 1980
서계 박세당의 정치사상 <동방학지> 19 : 김만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8
박세당의 격물치지설 <실학논총-이을호 박사 정년기념> : 배종호,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75
박세당의 실학사상에 관한연구 <아세아연구> 46 : 윤사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2
박서계와 반주자학적 사상 <대동문화연구> 3 : 이병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60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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