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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07 (일) 09:52
분 류 사전3
ㆍ조회: 2075      
[현대] 10.26사건과 12.12사건 (부상자회)
유신체제의 최후, 그리고 12·12반란

관련문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10.26사건과 12.12사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경
5.18광주민중항쟁 1
5.18광주민중항쟁 2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

1. 유신체제의 붕괴 - 10·26사건

가. 10·26사건의 정치적 배경

10·26사건은 기본적으로 유신체제의 지배집단과 국민사이의 대립관계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학문·양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상당부분 억압한 전형적인 군사독재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 특히 지식인층의 불만이 날로 고조되어온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변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유신체제가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뚜렷한 징후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났다.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엄청난 규모의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고도 불과 유효표의 31.7%를 득표한 반면에 야당인 신민당은 그보다 1.1%가 많은 32.8%를 획득했으며 통일당이 7.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를 위해 만든 유신헌법과 국민의 기본 생존권을 희생시키던 불합리한 정치체제와 경제정책에 대해 국민은 엄중한 경고를 내린 것이다.

제10대 총선결과는 유신정권의 유화책을 이끌어내어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면제로 석방된다. 그리고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표방하는 김영삼 - 김대중의 연합세력이 신민당의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대중에게 큰 희망을 줌과 동시에 유신정권에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같은 대중의 희망과 유신정권의 위기속에 1979년 하반기가 시작되었다.

나. YH여공농성사건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한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갸날픈 여성노동자'들의 소위 『YH사건』이 발단이었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 4층 강당에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회장 장용호) 여자종업원 200명이 몰려와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회사를 계속 경영하여 작업을 하게 해달라"는 폐업조치 철회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는데 이는 사건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제1야당인 신민당을 탄압·와해시키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계산된 행위였다.

이날 경찰은 '101호 작전'이라 명명된 진압작전을 위해 정·사복 경찰 1,000여명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174명의 YH여공들을 순식간에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YH무역 노동조합 간부인 김경숙씨가 심한 부상을 입어 중태에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제1야당에 대한 과잉폭력행위를 저질렀다.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었고 박정권은 곧바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8월 13일 윤종완 등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고 유신정권은 이 같은 분열공작과 더불어 YH사건과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신민당을 비난해댔다.

그리고 9월 8일 오전, 서울민사지법 합의 16부(부장판사 조언)은 앞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집행을 정지시키고 정운갑씨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전무후무한 결정을 내린다.

아울러 유신정권은 김대중씨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범국민적 항쟁을 벌이겠다"는 9월 10일의 기자회견과 미 카터 행정부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뉴욕타임즈』와의 김영삼 총재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 국회법상 징계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159명이 여당 의원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결의안을 기습처리해 버렸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YH사건으로 시작되어 야당 의원의 의원직 사퇴로까지 치닫는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보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가 전례없이 고조되었다.

더욱이 2학기 개교와 동시에 학생운동은 YH사건으로 시작되어 유신철폐 요구농성으로 전화되고 있었다.

다. 유신체제 붕괴의 전주곡, 부·마민중항쟁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 "유신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는 일단의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1,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시위가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자 학생들은 교문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여 오후에는 남포동 등 부산일대를 누볐다. 부산시민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참여속에 부산대생 중심의 '유신반대 시위대열'은 17일 새벽 1시까지 부산시내 11개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듯 했다.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리자 이번에는 동아대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에 합류하였고 18일 0시부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유신정권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남포동 일대의 시민·학생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와 함께 "계엄철폐"를 외치는 야간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최세창 준장이 이끄는 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하여 무차별적인 진압을 자행함으로써 부산시위는 일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18일 아침,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도시 마산에서 경남대생 1,000여명이 휴교령을 무릎쓰고 교내시위를 벌인 뒤 오후 5시경 마산시내로 진출했다. 날이 어두워지며서 수만명으로 불어난 시민·학생 시위대는 공화당 경남도지부 사무실을 부수고 이어서 북마산파출소,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인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의 집과 마산시청, 법원, 마산MBC 등 유신체제를 유지·옹호해 온 19개소의 각종 공공건물을 공격했다. 유신정권은 39사단 병력 250명과 장갑차를 시위진압에 투입하였지만 시위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 19일 밤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19일 저녁 1,500여명의 무장군인이 마산시내에 투입되고 20일부터는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4일간의 "부산·마산민중항쟁"은 막을 내린다.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의 "부산·마산민중항쟁"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1,563명이었는데 이중 500여명은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노점상, 샐러리맨 등 일반시민이었다.

라. 유신독재의 최후,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후 18년 동안이나 장기집권해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것은 지배세력내의 권력갈등 결과로 유신체재의 정치적 폐쇄성의 반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년에 걸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겨울공화국'-시인 양성우의 시 제목에서 표현하듯- 이 일거에 무너졌으나 유신체제는 국민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가올 비극은 여기에서 잉태되었고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는 사라졌으나 유신체제를 지탱하고 보위하던 유신세력의 힘은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특히 지배집단의 한 축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정치군인집단, 바로 이들 집단이 유신체제를 탄생시키고 유지해온 정치권력의 핵심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의 정치체제속에 엄존하고 있었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2. 별들의 전쟁, 12·12 쿠데타-암호명 '생일집 잔치'

가. 10·26사건 이후 전두환의 위치

10·26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월27일, 계엄공고 제5호를 통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권력의 핵심이 붕괴된 당시의 상황에서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직과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함으로서 전두환은 향후 정국을 예의 주시하던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산께이신문은 11월 2일자 보도를 통하여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현재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군부내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거의 굳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의 와중에서 출범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정보·보안·수사 등 업무를 통괄하는 막강한 직책에 있었다.

나. 쿠데타의 시발, 정승화와 전두환의 갈등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그동안 대통령 경호실, 육군본부 지휘부, 수경사, 특전사 등 군 요직에 있으면서 특혜를 받아 오던 "정치장교"들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군 인사를 개편하였다. 이는 정승화 총장이 10·26이후 주장해오던 군의 정치불개입 입장을 표면상으로는 기정사실화 하는 조치였고 그 이면에는 군의 공식지휘체계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사이에는 향후 정치권력의 구조개편과 관련하여 화합할 수 없는 이견이 나타났다. 10·26직후부터 정승화 총장은 "유신체제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반면, 전두환 등 소장파 정치장교들은 유신체제의 유지를 원하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의 계속되는 군의 정치불개입 선언과 유신체제의 변화입장에 불만을 토로하고 반대를 하던 소장파 정치장교들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타직으로 발령하려는 정승화 총장의 계획을 알게 된다.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의 1심 재판 선고를 앞두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회동,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지구 경비사령관으로 전보·발령할 것을 협의한 것이다.

자신이 동해안지구 경비사령관으로 전보발령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두환 소장은 1979년 12월 8일, 노태우 9사단장을 서울 보안사령부로 불러 들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허화평 비서실장의 브리핑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노태우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연행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① 정승화 총장과 김재규와의 개인적 친분 ② 정승화 총장의 박대통령 시해장소 참석 ③ 정승화 총장의 김재규로부터의 자금 수수 ④ 정승화 총장의 김재규 사건 축소 지시 ⑤ 정승화 총장의 김재규 재판의 조속한 종결 지시 등 부당한 압력 행사 ⑥ 군 내부의 소장파 장교들의 정승화 총장에 대한 반발 등이었다.

정승화 총장의 연행에 대하여 동의를 표한 노태우는 D-day를 개각을 하루 앞둔 1979년 12월 12일로 잡은 뒤 전두환 사령관과 함께 하나회 출신 소장파 장교그룹을 설득, 합류시키기로 하였다.

다. 12·12 하극상 반란 - 암호명 '생일집 잔치'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경 전두환 소장을 비롯한 하나회 출신 수도권지역 부대지휘관 등 소장파 장교 그룹은 비상계엄하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부대를 벗어나 "생일집 잔치"라는 암호명에 따라 경복궁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였다.

경복궁 30경비단실에 모였던 군 지휘관 명단

성 명 직위 기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육사 11기, 소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육사 8기, 중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육사 8기, 소장
황영시 1군단장 육사 10기, 중장
노태우 9사단장 육사 11기, 소장
백운택 71방위사단장 육사 11기, 준장
박준병 20사단장 육사 12기, 소장
박희도 1공수 여단장 육사 12기, 준장
최세창 3공수 여단장 육사 13기, 준장
장기오 5공수 여단장 육사 12기, 준장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육사 16기, 대령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 육사 17기, 대령
이학봉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육사 18기, 중령

☞ 자료출처 : 정상용외, 광주민주항쟁, 1990. 돌베개, 70쪽에서 인용

우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 총장 연행 책임자로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과 육군범죄 수사단장 겸 합수부 수사 2국장인 우경윤 대령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연행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우발사태에 대비하여 '후보계획'을 세운 뒤 정총장 연행조와 후보계획조는 저녁 6시 50분경 한남동 총장공관에 도착했다.

7시 15분경, 정총장을 응접실에서 접견한 이들은 '김재규와 관련된 진술 녹음을 위해 녹음시설이 있는 곳으로 모셔가야 겠다'며 대통령 지시라고 거짓으로 강변하였다. 정총장이 화를 내며 '직접 대통령과 통화를 하겠다'고 총장 부관 이재천 소령을 부르는 순간 허삼수, 우경윤 두 대령은 응접실로 들어오는 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정총장의 "사격중지"라는 외침과 함께 경호실 복장에 M16소총을 든 장교가 총을 쏘면서 대형유리창을 깨뜨리고 뛰어 들어와 정총장에게 총을 들이대었고 허삼수는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차에 실어 총장공관을 빠져나와 곧장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감금시켰다.

한편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총장 연행을 재가받기 위해 무장한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수부 수사 1국장 이학봉 중령을 대동한 채 삼청동 총리공관에 도착, 이미 정총장을 연행해 놓은 상황에서 최대통령에게 정총장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대통령은 국방장관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면서 재가를 거부했다. 계속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재가요청에도 불구하고 최대통령은 요지부동 국방장관을 데려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고 경복궁의 쿠데타 지휘부는 최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하고 육본에서 지휘관의 부대복귀 명령을 내렸음에도 해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으로 하여금 심청동 총리공관의 경비병력을 무장해제시키고 자파병력으로 공관을 봉쇄하는 등 최대통령에 대해 사실상의 연금조치를 취한 것이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황영시 1군단장을 포함한 전원이 집단으로 최대통령에게 몰려가 다시한번 재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총장 연행이 군 주요지휘관들의 일치된 뜻이라고 설명하여도 끝내 최대통령은 재가를 하지 않았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때까지 최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전두환 등 경복궁 30경비단장실에 모인 지휘관들의 정승화 총장 연행행위는 명백한 하극상 반란이었다.

라. 육본의 반격과 반란군의 불법 무력동원

한편 육군본부의 윤성민 참모차장이 주축이 되어 육군의 공식지휘계통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예하부대 상황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노태우 등 일선 지휘관들이 부대를 이탈하여 경복궁에 모인 것을 파악했다.

윤차장은 정종창을 원상회복시키고 지휘관들은 부대로 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반란군 지휘부는 이를 묵살했다. 육본의 공식지휘는 정총장의 신병을 원상회복시키고 그를 강제연행한 세력을 응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총장공관의 총격전 소식을 접하자마자 김종환 합참의장과 함께 용산의 미군 벙커로 피신했다. 그리고 정총장의 핵심 측근인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등은 장군승진을 빙자한 축하연이 개최되고 있던 신촌의 한 요정에서 비상발령과 정총장 연행소식에 곧바로 부대로 복귀했다.

반란군 지휘부는 밤 10시 30분경 최대통령에게 다시 한 번 재가를 요구했지만 실패했다. 노재현 국방장관과 가까스로 전화를 연결하였으나 그 역시 총리공관으로 오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정총장의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반란군 지휘부는 마침내 힘으로 모든 것을 기정 사실화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무력대결을 통한 사태 장악만이 유일한 길이라 판단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박희도 1공수여단에게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무력진압"을 지시하자 그는 13일 새벽 1시경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손쉽게 장악했다.

또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3일 새벽 2시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과 특전사 보안부대장 김정룡 대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지시하였고 새벽 3시경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사령관실로 총격을 가하며 난입한 자신의 부하 총에 총상을 입고 체포당했다.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신윤희중령으로 하여금 13일 새벽 3시 25분경, 수경사령관실에서 사태논의를 하고 있던 윤성민 참모차장, 문홍구 합참본부장,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등을 체포케했다.

이곳에서 체포된 육군본부 지휘장성들은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은 제2기갑여단장 이상규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도기갑사단 전차에 대항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동원을 요청하였고, 노태우 9사단장은 자기 부대인 전방의 9사단 29연대를 즉시 중앙청으로 출동시키도록 지시하여 9사단 29연대와 제2기갑여단 16전차대대는 도중에 합류,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에 진주하였고 박희모 소장의 30사단 90연대는 반란군 지휘부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12월 13일 새벽에는 모든 상황이 끝났다.

전두환 소장 등 반란군에 의하여 수도권지역 지휘관들은 육군본부 정식 지휘계통의 명령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수도권지역의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육군본부, 국방부, 수경사 사령부, 특전사 사령부 등을 점령하고 육본 수뇌부를 체포, 12·12하극상 반란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12·12반란군이 불법·동원한 군 부대는 다음과 같다.

12·12반란군 군부대 동원 현황

부대 병 력 목표 지역 정령일시 철수일시 이동 위치
1공수여단 (3개대대) 장교 137사병 755 (1, 2, 5대대) 국방부 육군본부 12.13. 02:00 12.25. 00:01 통신공무원훈련원
3공수여단 (2개대대) 장교 108 사병 539 (12, 15대대) 경복궁 12.13. 06:50 12.14. 00:01 한양대학교
5공수여단 (2개대대) 장교 79 사병 410 (21, 25대대) 효창운동장 12.13. 07:00 12.26. 01:30 장위동 (남대문중학교)
30사 9연대 장교 72 사병 1,058 71훈 712지단 12.13. 06:20 12.23. 11:00 수색(복귀)
9사단 29연대 장교 109 사병 1,285 중앙청 12.13. 03:50 12.24. 00:01 일산(복귀)
제2기갑 사 단 장교 19 사병 167 (전차 35) 중앙청 12.13. 03:25 12.17. 00:01 금촌(복귀)

☞ 자료출처 : 평화민주당 광주민중항쟁백서, 20쪽에서 인용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정치장교집단은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기반으로 쿠데타에 성공하였고 그들이 모두 반란군에 참여한 시간은 12월 12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10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13일 아침 이들은 군의 공식지휘계통을 장악한 이른바『신군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권력을 차지하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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