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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1-07 (수) 00:05
분 류 사전3
ㆍ조회: 1803      
[현대] 신동엽의 삶과 문학 (김현숙)
신동엽 (1930~1969)

그의 삶

1. 태어날 당시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가난한 초가에서 생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전처 소생의 아들은 죽고, 후처인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았기 때문에). 때문에 네 이복 누이들은 가난 속에서 신동엽의 희생양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2. 유년 시절

신동엽의 유년 시기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수탈정책을 극도로 강화하여 헐벗고 굶주림이 지배하는 절대적 빈곤의 시대였다.

부여초등학교 시절에 신동엽은 과묵하고 내향적 성격이었다. 곧잘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고,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탈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6학년 때 '내지성지참배단'의 그 학교 대표로 뽑혀 보름간 일본을 다녀 오기도 했다(이로 인해 그의 부친은 아들을 통한 신분 상승의 의지를 갖게 된다).

3. 전주사범 시절

1943년 입학. 그 절대적 빈곤의 시대에 가난한 수재들이 열망하는, 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사범학교다(학비가 훨씬 적게 들고 의무적이지만 초등학교에 발령이 나기 때문에). 신동엽은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문학,종교,사상서에 파묻혀 살았다. 일제의 무리한 근로봉사와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어가던 이 시기가 비로소 민족의식에 눈뜬 시기라고 추정해 봄직하다.

→ 재학 중의 8·15해방 : 그 당시 그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그 후, 1948년 남한 총선을 반대한 동맹 휴학 가담으로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또, 그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 학생들에게도 끌려가 심한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좌·우익에게는 '중립'으로 여겨지는 그의 소박한 '민족주의'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중 자체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범적인 식민지 학생이나 혼자만의 문학세계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다른 내면의 변화을 나타낸다.

4. 단국대학 시절과  6·25

1949년 사학과 입학.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한 민족주의가 좌절된 정치적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恨)의 서정으로 표현한 <나의 나>를 쓴 것이 이 때이다. (발표는 1962년 6월)

6.25 전쟁은 신동엽의 정신과 육체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 시기이다. 7월부터 9월까지 부여에서 인민군의 강제부역을 함으로써 수복 후 부산으로 도피, 12월 방위군으로 징집됨. 군간부들의 부정부패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이듬해 2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귀향한다. 오랜 요양을 필요로 한 이 귀향길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민물의 날게를 생으로 잡아 먹는 바람에 뒷날 간디스토마로 고생하다 간암으로 요절하게 된다.

→백제 사적과 갑오농민전쟁 전적지 답사 : 대전 전시연합대학 재적 중. 이는 그가 1960년대 대표적 참여 시인이 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봉건·반외세의 갑오농민전쟁에서 그는 '적'을 인식하게 되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가진다.

5. 졸업 후

1953년 졸업 후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 일을 하며 자취를 했다. 여기서 소설가 현재훈과 아내 인병선을 만난다.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부여에서 신혼집을 차렸으나 가난은 여전했다. 아내의 양장점 개업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자 구상회 등 문학지망생들과 어울려 시인이 될 꿈을 키운다.

그 후 보령농고에 취직하였으나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서 가족과 헤어져 본가에서 요양한다(폐결핵으로 오인하여). 이때 시쓰기에 몰두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를 썼고(1959년 조선일보에 20여행이 삭제되어 실림), 이 시로 인해 시인 박봉우와 만나 참여시인으로서 둘도 없는 지기가 되었다.

6. 서울 생활

교육평론사 재직,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삶의 시작. 1960년 [교육평론]에 <싱싱한 瞳子를 위하여>를 발표, 미래 지향적 태도를 보인다.

7.  4.19 혁명 시기

4.19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1960년대 대표적 참여시인이 되게 했다. <학생혁명시집>엮어 4.19의 정신을 자유와 정의로 읽고, 승리와 그 감격을 노래했다. 그러나 미완의 혁명은 쓰라린 좌절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 : 1961년. 이로써 사망할 때까지 8년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혁명의 좌절로 인한 정신주의에 몰두한 시기로 정신사적 시론 <時人精神論>을 발표(1961.2), 무정부주의·동양적 정신주의·민족주의를 나타낸 시관을 보여준다.

8.  5.16 이후

4.19의 좌절로 더욱 정신주의에 침잠한다. 정지척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1962년 건국대학원에 입학, 정신주의로 도피해 버티고자 한다. 이 때 쓴 시는 참여시 성격이 강한 작품에도 동양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정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시집<阿欺女>).

그 후 <주린 땅의 指導原理>(1963.11)에서야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정신주의 우세로부터 돌아와, 현실 참여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된다.

9.  6.3 사태

1964년 굴욕적 외교인 한일회담 일정합의와 정보기관의 학원사찰로 인한 학생 시위. 그러나 계엄 선포와 많은 학생들, 정치인, 언론인이 구속되는 결과를 낳고 좌절한다.

→이로써 신동엽은 정신주의의 안주에서 현실로 뛰쳐나오게 된다. (한일 협정 비준반대 서명참여). 적극적 현실 참여로 나온 <발>, <4월은 갈아엎는 달> 등이 발표된다.

10. 절정기

1967-1968. 개인 시사에서의 절정기.

→1967년 : 참여시의 극점인 <껍데기는 가라>(1월), 대작 <錦江>(12월)을 발표, 1960년대 참여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 하게된다.

→1968년 : 시인으로서의 삶이 절정에 이른 시기.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의 한 해 동안 가장 왕성하게 창작을 했다. <봄은>(2월), 오페레타<석가탑>,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6월), <여름고개>(8월), <散文詩1>(11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 많은 유작이 창작되었다.

이 해 그를 확고한 참여시인으로 평가했던 김수영의 죽음을 체험한다.

11.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사망. 3월 간암 진단을 받은 후, 퇴원하여 한약으로 버티면서 신체가 망가지고 혼수상태의 사경을 헤메며 투병하다 문병 온 남정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작가론

1. 작품 경향

1950년대의 우리 시단은 모더니즘의 물결과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의 조류로 크게 나뉘어 대립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면서도 역사와 현실의 진정한 문제를 피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모든 시인이 일치하는 형국을 드러내었는데, 신동엽은 이런 풍조를 철저히 배격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의 시세계를 출발시켰다. 당대 시단의 양대 주류를 거부한 채 처음부터 민중적 지식인으로 시를 익히고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50년대에 신동엽은 생애 가운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커다란 고통을 경험한다. 해방후의 갈등이 6·25와 남북 분단, 전후의 폐허로 이어지며 그가 겪게 된 허무와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그의 의식은 민족사의 비극인 6·25를 체험하면서 현실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된다. 이로 인해 민족의 정신적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동학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집약되었고, 이것이 서사시 「금강」을 낳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전후의 폐허에서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는데, 아픔을 딛고 시쓰기에 몰두하여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여행이 삭제되어 발표되고, 「진달래 산천」으로 불온성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1960년 4·19혁명은 그의 의식세계의 충격을 주었다. 50년대 후반, 전후의 좌절감과 허무감, 허탈감 같은 것으로 거의 모든 시들이 패배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던 상황에서 발발한 4·19혁명은 시대적 흐름에 대하여 방향 감각을 상실한 시인들에게 신선하고 강력한 충격으로 작용해 새로운 세계를 발을 내딛게 한다.

이렇듯 4·19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는 지식인의 사회 참여가 고조되었다. 그는 4·19혁명을 찬양하는 시 「아사녀」를 쓰고 7월에는 『학생혁명시집』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62년 무렵부터 그의 시세계는 비교적 안정을 찾아 정신지향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당시 4·19에서 5·16으로의 반전은 시인들에게 희망에서 절망으로 심정 변화를 유도했고, 또 다른 좌절을 맛보게 하였다. 따라서 그 고통을 정신 지향적 자세로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에 그가 쓴 시들이 1963년에 첫 시집 『아사녀』로 간행되었다.

그 후 65년 초까지 신동엽은 거의 침묵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새로운 모색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4·19에 대한 추상적인 기대와 희망이 무산된 뒤, 정신 지향적 세계에 머물던 신동엽은 그것이 갖는 현실 대응의 한계를 딛고 구체적으로 현실에 부딪쳐 나간다. 이 시기에 이르러 신동엽의 초기의 대지는 한반도로, 원초적 생명력의 그리움은 민족 주체성의 추구로, 과거 역사에의 관심은 구체적인 현실인식으로 전이되었다.

1965년에 시 「삼월」의 발표를 기점으로 '민중적 자기 긍정'에 도달한다. 그는 「발」, 「4월은 갈아 엎는 달」 등을 썼고 이어서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를 발표하였다. 「껍데기는 가라」에 대한 조동일과 김수영의 평가를 시작으로 그는 문단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1967년에는 4800여 행에 달하는 서사시 「금강」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문학의 결정판이 되었고, 그 결과로 신동엽은 확고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이 때의 작품들은 대개 민족적 동일성을 훼손시키는 모든 반민족적 세력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기조를 이루며, 민중에 대한 자기 긍정을 노래하고 있다.

2. 시어

신동엽의 시어는 고유어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이 점은 그의 시 소재와도 직결되어 있다. 그는 민족의 순수성 및 동일성 회복을 위하여 시적 표현으로 우리말의 순수성 회복에 역점을 두었다. 고유어는 자연을 표상하는 시어가 많고,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노동이나 민속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또한 다수의 한자어를 사용하였는데, 한자는 관념적인 제목이나 추상적인 어구 혹은 강조하고자 하는 시어와 고유 명사, 특히 자연물, 문명, 인칭 등에서 높은 빈도를 보인다. 그리고 외래어의 사용은 대개 지명, 인명, 문명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경우에 국한하였고, 무질서하게 외래어를 쓰지는 않았다.

그는 시어의 반복적 사용으로 상징적 의미를 형성하고, 단일 시편 속에서 반복됨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나타낸다. 아울러 그의 시에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시어가 많이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시어는 감탄적 성향을 다분하게 드러냄으로써 시어의 '자기 표출성'이 강하다. 이 점은 시에 긴장감이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약화시킴으로서 시적 묘미를 절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3. 소재

·原數性의 소재 : 숲속, 대지, 달밤, 원무 등 → 생명력이 넘쳐나는 대지,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세계 형상화

·次數性의 세계 : 현대 문명, 세계 전쟁, 모래밭, 고드름, 구름, 사막 등 →우리 민족의 역사적 모순, 현대 문명과 전쟁, 민중들의 삶

·歸數性의 세계 : 전경인, 대지를 갈아 엎고 씨뿌리는 행위, 강, 불, 눈동자 등 →대개 역동적인 힘을 동반한 소재, 수직 상승이나 수평 이동의 움직임을 통해서 현실 극복 의지를 보여 주며 순수성과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음

4. 어조

강하고 뚜렷한 남성적 어조와 여리고 자기 고백적인 여성적 어조가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어조의 혼용 양상은 그의 시에 흐르는 저항과 거부, 연민과 비애의 정서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여성적 어조는 한국 전통 시가와 연관성을 갖고 있는 반면에, 남성적 어조는 직설적이고도 능동적 측면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직접적인 발언의 저항시로 파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정적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비극적 정서와 여성주의는 한국 시문학의 정서적 원형질로서 신동엽도 여기에 맥을 잇는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항시 민족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점이 전통적인 측면과는 다르다.

5. 율격

그의 시 전반에 나타나는 율격은 민요적 성격이 강하며 한의 정서를 표출한다. 짧고 간결한 행의 운율과 여성적 어조는 한을 드러내는 민요의 전통적 분위기로 이해된다. 그의 시 기본 율격은 민요의 율격인 3음보격과 4음보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율격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다양한 변용까지를 수용하여 현대적 감각을 살리고 있다.

6. 문학사적 의의 - 참여시, 전통성 계승

그는 1950년대의 혼미한 문단에 발을 딛고, 1960년대의 이 땅 현대 시사에 현실 대응의 한 문학적 전범을 보여 주었다. 그의 문학적 가치의 한 측면은 현대의 문명과 사회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70, 80년대로 이어지는 민족문학, 민중문학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시는 전통적 요소의 시적 수용과 현실 대응이라는 문제를 잘 결합시켜 놓았다. 이 점에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시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의 시는 여성적 어조의 문제, 민요의 율격과 고유어 및 토속어의 활용 그리고 우리 민족의 한을 형상화하였는데, 그 이전의 시들이 대개 개인의 고백적 양상을 보여 주었던 점을 뛰어넘어, 그의 시는 민족적인 문제로 확대되어 간 점을 가치 있게 들 수 있다.

7. 신동엽의 시세계

50년대 전후 문인인 신동엽은 전후 시인들이 답습했던 '1950년대 모더니즘'을 향유하지 않았다. 농촌 정서를 바탕으로 민족의 토착적인 서정성을 구사하여, 역사의식을 담은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특히 그는 장시의 이야기를 담화함에 있어 과거 역사의 사실을 현재화하는 원근 조명법을 써 살아있는 현재로 역사가 복원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신동엽은 시를 개인적 즐거움보다는 '민족 공동체의 노래'로서의 시에 의미를 두었던 만큼 이념적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는 시를 이념의 대행물이나 종속물 또는 도구화로 만들지 않았다. 그의 시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를 '하늘, 눈동자, 껍데기, 알맹이, 4월, 동학, 아사달과 아사녀, 중립, 흙가슴, 쇠붙이' 등은 신비롭거나 원시적이며 상고 시대의 동양적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그의 시는 이러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시적인 즐거움과 함께 이념을 보다 순수하게 승화시키고 있다.

8. 신동엽 시의 문학사적 위치

신동엽이 문단에 등단한 1950년대 말은 자유당 독재 정부에 의해 반공 이념만이 허용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진달래 산천'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쟁의 아픔과 분단이라는 사오항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4 19와 5 16을 겪으면서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그 예가 장편 서사시 '금강'과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단시이다. 이러한 시를 통하여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민중의 정서에 따른 시적 형상을 창조한다.

즉, 그는 민족의 현실이 여러 불합리한 상황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기에 이른다. 이런 측면에서 1960년대는 김수영의 시와 더불어 참여시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출전 : 김현숙의 홈페이지-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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