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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1-07 (수) 23:00
분 류 사전3
ㆍ조회: 1785      
[현대] 김춘수 (금성)
김춘수 金春洙

1. 약력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에서 출생, 통영보통학교를 거쳐 명문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스스로 퇴학하고 1940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였으나 1942년 12월 사상 혐의로 퇴학 처분 당하였다.

이후 충무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통영중학 교사로 재직 시절인 19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했다. 49년 다시 마산중학으로 옮기고 제2시집 <늪>, 제3시집 <旗>, 제4시집 <隣人>을 차례로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60년대부터 해인대, 경북대, 영남대 교수를 차례로 거쳐 81년에는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국시인협회상, 자유아세아 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82년에는 문장사에서 詩와 詩論에 대한 <김춘수 전집>을 출간하여 회갑 맞이 작품 정리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의 여행을 통해서 그의 무의미 시를 다져 가고 있다.

2. 김춘수 詩의 변천사(意味에서 無意味까지)

김춘수의 詩는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 큰 변화의 단계가 있다.

그 첫번째가 첫 시집이 나오던 47년 무렵부터 50년대의 <꽃>에 대한 일련의 詩가 생산되던 시기까지로 볼 수가 있다. 이 시기를 시인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自己內 世界'의 시절이라고 한다.

두번째 단계는 57년의 詩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후로 시작되는 `말의 트레이닝' 단계이다. 이때 시인은 의식과 무의식의 詩作에서의 상관 관계에 천착하게 된다.

마지막 변화의 단계는 두번째 단계의 시도가 거의 완성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처용단장 2부>를 시작하던 무렵부터로 본다. 이때부터 시인은 완벽하게 보통 시 속에서 보여지는 통일된 image를 버리고 일정하고 보편적인 세계관에서 이탈하며 철저한 허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가) 意味의 시기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의 설명을 보면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도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따라서 장미를 노래한 것은 하나의 이국 취미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시인은 하나의 시적 방법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촉각'에 의지한 詩를 썼으며 그것은 意味(말)보다 먼저 tone이 앞섰다.

시인의 발상은 서구의 관념 철학으로 접근해 갔으며, 그가 사숙(私淑)했던 릴케의 영향력과 함께 형이상학적 인식의 세계로 침잠하여 선험의 세계를 떠돌기에 이른다. 그러다 결국 시인은 '실제 감각' 따위를 잃어버리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의 바닥에서 끝내는 '허무'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존재의 허무함 앞에서 시인은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의 詩를 남기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詩들을 고비로 시인은 의식적으로 '말의 트레이닝' 곧 '데생 시기'로 돌입하게 된다.

나) 意味에서 無意味로

시인은 50년 말에서 60년 전반에 걸쳐 이른바 '말의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그것은 관습적인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물의 의미와 질서에 대한 시적 재구성을 해가는 작업이었다. 그에 의하면 비유적 image를 버리고 image를 위한 image로써 詩를 일종의 순수한 상태로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세잔이 사생(寫生)을 거쳐 추상에 이르는 과정을 확신하고, 詩로 이 과정을 대체 경험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사생이라고해서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 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을 버리기도하고, 과장되게도 하고, 실제와 전혀 다르게 재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상의 재구성이며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 연상이 끼이게 되는 것이다. <처용단장 제 1부>는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쓰여진 연작시이다.

여기서 '말의 트레이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일종의 '언어 유희'이다. 李箱의 시가 '말의 장난'이었던 것처럼 이 시기의 김춘수의 시를 '예술=장난'이라는 오락 예술론의 재시도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무엇이가를 말하려는 시가 아니라 무념무상의 세계로서, 의미가 없는 전체적이며 동시적인 어떤 '연상(聯想)의 순간'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으로 이러한 것을 '무의미 시'로 지칭한다.

다) 無意味詩

김춘수는 image를 image 그 자체가 목적인 서술적 심상과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인 비유적 심상으로 나누고, 서술적 심상을 다시 대상을 가진 서술적 심상과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으로 나누면서, 바로 이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에서 無意味시가 탄생한다고 하였다.

시인의 표현을 직접 빌리면

[나에게 있어 무의미란 무엇일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의미시는 관습이나 기성 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가 된다. 허무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의미 이전의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고 하여 그의 시를 지탱시키는 현상학적 에너지가 '허무'임을 이야기한다. 즉 李箱의 경우처럼 대상과 사물과 관념을 제거시키고난 어떤 방심상태, 그 자유스러운 유희의 상태가 곧 '무의미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미시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image들을 비논리적으로 결합시킨 대상을 놓친 절대 심상인 것이다.

다른 시인들은 image를 얻으려는데 비해 김춘수는 image를 버리려 한다. image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image의 명중성, 의미성, 상징성 따위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대상의 구속을 받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 행위와 사고 행위가 빚어내는 무의미시, 곧 탈image의 리듬과 쾌감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그의 시이다.


3. 김춘수 詩에 있어서의 개인적 상징

김춘수의 시가 난해한 이유는 기법상의 초현대성과 함께 보편성이 없는 개인적 상징을 그의 시어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다>, <꽃> 같은 시어들은 그의 시 속에서 특수한 의미로 표현되는데 특히 <처용단장>의 주된 맥을 이루는 <바다>에 대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바다는 '병'이고 '죽음'이기도 하지만, 바다는 또한 '회복'이고 '부활'이기도 하다. 바다는 내 '유년'(幼年)이고 또한 내 '무덤'이다.]

라고 했다. 곧 시인은 <바다>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의미간의 무상관성 때문에 시는 자연히 보편성을 잃고 난해해지는 것이다.

4. 인간 김춘수

김춘수는 충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난 귀공자였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자전적인 그의 소설 <처용>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한 그의 생활이 장년이나 노년이 된 이후에도 그를 현실에서 좀 떨어진 고고한 위치에 서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양복 윗도리를 매일 갈아입는 멋쟁이였으며, 미식가였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선별적으로 사귈 만큼 성격에 융통성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허약해 보이는 체구와 여자의 손처럼 희고 깨끗한 손, 거울 같은 구두에 드러나는 그의 결벽성은, 여러 제자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가 제자들이 술집 여자로 접대하려하면 가차없이 내쫓아버리는 공선생 같은 면모와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신체의 결정적 결함이었던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한 때는 가발을 쓰고 다니기도 했지만 딸들의 절대적인 반대에 부딪쳐, 계절에 맞게 여러 개의 모자로 대신하기로 했다. 한때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전증까지 일으켰지만 수술 후에는 오히려 몸이 불어나 얼굴에는 윤기가 나고 배가 앞으로 나올 만큼 풍체가 좋아졌으며 자연히 수전증도 사라졌다. 그의 결단력 또한 대단해 수술 후에 결연히 금연을 해 동료 흡연가들을 놀라게 했다.

집안에서 그는 전기 휴즈도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7,8년간 사진 한 장 찍어보지 못할 만큼 세상살이에는 무관했으며 심지어 카메라의 셔터가 어느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그는 고소 공포증이 심각해서 74년에 새로 집을 지을 당시 2층 계단에도 올라서지 못할 정도여서 옆집에 살던 동료 교수가 대신 감독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 시절 의원 사절단으로 세계 일주를 다녀오면서 그 심각한 고소 공포증을 고쳤다고 하니 국회의원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는 예술가답게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8년간 제자 양성에 정성을 기울인 경북대를 떠나 영남대로 자리를 옮긴 것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악명높던 K총장과 그 주변 인물이 무슨 심의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직,간접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그는 시인이지만 그림에도, 조각에도, 꽃에도 조예가 깊다. 벽에 걸린 탈이나 그림을 늘 즐거이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한다. 지금도 그의 집 안마당에는 전라(全裸)의 여인상이 자리하고 있고 수많은 기화요초가 향기를 품고 있으며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들면 즉석에서 구입하는 분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대학에서 행한 그의 강의는 언제나 열강이었다. 국문학과 전공 강의인 <시론>시간에는 학년 정원의 3배를 웃도는 수강생으로 북적였으며 늘 시간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강의를 계속해 다음 시간의 교수를 복도에 오래 세워 놓기도 했다.

제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로 진출한 뒤 그는 어느 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 정치와는 관련이 없던 시인이 의원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내게 있어 시는 최선의 도덕적 결백을 위한 윤리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치란 최선을 우선하다 차선, 삼선의 여지로서 운영되는 현실에 대한 나의 참여이다."라고 자신의 견해와 입지를 밝히기도 했다.

시인이요, 교수요,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인간 김춘수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냉담한 느낌의 외모를 가졌지만, 드넓은 통영 앞바다를 사계절 지켜 보며 자란 까닭에 깊고 담담한 인품과 경상도 남자답게 표현에 능숙하지 못한, 조금은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참고자료

김준오, {시론}
김준오 <처용시학> - 김춘수의 무의미시. {부대논문집} 1980
조남익 {한국 현대시 해설} 미래문화사
권기호 외 {김춘수 시 연구} 흐름사
부산대 {국어국문학지} 1986년호
{김춘수 시선집} 문학세계사

출전 : 부산 금성고등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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