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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9 (토)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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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141      
[현대] 대한민국6-정치 (브리)
대한민국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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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사

한국은 1945년, 35년간의 일본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나, 해방후 우리의 정치는 국제적 냉전구조에 의해 틀이 만들어져 있었다. 냉전구조는 한국인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분단과 전쟁의 고통을 한국인에 강요했다. 해방 직후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을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지배함으로써 민족과 국토가 양분되었다.

그 후 3년동안 점령국인 미·소의 대립과 남과 북의 지도자들간의 반목과 불화로 통일정부의 수립이 무산되었고, 남과 북에 별도의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 분단이 확정되면서 38°선 이남지역에 국제연합(UN)의 결의에 의해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동년 5월 31일에 처음으로 개원한 제헌의회는 7월 17일에 새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했다. 1945년 8월 15일 새공화국의 헌법에 근거하여 새 정부의 수립이 선포됨으로써 해방후 3년간의 미군정이 종식되었고 대한민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 한국의 정치사는 다음 6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제1공화국(1948~60), ② 제2공화국(1960~61), ③ 1961년의 5·16군사정변에 이은 제3공화국(1963~72), ④ 유신체제로 일컬어지는 제4공화국(1972~79), ⑤ 제5공화국(1980~87), ⑥ 제6공화국(1988~현재).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8·15해방 이후 주요정치연표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제1공화국

1948년에 수립된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끌었던 제1공화국은 제한적 민주주의 또는 준경쟁적 권위주의(quasi-competitive authoritarianism)로 특징지워진다. 이승만이 주도했던 1950년대의 한국정치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거가 주기적으로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1948년의 제헌의회 의원 선거 2년후에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이래 4년마다 어김없이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으며 1952년 최초로 대통령 직선이 이루어진 후 4년마다 대통령선거와 지방의회선거도 주기적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1952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집권을 계속 보장하는 방향으로 헌법개정을 강행함으로써 경쟁의 공정성, 경쟁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을 침해했다. 1952년의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경쟁결과의 불확실성을 뒤집고 경쟁결과의 사전적(ex ante) 확실성을 추구하려는 시도로서 그후 반세기동안의 헌정사를 얼룩지게한 출발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의해 1952년에 재선되었고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통하여 1956년 또다시 4년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라는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틀내에 정치를 묶어 놓았고 조봉암의 진보당을 비롯한 모든 진보세력과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여기에 더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정권은 신국가보안법제정, 〈경향신문〉 폐간,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 폐지등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규범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폭거를 자행함으로써 정당성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정당성의 위기는 1958년부터 시작된 경제침체와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는 추락했고, 마침내 1960년 3·15부정선거와 독재에 항의하는 4·19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고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제2공화국

4·19혁명 이후 허정이 이끄는 과도내각을 거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최초의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체제였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단명했다. 4·19이후 정권을 인계받은 세력은 제도권 보수야당인 민주당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사사오입개헌파동이후 자유당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이념과 지지기반의 차이를 넘어서 결성된 우산정당(umbrella party)이었다.

자유당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고 난 뒤 민주당을 구성했던 분파들은 적대적인 경쟁자의 관계로 돌아섰으며 그 결과 권력을 인계받은 장면정권은 약체정권을 면할 수 없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총리로 선출된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경제발전과 사회개혁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정치·사회의 변동기에 분출한 국민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지기반의 취약성으로 인해 장면 정권은 진보와 보수중 어느 세력도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급진 개혁세력들은 부정선거, 권력남용, 부정축재자처벌에서 정부가 너무 미온적이라 비난했고, 한편 혁신세력의 상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위험시하던 반공우익세력은 혁신세력에 대한 제재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장면 정권을 공격했다. 장면 정부는 좌우의 협공을 받다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과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5·16군사정변에 의해 붕괴되었고, 제2공화국은 수립 9개월 만에 사망했다.

제3공화국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해 2년간의 군부 직접 통치를 거친 뒤 형식적 민주주의로 복귀했다. 박정희와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군부의 직접 통치의 계속을 희망했으나, 미국과 시민들의 압력에 못이겨 마지 못해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복귀했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2년 12월 강력한 대통령과 약한 단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시켰다. 박정희는 정권의 이양과 관련해 몇 차례의 의사번복을 거친 끝에 1963년 봄 군부에 대한 지지정당으로 조직된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고, 10월 15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민정당의 윤보선 대통령후보와 경합해 근소한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이와같이 쿠데타 이후 2년여에 걸친 군부직접통치를 끝내고 박정희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에 복귀했지만, 박정희가 지향한 것은 민주적 정치질서의 창출이 아니라 강력한 권위주의적 질서를 토대로 근대화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산업화의 정치가 전개되면서 경제주의와 행정주의가 정치의 자율성을 억압했다.

'선성장, 후분배'의 구호아래 정치는 산업화를 지원하는 종속적 지위로 격하되었다. 제3공화국하에서 정당이 복구되고 국민의 대표가 의사당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지만 국민의 생활을 설계하는 자들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었다. 갈수록 정당, 이익집단, 결사체가 이끌어가는 정치의 영역이 줄어든 반면, 행정의 영역은 늘어만 갔다.

제3공화국하에서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와 같은 정권안보기구를 수립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비해 월등한 물리적 강제력과 정보통제력을 갖고 있었으나, 주기적 선거, 반대당의 허용, 상당한 언론의 자유, 노조의 허용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는 제한적으로 유지했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의 성공으로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67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헌법의 임기제한에 의해 3선 출마가 불가능해지자 1969년 야당과 학생들은 물론 공화당내의 김종필 지지세력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3번째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1년의 2회의 선거는 박정희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내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1년의 선거에서 야당의 후보인 김대중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고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뒤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분열과 관권선거라는 불리한 여건하에서도 대도시지역을 석권해 89석을 획득함으로써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113석에 근접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개헌시도를 저지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1971년 선거이후 노동자, 빈민, 지식인의 저항이 분출했고 박정희 정권은 선거를 통한 권력유지방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을 폐기하는 유신체제의 수립작업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3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1971년 12월 불안한 안보정세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무렵 미국과 중국 간의 화해, 중국·일본 간의 국교정상화 등 정세변화에 따라 남북대화가 열리게 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간의 관계개선을 상징하는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 색인 : 7·4남북공동성명).박정희 대통령은 안보위기에 대처하고 통일에 대비해 국력을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여 헌정을 중단시킨 후 11월 계엄령하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이른바 ' 유신헌법'을 공표했다.

제4공화국

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독재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극도로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였다.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는 국민적 동의에 기초해서 권력을 위임받고 행사하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자신을 행정, 입법·사법 3부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인 독재자로 부상시켰다. 유신체제하에서 대의정치와 정당정치는 황혼을 맞이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그 가운데 2/3는 1구 2의석의 중선거구에서 선출하고 1/3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1/3에 달하는 유신정우회 의원을 확보하게 되었고 자연히 여당인 공화당에의 의존은 줄어들게 되었다. 강한 여당은 강한 야당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야당과의 권력경쟁 자체가 소멸된 상황하에서 집권 여당은 할 일이 없어졌다. 유신체제하에서 여당도 야당도 아닌 박정희의 친위 보안부대인 중앙정보부, 경호실, 보안사령부 등이 국민의 여론을 수집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사회는 해체를 강요당했다. 노동자들은 병영식으로 통제되었고 농민들은 새마을 운동의 일원으로 편성되었으며,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 통제도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비민주적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야당은 물론 원외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나갔고 이에 대해 정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대처했으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은 확대되어 갔다.

민심이 민주공화당 정권을 떠나버린 결과로 마침내 19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도 더 많은 표를 획득하는 이변이 일어났고(신민당 32.8%, 민주공화당 31.7%), 이에 고무된 신민당은 김영삼을 새 총재로 선출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공격을 가중시켰고,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그 결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의 시위소요사태인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일어났고 부마사태의 진압을 위해 부산과 마산지역에 계엄령이 발동된 가운데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 색인 : 10·26사태). 박정희의 피살 직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에 의해 국무총리 최규하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나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유신정권의 붕괴는 권위주의 독재의 제도화에 실패한데서 기인한다. 박정희는 자신이 물러난 뒤에도 유신정권을 계속 유지 시킬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제도화된 정치조직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권력은 박정희와 근위병조직인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호실로 집중되었고 제도화된 정치조직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강권조직을 핵심으로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강경일변도로 밀고 나가는 '권력경화증'에 걸려 있었다. 결국 유신정권은 비제도화된 집정관적(praetorian) 권위주의 정권이었고 유신의 창업자인 박정희가 피살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제5공화국


1980년 5월 18~27일
박정희가 이끄는 유신체제는 무너졌으나 전두환을 중심으로하는 신군부세력이 광주대학살이라는 유혈극을 벌인 끝에 권력을 찬탈하고 또 다른 억압적인 권위주의체제를 부활시켰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12·12사태로 군부를 장악했고 이들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해 모든 정당과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정치지도자들을 체포함으로써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욕구를 좌절시켰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에 반대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함으로써 사실상의 권력을 장악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게엄령하에서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고, 새헌법에 의거해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당선된 전두환이 1981년 3월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유혈극을 치르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태생적인 정통성의 결함에 시달려야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헌법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7년 단임제의 채택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높히려 했으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이후 학원자율화조치, 정치인 해금조치 등의 유화정치를 실시했으나, 이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높히기 보다는 오히려 전두환정권에 반대하는 야당, 재야인사, 시민운동세력,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동원을 조직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을 통해 패권적 집권여당과 다수의 군소야당으로 구성된 다당제구조를 공고히하려했다. 그러나 2·12 선거에서 사회운동세력들이 해금된 보수야당 정치인들의 조직인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한민주당의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한 결과 신당바람이 일어났다. 2·12 총선결과 신한민주당이 67석을 획득했고 '충성스런 야당'인 민한당은 35석밖에 얻지 못했다. 2·12 총선은 권력의 소재지의 변경을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민의의 소재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되었고 신한민주당은 사실상 해체된 민한당을 흡수함으로써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했다.

2·12 총선 이후 신한민주당이라는 강력한 조직적 반대세력이 제도정치권에 등장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은 일방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갈 수 없게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을 개헌을 위한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압력을 가했으나 여전히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전두환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신한민주당은 2·12 총선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에 '일천만 개헌추진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직접 거리로 나가 대중을 동원했다. 신한민주당과 사회운동세력간의 연합에 의한 대중동원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1986년 4월 30일 개헌협상테이블을 여는데 양보했다. 그후 1년동안 개헌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신민당의 대통령직선제와 정부여당의 내각책임제는 접점이 없이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고 1986년 7월 30일 발족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단 한차례의 공식회의도 열지 못했다. 여야간의 개헌협상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과 사회운동세력의 거리 시위는 격화되었다. 혼란의 와중에서 정권은 제도권 야당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에 나섰다. 1986년 12월 24일 명목상의 신민당 총재인 이민우는 7개항의 자유화조치가 선행되면 민정당의 내각제개헌안을 고려해보겠다는 소위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야당의 실질적 두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여당에 협조적인 이민우 구상에 동조하는 당내분파를 숙청하기 위해 66명의 의원을 이끌고 신민당을 탈당하여 김영삼을 총재로 하는 통일민주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직선제 개헌에 대한 양김씨의 일관된 자세는 제도권 야당의 기회주의를 의심해왔던 사회운동세력들의 야당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데 기여했다. 이민우 구상의 좌초로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협상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개헌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1987년 4월 13일 야당과의 개헌협상을 마감하고 현행 헌법 방식에 의해 대통령직을 후임자에게 승계하겠다는 4·13 호헌선언을 했다.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의 물결이 거리를 휩쓸었다. 이러는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적 저항운동이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이제까지 방관자적 자세를 보여왔던 중산층들이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제도권 야당과 사회운동세력들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연합조직을 결성했고, 국민운동본부는 1987년 6월 10일 12·12사태의 주역중의 한명인 노태우의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후보지명일에 맞추어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조직했다. 소위 ' 6월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6월민주화운동은 야당, 사회운동세력, 학생, 중산층을 포함하는 최대 민주화연합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시위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연합의 핵심적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연합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 6·29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사태의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고 신민당의 두 지도자는 정권의 즉각적인 퇴진을 수반하지 않는 6·29선언을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민주화를 위한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1987년 6·29선언으로 대타협이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거리의 정치는 자연히 개헌과 선거정치로 이동했다. 여야간의 일련의 협상을 거친 후 대통령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채택되었다. 선거국면이 전개되면서 민주화의 두 주역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일어났다.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양김씨는 그들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협력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난 뒤 그들은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경쟁이다. 그러므로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뭉쳤던 세력들이 민주화 이후 서로 다른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경쟁한다는 것은 너무도 '민주적'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갈라서기'가 너무 빨리 왔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완결되기도 전에 민주화를 주도하던 세력들은 두 대통령후보(김영삼, 김대중)를 중심으로 나뉘어졌고 그 결과 구권위주의세력이 지원하는 후보인 노태우에게 선거승리를 안겨 주었다.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가 단일화되지 않고서는 정부와 집권당의 지원이라는 엄청난 이점을 안고 있는 노태우후보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희박했다. 더구나 집권세력에 의해서 지역주의가 동원됨으로써 두 야당후보 지지표의 지역적 고착화를 가져와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대다수의 표를 어느 한 후보에 집중시키지 못했다. 이에 더하여 사회운동세력까지 양김을 따라서 분열함으로써 구권위주의세력의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가 등장한 후 1988년 4월 26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구권위주의 세력들이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선거에서 두 야당후보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조성한 지역주의는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표의 지역적 고착화 현상으로 나타나 의회에서 안정적 다수를 꾀하던 집권여당이 1950년대 이래 최초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총선 직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재빨리 3당공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여소야대의 권력구조가 등장했다. 세 야당의 느슨한 연합이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구권위주의 세력이 민주화의 의제와 속도를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정치지형이 형성되었다.

의회를 장악한 세 야당은 노태우 정권에 5공비리를 파헤치고 군부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노태우 정권 역시 5공을 청산하라는 야당과 국민으로부터의 압력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5공세력을 정권의 핵심으로부터 축출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는 전략적 계산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가 성공리에 치러진 후, 야당은 국정조사권을 활용해 5공화국의 비리와 의혹을 파헤치는 조사에 착수했고 10월에는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5공청산을 위한 청문회 정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과 친인척의 축출과 사법처리를 거쳐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 국민 사과를 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5공청산을 위한 청문회는 신생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역행하는 민중주의의 정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은 거리에서의 시위를 통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이익집단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함으로써 제도권 정치가 거리의 정치에 압도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거리로부터의 요구를 제도권에서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거리의 장외정치세력을 장내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구권위주의체제와의 연속성 위에서 태어난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리의 의회'의 확산은 보수세력의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켜 신생 민주주의를 불안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더하여 1989년의 동구와 러시아의 사회주의 몰락과 3저현상의 소멸로 인한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 약화가 노태우 정권에게 보수회귀를 위한 구실을 제공했다.

1989년의 공안정국의 조성에서부터 출발하여 1990년초 3당합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조치를 통해 노태우 정권은 수세기를 마무리하고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반격에 나섰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당의 노태우 총재,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합당에 합의함으로써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다. 3당합당으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에서 벗어나 의회 내에서 안정적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3당합당은 여소야대하에서 추진되어오던 민주화 개혁의 종식을 가져왔다. 먼저 지방자치의 실시가 기초자치의회 선거로 축소되고 지방자치의 핵심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여론과 야당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차기 정권으로 연기되었다. 6공화국 초기에는 경제력 집중억제시책, 금융실명제 준비, 토지공개념 관련 법안 추진 등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개혁시도가 있었으나 3당합당 이후 경제민주화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들이 퇴장을 강요당했고 여소야대 시기에 추진되어왔던 경제개혁은 무산되거나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조직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도 강화되었다. 3당합당 이후 취해진 노태우 정권의 대노동자공세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와 같은 변혁지향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불법화, 무노동무임금원칙의 엄격한 적용, 총액임금제와 같은 임금가이드라인의 부활 등으로 나타났다.

3당합당은 지역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3당합당은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평민당을 배제한 반호남의 정치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3당합당은 한국 국민을 지역에 근거한 '2개의 국민'(two nations), 즉 호남 대 비호남으로 갈라놓았다. 3당합당이 의도한 2개의 국민전략은 선거정치에서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91년 지방의회의원 선거에서 평민당은 부산, 대구, 경남, 경북, 충북, 제주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그후 평민당과 3당합당에 동참하지 않은 통일민주당 의원들이 결성한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민주당이라는 통합 야당이 출현했으나 1992년의 총선에서도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92년의 총선은 같은 해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92년 3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특기할 사실은 정주영이라는 한국의 최대 재벌총수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의 돌풍이었다. 창당 후 불과 2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당은 유효득표수의 18%를 얻어 31석을 당선시키는 이변을 창출했고 정주영은 이에 고무되어 차기 대통령을 꿈꾸게 되었다. 총선이 끝난 후 정국의 초점은 자연히 연말의 대통령 선거로 모아지게 되었다. 민자당 후보의 결정과정에서 당내 소수파의 수장인 김영삼은 다수파를 누르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의 독특한 수동적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노태우 대통령은 후계자 선출과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집권여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민주적 과정을 통한 대통령 후보의 선출을 가능하게 했으며, 집권여당인 민자당을 탈당하고 야당의 중립적 선거관리내각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선거 이후의 정통성 시비를 제거하여 평화적 정권이양에 기여했다. 1992년의 대선에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42.0%를 얻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33.8%)와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16.3%)를 누르고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민주화의 진전을 의미했다. 김영삼 정부의 등장은 1960년대 이래 처음으로 한국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간인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계승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는 자신을 ' 문민정부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규정했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첫째가는 역사적 과제는 군부권위주의의 해체작업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김영삼 정부가 구권위주의세력의 지지를 받아서 출범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가 개혁보다는 현상유지를 꾀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김영삼 정부는 예상을 뒤엎고 구권위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에 나섰다. 먼저 구권위주의 정권의 핵을 이루고 있었던 군부 엘리트들을 숙청했고, 군부 내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려오던 하나회와 같은 정치군인 집단들을 해체했으며,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재확립했다. 안기부에 대한 국회의 통제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었으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이 금지되고 활동영역을 군 내부로 한정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음으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관료와 정치인의 사정에 나섰으며 1993년 6월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해 공직자 재산공개와 등록을 제도화했다. 또한 정치자금법 개정과 금융실명제의 단안을 내림으로써 권력과 금력간의 유착관계를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깨끗한 정치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1995년 6월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는 4대 지방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중앙정치에서 시작된 민주화를 지방으로 확산시켰다.

김영삼 정부의 전광석화 같은 개혁조치에 기득권 세력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개혁으로 인한 가시적인 과실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기득권 세력들은 개혁에 대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혁정치에 대한 불만은 1995년의 지방선거에서 표출되었다. 이러한 개혁정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김영삼 정부는 '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 나섰다. 1995년 12월 19일 자민련을 제외한 여야 대다수 의원들의 찬성으로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역사바로세우기는 법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12·12, 5·18 관련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세계 민주화 역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겼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에서 군부권위주의정권의 과거를 단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예상을 뒤엎고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과거를 단죄함으로써 집권 후반기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1996년의 최대의 정치행사인 총선에서 승리의 초석을 쌓았다.

1997년의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달성한 민주화 10년을 자축하고 21세기 한국의 진로를 선택하는 잔치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시련에 부딪쳤다. 1996년까지만 하더라도 낙관적 분위기가 한국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1997년 선거의 해가 시작되면서부터 한국형 발전모델의 문제점이 연속적으로 노출되었다. 1996년말에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화이트칼라와 민주화 시민운동의 동참을 불러일으키면서 1987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화 사회운동세력과 노동운동세력 간의 확장된 연합을 형성시켰고 최대한으로 확장된 저항연합은 김영삼 정권으로 하여금 유연적 노동시장을 마련하려던 개혁조치를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노동법파동은 불길한 조짐이었다. 노동법 파동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한보사태와 김현철파동이 연이어 터졌다. 한보사태와 김현철 파동은 한국 자본주의가 아직도 투명성과 절차적 공정성을 갖추지 못하고 정치인, 기업인, 금융인 간의 3각유착관계의 네트워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거의 해에 터져나온 내부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김영삼 정부는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단행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한보사태에 이어 진로, 대농, 기아와 같은 재벌의 부도가 연이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는 '부도유예협약'이라는 형태로 문제를 봉합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신호는 외부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다. 타이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에 상륙했을 때, 세계 자본가들이 한국 금융의 건전성을 시험하자 한국 자본주의의 취약성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마침내 국가부도까지 몰리게 된 경제위기가 발발했다. 국가부도의 벼랑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을 받는 대가로 IMF 관리체제를 수용하는 형태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한국형 발전모델에 대한 한국인들의 자존심과 신뢰는 산산히 부수어져 버렸다.

위기와 함께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제 1997년의 대선은 민주화 10년을 자축하는 축제가 아니라 IMF 관리체제를 초래한 국난의 극복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말하자면 누가 이 국난을 초래했으며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무엇인가였다. 위기적 상황에서의 선택의 결과는 먼저 김대중 정부로의 정권교체였다. 정부수립 50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정권교체는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위기상황에서 여에서 야로 정권교체를 선택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정권의 실패를 표로써 심판할 수 있는 주권자로서의 능력을 과시했다. 또한 위기상황에서 평화적인 선거를 치러냄으로써 한국인들은 외부적 상황의 변동에 관계없이 민주주의가 '우리 동네의 유일한 게임'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다. 말하자면 1997년의 선거는 한국 민주주의가 전환의 과정을 마감하고 공고화 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결정적 문턱을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로 1997년의 선택은 이제까지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배제된 세력에게 민주화를 위한 국민통합을 위임한 선택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스스로를 ' 국민의 정부'라고 규정함으로써 지역통합, 사회통합, 민족통합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에 화답했다. 셋째로, 김대중 정부는 냉전의 해체와 경제의 세계화라는 세계사적인 대전환기에 민주주의, 시장경제, 세계주의로의 3중적 전환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에 호응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새 정부의 국정의 기본 이념이라고 선언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에게 1998년은 위기관리의 해였다. 위기하의 한국경제를 IMF와의 협조하에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1998년에 김대중 정부에 맡겨진 첫번째 과제였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기 전부터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했던 5대 재벌그룹 총수들과 시장경제 원리에 맞는 방향으로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노동자의 협력 없이는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했다. 뒤이어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적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기업, 금융, 노동, 공공의 4대 부문에서 포괄적인 경제구조개혁이 실시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관리노력과 4대 부문 구조조정의 결과로 한국은 외환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노력과 국민들의 위기의식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경제위기는 진정되었으나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정치는 위기에 처한 경제를 소생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한국경제의 재도약에 짐이 되고 있다. 고비용 저효율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제도개혁은 지지부진한 가운데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지역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치개혁이 앞으로 김대중 정부에게 맡겨진 최대 과제임을 시사해 준다.

대외관계

외교현황

분단국으로 출발한 대한민국 외교의 기본 과제는 국제사회로부터 정통성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생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 정부수립 후 되도록 많은 나라와 국제기구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을 외교의 우선적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세계정부의 성격을 가진 국제기구인 국제연합(UN)은 1948년 12월 한국정부를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했고, 북한의 침략에 대해 UN군을 파견했으나 북한을 지지하는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의 반대로 40년 이상이나 UN 회원국 가입을 저지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89년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냉전체제가 종식됨에 따라 한국 외교의 반경은 전세계를 포괄하게 되었다. 한국은 1991년 9월 북한과 함께 UN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했으며 1998년 9월 현재 수교국의 숫자는 러시아 등 구사회주의 국가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183개국에 이르렀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북한의 경제적 실패, 한국의 경제적 도약으로 남북한간의 외교경쟁은 한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와 상호경제회의(CMEA)의 해체는 북한을 외교적, 경제적 고립에 빠뜨린 반면, 한국은 경제적 강국으로 부상한 데 힘입어 동유럽과 러시아의 구사회주의권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비동맹 제3세계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확대, 심화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한국외교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에 힘입어 과거의 원조수혜국의 위치에서 벗어나 원조공여국으로 지위상승에 성공했고, 민주화로 인권침해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당당하게 지구촌 민주주의의 일원이 되었다. 달라진 한국의 위상은 선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초청을 받음으로써 확인되었다. OECD의 일원이 됨으로써 한국은 빈곤과 독재가 공존하는 제3세계로부터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가 상생하는 제1세계로 지위상승을 이룩할 수 있었다.

건국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 외교의 핵심분야는 안보외교, 경제외교, 통일외교였다. 건국 이후 분단국가의 수립과 한국전쟁을 치른 한국의 외교 중심축은 안보외교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외국자본의 유치, 수출확대, 국내시장 개방압력에 대처하기 위한 경제외교의 중요성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냉전이 종식된 뒤,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 통일에 대비한 남북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통일외교가 한국외교의 새로운 중심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안보외교

대한민국은 냉전의 와중에서 분단국가로 탄생했고 전쟁까지 치른 국가이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국가안보의 확보는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건국 이후 북으로부터 강한 군사적, 정치적 도전을 받아온 한국은 후원국인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안전에 대한 보장과 군사원조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정부의 1차적 외교정책의 목표는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UN군의 파견이었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에는 UN군의 계속적인 한반도 주둔과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안보에 대한 공약을 계속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어왔다. 1953년 7월 27일 이승만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성립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군사원조를 얻어내는 데 활용했다. 한국은 미국을 한국 방위에 묶어두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 사령관에게 이양하는 조치까지 감수했다. 냉전기의 한국의 최고 목표는 북한으로부터의 남침을 방지하고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안보외교의 첫번째 시련은 데탕트라는 국제안보환경의 변화로부터 나왔다.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시아로부터 발을 빼는 '괌 독트린'을 발표했고, 이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부분적으로 철수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와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의 축소로 한국은 안보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한국은 이에 대응하여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육성과 남북대화를 추진했다. 1960년대의 베트남전 파병, 1970년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은 미국을 한국에 계속 남아 있게 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과 연관된 것이었다.

1980년대말의 냉전종식은 한국 안보를 위한 획기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노태우 정권은 냉전의 해체로 조성된 유리한 국제환경을 포착, 활용하기 위해 북방외교를 전개했다. 먼저 동유럽권 구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를 시작으로 구소련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는 한국에 유리한 안보환경을 조성했다. 외교수립 이후 러시아는 1961년에 체결된 북한과의 상호원조조약을 1996년 9월에 폐기했고, 중국은 경제적 실익에 기초해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원했던 종래의 정책을 수정했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정상화와 정치·경제교류의 확대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안보문제와 관련된 최대의 외교현안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것이었다. 북한은 1985년에 국제핵비확산조약을 체결했으나 그 실행을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핵안전협정체결을 미루고 있었다. 한편 북한이 핵폭탄 제조를 추진하고 있다고 판단한 한국·미국 등 여러 나라는 다방면으로 압력을 가해 북한으로 하여금 IAEA와의 핵안전협정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1991년 12월 남한에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와 핵연료 재처리 및 농축시설의 설치를 배제하는 내용의 비핵원칙을 선언했다.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했으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IAEA의 핵사찰을 거부하고 1993년 3월 12일 '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의 NPT의 탈퇴로 조성된 안보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은 긴밀한 협조 아래 북한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1994년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경수로지원에 대한 대가로 북한의 핵사찰 수용과 남북정상 회담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과 '조문파동'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으나 1994년 10월 21일 대북경수로지원에 대한 대가로 핵사찰을 수용하는 북·미간의 제네바 핵협상이 타결, 서명되었고 북한 핵을 둘러싼 안보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대북경수로지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설립되었고 경수로지원사업은 북한 잠수함침투사건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탈냉전기에도 여전히 한반도는 냉전의 한복판에 있다. 경제실패로 북한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군사력이다. 북한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해 '벼랑끝외교', '자해공갈외교'를 벌이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북한은 인공위성인지 장거리 미사일인지 확인되지 않은 물체를 발사해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을 놀라게 했다. 북한은 탈냉전시대에 여전히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 체제붕괴의 위험에 처한 북한 지도부는 미사일이나 핵개발의 위협을 통해서 정치적 생존을 보장받고 동북아시아 평화비용의 지불을 요구하는 경제외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강성군사대국' 건설 정책은 한반도의 안보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북한의 강성대국론에 대해 김대중 정부는 군비경쟁을 통한 대북군사우위확보로 대응하기보다는 쌍방 신뢰구축과 군비통제를 통해 소모적인 군사적 대결구조를 청산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경제외교

냉전시대의 한국외교의 제1차적 목표는 안보외교였으나 한국 경제의 성장과 냉전의 해체로 경제외교로 외교의 중점이 이동하고 있다. 개관해 볼 때, 한국의 경제외교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원조외교',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의 차관 및 투자유치와 시장확보 활동,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의 국내시장보호를 위한 통상외교,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시장개방과 투자유치를 위한 외교의 시기로 대분할 수 있다.

1970년대초까지 경제원조는 전후 경제복구와 경제개발을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한국은 외국, 특히 미국의 경제원조 없이는 기본적인 경제적 요구도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해외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원조를 받아내고자 했다. 미국의 경제원조는 국가예산 보조를 위한 재정지원 외에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950년대말까지만 해도 곡식·원면·원자재·의료품 등 생필품에 집중되었으나, 그후 1970년대초에 무상원조가 끝날 때까지 점차 산업발전의 기반형성을 위한 원조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 중반 한·일관계정상화, 베트남전 파병결정 등에 경제적인 동기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이러한 전반적인 경제발전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격감됨에 따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아시아개발은행(ADB)·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의 역할과 비중이 증대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 일변도의 한국 경제외교도 점차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한국의 적극적인 해외경제진출의 시기였다. 한국은 베트남에서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중동에서의 건설사업, 기타 지역에서의 시장확대에 집중적인 노력을 했는데, 외교는 이러한 해외경제활동을 인도하고 지원하는 새로운 사명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제외교는 1980년대 후반에 와서 국내시장보호라는 새로운 사명을 갖게 되었다. 즉 미국이 무역적자에 허덕이게 되고 잠시나마 한국이 1980년대말에 무역흑자국이 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장개방압력이 강화되었다. 시장개방문제는 한·미 쌍무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우루과이라운드(UR)를 통한 다자간 협상에서도 집중적으로 대두되었고, 특히 농산물 시장개방과 관련하여 한국외교에 커다란 과제를 안겨주었다. 한국외교는 민주화로 인해 막강해진 국내적 압력과 격화된 통상갈등으로 말미암아 증대된 국제적 압력의 틈바구니에서 균형 있고 합리적인 정책을 모색해나가는 데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경제외교는 세계화로 조성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세계화는 국제금융자본의 급격한 이동을 가져와 마침내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고 한국을 IMF 관리체제하에 들어가게 했다. IMF 체제하에서 한국의 경제외교는 외환위기와 외채위기의 해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 위해 첫째 해외시장의 개방과 개척을 통한 우리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확대에 노력하고 있고, 둘째, 적극적 투자유치를 통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며, 셋째, 외채구조의 개선과 상환부담 경감을 위한 금융외교를 전개하는 것이다.

통일외교

분단국으로 출발한 남한과 북한이 전쟁까지 치르게 되면서 통일외교는 당분간 설자리가 없었다. 더구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는 데 국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통일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남과 북에 다 같이 '선 경제건설 후 남북통일'이라는 공식이 지배했다. 남과 북이 접촉을 시작한 것은 전후 복구가 끝나고 경제건설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 1970년대부터였다.

남·북한은 1970년대초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접촉을 갖고, 1971년 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하여 1972년에 7·4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는 데까지 발전했으나, 남북대화는 북한측의 거부로 중단되었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에 대한 외교정책 특별선언'( 6·23선언)을 통해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고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했다. 제5공화국이 등장한 뒤, 전두환 대통령은 '남북한당국최고책임자회의'를 제의했으나 북한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후 1984년 북한의 대남수재민 구호제안을 계기로 남북적십자회담·남북국회회담·남북체육회담·남북경제회담 등 일련의 남북대화가 진행되었으나, 북한은 1986년부터 일체의 남북대화를 거부했다.

민주화의 결과로 탄생한 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로 높아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탈냉전으로 조성된 유리한 국제질서를 이용하여 통일외교의 영역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북방외교로 러시아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여는 데 성공했고 나아가 북한과의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는 데 성과를 거두었다. 노태우 정부는 '7·7선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등을 통해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의 평화통일정책을 추진했다. 1990년대초 북한은 경제적인 파탄과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남·북한의 UN 동시가입을 수락하고, ' 남북고위급회담'이라는 이름의 총리회담을 수락했다. 1990년 9월 4일부터 5차에 걸친 남북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남북은 1991년 12월 13일 역사적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어서 1992년 2월 19일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위의 기본 합의서 외에 정치, 군사 및 교류, 협력의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효시킴으로써 남북한 당국은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화해·공존 관계를 제도화해 나갈 수 있는 기본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경제위기와 동구와 러시아의 사회주의정권의 몰락이라는 변화된 국제환경하에서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했다. 김영삼 정부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는 없다"고 선언하며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밝혔으나, 그로부터 불과 15일 만에 북한은 NPT의 탈퇴를 선언해 남북관계는 오히려 위기국면으로 치달았다. 북한의 핵사찰 거부로 조성된 긴장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핵협상의 타결로 일단 해소되었고 남북한은 관계개선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4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한이 주도하고 미국과 중국이 참여해 상호신뢰구축과 한반도평화체제구축을 논의하는 4자회담을 제의했으나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의 좌초사건을 비롯한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의 등장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정책에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다. 이른바 ' 햇볕정책'으로 불리기도 하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흡수통일포기, 교류·협력에 있어서 정경분리원칙의 적용, 평화정착 우선주의의 채택으로 요약된다. 김대중 정부의 통일외교가 김영삼 정부의 통일외교와 차이가 나는 영역은 대북정책의 일관성이다. 김영삼 정부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강경정책과 온건정책을 왔다갔다 함으로써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상호신뢰관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반면, 김대중 정부는 또다른 북한 잠수정 좌초사건 등의 남북관계를 위협할 만한 상황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인내를 가지고 햇볕정책을 실시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먼저 민간기업을 통한 금강산 관광으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았다. 6·25전쟁 이후 최초로 남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북한 땅을 밟는 감격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체제보호를 위하여 한국을 포함한 외부에 대한 개방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특히 한국에 의한 독일식의 '흡수통일' 가능성을 크게 우려해 온 북한은, 종전의 정권들과 달리 김대중 정부가 북한체제 유지론에 기초로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와 대북 평화·협력의 추구에 초점을 둔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데 대해 마침내 신뢰의 태도를 나타냈다. 그 결과 2000년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 55년 만에 평양에서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남북관계는 종전에 비해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상호신뢰구축에 기초한 남북관계 실현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승주(韓昇洲) 글 | 임혁백(任爀伯) 참조집필>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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