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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28 (일) 19:49
분 류 사전3
ㆍ조회: 2080      
[교육] 입시제도-고등교육기관 (민족)
입시제도(고등교육기관)

세부항목

입시제도
입시제도(역사)
입시제도(중등교육기관)
입시제도(고등교육기관)
입시제도(과제 및 전망)
입시제도(참고문헌)

대학입시제도의 변천을 유형, 시기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학별 단독시험제(1945∼1953)]

8·15광복 후의 대학진학에서 가장 중심문제를 이루게 된 것은 대학 입학자격에 관한 것으로 학교의 연계성 문제가 대두되었다.

여기에서 미군정시대에는 전문부 3년 졸업자는 대학 학부 2학년에 편입을 허가하였고, 전문부 2년 수료자는 학부 1학년에의 진학을 허가하였다. 전문부 3년 졸업자는 일정시대에 중학 5년을 졸업한 자이므로 통산 8년이 되기 때문에 학부 2년에 편입학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학생들의 후학년한을 계산하여 각각 대학의 해당학년에 진학할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한편 독학자는 진학할 기회가 없게 되어 이들에게 진학의 기회와 문호를 개방하기 위하여 문교부에서는 국비로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를 실시하였다. 이 시험은 군정당시 연 2회씩 봄, 가을에 실시했는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학자에 대한 대학입시의 기회를 부여해오고 있다.

8·15광복 이후의 대학입시제도는 대학총학장회의에서 시험시기·시험과목 등에 대하여 협의를 거쳤으나 대학별 단독고시제를 유지해 왔다. 즉, 대학 당국에 일임하고 있었지만 대학간의 협의형식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교(당시는 6년제 중학교) 졸업자수가 대학의 수용능력과 큰 차이가 있었던 관계로 당시 입학자격이 인정되지 않았던 구 5년제 중학교 졸업자들을 입학시킨 대학들이 많았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세칭 일류대학에서도 한때는 청강생제도를 채택하여 무자격 학생을 입학시켰는데 이들이 후일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정규학생으로 편입시켜 주는 일이 많았다.

구 5년제 중학교 졸업생은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에서 국어·외국어·국사만 과하고 기타 과목은 면제해 주는 일이 있었다. 또 이북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자도 학력을 인정하여 대학의 입학 또는 편입학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 피난중에 해방 전의 4년제 또는 5년제 중학 졸업자에게도 대학입학자격을 부여하여 종래 많았던 무자격입학생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을 보게 되었다.

또 38°선 이북의 학교출신자를 이남학생과 동등한 연한으로 보아 입학 또는 편입학 자격을 부여하였으나 적어도 1년간은 청강생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그 학교성적을 보아 정규학생으로 편입하는 특별조치가 강구되었다.

이는 군정당시 문교부증명으로 대학입학자격을 인정하다가 정부수립 직전에 허위증명 신청이 많다는 이유로 폐지했던 제도를 약간 변경하여 실시하게된 것인데, 그 증명은 이북 5도지사가 발행키로 하였다. 이 제도를 복귀시킨 이유는 이북에서 피난온 다수의 청소년들에게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입학자선발 방법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전기 학교와 후기 학교로 나누어 필기시험을 주로하여 결정토록 하였는데 그 기일, 고시과목 등은 총학장회의에서 협정한 것을 문교부에서 재시달하는 방법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시험과목의 결정에서는 고등학교 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고려하여 가급적 광범하게 결정할 것이다. 특히 실업고등학교 졸업자가 동계의 실업대학에 입학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 출신 실업학교에 적합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문제가 많이 논의되어 대학 당국에서는 이를 어느 정도 인정키로 하였다.

그리고 대학입학 지원자는 매년 증가하였는데 국방 당국은 입학생수를 제한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고집하여 자연과학계 학과는 정원대로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문과학계는 75%, 사회학과계는 50%(1953년도는 75%)로 제한모집하였다. 그리고 의학계학생은 정원 50% 증모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학과의 증설, 학생정원의 증가 등으로 모집 학생수를 확대함은 원칙적으로 인정치 않았고 국방부와 합의된 부분에 한하여 예외를 인정하였다.

한편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상이학생의 대학입학 특별취급 문제가 대두되었다. 입학시험실시에 있어서도 특혜를 베풀고 등록금에 있어서도 특혜를 주었다.

[국가연합고사·본고사 병행제(1954)]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부산에서 환도하고 사회질서가 다시 회복됨에 따라 대학입학 선발도 점차 개선의 길을 걷게 되었다. 즉, 입학자격에 있어서도 종전과 변동이 없었는데 38이북의 학교 출신자를 임시청강생의 명목으로 특별입학시키던 조치는 폐지하고 일반학생과 동등하게 다루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동안 누적되어온 대학의 입학부정문제가 대두되자 대학입학 선발연합고사를 거쳐 적격자 만을 대학에 입학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여기에서 1954년에는 입학자의 적성을 고려하기 위한 방법으로 각 대학 협의하에 소위 대학입학자 선발고시위원회의 주관 하에 국가 연합고시를 실시하고 다시 대학별로 본고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연합고시에는 총 2만8000여 명의 지원자 중 2만4000여 명이 합격되었고, 각 대학에서는 이 성적을 참작하여 입학을 허가하려 하였다. 그런데 1954년 2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중학교 이상 각 학교의 입학시험은 선발 자유제 실시를 백두진 국무총리에 특별유시’ 함으로써 백지화되었다.

요점은 대학의 입학제도에서도 1954년 각 대학 협의하에 연합고사를 실시한 일이 있었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연합고사에 의한 선발기능은 한 번도 반영시키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대학별 유시험·무시험(내신제) 병행제(1955∼1961)]

국가 연합고시제는 1개년의 시행으로 중단되고 다시 대학별 선발제도로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학의 입학시험은 전·후기로 나누어 대학의 자유선택에 따라 실시하였는데 정원 미달로 인한 보결시험은 후기 시험 종료후 시행하되 가급적 3월 말까지 끝내는 방침을 따랐다.

필기시험 과목은 대학에서 선정 고시해 왔는데 대체로 필수 네 과목, 학생선택 한 과목 이상을 과했다. 그리고 각 대학에서 필수로 과하는 교과와 선택에 따라 수험준비 교육이 성행을 보게 되었다.

모집정원은 인가된 정원 이내로 하되 여학생과 상이군경은 정원의 10% 이내에서 초과모집할 수 있었다. 이 밖의 일들은 학칙 또는 학교방침에 따르도록 하였는데, 여자에 대한 특별입학 조치는 점차 폐지되었다.

한편 전란시부터 실시해 오던 의예과·치의예과와 한의학과 등 의과계의 50% 증모조치는 1957년도부터 25% 증모토록 변경하였다. 이는 의료요원 부족으로 완화할 필요는 계속된다고 느끼나 가급적 학생지도의 충실면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제 모집에 있어서는 교사증축관계로 정원을 많이 초과모집하는 경향이 있어 종종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이 시기도 대학단독출제에 의한 전형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6년부터는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일부 대학교에서는 무시험 전형, 즉 고등학교 성적과 구두시험 등으로 전형입학케 하는 방법이 성행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수년간 입학생 전원을 이런 방법으로 입학시키고 일부 사립 대학교에서는 입학생의 10∼15%를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시켰다. 그리고 1958년의 대학입학시험에서는 고등학교 성적을 30% 참작케 한 일도 있다.

즉 문교부는 1957년 9월 11일,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열린 전국 12개 국·공립 대학총(학)장회의에서 합의를 보아 1958년의 12개 국·공립 대학 입학전형은 유시험, 무시험으로 나누되, 무시험으로 입학정원의 10%를 입학시킬 수 있고, 유시험은 고등학교 3년간의 성적 30%, 입학시험 성적 70%로 합격을 결정토록 하였다.

고등학교의 성적심사는 생활기록부 또는 동보조기록으로 고등학교 3년간의 성적을 심사하되 그 방법은 당해 총학장의 재량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61년 이후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 일부대학교에서는 진학적성검사를 실시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전에는 대학별 단독고시제에 별 변동이 없었다.

이 시기의 대학 입학제도에서는 대학별 자율성의 폭이 넓었음에 대하여 대학재학생에게는 징집연기의 혜택을 주게 되어 6·25전쟁 후에는 대학으로 쇄도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일부 사학에서는 보결생·청강생 등의 명목으로 과다한 학생을 부정모집하게 되어 큰 사회문제화 되었음은 물론, 무리한 진학열로 인해서 한때는 대학등록금 때문에 농어촌경제의 파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전답을 정리하고 농우(農牛)까지 팔아 대학등록금을 마련하였고, 시설이 부족한 각 대학에서는 등록금을 받아 건물을 세워 대학건물을 한때 ‘우각관’이라고까지 하였다. 악덕 학원기업이 성행했던 때로 1950년대는 학원기업이란 불미한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도 했었다.

[대학입학국가자격고사제(1962∼1963)]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문교정책은 대학에 대한 불신과 통제의 강화를 전제로 하는 혁신정책이었다. 1961년 8월에 공포된 〈중·고등학교 및 대학의 입학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의거하여 1962년부터 대학입시는 국가자격고사제로 시행되었다. 동법은 제1조의 목적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교육의 정상화와 질적 향상을 기하고 지방교육기관의 건전한 육성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교육법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및 대학의 입학에 관해 잠정적인 특별조치로 대학(초급대학·교육대학 및 사범대학 포함)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교육법 제111조의 자격을 가진 자로, 국가에서 시행하는 고사 또는 서류전형에 합격한 자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요점은 국가고시제의 실시를 규정한 것으로 고시 및 서류전형은 매년 교육부에서 실시하되 그 합격의 효력은 당해년도의 학년 초부터 1개월간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 및 서류전형에 관한 일을 장악하기 위하여 문교부에 입학고사 중앙위원회를 두고 서울특별시 및 도에 입학고사 지구위원회를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중앙위원회와 지구위원회에 각각 대학소위원회를 두고 고사 시행시마다 필요한 수의 출제위원과 전문위원을 두기로 하였다.

위와 같은 목적에 따라 국가에서 시행하는 자격고사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대학에 응시케 함으로써 유능한 인재만을 교육시켜 국가의 요청에 부응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래의 인문숭상의 악습을 타파하고 실업교육의 진흥을 도모하고자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자의 동계 대학진학에 있어 서류전형으로 심사하는 특전을 부여키로 하였다.

1962년의 대학신입생 전형은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국가고사와 각 대학에서 행하는 실기검사(또는 필요한 간이한 검사) 신체검사 및 면접의 결과에 의하여 선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고사 대학 적성검사와 서류검사에 의한 전형 또는 필답고사(지망학교에 따르는 실기고사 포함)에 의한 전형으로 하였다.

서류검사에 의한 전형은 실업고등학교 졸업자로 동일계 대학입학 지원자 중 해당 학교장이 추천한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자로 동계대학의 입학을 지원하는 자라야 한다. 그리고 학급당 학생 총수의 10% 이내로 하되 학생 성적순위가 5분의 1 이상에 해당되며 타의 모범이 되는 자라야 한다.

다음에 고사과목 및 출제범위는 현행 교육과정의 필수교과와 선택과목의 내용 및 범위를 기준으로 필수교과는 국어(1) 사회(일반사회, 도덕, 국사) 수학(1), 과학(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 한 과목 선택), 실업·가정(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가정 중 1과목 선택) 및 영어로 여섯 과목이고, 선택과목은 계열별로 지정한 여섯 과목 중에서 1과목을 선택케 하였다.

그런데 예·체능계는 음악·미술·체육 등 세 과목 중에서 한 과목을 택하여 응시토록 하였다. 그리고 음악, 미술 및 체육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자를 육성하기 위한 특기자 전형은 필답고사를 대신하여 서류전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대학 입시제도의 혁신을 위하여 시도했던 국가자격고사제에도 많은 문제점이 따르게 되었다.

즉, 1962년도의 자격고사는 대학입학의 자격고시에 그치지 않고 각 대학의 입학전형에 사용하도록 일률적으로 규제했기 때문에 각 대학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없고,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낳게 하였으며, 자격고시는 학과별로 선발하였기 때문에 학과별로 합격선의 극심한 차가 나타났다.

그래서 성적이 나쁜 학생이 많이 합격하는 반면에, 성적이 좋은 학생이 많이 떨어지게 되어 당초의 목적이었던 대학교육의 적격자선발이라는 목적에 어긋난 점이 많았다.

또 실업계고교 출신자에 대한 무시험전형의 특전은 실업교육의 진정한 진흥책이 되지 못하였고, 실업계고교 출신학생의 성적이 입학 후 훨씬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리고 체능성적의 결과가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정원 미달과가 생겨 추가모집을 자주하여 실효를 잃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고려해 앞으로의 대학입학 자격고시는 대학입학을 위한 자격고사의 성격에 그치게하고 각 대학의 자율성은 살리지만, 학생의 이중시험의 부담을 덜어 주어야 할 것이 강력하게 요청되었다.

[대학별 단독시험제(1964∼1968)]

5·16군사정변 후, 군사정부는 대학교육의 정상화를 기하고 질적인 향상을 누리려면 대학의 정비와 더불어 자질이 우수한 학생을 입학시키는 것이 필수요건이라 생각하여 대학입학문제에 문교부가 직접 관여하였다.

그리하여 1962년에는 대학입학자격고사와 대학별로 시행한 체능검사점수를 합산하여 전형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는 대학입학자격고사에 합격한 자만이 4년제의 주간대학에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기회균등에 위배되는 처사라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여기에서 고등학교 졸업 또는 동등 이상의 자격을 가진 자라면 대학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63년 4월 〈대학의 입학에 관한 입시조치법〉을 폐지하였다. 그래서 1964년부터는 국가고시를 폐지하고 대학별로 실시되는 자체선발고시로 환원시켰다.

신입생전형은 각 대학의 총학장이 법령과 문교부에서 시달한 전형지침에 따랐다. 그런데 전형기일은 총학장이 전·후기중 택일해서 실시하였다. 전형방법은 필답고사와 더불어 전형보조자료로 진학적성검사·신체검사 및 면접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필답고사·신체검사 및 면접으로 그치고 있었다.

필답고사는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으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고등학교의 교육과정 시간배당기준령에 의해서 결정하되 실업계 대학 및 여자대학에서는 선발과목 중에 반드시 해당 실업 및 가정을 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능·체육·과학 기타 특기가 있는 자는 정원내에서 총학장이 정하는 기준에 따라 특전을 주었으나 반드시 일반응시자와 함께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출신학교 성적은 요구하지 아니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필요에 따라 요구할 경우에는 고등학교의 생활기록부 서식과 기록법에 의한 것을 제출케 하였고, 실업계 대학 및 예능계 대학은 동일계 고등학교 출신자를 모집정원 내에서 특별히 선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위와 같은 지침에 따라 실시하는 선발고시에서 각 대학의 총학장은 입학자모집요강을 작성하여 공고 10일 전에 문교부장관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모집 요강에는 ① 모집 정원 ② 시험과목 ③ 전형기일 ④ 제출서류 ⑤ 전형방법 및 납입금 등을 명시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전형에 필요한 사항은 법령과 문교부 지침에 의하여 각대학(교)의 총학장이 정하도록 하였다. 위에서와 같은 전형방법에 따라 법률과 문교부지침의 범위 안에서 각 대학별로 개성있는 선발방법을 실시하고 있었다.

결국 학교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었고, 또 대학에서 과하는 입시과목에 따라 고등학교 교육의 중점 방향이 결정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대학입학 시험제도는 대학별 단독출제로 이렇다 할 특색은 없었다.

또 1964년부터 1968년에 이르기까지 5개년간 실시되었으나, 그 동안에는 눈에 띠는 변화도 없었다. 다만 달라진 일이 있었다면 대학에 따라 입시과목을 거의 해마다 변경하는 사례가 있어 고교학생들을 당황케 해 왔었다.

예를 들면 공동필수과목에서 수학을 과했는가 하면 다음 해에는 선택으로 바꾸고, 또는 수학은 과하지 않고 사회의 폭을 넓히는 등의 일이었다.

또 많은 대학이 시설도 미비한 상태에서 마구 학생만을 모집하여 학원재벌·학원기업이니, 학교주식회사라는 별명이 따를 정도로 대학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대학생의 자질은 극도로 저하되었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열은 높아지기만 해서 무조건 대학입학을 서둘렀다. 그로써 교육비 부담은 늘어만 가고 농어촌의 아들딸들은 논밭을 팔아 등록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무리해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어 고등실업자만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교육망국론, 대학망국론까지 나오게 되었고 대학정비를 운운하면서 대학교육의 정상화가 시끄럽게 논의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8년 11월 14일, 대통령령 제 3637호로 대학입학 예비고사령이 공포되었다.

[학입학예비고사·본고사병행제(1969∼1980)]

제도는 1960년대 초에 시행착오로 끝난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제도의 부활이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 보다 세련된 것이었다.

문교부는 대학입학자격 예비고사의 실시는, 첫째 국가가 통일된 기준 아래 대학교육에 알맞은 인재를 골라 대학의 권위를 높일 수 있으며, 둘째 사학의 학생정원 초과모집과 대학교육의 적성 무시로 인한 대학의 질적 저하를 막을 수 있으며, 셋째 국가의 인력수급계획에 비추어 국가계획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고, 넷째 대학의 지역적 차이나 격차를 막을 수 있고 고등학교의 교육 목적에 따라 교육내용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정책수행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각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하기 전에 국가가 통일된 기준으로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기초실력을 평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예비고사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예비고사제도가 발표되자 일반적으로는 원칙적인 처지에서 찬성하였다. 그러나 일부 사학에서는 강력히 반대하였고, 고등학교측에서도 새로운 입시준비 등 학생들이 과중한 부담을 가지게 된다고 불안해 하였다.

또한 교육부에서는 예비고사는 일정한 수준에 비추어 대학입시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쳐서 입학자 선정은 어디까지나 대학자체가 결정하는 것이니만큼 대학의 입시에 대한 자율성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부 사립 대학에서는 예비고사로 대학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더욱 침해당할 것이라고 반발하기도 하였다.

1969년도부터 시행한 대학입학예비고사제도는 음악·미술·체육 등 예체능계를 제외하고 초급대학 및 교육대학을 포함하는 모든 대학에 적용되었으며, 초년도에는 모집정원의 1.5배를 합격시켰다.

총 응시자수는 112만 명이었고 합격율은 남자가 55.45%, 여자가 51.32%였다. 그리고 인문·실업학교간에는 물론, 학교간 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예비고사의 교과목은 국어·사회·수학·과학·영어·실업·가정 등이었는데 필답고사는 모두 객관식으로 출제되었다. 그리고 지학과 제2외국어는 장차 고등학교교육의 정상화를 기하기 위하여 충분한 여건이 조성된 뒤에 추가하기로 일단 제외하였다.

대학입학 예비고사 종합평가교수단은 1971년 6월 15일, 1969학년도부터 실시한 대학입학 예비고사결과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결과, 국가관리 대학입학 예비고사는 고교 및 대학교육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예비고사는 계속 실시하되, ① 예비고사 성적의 지역별·학교별 발표를 금지하고 ② 출제내용과 출제기술은 계속 연구·발전시켜야 하며 ③ 대학입학 정원의 150%로 한정된 예비고사 합격률 180%로 증가시키며 ④ 예비고사 합격증에 성적을 표시, 대학 당국이 입학시험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⑤ 고등학교 상위성적 3% 이내의 학생은 예비고사를 면제시켜 주며 ⑥ 시험관리의 철저를 위해 고사장 수용 인원의 감축 또는 답안지를 2종으로 하고 ⑦ 대학입학 예비고사제도의 연구 및 개선을 위해 ‘대학입학예비고사 연구위원회’를 설치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문교부는 이 건의에 따라 1971년 11월 19일에 실시된 1972학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의 합격선을 종래의 150%선을 폐지하고 변동합격률제를 적용, 매년 성적에 따라 합격자수를 정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문교부는 1973년 2월 28일, 고등학교 및 대학입시제도의 개선방안을, 이어 3월 13일에는 그 시행 계획을 발표하여 1974년부터는 입시제도가 다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입시제도는 예비고사와 본고사로 나누어 실시하되, 대학입학예비고사 합격률은 전국적 기준으로 정하지 않고 시·도단위로 정하기로 하였다.

수험생은 2개 이내의 시도별 지원을 명시하여 예비고사에 응시, 합격여부를 판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예비고사 합격자는 합격한 시·도 내의 대학에만 진학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예·체능계 지원자도 예비고사를 거치도록 규정하였다.

대학별 본고사는 예비고사에 응시하여 합격한 시·도 내에 있는 대학에 임의로 지원하여 응시하도록 하였다. 전형내용은 계열별로 요구되는 교과시험과 면접에 의하되 전형방법은 대학별로 고사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선발기준은 예비고사성적(20% 이상)·내신성적(점차 반영)·본고사성적·면접·체력장성적(10%)을 종합하여 전형하도록 하였다.

예비고사 성적 20% 이상과 체력장 성적 10%는 규제사항으로 전국 각 대학의 공통기준이고, 나머지 3개 사항(내신성적·본고사성적·면접)은 실시여부 및 비율 등 모두 각 대학의 자율에 맡기도록 하였다.

문교부는 1976년 8월 실업계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대학진학의 혜택을 넓혀 주기 위하여 〈대학진학예비고사령〉을 재정, 예비고사에 실업계 4개 계열을 신설하여 별도로 합격자를 사정토록 하였다. 대학입학본고사에서는 이들의 필답시험을 면제, 예시성적과 고교내신성적 및 면접만으로 특별전형하도록 하였다.

또 이처럼 진학특혜를 받게 될 실업계열 지원자격은 출신고교성적이 30% 이내인 자로 하였다. 그리고 공업계에서는 이 밖에 국가기술자격 검정고시에 합격, 기능사 2급 이상을 취득한 자로 제한하였다. 실업계출신 특혜진학방안은 1977학년도 예시와 대학 및 전문학교 진학부터 적용하였다.

한편, 예비고사성적 반영비율의 변화과정을 살펴 보면, 문교부는 1974년부터 대학입학 전형에서 예비고사성적을 20% 이상 반영하도록 규제하였다. 그런데 각 대학교 본고사에서의 예비고사성적 반영률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되었다. 1976년도의 반영률을 살펴 보면 총 98개 대학 가운데에서 50% 이상의 13개 대학에 이르고 있으며, 20%∼49%가 64개 대학이었다.

그리고 20% 이상 반영하라고 문교부가 규제하였지만, 전혀 반영하지 않은 대학이 1975년에는 5개 학교가 있었으나, 1976년에는 한 학교도 없었다. 1977년에는 예비고사성적의 본고사 반영률이 최저 10.2%에서 최고 100%에 이르고, 전국 대학의 평균이 40.8%를 보이게 되었다.

본고사의 전형방법은 총학장이 결정하되 입학시험의 전형방법과 관리를 다루는 연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문교부는 선발요강 중 전형방법 및 권장사항으로서 “필답고사의 문제형식은 가급적 객관식 위주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등 8개 항목의 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대학입학시험이 고등학교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에 비추어 대학입학예비고사 성적 반영, 고등학교 내신성적 반영, 적성검사 실시, 출제내용 및 방법의 개선, 국사과목의 별도출제 등을 권장하였다.

1974년에 실시한 특기자전형은 2차에 걸쳐 심사하였다. 1차 심사는 교육감이 위원장이 되고, 2차 심사는 대학입학예비고사위원회 위원장이 담당하였다. 대학의 본고사에서 또 한 가지의 새로운 경향은 시험과목을 줄이고 종래의 객관식 출제에서 주관식 출제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1977년부터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전기대학들은 본고사의 시험과목을 대폭 줄였다. 이것은 예시의 신빙도가 높아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문교부가 선다형이나 단답형보다 논문형출제 비중을 높이도록 지침을 시달하고 대학 당국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체능계 대학의 실기평가기준이 세분화 되었고 남녀모집비율이 재조정되었다.

또한 대학입시에서 필답고사와 예비고사성적 외에 면접성적을 점수화하여 입시총점에 반영하기로 한 대학이 많이 늘어났으며, 고교생활기록부를 면접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기로 한 대학도 늘어나게 되었다.

[학입학학력고사·내신제의 병행제(1981∼1993)]

980년 이른바 7·30교육개혁에 의하여 대학입시제도는 다시 크게 개혁되었다. 대학입시선발을 예비고사와 고교내신성적에 의하여 실시하고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81년에는 예비고사성적 50% 이상, 고교내신성적을 20% 이상으로 하도록 시달되었다. 1982년도부터는 대학입학예비고사를 대학입학학력고사라는 명칭으로 바꾸었고 그 비중을 50% 이상, 고교내신성적을 30% 이상으로 하며 대학입학학력고사의 합격선을 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학력고사성적과 내신성적의 기계적 합산에 의하여 입학자를 선발하는 방식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첫째, 대학본고사를 폐지함으로써 대학의 학생선발권을 박탈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것은 결국 대학의 자율권을 위축시키고 대학 고유의 특성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둘째, 대학입시제도가 급격하게 변경되었으며, 특히 내신성적이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여 이른바 ‘눈치작전’·‘배짱지원’ 등 비교육적 현상이 나타났다.

셋째, 학력고사가 객관식 일변도의 출제방식으로 지엽적 암기력만 평가할 뿐, 적응력·분석력·종합력·창의력·표현력 등 고차원의 사고능력을 평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적 비판을 수렴하여 1986년과 1987년에는 대학별로 논술교사가 첨가되었다. 이때는 대학학력고사·내신성적 및 대학별 논술고사의 세 가지를 종합하여 학생을 선발하게 된 것이다.

논술고사는 입시 총점의 10% 이내에서 실시되었으며, 탈교과적·범교과적 성격의 문제를 출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논술고사는 그 목표한 바를 성취했다고 보기 힘들었다. 이에 따라 1988년부터는 논술고사가 폐지되었다.

한편, 내신제는 1981학년도에는 우선 고등학교 3학년의 성적만을 대상으로 교과성적과 출석성적을 반영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도 지역간·학교계열간(인문계·실업계) 및 주야간의 차이는 무시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내신성적의 90%를 차지하는 교과성적의 산출방식은 이수단위를 토대로 계열석차를 산출하고 이를 토대로 10개 등급으로 구분된 내신성적을 산출하도록 하였다. 한편, 내신성적의 10%를 차지하는 출석성적 산출방법은 출석비율에 따라 6등급에 해당하는 점수를 얻도록 하였다.

1982년에는 내신성적 반영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하였으며, 내신성적의 반영대상도 고등학교 2·3학년의 2개 학년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내신성적의 반영비율이 확대되면서 교과성적의 내신등급도 15등급으로 더욱 세분화 하였다. 1983학년도에는 내신성적의 반영비율과 교과성적의 등급수를 1982학년도와 같이 하였으나, 반영대상학년을 3개 학년으로 확대시켰고, 출석성적의 등급수를 6등급에서 5등급으로 간소화시켰다.

내신제도가 채택되면서 고등학교교육의 정상화를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나 제반 부수적인 문제점들이 제기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즉, 지역간·학교계열간·주야간·남녀간의 차이가 무시되면서 학생의 학습능력 산출이 불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고등학교에서 지나친 경쟁의식이 유발되면서 비인간화 현상이 빚어지고, 성적평가에서 고등정신 기능의 측정이 어려워 학교에서는 객관식 중심으로 평가하게 되고 내신점수 산출에서는 석차 백분율로 하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1988년부터는 대학별로 시행되는 논술고사를 없애고 대학입학학력고사의 내용을 개선하여 주관식 출제를 가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시험·후지원제로 바꾸고 입시의 관리를 대학에 일임하는 동시에, 총점·문항배점 및 과목별 가중치 적용 등에 대한 대학의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전형방법은 일반계열은 대학입학 학력고사에 고교내신성적 30% 이상을 반영시키고 면접고사로 결정하였으며, 예·체능계열은 일반계열의 전형방법에 더하여 실기고사를 과하였다.

다만 면접고사를 점수화 하느냐의 여부에 관한 문제가 따르게 되었는데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사범계학과를 포함)에서는 일반계열·예능계열과는 달리 면접고사 5∼10%, 교직적성 및 인성검사 성적 5∼10%에 더하여 실기고사를 통해서 전형하였다.

대학입학 학력고사는 중앙교육평가원에서 출제하되 전과목에 걸쳐 주·객관식 혼용으로 했으며 주관식 출제비율은 전 과목의 30% 내외로 하였다.

그리고 주관식 문항 유형은 완성형과 단답형으로 하였다. 또한 객관식은 이해와 사고력 및 응용력을 요구하는 문제를 많이 출제하였고, 주관식은 완성형보다 단답형 위주로 출제하되 서술적 단답형을 많이 출제하였다.

[학수학능력고사·내신제·본고사병행제(1994∼)]

993년은 전반적인 사회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대학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시작된 한해였다. 특히, 우리 나라 학교교육의 성격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다란 파급력이 있는 대학입시정책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시도되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실시와 대학별 본고사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다.

1981년의 7·30교육개혁조치 이후 대학입시제도는 선시험 후지원이냐, 선지원 후시험이냐 하는 지원시기 등에 있어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모든 대학이 일률적으로 학력고사 성적과 고등학교 3년간의 내신성적을 기본 골격으로 해서 학생을 뽑는 획일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시제도를 10여 년간 시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첫째, 학생을 뽑는 주체가 대학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자율성과 독자성이 배제되었고 둘째, 대학입학학력고사의 출제 내용 및 형식이 고등학교 교육의 파행적운영을 막는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파행적 운영의 한 요인이 되었으며 셋째, 수험생들의 입시에 대한 부담이 과중되고 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에 교육부는 1991년 4월 2일, 1994학년도부터 적용할 새 입시제도를 확정발표했고 1992년 3월에는 각 대학의 입시 요강 골격을 집계발표하였다.

각 대학은 ㉠ 고등학교 내신성적만으로 선발하는 방법, ㉡ 고등학교 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선발하는 방법, ㉢ 고등학교 내신성적과 대학별필답고사성적으로 선발하는 방법, ㉣ 고등학교 내신성적, 대학수학능력성적과 대학별필답고사성적으로 선발하는 방법의 4가지 방법 중에서 전형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지적능력을 측정하는 학력고사를 폐지하고 사고력을 비롯한 다양하고 광범한 능력을 측정하는 대학교육적성시험을 실시하는데 그 명칭을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1993년 2월 12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8월 20일과 11월 16일에 실시하고 수험생의 복수지원을 허용하는 새입시제도의 시행 기본계획을 확정발표하면서 7년간의 연구와 3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시행하게된 입시제도라고 밝혔다.

1994년도 입시부터 새로 도입된 대학입시제도는 앞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대학의 자율성을 신장하며, 중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 골격은 먼저 학생선발의 기본 전형자료는 내신성적, 대학수학능력시험성적, 대학별필답고사성적(대학본고사)으로 하되 내신성적은 반드시 40% 이상 반영하도록 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채택여부, 반영비율, 반영방법 및 대학별 필답고사의 실시여부와 반영비율은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전형자료인 고교내신성적은 고등학교 3년간의 학업성적인데, 실질적인 반영비율을 높여 교육과정의 파행적 운영을 예방하고, 고등학교 교육의 자주성과 권위를 보장한다는 입장에서 그 반영비율을 상향조정, 현행 30∼40% 이상을 의무적으로 높이고 내신등급도 10등급에서 15등급으로 세분했다. 이에 따라 기본점수의 차이가 종전의 제도보다 커져서 내신성적의 실질반영률 또한 현행 4.9∼10% 수준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또 평가영역은 현행 교과성적과 출석 성적 이외에 특별활동, 행동발달, 교내의 봉사활동 성적 10%를 반영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을 알아보기 위하여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따라 언어, 수리·탐구 I, II, 외국어(영어)영역별로 통합교과적 소재를 바탕으로 사고력을 측정하는 ‘발전된 학력고사’로서 대학수학 적격자의 선발 기능을 제고하고 고교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며 학생 선발에 공공성과 객관성이 높은 자료를 제공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출제의 기본방향은 고교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추어 출제하고 가능한 한 문제상황 중심으로 통합교과적 소재를 활용하여 출제하며 단순한 기억력이나 암기력 평가를 지양하고 사고력을 측정하는 문항을 출제한다.

또 속도검사가 아닌 역량검사가 되도록 출제하고 문항의 형태는 5지선다형 객관식으로 한다. 정답이 2개 이상인 문항도 있다. 그리고 수리·탐구영역(Ⅰ)에서는 주관식 문항을 20% 포함하되 정답을 OMR 답지에 표기하도록 한다.

언어영역은 6개의 ‘듣기 문항’을 출제하며, 외국어(영어)영역은 17개의 ‘듣기·말하기 문항’을 출제하고 문항별 예상 정답율은 20∼30%, 영역별 예상 평균 점수는 상위 50% 집단이 50∼60점이 되도록 출제한다. 문항당 배점은 언어영역은 1.6, 1.8, 2점, 수리·탐구 영역(I)은 2, 3, 4점, 수리·탐구 영역(Ⅱ)와 외국어(영어)영역은 1, 1.5, 2점으로 차등 배점하기로 하였다.

출제의 기본방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음 실시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통합교과적이고 탈교과적으로 고등정신능력과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을 측정하여 대학교육적격자를 선발하려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고교교육에 미치는 입시영향을 최소화하고 학생선발의 공공성과 객관성이 높은 자료를 제공한다는 입장에서 언어, 수리·탐구, 외국어(영어)영역으로 나누어 실시하도록 하였다.

언어영역에서는 사실적·추론적·비판적 언어능력을 측정하여 국어교과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등 다양한 교과영역에서 출제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외국어 영역에서는 사실적·추론적·비판적 영어능력을 측정하여 영어가 대학교육에 필수적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학력고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출제 및 채점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담당하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및 시·도교육청에서 시행 및 관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출제는 객관식이고 학생은 희망에 따라 3학년 재학 중에 1회 또는 2회 응시해 그중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제출할 수 있게 하였다.

또 고득점자의 재수를 방지하기 위해 희망하는 대학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고득점자를 일정 범위 내에서 특별전형으로 선발할 수 있도록 했고(특차전형), 대학의 특성화와 다양화를 기하기 위해서 계열별·학과별로 특정 영역의 성적에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끝으로 대학별 필답고사는 대학의 특성 또는 계열별·학과별 특성상 별도의 수학능력을 측정할 필요가 있을 때 대학별로 별도의 고사를 시행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험과목은 대학이 결정하도록 하는데 고등학교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을 준거로 하여 사고력과 판단력, 탐구능력 등 고등정신능력을 주관식 위주로 측정하도록 하고 있다.

위의 3가지 기본 전형자료를 바탕으로 대학이 선택할 수 있는 입시유형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4가지 방식 중에서 전형방식을 선택하였다.

1994학년도 입시의 경우 처음에는 많은 대학들이 본고사를 보겠다고 발표했으나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권위를 높이려는 교육부측의 권유와 별도의 시험실시에 따르는 관리상의 문제 등을 들어 대학별 필답고사를 기피하였다.

특히 1993년 초에 잇달아 터져나온 대학의 입시 관련 부정으로 대학의 객관적 시험관리능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사회 전반에 형성되었던 것도 본고사를 기피하게 된 주요 요인이었다.

그 결과 서울대·연세대·고대·서강대·포항공대·가톨릭대 등 9개 대학만이 내신성적 40%, 수능 20∼30%, 대학별 본고사 30∼40% 정도를 반영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 나머지 대학들은 대개 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새로 시행하게 된 대학입시제도의 또 다른 특징은 특차모집과 복수지원제 실시라 하겠다. 즉, 특차 모집은 대학별고사를 실시하는 대학 중 모집 정원의 일정비율을 대학별고사를 면제하고 선발하고자 하는 대학, 그리고 총 모집 정원의 50% 이상을 후기에 모집하는 대학은 전기모집에 앞서 특차로 신입생을 선발할 수 있는데, 합격자는 전기모집대학의 원서 접수 마감일 3일 전까지 결정한다. 그리고 특차합격자는 전기나 후기모집에 지원할 수 없으며 이를 어길 경우 모든 대학의 합격을 취소한다.

다음에 복수지원제는 수험생이 희망하는 여러 개의 대학에 지원하여 여러 개의 대학에 합격하더라도 그 중에서 희망하는 대학을 선택하여 입학 할 수 있다. 수험생은 전기 모집기간 중 입시 일자가 다른 대학에는 복수로 지원할 수 있으며 두 개 이상의 대학에 합격하면 그 중에서 희망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전기모집에 불합격한 학생은 후기 모집기간 중 입시 일자가 다른 대학에 복수로 지원할 수 있으며 복수로 합격되면 희망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다만, 입시 일자가 같은 대학에는 허수를 예방하기 위해 복수지원을 할 수 없으며 ㉠ 특차모집에 합격한 자는 전기, 후기, 추가모집에, ㉡ 전기모집에 합격한 자는 후기와 추가모집에, ㉢ 후기에 합격한 자는 추가모집에 각각 지원할 수 없다.

합격자 발표 후, 복수지원한 학생이 타대학에 입학하여 결원이 발생한 대학은 합격자 발표시 예비후보를 발표하였으면, 이에 의하여 추가합격자를 선발하고, 이를 발표하지 않은 대학은 불합격자 중에서 고득점자 순서로 추가합격자를 결정해야 한다.

전기 모집대학은 후기 모집기간에, 후기 모집대학은 그 기간이 끝난 이후에 추가모집할 수 있으며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는 대학이 정한다.

음악·미술·체육 등 실기가 중요한 학과에서는 실기고사를, 과학 등 실험과 실습이 중요시되는 학과에서는 실험고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한다. 고사의 과목 및 시행방법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하여 시행하되 실기고사의 경우 교육부가 발표한 예능계 입시제도 개선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

한편 면접·구술고사·신체검사는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신체검사는 대학교육에 지장이 없는 한 불합격 자료로 활용하지 못하며, 면접·구술고사는 합격·불합격의 자료로 활용하거나 총점의 10% 이내에서 입시사정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사범계 대학과 사범계학과는 면접 10% 이내와 교직적성 및 인성검사 10% 이내를 필수적으로 반영하도록 하였다. 1994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현행 대학입시제도는 그 실시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크게는 대학 수학능력시험에도 문제가 있고, 고교내신제, 대학별 고사문제 등 현제도가 안고 있는 많은 특징만큼이나 시정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한편 대입제도가 안고온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새 입시제도가 학교교육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교수-학습방법과 평가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대학별본고사에서 논술형 문제가 출제되고, 수능시험에서도 선택형이기는 하지만 종합적인 사고력과 판단력을 요하는 문제들이 출제되었다. 그러나 종전의 단순 암기식의 교육방법으로는 이를 감당해 낼 수 없다는 위기감이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논술고사의 실시는 논리적인 사고의 형성과 더불어 일부 과목에서나마 토론식 수업이 전개되는 등, 수업방법의 전환이 모색되기 시작했으며 평가체제도 기존의 객관식 유형에서 벗어난 주관식 평가가 초등학교에서부터 정책적으로 장려되는 등 학교현장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아울러 사고력과 판단력은 학교수업만을 통해서는 형성될 수 없고 평소의 폭넓은 독서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 자리잡으면서 독서 붐이 조성되었다는 것도 새 입시제도가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함종규(咸宗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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