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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31 (수) 18:46
분 류 사전2
ㆍ조회: 2539      
[불교] 불교-불교의 역사 (브리)
불교-불교의 역사

세부항목

불교-불교의 기원
불교-불교의 역사
불교-아시아의 불교

부파불교

결집(結集)과 근본분열

석존의 생존시에 승가 내에 교리나 수행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승가의 화합은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높은 인격과 카리스마로 인해 승가의 절대적 귀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스로를 교단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러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종형제였던 데바닷타가 자신을 교단의 우두머리로 세워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석존은 사후 승가의 화합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 석존의 마지막 날들의 행적에 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석존은 사후 자신이 가르쳐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부촉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석존의 입적 후 그의 교설에 관한 상이한 이해와 전승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승가는 곧 석존의 교설내용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으며, 이를 위해 승가의 대표자들이 모여 이른바 결집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결집이란 석존의 가르침을 모인 사람들이 합송(合誦 sagt)하여 확인하는 행위로서 제1차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阿羅漢:수행을 완성한 자)들이 모여 가섭의 주재로 열렸다고 한다.

이때 석존의 교법은 그를 항시 가까이 모시고 있던 아난다에 의해 암송되었으며 율은 계율에 정통한 우파리에 의해 송출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들에 의해 송출된 법과 율이 지금의 팔리어 장경이나 한역 대장경에 들어 있는 형태의 경과 율의 내용을 완전히 갖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다만 그 근본적인 사상만이 간단한 단문이나 게송(偈頌) 형태로 읊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경과 율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내용이 확장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경ㆍ율ㆍ논(論)을 일컬어 삼장(三藏)이라 부르지만 그 가운데 논장을 구성하는 논서들은 경이나 율보다 훨씬 후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집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석존의 가르침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해석을 둘러싸고도 이론(異論)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불교가 지역적으로 중인도를 중심으로 해서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되고 비구승의 수도 많아지게 됨에 따라 계율의 실천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팔리어 율장에 의하면 석존의 입적 후 100경에 야사(Yaa)라는 비구가 당시 상업적으로 번창하고 있던 도시 바이샬리에 갔다가 그 지방 비구들이 신자들로부터 금ㆍ은 등을 보시받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오히려 그들로부터 빈축을 사게 되자 그 지방 서쪽 지역에 있는 비구들에게 도움을 청한 결과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계율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비구들은 바이샬리 비구들이 행한 10개 사항(十事)을 심의하여 불법임을 판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율장이 전하는 바이나 실론의 사서 〈도사 (島史) Dpavasa〉에 의하면 그 회의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수많은 비구들이 따로 모여 대중부(大衆部)라는 파를 형성함으로써 승가는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그후 다시 양파로부터 일어난 분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근본분열이라 부른다. 바이샬리 비구회의는 십사의 심의가 목적이었지만 〈도사〉에 의하면 레바타(Revata)를 수좌로 한 700명의 장로들에 의해 다시 한번 석존의 계율에 대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2차 결집이라 부른다. 실론의 전승에 의하면, 아소카 왕 때 제3차 결집이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부파불교의 전개와 사상

실론의 〈도사〉에서는 근본분열이 있은 후 100년 동안 지말분열(支末分裂)이 일어나 대중부ㆍ상좌부로부터 18부파가 생겨 도합 20부파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모두 아소카 왕의 통치 이전이라고 하나 아소카 왕이 선교사들을 인도 각지에 파견한 일이나 당시 승가 내에 분쟁이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들로 보아 아소카 왕 때까지만 해도 승가는 비교적 단합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말분열은 아소카 왕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의 즉위(BC 270경) 전부터 이미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으나 왕의 지원 아래 더욱더 번창하게 되었다. 승가의 지말분열은 이와 같은 불교의 양적 팽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소카 왕은 즉위 8년이 지나 인도 동쪽의 칼링가라는 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참한 고통을 주게 된 것을 뉘우치고 독실한 불교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폭력에 의한 정복 대신 법에 의한 정복(dhammavijay)을 정치이념으로 추구했으며, 인도는 물론 실론ㆍ시리아ㆍ이집트ㆍ마케도니아 등의 국왕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불법을 전파했다.

그는 암벽이나 석주에 자신의 정책과 불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담은 칙령을 새겨서 당시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전하게 했다. 그는 불교 이외의 교단들도 지원했지만 특히 불교 승가에 많은 물질적 지원을 했으며, 석존의 유적지들을 참배하고 수많은 불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아소카 왕의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얼마 가지 않아 멸망했지만 불교의 역사를 통해 그는 불법에 의한 선정을 베푼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되어왔다.

근본분열 이후 18개의 지말분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정확히 알기는 매우 어려우나, 아소카 왕의 불교에 대한 지원 이후 승가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지역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석존의 교설 자체에 후세 사람들의 오해와 논란을 일으킬 만한 점들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원에 거주하는 수도승들 가운데는 불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석존이 설한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태도가 등장했으며 석존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갖가지 철학적 입장이 정립되게 되었다.

각 부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논서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논서들은 결국 논장(論藏)을 형성하게 되었다. 논을 뜻하는 '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말은 '다르마', 즉 석존의 교설을 분류ㆍ분석하는 연구를 뜻하는 말로서 논의 원초적 형태는 이미 경들 속에서 발견되고 있었으나 부파불교의 전개와 더불어 본격적인 논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석존의 교설 가운데 부파간의 철학적 견해 차이를 보이게 한 문제들은 주로 무아설(無我說)과 업보에 관한 문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법(dharma)의 수와 종류 및 본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불타관이었다.

석존은 인간존재 및 경험세계를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는 제요소들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러한 제요소들 자체가 인간존재이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따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부파불교는 인간을 이렇게 분석적으로 보는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12처(處), 18계(界), 72법(法) 등 다양한 법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법이란 석존의 교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및 경험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 법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이론을 전개한 부파는 상좌부로부터 분리되어나온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간단히 有部라고 함)였다.

유부는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무상한 유위법(有爲法) 72법을 들고 있으며, 열반 등 조건에 따라 생기지 않는 영원한 법인 무위법(無爲法) 3법을 들고 있다. 유부에 의하면, 모든 법은 고유의 자상(自相)과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으며 과거ㆍ현재ㆍ미래 3세를 통하여 실체로서 항존한다고 한다(三世實有法體恒有).

제법의 작용은 현재세에 찰나적으로 생멸하지만 법의 본체는 3세에 걸쳐 항존한다는 이론으로서 모든 유위법의 무상함을 가르치는 석존의 설을 계승하면서도 우리가 범하는 업의 실재성을 어떤 형태로든 인정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야만 이미 지은 업이 초래하는 과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에 전개된 대승불교는 유부의 이와 같은 철학적 입장을 아공법유(我空法有), 즉 인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인간을 구성하는 법들은 실재한다는 이론으로 규정한다. 그런가 하면 논서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직 경에만 의지할 것을 주장하는 경량부(經量部)에서는 모든 법은 찰나에 생멸하는 것으로서 오직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법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모든 유위법의 무상성을 강조했다.

한편 석존의 무아설은 윤회와 업보의 사상과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을 낳게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만약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모두 순간적이고 무상한 법들뿐이며 어떠한 항구한 것도 없다면 내가 지은 업은 어디에 존재하며 누구에 의해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무상한 제법을 하나로 묶어주며 인격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유부에서는 인간의 생명력의 중심인 명근(命根 jva)이라는 것을 실체로서 인정했으며 상좌부에서는 표면심과 구별되는 무의식적 잠재심으로서 유분심(有分心 bhavaga-citta) 혹은 유분식(有分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경량부는 종자(種子 bja)의 개념을 도입하여 심의 연속성을 설명하려 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과거 경험은 종자와 같은 잠재적 형태로 마음에 보존되어 있다가 이 종자들의 상속(相續)ㆍ전변(轉變)ㆍ차별(差別)에 의해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자들을 보존하고 있는 표현심의 배후에 지속적으로 미세한 인식작용을 하고 있는 일미온(一味蘊)이라는 것이 담겨져 있다고 하며 이러한 세의식(細意識)으로써 경량부는 행위주체의 연속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경량부의 이같은 이론은 대승불교의 유식(唯識) 사상에 의해 계승ㆍ발전되었다.

그런가 하면 독자부(犢子部)와 정량부(正量部)는 푸드갈라(Pudgala)라는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 즉 오온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어떤 인아(人我)가 있어서 업보를 받는 주체가 되며 해탈하여 열반에 드는 주체가 된다고 한다. 또한 유부 등 여러 부파들은 중유(中有:또는 中陰)라 하여 사후에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어떤 중간적 존재를 인정하기도 했다.

건달바(乾闥婆)라 불리기도 하는 이 중유는 미세한 형태의 오온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리 상좌부는 그러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밖에도 대중부는 근본식(根本識), 화지부(化地部)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는 개념으로써 인간의 지속적 주체를 인정했다. 이 모든 개념들은 석존의 엄격한 무상ㆍ무아 사상의 철학적 수정이라고 볼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불법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불타관에 있어서도 새로운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석존의 사후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역사적 존재로서의 그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흐려지고 신자들 가운데는 그를 이상화시켜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석존은 외모에 있어서 위대한 인간(mahpurua)이 갖추어야 하는 32상(相), 80종호(種好)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10력(十力), 4무소외(四無所畏)와 같은 초월적 힘들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석존이 현세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은 결코 한 생애의 짧은 수행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전생에 수많은 삶을 거치면서 보살(菩薩)로서 한량 없는 공덕을 쌓았다는 생각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석존의 전생담(前生譚 Jtaka)들이 만들어졌다.

대중부에서는 석존을 전적으로 신격화하여 그를 완전히 초세간적(超世間的)인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일체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우며, 그의 몸과 위력과 수명은 한이 없으며, 그의 말은 모두 설법이고 한 찰나의 마음에 일체법을 안다. 지상에 나타난 그의 몸은 변화신(變化身)일 뿐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이전 보살이었을 때에도 청정한 몸으로 모태에 들어갔으며 모든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원하는 대로 악취(惡趣:낮은 형태의 존재)에 태어날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 세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대중부는 다른 한편으로 중생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나 번뇌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뿐이라는 심본청정설(心本淸淨說)을 주장했다. 대중부의 관념들은 대승불교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부파불교시대에는 불교의 우주관도 체계화되었다.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세계는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3계로 구성되어 있다. 욕계는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머무는 세계로서 33천(天)들이 머무는 6욕천(六欲天)도 포함되어 있다.

색계는 욕계를 벗어난 신들이 머무는 곳이며 선정(禪定 dhyna)을 닦은 사람이 깨달음 없이 죽는 경우 태어나는 곳이다. 신체는 존재하지만 육체적 욕망은 없는 세계다. 무색계는 신체나 장소가 없는 정신적 세계로서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 ㆍ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想處)의 4처가 있다.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有情 또는 衆生)는 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각기 지은 업에 따라 5가지 존재형태(五趣 gati), 즉 지옥ㆍ 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天)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다고 하며 여기에 아수라(阿修羅 asura)를 더하여 6취(六趣)를 말하는 학파도 있다.

한편 인간이 생사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도 체계화되어 이른바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로 정리되었다. 과거세의 무명(無明)ㆍ행(行)을 인(因)으로 하여 현재세의 과(果)인 식(識)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가 생기고 현재세의 애(愛)ㆍ취(取)ㆍ유(有)가 인(因)이 되어 미래세의 생(生)ㆍ노사(老死)가 과(果)로서 생기게 된다. 이것을 유부와 팔리 상좌부는 3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因果)라 부른다.

삼장(三藏)의 구성

부파불교 논서들의 형성과 더불어 불교 경전은 경ㆍ율ㆍ논 등, 삼장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석존의 교설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수되다가 1세기경에 실론에서 처음으로 문자화되었다. 현존하는 삼장 가운데 석존의 교설을 가장 충실히 보존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팔리어로 전수된 상좌부의 삼장이다 (→ 색인:팔리 삼장).

팔리어 경장은 경의 길이, 주제의 수에 따라 5부(nikya)로 나누어져 있다. 즉 장부(長部 Dghanikya) 34경, 중부(中部 Majjhima-nikya) 152경, 상응부(相應部 Sayutta-nikya) 2,872경, 증지부(增支部 Aguttara-nikya) 2,198경, 소부(小部 Khuddaka-nikya)의 5부 경전들이다. 소부는 유명한 〈법구경 法句經〉ㆍ〈수타니파타 Suttanipta〉, 석존의 전생의 행적을 담은 〈본생경 本生經 Jtaka〉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율장은 계경(戒經 Pimokkha-sutta), 즉 비구 221계를 해석하는 경분별(經分別), 승가 운영의 규칙(磨)을 다루고 있는 건도부(浦部), 부록과 같은 부수(附隨)로 구성되어 있다. 상좌부의 논장은 〈법집론 法集論〉ㆍ 〈분별론 分別論〉ㆍ 〈논사 論事〉ㆍ 〈인시설론 人施說論〉ㆍ 〈계설론 界說論〉ㆍ 〈쌍대론 雙對論〉ㆍ 〈발취론 發趣論〉의 7논서로 되어 있다.

상좌부에서는 이상의 삼장에 대하여 팔리어 주석서가 씌어졌으며 특히 5세기에 인도로부터 실론에 온 붓다고사(Buddhaghosa佛音)의 주석서가 권위적이다. 상좌부 외에 유부 등 타 부파들도 각기 삼장을 전수한 것으로 생각되나 상좌부 삼장처럼 완벽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한역, 혹은 티베트어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한역 대장경 가운데 상좌부의 5부 경장에 해당되는 것이 아함경(阿含經)으로서 여러 부파에서 전수되던 것이 한역된 것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法藏部 전승, 413 한역)ㆍ중아함경(中阿含經:有部 전승, 398 한역)ㆍ잡아함경(雜阿含經:有部 전승, 443 한역)ㆍ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부파는 불명, 384 한역), 그리고 소부(小部)에 해당하는 〈법구경〉ㆍ〈본생경〉 등의 한역이 현존한다.

한편 한역 율장으로서는 유부의 사분율(四分律) 등 5종의 한역 율장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논장은 상좌부 외에 7논서로 된 유부의 것이 한역으로 거의 완벽하게 전해지고 있다. 7논서는 〈발지론 發智論〉ㆍ〈품유족론 品類足論〉ㆍ〈식신족론 識身足論〉ㆍ〈법온족론 法蘊足論〉ㆍ〈시설론 施說論〉이다. 상좌부와 유부 외에 다른 부파들도 논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극히 부분적인 한역 외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대두

대승불교(大乘佛敎 Mahyna)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승불교가 발생한 시대와 지역, 대승불교와 소승 부파불교와의 관계, 대승불교의 교단적 성격 등과 기본적인 문제들이 아직도 학자들의 연구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세기 후반에 쿠샤나국으로부터 후한(後漢)에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은 대승경전 중에서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ㆍ〈수능엄경 首楞嚴經〉ㆍ〈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ㆍ〈보적경 寶積經〉 등을 번역했다. 이로 보아 그당시 쿠샤나국에는 대승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경전들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대승불교의 발생은 적어도 1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날라다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대승불교의 운동을 전개한 자들은 종래의 불교를 '소승', 즉 '작은 수레'라 불러 그것이 출가승만을 위주로 한 편협한 불교임을 비난했다. 대승불교도들은 왕이나 부호의 지원 아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출가승들의 안일한 삶과, 신도들의 물질적 공양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들만의 정신적 평안만을 구하는 소극적ㆍ현세도피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할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대중적 불교를 제창했다.

더욱이 사원의 안정된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발달된 교학적(敎學的) 불교는 번거로운 이론적 논의를 일삼아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필요와 욕구로부터 점점 더 유리하게 되었다. 대승불교운동은 이러한 교단적 상황에 대한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각성에서 일어났다.

대승불교도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나섰다.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보살(菩薩)의 개념이다.

보살의 길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 bodhisattva)의 약어이며, 보리살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로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有情), 혹은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자'라는 뜻이다.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새로운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대승은 소승의 이상인 아라한을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이기적인 존재로 배척한다.

보살은 자신의 구원에 앞서 남부터 구원한다는 자비의 원(願)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보살도는 재가자나 출가자를 막론하고 보리심을 발하고 자비의 원을 세운 자는 누구든지 다 실천할 수 있는 길이었다.

소승불교에서는 최고의 아라한 과(果)를 얻으려면 재가생활을 버리고 출가자로서 수도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보살은 원래 대승경전에 자주 나오는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 같은 재가자들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출가한 보살도 생겼으나 출가보살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250의 구족계를 받아 승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활동무대는 재가신도들이 많이 찾아오는 석존의 유골이나 유품을 봉안한 불탑이었다. 그들은 계(戒)는 지켰으나 승단생활을 지배하는 독자적인 율(律)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승불교에서는 보살이란 무엇보다도 석가모니 부처의 성불 이전의 존재를 의미했으며 그의 전생의 행적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소승경전의 〈본생경〉은 바로 이러한 석가 보살의 전생에서의 수많은 이타적인 행위와 업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보살이란 어디까지나 석가모니 부처와 같이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불이든 보살이든 다 범부 불교도들은 바로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름아닌 석가모니 부처가 이룩했던 것과 같은 성불 그 자체였다. 아마도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담이나 전기 등에는 대승의 재가신자들이 추구하던 삶의 이상이 이미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승의 보살들이 닦아야 하는 수행방법도 자연히 소승과는 달라서 팔정도 대신 6바라밀(六波羅蜜), 즉 6개의 '완성'을 닦는다. 즉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반야(般若)이다. 6바라밀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보시의 개념이다.

보시란 소승불교에서는 주로 재가자들이 출가승들에게 행하는 물질적 공양을 의미했으나 대승불교는 그것을 보살들 자신이 실천해야 할 첫번째 항목으로 삼은 것이다. 다음에 유의할 것은 반야바라밀로서 대승에서 반야란 주로 제법의 '공', 즉 무실체성(無實體性)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러한 지혜를 바탕으로 해야만 남은 다섯 바라밀도 올바르게 닦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일찍부터 반야바라밀을 주제로 한 많은 경들을 산출한 것이다.

불보살 신앙

대승불교의 또하나의 특징은 보살에 대한 신앙이다. 대승불교에 의하면 보살은 수없이 많이 있으며 이 세상뿐만 아니라 시방(十方) 세계의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을 구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돕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해탈이란 어디까지나 개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지 다른 것의 힘을 빌린 신앙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을 믿기 때문에 엄격한 정신적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신앙적 불교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ㆍ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ㆍ문수보살(文殊菩薩)ㆍ보현보살(普賢菩薩) 등은 이러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대표적인 보살들이다.

대승불교는 불타관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보살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었듯이 부처의 개념도 일반화되어 시방 삼세에 수없이 많은 부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라 하면 무엇보다도 역사상의 석가모니 부처를 의미했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과거 7불 혹은 25불, 또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의 관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승에서처럼 불의 개념이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승에서 과거의 부처들은 모두 열반에 들어가 생사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 존재로 이해되는 반면에, 대승에서의 제불은 우주의 각방에서 보살과 함께 정토(淨土)를 이루며 거기서 활동하고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대승불교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불타관의 변화를 밑받침하기 위하여 부처의 3신설(三身說)을 전개했다. 즉 부처에게는 3가지 몸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첫째, 화신(化身) 혹은 응신(應身)으로서 중생의 교화를 위해 지상에 나타난 역사적인 부처를 의미한다. 둘째, 보신(報身)으로서 보살이 원을 발한 후 오랜 수행을 하여 그 결과로써 얻은 초자연적인 몸을 말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가장 좋은 예이다. 셋째, 법신(法身)으로서 모든 형태를 초월하여 모든 불의 근거가 되는 진여(眞如)의 깨달음 그 자체를 뜻한다.

제불과 보살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자연히 신자들 가운데는 그들을 형상화하여 숭배하려는 열망도 생기게 되어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제작되었다. 특별히 중인도의 마투라라는 곳과 서북인도의 간다라 지방은 이러한 불상제작의 중심지였다. 간다라 지방의 불상은 그리스의 신상에서 발견되는 우아함을 갖추고 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로부터 그 지방에 성행하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재가신자들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여 불보살의 숭배 이외에도 석존의 유골이나 유품을 봉안한 불탑의 참배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대승경권(大乘經卷)의 숭배도 행했다. 즉 보통의 재가신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진리를 담은 경권을 탑 안에 안치하고 숭배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권의 수지(受持)ㆍ독송(讀誦)ㆍ서사(書寫)의 행위도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은 공덕을 지닌 것으로 권장되었다. 대승불교는 또한 이상과 같은 각종 신앙적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공덕을 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넘겨준다는 소위 회향(廻向)의 실행도 강조했다.

이것은 물론 업의 법칙에 대한 엄격한 개인주의적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정신의 표현이다. 실로 대승불교는 종래의 불교에 비하면 훨씬 더 종교적으로 다채롭고 풍부하며, 대승의 종교세계는 소승불교처럼 외롭지 않은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대승경전들

① 〈무량수경 (無量壽經) Sukhvatvyha-stra〉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은 대승의 불보살 신앙 및 정토왕생(淨土往生) 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수많은 대승불교 신자들의 귀의처가 되어 왔다. '무량수'라는 말은 'Amityus'를 번역한 말로 '무한한 수명'이란 뜻이고, 〈대무량수경〉의 산스크리트 'Sukhvatvyha'라는 말은 '극락의 장엄'이라는 뜻이다.

〈무량수경〉의 내용은 법장(法藏 Dharmkara)이라는 보살이 중생을 위해 48개의 서원(誓願)을 세운 뒤 오랜 기간의 수행을 거쳐 성불하여 서방에 있는 극락세계(sukhvat)의 정토를 이루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8개의 서원으로서 이들은 장차 법장보살이 성취하고자 하는 정토의 모습과 중생들이 거기에 태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제18원은 중생이 지극한 신심으로 왕생을 원하여 10념(十念)만 발하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정토신앙은 보살의 자비와 공덕에 힘입어 이 혼탁한 세상에서 맞닥치는 고통ㆍ죄ㆍ유혹이 없는 안락한 곳에 왕생하여 거기서 성불하고자 하는 대승불교도들의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②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Prajñpramit) 계통의 경전들

반야 계통의 경에는 송(頌:32음절)의 수에 따라 길고 짧은 여러 개의 경들이 있다. 그중 제일 먼저 성립되었다고 간주되는 것은 〈팔천송반야 八千頌般若 Aashasrik〉(小品般若라고도 함)이며 이것이 확대되어 2만 5,000송의 〈대품반야경 大品般若經〉이 성립되었다.

그외 1만 8,000송, 10만 송으로 된 것도 있고 짧은 것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다경 Vajracchedikprajñpramit-stra〉ㆍ〈반야심경 Prajñpramithdaya-stra〉이 유명하다. 반야계통 경전의 주요사상은 공사상으로서 제법은 자성 없이 공하며 이것이 제법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승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에서 법을 실체시하는 경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대승불교 사상의 근본을 이룬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는 것이 반야(prajñ), 즉 지혜이며, 이러한 지혜에 입각하여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한다. 제법이 공하고 모든 현상적 차별들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으면 부처와 중생,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 세간과 출세간, 열반과 생사의 차별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부처의 설법도 설법이 아니라는 것을 반야경전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③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 Vimalakrtinirdea-stra〉(간단히 '유마경'이라고도 함)

위와 같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유마경〉은 세속사회에의 적극적인 참여와 재가불교의 이상을 가르친다. 이 경의 주인공은 유마힐(Vimalakrti:'유마'라고도 함)이라는 거사로서 그는 지혜에 있어서 석존의 10대 제자들보다도 훨씬 뛰어나 그들을 무색하게 하며, 어디서나 자유자재로운 거침없는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실재는 모든 대립을 초월한 불이(不二 advayatva)의 절대 평등한 경지로서 불가사의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④ 〈법화경 (法華經) Saddharmapuarka-stra〉

〈유마경〉이 아직도 대승의 이상을 소승에 대립시켜 논하고 있는 반면에, 〈법화경〉은 이러한 대립적 견해를 초월하여 불타의 여러 교설들은 결국 모두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성문(聲聞 rvaka), 연각(緣覺 Pratyekabuddha)ㆍ보살의 삼승(三乘)은 결국 일불승(一佛乘)에 귀결된다는 대승불교의 포용적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 일불승에 의하여 모든 중생은 성불하는 것이다. 불타관에 있어서도 〈법화경〉은 부처가 출생하여 출가하고 성불한 후 입적한 것은 단지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실은 부처의 수명은 불가수량(不可數量)이며 그의 성도는 무량겁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법화경〉은 이상과 같은 진리들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으며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경전이다. 불탑신앙과 경권신앙도 이 경에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⑤ 화엄 계통의 경전

〈화엄경 華嚴經〉에는 한역으로 40권본, 60권본, 80권본의 3종이 있으나 중국에서는 5세기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Buddhabhadra)에 의해 번역된 60권본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Mahvaipulya-buddha-avatasaka-stra〉이 가장 널리 사용되어왔다.

〈화엄경〉은 매우 방대한 문헌으로서 본래는 독립적으로 유통되던 여러 경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화엄경〉은 주요내용으로서 〈십지품 十地品〉에서 불의 정각에 도달하기 위해 10바라밀(十波羅蜜)을 닦아가는 보살의 수행을 10단계(十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음에 〈입법계품〉에서는 보살의 수행과 정을 선재(善財 Sudhana)동자의 구도기로서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 법계'란 보살이 여래가 되기 위해 깨달아가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선재동자는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찾아다니며 설법을 듣고 마지막으로 미륵불(彌勒佛)을 만나서 법계를 증득(證得)한다.

⑥ 〈승만경 勝經〉

이 경의 주인공은 승만 부인으로서 〈유마경〉과 같이 재가불교의 대표적 경전으로서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담고 있다. 〈승만경〉은 법신(法身)이 번뇌에 감싸여 있을 때를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고 한다. 여래장은 고(苦)를 싫어하는 열반을 구하는 보리심으로서 중생의 본래의 마음을 가리킨다.

⑦ 〈열반경 涅槃經〉

이 경의 주제는 석존이 입적할 즈음에 이르러 열반에 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방편에 불과하며 사실 여래는 상주불변하는 법신이며 열반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4바라밀(四波羅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사상을 〈열반경〉은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열반을 상ㆍ낙ㆍ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승불교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아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무아설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분명히 석존 본래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사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경〉은 대승의 법신사상과 불성론적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대담하게 열반을 '아'로 규정하고 있다.

중관(中觀) 사상과 유식(唯識) 사상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소승불교의 번잡한 교리의 연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고 이에 반발하여 대중적인 종교운동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승불교도 자연히 철학적으로 자신을 정립하고 옹호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소승불교와 같이 많은 논(論)들을 쓰게 된 것이다. 대승의 논서들 중에서 제일 일찍 씌어진 것은 대승 최고의 논사로 추앙되어 오는 용수(龍樹 Ngrjuna)의 것들이다. 용수는 2~3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며 남인도 출신으로 불교의 여러 사상뿐만 아니라 외도(外道) 사상에도 조예가 있었다. 저서에서 그는 대승의 공사상에 입각하여 이에 어긋난 여러 실재론적 견해들을 논파하고 있다.

용수사상의 핵심은 그의 〈중론송 (中論頌) Mlamdhymika-krik〉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중론송〉의 '중'은 유와 무의 양극을 피하는 석존의 기본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法)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다.

그러나 공은 결코 무가 아니며, 다만 자성이 없이 조건적으로 생기(生起)하는 현상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공이란 비유(非有)ㆍ비무(非無)이며 중도인 것이다. 공은 연기(緣起)라는 제법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일단 제법의 실상이 공임을 알면, 그 법들이 아무 것도 아닌 무가 아니라 공한 그대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것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며 용수는 이것을 가명(假名)이라 부른다.

용수에 의하면 사람들이 세계의 실제 모습인 공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ㆍ개념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사물들이 독립되고 고정된 본질을 갖고 실재하는 것처럼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은 일체의 개념들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용수는 일상적 언어나 관념의 타당성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다. 용수에 의하면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높고 낮은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이 2가지 관점에 따라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2제(二諦)가 성립된다고 한다.

진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야(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서 언어를 초월한 공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속제란 세상 사람들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는 세계로서 진리가 가리워진 모습을 말한다. 용수는 이러한 일상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공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언어의 사용과 철학적 사유는 속제의 단계에서, 가명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제를 떠나서는 진제를 깨달을 수 없다고 용수는 말한다. 석존의 모든 교설들은 주로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공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누구든지 진제를 깨닫기 이전까지는 속제의 방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중관철학과 대승불교의 양대 철학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유식사상이다. 유식사상은 중관철학의 진리에 대한 부정적 접근에 만족하지 않고 공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발전시켰다. 우리가 자성 없이 공한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보는 것은 결국 우리의 그릇된 인식(識)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유식철학은 우리의 인식활동을 떠난 사물의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식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인식활동만 존재한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 vijñapti-mtrat)의 철학이다. 유식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 식의 구조와 작용으로써 생사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이다.

유식철학은 〈해심밀경 解深密經 Sadhinirmocana-stra〉과 같은 유식경전에 근거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논서로 전개된 것은 4세기의 미륵(彌勒 Maitreyantha), 무착(無着 Asaga)과 그의 동생 세친(世親 Vasubandhu)에 의해서였다. 이들에 의해 수립된 철학은 요가의 실천을 통해 유식의 진리를 추구한다 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 혹은 유식학파라고 부른다.

세친은 〈유식이십론 唯識二十論〉에서 우리의 인식 활동을 꿈에 비유하면서 인식대상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인식은 식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논한다. 〈유식삼십송 唯識三十頌〉에서는 식의 전변(轉變)에 의해서 자아와 제법(諸法)의 실재성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식의 전변이란 식을 주관(見分 혹은 能取)과 객관(相分 혹은 所取)으로 구별하면서 8가지 모습(八識)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심층식으로 여기서 우리가 지은 업의 자취가 종자와 같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발현하여 자아의식의 제7식 말라식(末那識)과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意)의 6식으로써 지각되는 경험세계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세계는 식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식의 상분(相分)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분을 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부의 인식상태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작용 그 자체도 항상 생성소멸하는 의타적 존재로서 이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부르며, 이렇게 식의 본성을 깨닫고 나면 외계 사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데 이것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부른다. 이른바 유식의 삼성설(三性說)이다.

인도 불교의 쇠퇴와 밀교

인도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 이후 500여 년 만에 다시 통일 왕조를 건설한 굽타 왕조(320~500경)에 들어오면서부터 힌두교의 부흥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굽타 왕조는 불교의 융성에 자극받아 대중적 신앙으로 기반을 넓히고 등장한 힌두교를 국교로 삼아 신전을 건설하는 등 힌두교를 널리 지원했다.

굽타 왕조의 안정된 정치체제 밑에 문학과 예술이 발달했으며 학문도 번창했다. 굽타 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지만 불교는 점차 힌두교의 세력에 밀리면서 힌두교적 요소를 섭취하거나 동화되기 시작했다. 7세기에 인도를 방문한 당(唐)나라의 현장(玄奘) 법사에 의하면 불교는 이미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불교 사원들은 황폐화되고 있었다.

특히 불교 내에서는 힌두교 밀교(密敎)의 영향을 받아 탄트라(Tantra)라는 밀의적 가르침을 담은 경전들이 성립되었으며 인도 불교는 전적으로 밀교화되다시피 했다. 밀교의 목적은 진언(眞言 혹은 陀羅尼)ㆍ만다라(曼茶羅)ㆍ수인(手印) 등을 사용하여 불보살과 수행자의 신비적 합일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밀교는 이와 같이 신(身)ㆍ구(口)ㆍ의(意) 3밀(三密)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몸속에서 성불을 체험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적으로 하며, 이같은 사상은 〈대일경 大日經〉이나 〈금강정경 金剛頂經〉과 같은 대승 경전들에 이미 나타나 있다. 중국ㆍ한국ㆍ일본에 전해진 밀교는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후기의 밀교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적 상징들을 사용하여 남녀의 성합(性合)을 깨달음을 이루는 최고의 수단으로 삼는 이른바 좌도(左道)밀교적 성격이 강한 탄트라들을 산출했다. 이러한 탄트라들은 인도 불교의 최종단계에 산출된 문헌들로서 티베트 대장경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티베트 대장경의 탄트라는 소작(所作)ㆍ행(行)ㆍ유가(瑜伽)ㆍ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대일경〉은 행 탄트라, 〈금강정경〉은 유가 탄트라에 소속되어 있고 비밀집회(Guhyasamja)ㆍ헤바즈라(Hevajra)와 같은 본격적인 좌도밀교의 탄트라는 무상유가 탄트라에 속해 있다.

좌도밀교에서 말하는 성합이란 결코 육체적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행위로서 행해지는 것이다. 좌도밀교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진리를 구체적 의례를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열반(空 또는 般若)을 여성(yum)으로 상징하고 생사(方便 또는 慈悲)를 남성(yab)으로 상징하며 남녀의 성합은 이 둘이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세계를 자신의 몸으로 실현하기 위한 의례적인 행위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의례는 반드시 입문식(灌頂)을 거치고 스승의 엄격한 지도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계율을 무시한 좌도밀교의 파격적 행위는 힌두교의 성력(性力) 숭배적 밀교와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합되어버렸으며 불교는 이로써 자신들의 독자성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돌이키기 어려운 도덕적 타락과 쇠퇴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밀교적 형태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인도 불교는 이슬람교의 등장에 의해 제도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인도에서는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아시아의 불교

동남아시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아소카 왕 치세 때였다. 실론의 사서들에 의하면 아소카 왕은 데바남피야 티사(BC 250~210) 왕 때 아들 마힌다를 전도승으로 실론에 보내 처음으로 불법을 전했다고 하며 그의 여동생 상가미타 비구니도 그후 실론에 왔다.

상가미타는 그때 석존의 성불지인 부다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실론에 전파된 불교는 상좌부 계통의 보수적인 일파로서 실론을 거점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 티사 정사를 지었으며 이것이 후에 실론 상좌부의 보수적 전통의 보루인 대사(大寺)가 되었다.

두타가마니(BC 101~77)의 치세 때에는 팔리어로 된 경전이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매년 5월에는 석가의 탄생ㆍ성도ㆍ입멸을 기념하는 베사크(Vesak) 축제도 시작되었다. 바타가마니 아파야(BC 43~17)의 치세 때에는 무외산사(無畏山寺)가 건립되었으며 이 사원은 그후 인도 불교의 여러 교파들과 교섭하는 가운데 대승불교도 받아들였다 (→ 색인:아바야기리).

마하나마(409~431) 왕 때에는 인도에서 온 불음(佛音)이 팔리 경전 대부분의 주석서를 썼으며 상좌부계 불교의 체계적 강요서인 〈청정도론 淸淨道論〉을 저술하여 지금까지 상좌불교의 권위 있는 논서로 읽혀지고 있다.

실론의 불교 역사는 순탄하지만은 않아 여러 번 출가승들의 수계(授戒) 전통이 끊어질 정도로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미얀마(1065, 1475, 1801)로부터, 혹은 타이(1758)로부터 수계 전통을 이어 받았다.

16세기 포르투갈의 식민통치기(1505~1658)에 불교는 탄압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받기도 했다. 그후 영국의 통치하에서 사정은 좀 나아졌으나 여전히 선교사들의 탄압과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중흥운동도 일어났으며, 여기에는 헨리 올콧이라는 미국의 신지주의자나 영국의 불교학자요 팔리어 경전연구회(Pali Text Society)의 창시자인 리스 데이비즈 등의 역할도 컸다. 현재 실론 원주민으로서 대부분 불교 신자인 신할리족과 인도 남부로부터 이주해온 힌두교 소수민족인 타밀족 사이에 심각한 인종대립과 종교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의 초기 불교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얀마의 사서들은 실론의 붓다고사가 버마를 방문해 팔리어 경전 연구의 전통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11세기에 수립된 아나우라타 왕조(1043~1283) 때만 해도 소승과 대승이 공존했으며 아나우라타 왕(1044~77)은 대승을 몰아내고 상좌부로 승가를 통일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대승은 존속했으며 1287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많은 불교시설들이 파괴되었고 1752년에 새로운 통일왕조가 수립될 때까지 국토는 여러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기간에 대승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상좌부 불교만이 남게 되었다.

19세기에는 팔리어 연구가 성행했으며 경전들은 미얀마어로 번역되었다. 1880경 미얀마는 영국에 의해 인도에 병합되었으며 미얀마 독립운동에는 승려들의 역할이 컸다. 현재에도 미얀마에는 거의 마을마다 절이 있으며 승려는 자신들의 공부와 수행 외에 신도들을 위해 각종 의례를 베풀고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도들은 승려를 존경하며 승가를 위해 보시를 베풀고 공덕을 쌓는다.

미얀마인들은 청소년기에 반드시 1번 일시적으로나마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하는 관습이 있다. 마을의 불교는 토착적 신앙인 신령(nat) 숭배와 습합되어 있으며 세속적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는 신령들에게 기원한다.

이와 같은 사정은 대체로 타이ㆍ캄보디아ㆍ라오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이의 경우에도 옛날에는 대승불교가 행해지기도 했으나 람캄행 왕이 통일 왕조를 이룩하고 실론으로부터 고승을 초청하여 오늘날의 상좌부 타이 불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타이 문자도 만들었다.

라마 4세(1851~68) 때는 상좌부의 불교 정화를 위해 노력해 승가는 엄격한 계율 준수를 하는 정법파(正法派 Dhammayut)와 재래의 대중파(Mahanikai)로 분열되었다. 캄보디아ㆍ 라오스 지역에는 자바르마 2세(820~869)에 의해 크메르 왕국이 수립되어 14, 15세기에 타이의 침입을 받기까지 약 750년간 번영했다.

자야바르만 7세(1128~1225) 때 크메르 왕국은 가장 번성했으며 그는 대승불교의 신봉자로서 102개의 병원을 지었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와 같은 대사원도 크메르 왕조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서 지금도 그 거대한 유적을 남기고 있다.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상좌불교와 같이 병존하다가 15세기부터 타이 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불교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 가운데 베트남만이 중국의 영향 아래 지금까지 대승불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10세기부터 14세기말에 걸쳐 선불교(禪佛敎)가 성행했다. 현재 베트남의 불교신자들은 한문 경전을 베트남 음으로 독송하며 승려들은 독신으로 계율을 엄수한다.

베트남 불교는 교리적으로 선(禪)과 정토신앙이 융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불교 행사는 1주일간에 걸쳐 행해지는 불탄일(phat-dan) 축제이다. 승려들의 사회적 활동도 크다. 베트남에서는 중국에서와 같이 관리등용을 위한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시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고려시대의 승과(僧科) 제도와 비슷하다 하겠다.

이상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인구 대다수가 불교 신자이며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상좌부 불교가 거의 국교가 되다시피한 나라들이다. 전통적으로 이들 국가에서는 왕과 승가와 재가신도들이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불교적 사회질서를 형성해왔다.

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승가는 재가신자들을 정신적ㆍ도덕적으로 인도해주고 필요한 불교식 의례들을 수행해주는 반면 재가신자들은 승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보시를 통해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아간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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