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6:31
분 류 사전3
ㆍ조회: 5804      
[현대] 대한민국2-주민 인구 취락 (한메)
대한민국2

관련문서

대한민국1-개관 자연환경
대한민국2-주민 인구 취락
대한민국3-역사
대한민국4-정치
대한민국5-국제관계
대한민국6-군사
대한민국7-통일
대한민국8-경제 산업
대한민국9-사회
대한민국10-문화
대한민국11-해외의 한국연구

주민·인구·취락

[주민]

<민족>

한국인은 고유의 언어와 생활풍속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 존재가 뚜렷하다. 한국은 오늘날 거시적으로 볼 때 중국문화권에 속해 있는데 한국인과 중국인은 인종적으로 몽골인종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가 BC 5000년경에 열리기 시작하였으며, 이들 신석기인의 혈통은 구석기인과는 달리 끊기지 않고 계승되어 한국민족의 형성에 일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신석기인은 고(古)아시아족의 일파로 보이는데, 이들은 압록강·대동강·한강·낙동강·두만강 하류지역의 강변(江邊)·해안(海岸)·도서(島嶼)에서 움집을 짓고 채집·어로·수렵생활을 하였다.

고아시아족은 새로 등장한 북방계의 다른 일파인 알타이족 또는 퉁구스족에 밀려서 북쪽과 동쪽의 변방으로 이동하였다고 짐작된다. 고고학적·언어학적 증거에 의하면 한민족(韓民族)은 BC 4000∼BC3000년 전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한국으로 옮겨온 퉁구스족으로 알려져 있다.

BC 1000년경부터는 만주지방으로부터 민무늬토기인[無紋土器人]이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빗살무늬토기인〔櫛紋土器人〕 다음에 등장한 최초의 민무늬토기인은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예맥족(濊貊族)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예맥족은 상대(上代) 중국의 동북 변경 밖에 살던 종족이며, 한국에서 청동기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또는 한국으로 이것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고조선(古朝鮮)은 이러한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국가이며, 고조선의 단군신화(檀君神話), 즉 <곰> 숭배사상과 같은 애니미즘도 한국인 생활에서 뿌리를 깊게 박고 있는 샤머니즘과 함께 북방문화에 속한다. 철기문화는 BC 400∼BC 300년경에 들어왔으며, 농경문화와 더불어 중국 한족(漢族)의 문화였다. BC108년에 한(漢)의 군현(郡縣)이 설치되면서 한강 이북에는 중국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왔으며, 한국의 문화는 북방계통에서 중국계통으로 크게 방향이 바뀌는 한편, 주민의 피에도 중국인의 피가 섞이기 시작하였다고 여겨진다.

또 낙랑군(樂浪郡)의 지배하에 놓인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많이 이주하였으며, 기원 전후부터 남부지방에서는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등의 한족(韓族)이 지역화하여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동예(東濊)·옥저(沃沮) 등으로 갈라져 있던 한강 북쪽의 예맥족과는 분리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이 한족들도 해안지대를 따라서 화남(華南) 또는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과의 부분적·단편적 혼혈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국의 문화는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북방적 전통을 농후하게 지녔으며, 점차 중국의 한문화(漢文化)가 급속히 도입·보급되었다.

신라(新羅)가 삼국을 통일한 뒤 발해(渤海)와의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를 거치면서, 757년(경덕왕 16)부터는 한강을 경계로 하여 남북간의 차이가 줄어들고 한민족의 본질이 굳어갔지만, 대체로 청천강(淸川江) 북쪽의 평안도지방과 장진강(長津江) 동쪽의 함경도지방에서는 오랫동안 한민족(韓民族)과 만주족(滿洲族) 또는 여진족(女眞族)과의 혼거(混居)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한민족은 예맥족을 근간으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민족의 요소가 약간 혼성되면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 한국의 단일민족적 성격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지역개념과 더불어 확립되었다.

<민속>

한국은 국토가 온대에 속하고 반도적(半島的) 위치에서 4계절의 구분이 뚜렷하고 우량(雨量)이 알맞기 때문에 일찍부터 농경을 주업으로 삼아 그에 관련된 농경문화를 하나의 생활문화로서 정착시켜 왔다. 또한 농경생활에서 비롯된 세시풍속(歲時風俗)이 다양하게 뿌리를 내려 명절만도 설·상원(上元)·입춘·한식·초파일·단오·유두·칠석·추석·동지 등의 각종 의례와 놀이, 조상을 모시는 차례(茶禮)를 비롯하여 각종 신을 모시는 여러 가지 의례가 행하여져 왔다.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행위로서 고사(告祀)·굿·고수레·부적 등의 민속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정월에 토정비결을 보고 점을 치는 일 등도 유구한 역사의 민속유산으로 남아 있다. 세시풍속에 맞추어 정초에는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에게 세배하며 조상의 무덤에 성묘도 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덕담을 나누는 등의 민속은 오늘날까지 행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농업국에서 상공업국으로 전환하였으며, 영농도 기계화되고 세시풍속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본적으로 크게 변모되었다. 즉 종래의 화전놀이·화류놀이·등고(登高)·단풍구경 등은 주말이나 휴가철의 관광·등산으로 바뀌고 있으며, 농촌에서도 길쌈이나 바느질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형 집단민속놀이의 세시풍속들도 소멸되어 가는 추세이고 영남·호남에 많았던 동제(洞祭)·농악·줄다리기 등과 함께 마을단위의 자생적인 축제양상을 보이던 세시풍속들도 점차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이러한 소멸추세에 대하여 문화재보존 차원에서 <향토문화제>라고 하여 관주도형(官主導型)의 대형 지방축제들이 세시풍속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한국의 2대 명절인 설날과 추석은 민족대이동을 이루며 세시풍속의 2대 정점일로서 현대생활에도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이 밖에 한국인은 고유의상으로 한복을 입으며, 식생활에서는 쌀이 주식이고 부식 가운데 김치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주거생활에서 한국의 전통적 가옥구조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온돌이라는 특수한 난방양식이다.

가족행사로는 돌·결혼식·환갑 등을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한편 한국 고유의 민속인 관혼상제(冠婚喪祭)의례는 73년에 <가정의례준칙> 등이 제정되면서 관(官)주도의 새로운 풍속이 형성되고 있다.

<언어>

한국어는 터키어·몽골어·퉁구스어와 더불어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이들 언어의 공통적인 조상, 즉 알타이 공통조어(共通祖語)는 알타이산맥 남쪽지방에서 발달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어는 지리적·계통적으로 퉁구스 제어(諸語)와 가깝다고 하지만 닮은 점이 적으므로 원시한국어는 알타이 공통조어에서 가장 일찍 갈라져 나온 언어인 듯하며, 그 시기는 BC4000∼BC2000년경 으로 짐작된다.

고대 한국어는 고구려어로 대표되는 북방의 부여계(夫餘系)언어와 신라어로 대표되는 남방의 한계(韓系)언어로 구분된다. 한계 언어는 한반도 남쪽으로 먼저 이동해와 살던 한족(韓族)의 언어로서 진한·마한·변한의 언어는 방언적 차이를 보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부여계 언어와 한계 언어 사이에는 방언 이상의 언어적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족은 뒤에 신라와 백제로 나누어졌는데, 백제의 경우 북쪽에서 이동해 온 지배층인 부여족은 피지배층인 한족과 다른 언어를 썼다고 한다.

이러한 고구려어·신라어·백제어의 흔적은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지명에 남아 있다. 한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한민족의 형성은 단일한 한민족어를 또한 형성하게 하였다. 즉 부여계에 속하였던 고구려어가 신라어에 의하여 정복당함으로써 한반도의 언어는 경주방언(慶州方言)을 모델로 한어화(韓語化)하게 되어 단일어로서의 민족어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어는 경주지방이 그 중심이었던 신라어를 근간으로 하여 발전되어 왔다. 신라어는 지명어휘뿐만 아니라 향가(鄕歌)가 전승되어 어느 정도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918년 고려가 건국되자 정치·문화의 중심이 경주에서 개성(開城)으로 옮겨지면서부터는 경기지방의 언어가 중앙어로 되었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개성어는 경주어와는 방언차를 보였으며, 고려시대의 성립은 한국어를 재조정시키게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중심으로 대략 4개의 방언이 성립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즉 고구려지역의 북부방언권, 신라지역의 동부방언권, 백제지역의 서남방언권,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의 중부방언권 등이다. 이러한 방언권은 현대에 이르러 동북방언(함경도)·서북방언(평안도)·동남방언(경상도)·서남방언(전라도)·중부방언 및 제주방언 등의 6개 방언으로 재조정되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는 민족의 문자인 한글이 창제되었다. 세종(世宗)은 집현전(集賢殿)의 성삼문(成三問)·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 등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1446년(세종 28) 민족 최대의 문화적 창조물인 한글을 창제·반포하였다. 문자생활에 있어서 한국인은 오랫동안 한자(漢字)를 써오다가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훈민정음의 창제로 한국 고유의 글을 가지게 되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국의 어음(語音)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와 더불어 서로 유통되지 않으므로 우민(愚民)이 말하고자 하여도 마침내 그 정을 펼 수 없는 것이 많다. 내가 이것을 단연히 여겨서 28자를 새로 만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나 쉬이 익혀서 일용에 편케 하고자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언어를 같이 하는 한 민족으로서 독자의 문자를 가져야겠다는 의식이 들어 있으며, 일반 국민생활의 편의를 도모하는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창제된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표음문자(表音文字)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국문자의 창제·사용은 한국국문학사에도 큰 진전을 불러 일으켰다.

한글창제 뒤에도 문자생활은 한자에 의지해 왔으나, 대한제국시기 민족의식의 대두와 함께 점차 한자·한문 중심의 표기생활에서 벗어나 한글·국문 중심의 표기생활로 바꾸도록 강조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어문말살정책으로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정부의 주요어문정책 중 하나로 한글 중심의 표기생활이 추진되기 시작하였으나 한글전용정책은 민간 및 학술단체 등의 반대로 인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한문 뿐만아니라 196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산업화·근대화에 따라 영어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어의 사용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한글세대>가 점차 증가되었고, 각종 공문서·서적·신문 등에서 한글전용의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경향이다. 이 과정에서 종전의 문어체 문장들이 구어체 문장으로 바뀌게 되는 번화도 문자생활에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한글의 정서법은 1933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한 이래 밋 차례의 부분개정을 거쳐 지금까지 그맥락이 이어지고, 89년에는 <한글맞춤법> 및 <표준어 규정>을 개정하였다.

한국어의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며, 문법은 <주어+술어> <주어+목적어+동사>로 되어 있다. 한국어를 쓰는 인구는 현재 남한 4238만(1989), 북한 약 2242만(1988), 재외한국인 약 350만으로 전체 약 6830만으로 추산된다.

[인구]

<인구성장>

조선시대 이전의 인구나 호구에 관한 기록은 극히 단편적으로 전해올 뿐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낙랑군은 6만 2812호에 인구 40만 6748, 현도군은 4만 5000호에 인구 23만 1845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는 여자와 유년층 및 노년층이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남부지방은 당시에도 북부지방보다 인구가 많았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기원 초기의 한국인구는 약 300만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호구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고려시대는 호구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인구가 중기에 1000만 내외, 말기에는 약 1300만 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국권피탈 후부터는 현대적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일 수 있다.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는 1925년에는 1900만에 달했고, 1930년에 2105만8000, 1935년에 2289만 9000, 1940년에 2432만6000, 1944년에 2590만으로서 1911년의 인구 약1380만에 비해 약 2배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급격한 인구증가는 국권피탈 이후 보건의료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서양의학과 서양식 의료시설이 도입됨에 따라 사망률이 떨어졌으며, 새로운 보건의료 제도로써 출생률의 상승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 38°선을 기준으로 남한 인구는 약 1600만, 북한 인구는 약 880만이었는데, 1949년의 인구센서스에서 남한인구는 2018만 9000으로 4년 동안에 약 400만이 증가하였다. 1955년의 남한 인구는 2152만 6000에 머물렀고,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1960년에는 2498만 9000으로 8·15 전의 전국 인구와 비슷해졌다.

이러한 휴전 후의 인구증가는 주로 자연증가에서 기인하는데, 1955년경부터 일어난 베이비붐과 의학의 발달에 따른 사망률 저하가 그 원인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더불어 가족계획사업이 추진되어 출생률이 점차 낮아지기 시작하여 1960∼66년 사이에는 연인구증가율이 2.7%이던 것이 1966∼70년 사이에는 1.89%로 떨어졌다.

즉 8·15 이전의 다산다사(多産多死), 1950∼60년대의 다산소사(多産少死) 형태에서 1970년대에는 소산소사(少産少死)로 이행하는 인구혁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5년의 인구는 4044만 8000, 인구증가율은 1.56%인데 비해 1986년에는 4118만 4000으로 증가율은 0.95%였다.

현재 남한의 인구는 4405만 6000(1993)으로 추산되며 인구증가율은 0.9%이다. 이와 같이 남한의 인구 증가율이 1% 미만으로 떨어진 것은 가족계획사업의 성공적 수행과 보건·의료수준의 향상, 국민의식수준 및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출산력의 급속한 감소 때문이다. 한편, 1992년 현재 북한의 인구는 2292만 명으로 추산된다.

<인구구조>

성별 구조는 일반적으로 여자 100명에 대한 남자의 수, 즉 성비(性比)로서 표시한다. 1911년의 한국의 성비는 110.9로서 심한 남초현상(男超現象)을 보였으나 1944년에는 99.4로서 여초(女超)로 바뀌었는데, 이는 1939년 이후 많은 청장년 남자가 징병 및 징용에 의해 국외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또 1949년 한국의 성비는 102.1로서 다시 남초현상을 보이다가 1955년에는 6·25로 인하여 100.1로 균형을 이루었고, 1980년에는 100.5, 1988∼90년 동안은 101.6을 유지하였다.

또한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성별구조도 달라지는데, 섬유공업·전자공업 등의 발달로 여성근로자를 필요로 하는 공업도시나 미군 주둔지역 등은 여초현상을 보이는 반면, 창원·울산·포함과 같은 중화학공업이 발달한 지역과 광공업지역은 남초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인구의 연령별 구조는 인구피라미드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인데, 출생·사망·인구이동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국의 연령별 구조도 1950년대 이전에는 전형적인 피라미드형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다산다사의 후진지역에서 볼 수있는 유형이다.

일제강점기 연령별 구조를 보면 청장년층은 해외유출로 감소한 반면 0~14세 유년층은 증가하여 피라미드 저변이 더욱 넓어졌다. 1925~44년 사이에는 15~44세 연령층은 줄어들었고 유년층은 늘어났으며, 60세 이상 노년층은 큰 변동이 없었다.

1960년대에는 6·25 이후 출생률 상승으로 유년층이 늘어났으나 점차 소산소사로 유년층 비율이 낮아졌다. 1985년에는 유년층 비율이 30.1%인 반면, 15~44세 연령층은 50.7%로 높아져 인구피라미드는 저변이 점차 좁아지는 방추형으로 옮아가고 있다.

산업별 인구구조는 경제발전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선진국에서는 1차산업이 10% 내외, 2차산업이 30% 내외, 3차산업이 60% 내외를 차지하는 반면,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2·3차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나 8·15 직전까지도 농업을 중심으로 한 1차산업인구가 전체 취업인구의 약 70%를 차지했고, 2차산업인구는 7% 정도였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1970년에는 1차산업이 50.5%, 2차산업이 14.3%, 3차산업이 35.2%였으며, 1980년대에는 각각 34.0%, 22.6%, 43.4%로 바뀌었다. 이후 1990년에는 각각 18.3%, 27.3%, 54.4%로 변하여 3차산업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인구분포>

일제강점기 때에는 북부지방에 광공업과 신흥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남부지방의 농촌인구가 대량 유입되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1955~60년 사이에는 6·25 때의 피란민들이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정착, 이들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여 지역별 인구증감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였는데, 서울의 인구증가는 주로 농촌인구 유입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울의 인구증가가 전국 인구증가수에서 차지한 비중이 1966~70년 사이에는 76.2%로 사상 최고에 달했으며, 이로 인해 서울은 인구의 과대화·과밀화로 주택난·교통난·취업난 등 각종 도시문제가 발생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부산도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수도권전철과 경인·경부·영동 고속도로 개통 및 인천·성남·안양·부천·일산 등의 성장과 함께 수도권에 속한 경기도의 인구증가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서울과 주변 수도권은 오늘날 국내 최대 인구집중 지역이 되었다.

인구의 도시집중현상은 서울·부산 이외에 대구·인천·광주·대전 등 대도시와 창원·부천·구미·울산·포항 등 신흥공업도시에 편중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따라서 이들 도시지역은 인구밀도가 높은 반면, 군부(郡部)의 경우 강원도와 이에 인접한 경상북도·충청북도·경기도의 산간지방, 소백산맥 및 그 주변에 속한 전라북도·경상남·북도 일부 지방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다. 이처럼 농촌인구의 도시집중 또는 이촌향도는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도시중심으로 추진되어 왔기 때문에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인구이동>

조선시대에는 북부 변경지방의 방어와 개척을 위해 남부지방의 주민이 그곳으로 이주하여 북부지방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촌락지역에서 도시지역으로 인구가 이동하였다. 8·15 직후에는 북한에서 약 180만 명이 월남하였고, 1950~53년의 6·25 기간에는 100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월남함으로써 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인구이동이 일어났으며, 55년 이후부터는 이촌향도 경향으로 인구이동이 이루어졌다.

또 1969년을 기점으로 제조업 및 사회간접자본 부문을 중심으로 국민경제가 발전됨에 따라 농어촌인구의 도시지역으로의 이동이 점차 증가하였다. 이로써 대도시지역의 인구과밀화 및 농·어촌지역의 인구과소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해외로의 인구이동으로는 1945년 광복 당시 일본에 210만, 만주에 200만, 소련에 20만, 중국에 10만, 미국과 기타 지역에 3만 명이 분포하여 재외한국인 수는 전체 약 500만이었으나 8·15 후에 많은 사람이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한편 한국인의 이민은 1962년 해외이주법의 시행 이래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전체 이민의 80% 이상을 미국이 차지하고 그밖에 브라질·파라과이·아르헨티나·볼리비아·캐나다 등지와 유럽·아프리카·중동·동남아시아 등에도 한국인의 국제이동이 이루어졌다.

[취락]

<촌락>

⑴ 촌락의 발달

선사시대의 촌락은 주거지·토기·조개더미[貝塚]·고인돌[支石墓] 등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이들 유물분포의 최다밀집지는 대동강·한강·영산강·낙동강·두만강·압록강·청천강을 따라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선사시대의 구덩식[竪穴式] 주거지에서 선사촌락의 발달과정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장원촌락(莊園村落)이 발달하였다. 장원은 왕실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창설되었으나 지방 호족과 관리까지도 토지와 백성을 강제로 점거하였는데, 이것은 토지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에서 시작하여 중신 귀족에 이르기까지 분할하여 지배하는 특정한 촌락으로 변질되었으며, 농경지와 그것을 경영하는 인간과 결합된 주거공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원은 경지와 가옥이 집결된 촌락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고려는 북진정책과 영토수복을 과제로 삼았으므로 북쪽 양계(兩界)에는 요새적 성격을 띤 진취락(鎭聚落)이 성립되었다. 통치·군사기능을 복합한 진취락은 외적방어를 위하여 바닷가에 구축되었는데 청천강수계의 안주(安州)·박천(博川)·운산(雲山)·영변(寧邊)과 영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안변(安邊)과 안주 사이의 고원(高原)·문천(文川)·덕원(德源) 등지에 분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농경지대의 중심지와 수륙교통의 요지에 읍성취락(邑城聚落)이 발달하였다. 읍성취락은 행정적 통제와 군사적 방어기능을 복합적으로 담당하였는데 외적방어를 위해 취락 주변을 성곽으로 구축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동족촌락(同族村落)이 성립되었다.

한국에는 동족부락이 매우 많은데 주민의 대다수가 동일조상에서 파생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촌락이다. 저명한 동족부락은 일반적으로 웅장하고 우아하며 건축연대가 오랜 종가의 기와집을 중심으로 일반 초가가 밀집되어 전형적인 괴촌(塊村)을 이루는 것이 특색이었다.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의 하회(河回)처럼 역사가 깊은 동족부락에는 독특한 전통과 풍속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나 동족촌락은 신분단계의 해소, 광복 후 토지개혁에 의한 토지경제의 약화, 도시화·산업화에 의한 농민의 탈농촌현상으로 인하여 와해되고 있다.

현대의 촌락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상업적 농업의 도입으로써 과원촌락(果園村落)이 발생하였다. 과원촌락은 대외경지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기업화되고, 경영거점으로서의 과원농가는 합리적 경영을 위해 경지에 밀착되어 나갔다. 이로써 집촌이 보편화되었던 한국에서 산촌(散村)의 형태가 출현하게 되었다.

⑵ 촌락의 기능

촌락은 농업·임업·어업 등의 1차산업을 중심으로 그 생산활동 기능이 영위되고 있다. 한국의 농촌은 농업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촌락형태로서 산촌(山村)·어촌에서도 농사를 짓지 않는 촌락은 거의 없다.

중남부평야지대의 농촌은 집촌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북부지방과 산지로 갈수록 전작(田作)을 하는 산촌형태(散村形態)가 많이 나타난다. 농촌은 답작촌(沓作村)·전작촌(田作村)·근교촌(近郊村) 등 그 영농방식에 따라 적지작물의 선택, 경종조직의 방식, 토지이용의 방법 및 생활양식이 어느 정도 다르다.

한국의 답작지대는 남해안을 중심으로 황해안을 지나 쐐기모양으로 북상함에 따라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며 집촌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한국의 전작지대는 대체로 연천(漣川)∼포항(浦項)선 동쪽의 산악구릉지대와 서쪽의 평야지대 가운데 수리·지형·기후 등의 자연조건에 의해 답작이 불가능한 곳에서 주로 나타난다.

최근에는 도시인구의 팽창, 생활수준 향상, 운송수단의 발달로 인해 채소류·과실·화초 등의 상품작물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교촌(郊村)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촌은 도시 주변에 발달하는 근교촌과 도시에서 떨어져 있어도 교통수단의 발달로 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원교촌으로 나뉜다.

원교농업은 상품운반이 편리해짐에 따라 원교지대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서울 부근의 고양(高陽)·광주(廣州)·김포(金浦), 부산 부근의 밀양(密陽)·김해(金海), 대구 부근의 동촌(東村), 대전 부근의 유성(儒城) 등지에서 근교농업이 발달하였다. 원교농업으로는 남해안 일대의 채소류, 제주도의 감귤, 대구 주변의 사과재배 등이 있다.

그리고 식생활 향상에 따른 우유·유제품 소비량의 증가로 인하여 낙농업도 교촌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낙농업은 경기도의 평택(平澤)·안성(安城)·화성(華城)·시흥(始興)·안양(安養), 충청남도의 천안(天安)·아산(牙山), 경상남도의 양산(梁山) 등지에서 행해지고 있다.

산촌(山村)에서는 평지촌에 비해 임산물에 의한 수입이 크며 고랭지농업 및 화전농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고랭지농업은 대관령 부근의 강원도지방과 북부산간지대에서 행해지며, 감자·호밀·귀리·메밀·약초 등의 냉량작물이 조방적으로 경작되어진다. 대관령 부근에서 재배되는 여름무·홉·약초 등은 원교농업형태로서 재배되어 대도시로 출하되기도 한다. 그런데 화전농업은 연차적으로 이주정책사업을 실시하여 정리되어 왔다.

또 한국의 어촌은 수산업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반농반어촌(半農半漁村)이 많다. 어업의 작업장소가 해상이어서 한국의 어촌은 출어에 편리하도록 해안을 따라 길게 뻗는 집촌을 이루어 가옥과 대지는 적은 경향을 보이며, 도시와 같은 가옥밀집현상도 나타난다.

또한 성어기(盛漁期)에 중심어장의 섬에 다른 고장의 어선과 운반선, 상인들이 몰려들어 일시적인 이동시장으로서 파시(波市)가 형성되는데 파시는 조기·멸치·고등어·홍어잡이철 등에 흑산도(黑山島)·위도(蝟島)·어청도(於靑島)·연평도(延坪島) 등지에서 이루어진다.

⑶ 촌락의 형태

한국의 촌락 또는 취락은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자연부락(自然部落)이며 주로 농업과 어업에 생활의 기반을 두고 발달해 온 농촌과 어촌이다. 이러한 촌락은 가옥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집촌(集村)과 가옥이 흩어져 있는 산촌(散村)으로 구분된다.

① 집촌

한국의 촌락은 대부분 집촌이며, 가옥이 불규칙하게 밀집되어 있는 괴촌인 것이 보통이다. 괴촌은 저지대나 평야지대에 널리 분포하며, 주로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가옥이 누적되어 형성된 것이다. 전형적인 괴촌은 가옥이 울타리를 경계로 밀집해 있으며, 가옥은 일반적으로 작고 마당도 넓지 않다.

그런데 집촌 형성의 가장 큰 원인은 흩어져 살기보다는 한 곳에 모여 상부상조하면서 살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 논농사지역에서 발달한 집촌은 수리시설의 축조·관리와 영농(營農)에는 공동작업과 협동이 요구되기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농가와 농토가 분리되어 있고 농토가 여러 필지로 나누어져 분산되어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특히 제주도(濟州道)에서는 해안지대를 따라 솟아오르는 용천(湧泉)이 집촌형성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집촌의 대부분이 괴촌인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땅의 생김새를 따라 가옥이 한 채씩 세워졌기 때문이다. 한국촌락의 대부분은 지표(地表)가 고르지 않은 산지 또는 구릉지의 사면 아랫부분이나 골짜기에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농촌 중에서도 간척촌(干拓村)은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가옥의 간격이 일정하고 구조도 모두 같다. 1930년대 초에 간척사업에 의해 새로 생긴 김제군(金堤郡)의 광활면(廣活面)에서는 원래 5가구씩 편성한 반(班)들을 직선상의 농로(農路)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는데 당초의 가옥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간척촌 중에는 일본농업이민을 수용하기 위해 건설된 것도 있다. 광복 후의 간척촌으로서는 70년대에 조성된 계화도 간척지(界火島干拓地)가 가장 규모가 크다. 그리고 한국은 해안선이 길어서 어촌(漁村)이 많은데 반농반어가 대부분이다.

어촌은 대개 포구(浦口)를 중심으로 발달하며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가옥의 밀집도가 매우 높게 나타난다. 연대가 오랜 촌락 또는 집촌은 거대한 정자나무나 당산수(堂山樹)가 있어서 멀리서도 뚜렷이 구별되는데, 이것은 부락민의 결속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촌락은 70년대 이래 집촌을 대상으로 추진되어 온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경관상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② 산촌

산촌은 가옥이 집단을 이루지 않고 상호간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흩어져 있는 형태의 촌락을 가리킨다. 산촌은 전작(田作)을 주로 하는 개마고원과 태백산지를 비롯한 산악지대와 당진(唐津)에서 서산(瑞山)에 이르는 태안반도(泰安半島)를 비롯한 황해안의 간척지·개간지와 과수원지대, 대도시 부근의 근교농업지대, 특히 경상북도의 사과재배지역, 제주도의 감귤재배지역 등 각지에 부분적으로 분포한다.

답작지역이면서도 산촌이 분포하는 태안반도에는 기복이 아주 작은 파랑상(波浪狀)의 구릉지가 넓게 퍼져 있으며, 산촌은 이러한 구릉지에 모식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구릉지의 농경지는 주로 밭이며, 근래에 와서 지하수 개발로 밭이 다소 논으로 바뀌고 있다. 산촌은 취락의 중심이 없으며, 그 주민은 사회적 결속이 약하고 공동체적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고립가옥은 산촌지역에만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곳곳에 널리 나타난다.

⑷ 촌락의 입지

한국의 촌락의 입지는 지형 및 방어·교통로·괸광·휴양지·광산·종교 등의 사회적·자연적 환경과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아왔다.

① 지형

풍수설에서는 뒤에 산이 있고 앞에 시내가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지역이 살기 좋은 곳으로 되어 있다. 역사가 오랜 대부분의 촌락은 산이나 구릉의 양지바른 기슭에 발달되어 있어서 겨울철의 찬 북서계절풍을 막고 연료를 구하기도 비교적 쉬웠다.

특히 지형이 한 방향은 들을 향해 훤하게 트여 있고, 세 방향이 산이나 구릉으로 둘러싸인 <골>로 되어 있으면 촌락의 입지로는 이상적인 곳으로 꼽혔다. 큰 강 연안의 넓은 들은 홍수가 빈변하여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자연제방(自然堤防)은 일찍부터 촌락의 입지로 선정되었다.

따라서 한강의 미사리에서는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나타난다. 한강 하류의 뚝섬·잠실·토평(土坪;구리시) 등지에서는 홍수 때의 대피장소로서 돈대(墩臺)가 마을 단위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자연제방은 과거에 전적으로 밭으로 이용되었으나 방수제(防水堤)가 쌓이고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곳에서는 밭이 모두 논으로 바뀌었다. 김해평야(金海平野)·만경평야(萬頃平野)·김제평야(金堤平野) 등 넓은 평야지대의 촌락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방수제가 설치되고 관개시설이 확충됨에 따라 형성된 것들이 많다.

해발고도가 높은 태백산지역의 산간지대에 발달한 산촌(山村)은 산지농업과 임업을 토대로 이루어진 촌락이다. 산간지방은 주로 화전농업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일조시수와 생육기간이 짧아 농업에 불리하다. 화전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급증하였다. 그리고 산간지방의 촌락은 집촌(集村)이건 산촌(散村)이건 저지대의 촌락에 비하여 연대가 오래지 않다.

② 방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산성리(山城里)는 대표적인 산성취락으로서 해발고도 약 340m에 있으며, 그 주위는 가파른 산지로 둘러싸여 천험(天險)의 요새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관광지로 바뀌었다. 163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몽진한 남한산성은 영변산성(寧邊山城)과 더불어 산성의 쌍벽을 이루었고, 영변은 관서지방 최대의 방어취락이었다.

또 청주(淸州) 북동쪽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은 충청병영이 있던 곳이며, 이곳의 산성리도 근래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남·황해안지방과 북쪽 국경지대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을 쌓은 도읍(都邑)이나 진취락이 많았다.

서울과 대구를 비롯하여 수원·강화·홍성·서산·태안·서천·전주·남원·나주·진주·양산·제주 등은 취락 또는 시가지가 성곽을 벗어나 읍이나 도시로 성장하였으나 방어기능의 상실로 인하여 쇠퇴한 성곽취락도 많다.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과 고창의 모양성(牟陽城)은 성곽의 보존은 양호하나, 성내의 민간주택은 철거되었다.

또한 6·25 후 미군 주둔지역에 형성된 기지촌(基地村)은 조선시대의 성곽취락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지만 새로운 유형의 군사취락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1969년 미군이 부분적으로 철수함에 따라 일부 기지촌은 몰락하였으나 파주(坡州)지방에는 아직 곳곳에 기지촌이 남아 있다. 특히 포천(抱川)지방의 동두천(東豆川)은 기지촌을 근간으로 발전하여 시(市)가 되었다.

③ 교통로

도로와 큰 하천이 교차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나룻배로 강을 건넜고, 강을 건너는 양쪽 나루터에는 나루터취락〔渡津聚落〕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의 주요도로가 지나던 한강변에는 광나루〔廣津〕·삼밭나루〔三田渡〕·서빙고나루〔西氷庫津〕·동작나루〔銅雀津〕·한강나루〔漢江渡〕·노들나루〔露梁津〕·삼개나루〔麻浦津〕·서강나루〔西江津〕·양화나루〔楊花渡〕 등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교량이 많이 건설되어 나룻배가 거의 사라졌으며, 과거의 나루터취락은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조선시대의 주요 역로(驛路)를 따라서는 요소요소에 역원취락(驛院聚落)이 분포하였다. 역은 신라시대 이후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내왕, 단물의 수송 등을 주로 담당하였고, 원(院)은 관리나 일반 여행자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역삼동(驛三洞)·역촌동(驛村洞)·역리(驛里)와 같은 곳은 역이 있던 곳이고, 이태원(梨泰院)·퇴계원(退溪院)·장호원(長湖院)·조치원(鳥致院)·미원(米院)과 같은 곳은 원이 있던 곳이다. 원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 쇠퇴하고 정기시(定期市)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여행자가 늘어남에 따라 교통의 요지에는 주막촌(酒幕村)이 생겨났다. 말죽거리·떡점거리·주막거리·삼거리는 주막촌과 관련있는 지명이며, 주막촌은 가촌(街村)의 형태로 발달하여 일부는 시장촌으로 성장, 일반주택과 주막 이외에 <장터>가 있었다.

그리고 철도와 신작로 같은 새로운 근대교통의 도입으로 신흥교통취락이 발달하여 서울의 영등포·신촌과 김제(金堤) 등지에 역전취락(驛前聚落)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버스교통이 활발해지고 생활권이 확대됨에 따라 많은 신흥취락들도 큰 중심지에 시장기능을 빼앗겨 정체상태에 머물거나 쇠퇴하게 되었다.

④ 관광·휴양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더불어 관광열기가 일어나자 전국의 관광지나 온천이 있는 휴양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따라서 온양(溫陽)·유성(儒城)·부곡(釜谷)·도고(道高) 등지에 온천취락이 발달하였다. 또한 교통이 편리하고 모래톱이 좋은 해수욕장에는 해수욕객을 위한 취락이 발달되어 있는데, 순수한 해수욕장취락은 대천·만리포·연포·변산·상주(남해군)·경포 등지에서 볼 수 있다.

그 밖에 국립공원과 기타 주요 관광지의 관광취락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경주의 보문단지(普門團地)와 불국동(佛國洞), 속초의 설악동(雪嶽洞) 등은 가장 현대적인 관광취락으로 개발되었다.

⑤ 광산

지하자원이 채굴되는 곳에는 광산취락이 발달한다. 지하자원은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으므로 광산취락의 역사는 짧다. 오늘날 가장 활발히 채굴되고 있는 지하자원은 석탄이기 때문에 광산취락 중에는 탄광취락이 가장 많다. 탄광취락은 가옥의 밀도가 매우 높은데 대표적인 곳은 태백산지역의 나전(羅田)·구절(九切)·함백(咸白) 등이다. 탄광촌락으로 출발한 황지(黃池)·장성(長省)은 태백시(太白市)로 발전하였고, 사북(舍北)·신동(新東)·도계(道溪) 등은 읍(邑)으로 발전하였다.

⑥ 종교

한국의 대표적 종교취락은 계룡산의 신도안[新都內]과 풍기(豊基)의 정감록촌(鄭鑑錄村)이다. 신도안은 조선시대 풍수가들에게 길지(吉地)로 통했으며, 조선왕조가 망한 다음 정씨(鄭氏)가 이곳을 도읍지로 왕국을 세운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믿는 사람들이 3·1 운동을 계기로 모여들었고 8·15와 6·25를 거치는 동안 유사종교 집단이 많이 집결하였다.

풍기에도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정감록촌을 이루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길지를 택하여 집을 지었기 때문에 대체로 산촌(散村)을 형성하였다. 이 밖에도 부천시 역곡동(驛谷洞)의 기독교계 신앙촌, 김제시 금산면(金山面)의 증산교촌(甑山敎村) 등의 종교촌락이 있다.

<도시>

⑴ 도시의 발달

한국민족 고유의 도시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고구려 초기의 수도 국내성(國內城)을 들 수 있다. 그 도시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427년(장수왕 15) 이후의 수도였던 평양(平壤)은 그 출토품들을 통하여 훌륭한 도시문명을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백제시대의 위례성(慰禮城)·웅진(熊津;지금의 공주)·사비(泗비;지금의 부여) 등의 도시규모에 대해서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신라의 도시규모나 형태는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경주(慶州)는 신라 1000년간의 수도로서 전성시대에는 179만 호에 달하는 당시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또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九州五小京)제도를 두어 지방의 중심도시를 형성하였다. 9주는 상주(尙州)·양주(良州;지금의 양산)·강주(康州;지금의 진주)·한주(漢州;지금의 廣州)·삭주(朔州;지금의 춘천)·웅주(熊州:지금의 공주)·명주(溟州;지금의 강릉)·전주(全州)·무주(武州;지금의 光州)에 두고, 5소경은 중원(中原;지금의 忠州)·서원(西原;지금의 淸州)·북원(北原;지금의 原州)·남원(南原)·금관(金官;지금의 金海)에 두었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중요도시로 발달한 곳이 많다.

발해는 5경(京) 15부(府) 5도(道) 62주(州)로 구획되었는데, 5경 가운데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의 동경성(東京城)은 지금의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으로, 과학적인 발굴과 조사결과 동서길이 약 4.6㎞, 남북 약 3.3㎞, 주위 1만 6293m의 토성벽에 둘러싸인 대규모 도시였다.

철원에 도읍을 정한 고려는 919년(태조 2) 개경(開京;지금의 개성)으로 천도하였으며, 큰 지방도시 가운데는 서경(평양)·동경(경주)·남경(한양)의 3경이 있었다.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漢陽;지금의 서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6세기에 걸쳐 한국의 수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양의 인구는 17세기 중엽까지 10만 내외이던 것이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다소 기복은 있었으나 17∼20만 인구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 후반기 2세기 반 동안 도시성장은 거의 정체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1867년(고종 4) 한양의 호구 명세표에 의하면 총 4만 2393호 중에서 와가(瓦家)가 약 20%인 8652호, 반초가(半草家)가 약 10%인 4392호, 초가가 약 70%를 차지하는 2만 832호였다고 한다. 당시의 수도가 이런 현상이었으므로 지방도시는 그 모습이 촌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 도시의 정체성은 전(前)산업시대였다는 데 기인하지만 전재(戰災)나 당쟁의 영향도 컸다.

수도 한성을 비롯하여 지방도시 거의가 부(府)·목(牧)·군(郡)·현(縣)청의 소재지인 읍으로서 행정의 거점이었으므로 그 지방의 민호수와 농지의 대소에 따라 도시규모의 대소도 비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난을 거친 조선 후기에는 인구증가, 장시의 확충, 상공업의 발달, 도시집중현상 등으로 도시사회는 점차 행정적 거점에서 경제적 거점으로 전환해 갔다.

조선시대의 주요 도읍은 성곽으로 둘러싸였고, 행정·교육·상업 이외에 부수적으로 군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1876년(고종 13)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 후 부산(釜山) 개항을 선두로 원산(元山)·인천(仁川)·남포(南浦)·목포(木浦)·마산(馬山)·군산(群山)·성진(城津)·용암포(龍巖浦)·청진(淸津)·신의주(新義州) 등이 차례로 개항되고, 이와 함께 경인선(京仁線)·경부선(京釜線)·경의선(京義線) 등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주요 개항장에는 일본·중국 및 각계 조계(租界)가 설치되고 항만정비 및 매축공사(埋築工事)와 서양식·일본식·중국식 건물의 신축이 추진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의 도시경관이 출현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전반기에는 일본자본이 주도하는 상공업이 성하였으나, 일본의 기본정책은 한국을 일본의 식량기지화하려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삼남(三南)의 곡창지대를 비롯한 중부와 관서지방 평야지대의 미곡 집산지와 적출항을 중심으로 미곡의 거래와 정미업의 기업화에 의해 도시가 성장하였다. 호남의 중심도시인 전주(全州)·광주(光州), 쌀의 집산지인 이리(裡里)·정읍(井邑), 쌀의 적출함인 군산·목포 등이 활기를 띠었고, 금강유역에는 대전(大田)·청주(淸州)·조치원(鳥致院)·논산(論山), 영남지방에서는 대구(大邱)·김천(金泉)·밀양(密陽)·진주(晉州) 등이 쌀의 집산지로, 부산·마산이 쌀의 적출항으로 성장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 말까지 일본은 한국을 일제의 식량기지와 일본상품의 시장으로 존속시키려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도시의 성장은 전반적으로 미미하였다. 그러나 30년대부터는 한반도를 일제의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하고 경제적으로는 농공병진책을 감행함으로써 수력자원과 지하자원이 활발히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각종 공업이 활기를 띰에 따라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공업도시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44년 38°선 이남에는 서울·부산·인천·대구·광주·대전·개성·목포·전주·군산·마산·진주 등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부(府) 12개와 73개 읍(邑)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국의 약 2/3를 차지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제의 치하에서 광복이 되자 해외동포의 귀국, 북한으로부터의 월남 등으로 남한의 인구는 단시일내에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그 인구의 대다수가 도시지역에 정착함으로써 남한의 도시는 급격한 인구 팽창을 겪게 되었다. 1949년까지는 청주·춘천·이리·수원·여수·순천·김천이 시로 승격하여 남한의 시는 19개로 늘어났으며, 1955년에는 원주·강릉·경주·충무·진해·제주가 시로 승격되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그 해 종합공업개발지구로 지정된 울산을 비롯하여 의정부·속초·천안·안동이 시로 승격하였다. 1972년에는 그린벨트를 설치하는 한편, 수도권 철도의 전철화와 지하철의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의 성장을 이끌어 나갔다. 이로써 1973년에는 성남(城南)·안양(安養)·부천(富川)이 시로 승격되었고, 이 밖에 인천·수원·의정부 등이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1975년에는 울산·포항·마산·구미 등 신공업도시의 성장이 활발하였다. 1977년에는 구미, 1979년에는 동해·창원·제천·영주가 시로 승격되었고, 1981년에는 광명·송탄·동두천·태백·정주·남원·금성·영천·김해·서귀포가 시로 승격됨으로써 광복 당시 12개였던 남한의 시는 50개로 늘어났다. 또한 1986년에는 안산·과천·구리·평택 등 수도권도시와 지방도시가 시로 승격되어 시가 62개에 이르렀고 1995년 1월 현재 시는 모두 68개이다.

⑵ 도시의 기능

도시의 기능은 그 종류가 다양하고 내용 또한 복잡하다. 일반적으로는 공업·광업·수산업·임업도시를 포함하는 생산도시와 상업·교통도시의 교역도시, 행정·군사·교육·관광 휴양도시에 속하는 소비도시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상동·사북·도계·신동 등 지하자원의 개발과 더불어 형성된 광업도시는 특정한 기능이 월등하게 나타난 대표적 도시들이다.

한국의 도시는 대부분 행정과 상업기능이 탁월한 소비도시 내지 교역도시였으나, 60년대 이후 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공업기능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면서 공업도시가 발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부천·구미·창원·울산·여천 등이 신공업도시로 건설·육성되었으며, 인천·안양·수원·마산 등과 같은 일부 기존 도시도 공업도시로 바뀌었다.

생산도시 중에서 광공업 이외의 기능이 뛰어난 도시로는 법성포·삼천포·구룡포·주문진·속초 등의 수산업도시와, 광복 이전에 임업도시로 성장한 압록강 연안의 만포·혜산 등이 있다.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 발달한 교통도시로는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점에 있는 대전이 대표적인데 지금은 인구 122만 3896(1994)의 광역시로 발전하였다.

또 철도의 분기점에 있는 이리·송정·천안·조치원·제천·영주·김천도 교통의 영향으로 도시가 크게 발달한 경우이다. 부산·인천·목포·군산 등의 항구도시도 철도개통과 더불어 급성장하였으나 목포·군산은 호남지방의 쌀 수출항으로 건설된 도시로서 8·15 후 대일무역(對日貿易)의 침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침체상태에 있었다.

충청남도 도청은 원래 공주에 있었는데 1932년 대전으로 이전되었으며, 행정도시였던 공주는 1986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청주는 교육도시로 유명하고, 대구와 전주 또한 교육기능이 탁월하지만 한국교육의 총본산은 역시 서울이다. 진해(鎭海)는 대표적인 군사도시로 관광기능도 겸하고 있으며, 이 밖에 연무(鍊武)·동두천·의정부·송탄·오산·조치원·원주도 군사기능이 탁월하다.

관광휴양도시로는 경주·부여·제주·서귀포·온양·유성 등이 유명하며, 이 중 경주는 국내 제일의 관광도시로 개발·육성되어 왔다. 이 밖에 관광기능을 가진 도시로는 사적과 관광시설이 다른 어느 곳보다 풍부한 서울이 있다.

한편 도시의 경제기능은 산업별 취업인구의 비율로써 알 수 있는데, 도시의 산업에서 중요한 부문은 2·3차산업, 즉 광업·제조업·건설업·상업 또는 도소매·음식·숙박업·운수·통신·창고·금융·보험·용역·서비스업으로 분류된다.

⑶ 도시의 형태

도시의 형태나 경관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의 하나는 가로망(街路網)이다. 경주는 직교식 가로망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읍은 가로망이 불규칙하였고, 서울의 4대문 안에서도 지금의 종로와 같은 일부 대로만이 곧게 뻗었을 뿐 나머지 도로는 불규칙하였다.

처음부터 신도시로 건설된 군산·이리·대전의 경우에는 가로가 전체적으로 직교식으로 계획되었다. 이러한 도시형태의 발달은 도시의 기원과 함께 시대적으로 부여된 각종 경제적 기능, 자연적·공간적 조건, 도시구성원의 사회적 조직형태, 그리고 도시성장에 따라 도시에 도입된 교통수단의 종류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도시의 중심부분만을 고려할 때 대전·경주·삼천포 등은 직교식, 진해는 방사상, 속초·충무 등은 직선형, 천안·김천 등은 커브식 선형에 가까운 도시들이다. 기타의 많은 도시들은 상기 도시의 가로형태 중 하나 또는 둘 이상의 가로형태가 복합 내지 혼합되어 나타나 불규칙한 형태를 띠고 있다.

서울이나 마산과 같은 경우에는 비록 부분적으로 계획되었더라도 미로형 내지 불규칙한 도로망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도시의 윤곽을 좌우하는 가장 큰 외적 요인 가운데 하나는 도시 내의 교통수단의 발달과 그 수용과정에 있다. 서울의 경우는 이미 고속도로형 도시형태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는 대표적인 전차·철도 의존시대의 도시형태를 유지하였고, 70년대까지는 주로 버스노선에 의해 좌우된 도시형태였다. 부산은 철도축을 따라 발달된 전형적인 도시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사실상 항구라는 입지여건과 지형적 장애에 의해 형태가 크게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광주·전주·대전 등은 모두 도시화 형태로 보아 도시를 통과하는 기간철도축에 평행하는 도시형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과 같이 도시 거대화 과정에서 주위에 많은 위성도시와 함께 도시권을 형성할 때 도시형태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기 어렵다.

이와 같은 형태를 J.고트만은 메갈로폴리스라고 하였는데, 모(母)도시와 위성도시간에 발달하는 연속된 도시화지역을 도시회랑(都市回廊)이라고 한다. 서울과 인천 구간에는 미국의 시카고와 밀워키간에서 관찰되는 것과 같은 도시회랑의 발달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시회랑의 형성은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라 도시내의 기능이 점차 두 도시 중간지역으로 확대됨으로써 연결되는 것이다. 경인회랑은 초기에 근교농업이 발달하였고 60년 이후에는 공업지역이 확대되었으며, 최근 두 도시 사이에 새로운 도시형태를 출현시켰다.

또 한국의 역사적 도시의 대부분이 국가의 존립과 관계가 깊기 때문에 도시입지 선정에 그 시대의 사상이나 전통적 믿음이 반영되었다. 즉 신라 삼산(三山)의 위치는 불교적 신앙과 관련된 유물로 도시형태에 영향을 미쳤고, 백제의 풍납동(風納洞)과 공주·부여는 모두 하천이 중요한 방어적 요소였다.

또 고려시대의 개성은 분지지형에 이중도성을 구축하여 전형적인 성곽도시형을 유지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풍수사상이 수도와 도읍 입지 결정에 가장 중요한 인자로 등장하여 도시형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근래 산업시대에 건설된 계획도시들은 역사적 도시에서와 같이 도시의 입지 그 자체가 도시형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교통수단과 도시기능의 공간적 분포변화 또한 도시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각 도시별로 개발된 장기도시계획의 실시도 매우 중요하다.

장기도시계획은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의 공간적 확대를 규제하고 계획적 개발을 유도함으로써 가까운 장래에 출현될 도시형태를 추측케 한다. 이와 같이 도시형태를 좌우하게 될 장기도시계획은 현대도시가 지니고 있는 도시문제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창안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도시문제 가운데는 주택·교통문제 이외에도 대기오염·수질오염의 방지시설 및 환경보전에 대한 국민적 자각이 요구된다.

⑷ 도시의 구조

한국의 도시발달이 행정수행 및 통치를 목적으로 한 수도 중심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도시 내부의 구조가 자연발생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부분 계획된 구조를 지닌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20세기에 접어들 때까지도 옛 행정중심기능 위주의 도시로 출발한 대부분의 도시 내부구조는 단순하게 계획된 구조로서 관가·주택가·시장터 외에 넓은 경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구조적 형태는 지방 중심지인 읍지역(邑地域)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신시가지건설로 도시 내부구조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특히 이러한 변혁은 개항장으로 처음 문호를 열었던 항구도시에서 그 구조변화가 두드러졌는데, 본격적으로 신도시의 구조가 분화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이후이다. 1960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도시가 전통적인 도시의 전(前)산업시대의 구조를 반영하는 반면, 도시내 교통 역시 간선철도의 통과와 도보교통 위주로 도시내 활동범위가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0년을 전후하여 급격한 도시인구의 성장과 교통수단의 변화는 도시구조 재편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도시 공업화의 지향, 해외시장 개척에 따른 도시 영세공업의 정착화와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 무역 확대에 따른 도시내 시장의 활성화, 각종 정부기관과 사회공공기관, 연구기관의 신설과 대형화, 버스교통망의 확대와 교통수단으로서 승용차의 등장으로 20세기 초에서 40년대까지 겪었던 도시구조의 변혁을 또다시 경험하였다.

도시내부 구조의 유형은 도시의 인구규모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인구 20만 이하의 도시에서는 상업과 관공서 등의 집결지로서 그 중심지와 주변 거주지와 상업지역이 혼합된 주택지역이 나타나며, 그 밖에 공업지역과 농업지역이 연속되어 나타난다.

구조적으로는 동심원에 가까우나 공업지역의 위치는 주변에 고립·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중심지에 나타나는 상업지역은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중심지를 관통하는 간선도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시인구 규모가 20만∼100만에 이르게 되면 도심부분의 중심업무지구(CBD) 구조가 관찰된다. 이 CBD의 주변부는 각종 서비스와 도산매업이 집중하고 있으며 도시내에서 가장 높은 토지 이용의 혼합형을 이루는데, 이 주위에 주택지와 공업지역이 연속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100만 이상 거대도시의 경우 중심부분인 CBD지역과 CBD 주변부의 분화가 뚜렷해지고 중간지역이 그 밖을 넓게 에워싸고 있다. 중간부분에는 제2차 중심지(부심지)·제3차 중심지가 형성되며 최근에는 수많은 쇼핑센터가 발달하여 다핵화(多核化)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중간지역에는 계획된 공업단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각종 유통센터와 연구기관이 있다. 중간지역 밖의 외곽지역은 새로 건설된 거주지의 교외화(郊外化)가 추진되고 있으며 위성도시와의 연결지역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고 대부분 녹지대 및 개발제한지역으로 설정, 사실상 개발이 정체되어 있는 지역이다.

서울은 조선시대 이래 600년 동안 한국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중심지였으며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에서도 개발거점이었다. 정치·경제부문에서의 의사결정권 집중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부문에 걸쳐 기능의 공간적 집중을 초래하였고, 1970년대에 전철과 고속화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서구식 거대도시 형태와 흡사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울·부산·대구와 같은 거대도시의 경우, 상업지역이 대체로 CBD와 도매시장,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발달한 상가, 동단위 수준에 발달한 도매시장이나 쇼핑센터 등이 주류를 이루며, 최근 도시내 유통을 원활히 돕기 위해 각종 유통센터의 건설이 새로운 도시상업지역에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의 CBD의 구조적 특성을 보면 전문상가와 도소매의 밀집 정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주변부에 비해 상업활동과 도심업무가 가장 밀집한 지역에 해당하며, 도시 지가(地價)의 최고지역으로 백화점·사무소·금융기관이 집중되고 호텔·도소매업이 밀집하는 특색을 나타낸다.

그 밖에 부산의 남포동(南浦洞) 일대, 대구의 동성로(東城路) 일대, 대전의 중동(中洞) 등지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볼 수 있다. 아울러 서울의 신촌(新村)·청량리(淸凉里)·영등포(永登浦)·영동(永東), 부산의 서면(西面) 등지에 2차적 상업중심지인 부심지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도시 내부구조의 주요한 구성요소 중의 하나가 공업지역의 발달이다. 최근 도시내 대규모 공업단지 설치 이전의 공업지가 계획된 바도 있으나 거의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주택지역과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심내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중소도시의 경우 공업지역의 발달이 철도 주변과 일치하는데, 대구·부산·서대전 등지의 공업지역 발달이 대표적인 예이다. 도시 주택지의 계속적인 확산으로 일찍 개발된 공업지가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저해요인으로 등장하여 정책적으로 분산하게 되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윗글 [근대] 일제강점기 (두산)
아래글 [근대] 부산항의 역사 1 (부산)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28 사전3 [현대] 한일기본조약 (민족) 이창호 2003-12-13 19468
3027 사전3 [근대] 조동호 (유정기념사업회) 이창호 2004-03-25 8795
3026 사전3 [근대] 조동호 (브리) 이창호 2004-03-25 8463
3025 사전3 [근대] 조동호 (두산) 이창호 2004-03-25 7968
3024 사전3 [근대] 최시형연구-동학지도층 (유기쁨) 이창호 2004-02-20 7755
3023 사전3 [근대] 일제강점기 (한메) 이창호 2004-12-07 7145
3022 사전3 [근대] 조동호 (민족) 이창호 2004-03-25 6974
3021 사전3 [현대] 12.12사태 (두산) 이창호 2003-12-07 6825
3020 사전3 [근대] 일제강점기 (두산) 이창호 2004-12-07 6156
3019 사전3 [현대] 대한민국2-주민 인구 취락 (한메) 이창호 2003-11-28 5804
1234567891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