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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9 (토)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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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09      
[현대] 대한민국7-사회 (브리)
대한민국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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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변동의 성격

한국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1세기 또는 한 세대에 걸쳐 일어난 사회변동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간의 변화를 일반적으로 ' 근대화'라 규정해도 무방하며,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는 크게 3번의 파도가 일었다고 비유할 수 있다. 첫번째 파도는 19세기말의 문호 개방에 따라 서양문화와 접촉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 문화접변(文化接變)의 경험이고, 2번째의 큰 물결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해방과 함께 서양의 문물이 직접 밀어닥침으로써 전개된 또 한번의 문화접변이다. 그리고 3번째는 20세기말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정보화의 물결이다. 한 세기 전의 개화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적인 근대화에 일단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해방 후에도 남북 분단과 전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방황했지만, 마침내 1960년대초에 이르러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으로 자생적인 근대화를 경험하게 된 셈이다. 이제 파란많은 20세기를 마무리하고 대망의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 나라도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정보통신 기술의 혁신에 힘입어 정보화의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다만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워낙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경험한 과정이었으므로 일종의 '농축된 역사'로 이해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과거의 전통적 농경사회(農耕社會)와 현재의 지배적인 산업사회(産業社會), 그리고 미래지향의 정보사회(情報社會), 이 3가지 요소들을 동시에 안고 있으면서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격은 이러한 전통과 변화의 특징에 비추어 간추릴 필요가 있다.

전통적 요소와 근대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전제군주제와 비교적 엄격한 신분제의 틀 속에서 귀족통치를 근간으로 해서 유지되었던 전통사회의 조직원리는 가족과 친족 중심의 촌락공동체적 요소와 유교적 요소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 요소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인간관계에서 인정과 정서적 만족을 중시하고 모든 관계를 인간적·정의적으로 간주하려 하며 무엇이든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려는 '인정주의' 성향이 강하다. 이는 권리와 책임에 뿌리를 둔 서양의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② 사람의 정체의식은 개인으로보다는 집단 소속에 의해 좌우되고, 개인의 욕구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집합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가족과 친족 및 동족집단을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집합주의의 핵심이었다. ③ 인정주의적 성격이 강한 사회적 유대의 기초는 각종의 연줄에서 찾고, 연줄로써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심을 추구하려는 '연고주의'가 성행했다. 연줄로는 혈연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동향인들의 지연, 동창생들의 학연, 같은 직장 출신의 직연 등이 의사혈연적(擬似血緣的)인 성격을 띠어 각종 파벌이 쉽게 형성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④ 대인관계, 집단의 조직, 신분 질서에서 상하 위계서열을 중시하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소중히 여기는 '권위주의'가 또 하나의 강력한 특징이었다. ⑤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계층간의 지나친 격차나 부당한 차별대우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일종의 '평등주의' 또는 평준화 의식이 사회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는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과도 일맥상통하는 전통이다. ⑥ 사람들의 행위를 평가할 때, 특히 지도층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게, 올바른 예절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도덕주의' 혹은 규범주의도 중요한 특성이었다. ⑦ 예의를 숭상하고 도덕성을 강조하다 보니 때로는 지나치게 형식 위주의 '의례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회조직원리의 전통적 요소 외에도 한국사회의 전통적 가치지향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①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시간지향은 현세주의적이다. 과거를 중시하고 조상숭배를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현재의 삶에서 행복을 얻기 위함이다. ② 유교의 영향 아래 사대부 계급에서는 정신적인 삶과 학문을 가치있게 여기는 숭문사상이 지배했으나,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대체로 물질적 부(富)를 추구했다. ③ 아울러 세상에서 출세하여 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지위지향성 혹은 속칭 출세주의가 상당히 강했다. ④ 그 출세를 위한 첩경을 배움, 즉 교육에서 찾았던 것도 유교적인 가치의 한 표출이다. ⑤ 권위주의적 지향은 신분·지위·연령·성별에 의한 차별을 당연시했고, 특히 남존여비의 가치는 자녀의 출산과 양육에서 남아선호·남녀차별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⑥ 가족주의·연고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폐쇄적인 집단주의와 대외적 배타성이 강했다. ⑦ 감성적이고 인정스러움 대신에 감정이 격하여 갈등이 쉽게 일어나고, 폐쇄성과 도덕성은 갈등관계를 흑백논리로 가르는 성향을 부추겼다. ⑧ 출세를 위한 성취지향이 강한 반면, 이것이 경쟁에서 배타성과 감정을 타게 되면 격렬한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전통적 요소는 근대화에 저항하는 요인인 동시에, 한편에서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사회가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여 적응하는 데 기여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근대화 과정에 여러 모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국제적 문화접변에 의해 일어나는 일반적인 변동과 우리의 자주적인 적응 변동의 변증법적인 작용의 결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먼저 경제 및 사회 구조면에서 일어난 '산업사회화'와 의식과 인간관계 차원의 '물질사회화'라는 2가지 측면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세기말의 시점에서 급격하게 진행하고 있는 정보사회화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업사회화란 주로 공업화를 수반하는 사회변동을 특징짓는 말로서, 산업구조가 농업중심에서 제조업, 나아가 사회간접자본과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하는 과정이며, 이에 따라 농업도 공업화를 겪게 됨으로써 농촌 인구가 줄고 도시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도시화를 수반했다. 가령, 도시(시부) 인구의 비율이 해방 당시 1945년에 12.9%, 1960년에 28.0%이던 것이 1990년에 이미 74.4%로 대폭 증가했다. 직업도 다양해지고 집단조직은 규모가 커지면서 공식·복합화되며 계급도 다원화되고 전반적으로 대중사회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가족의 구성과 기능도 축소되고, 개인중심주의가 만연하면서 인간관계가 이익사회화하며, 정신과 문화가 세속화하는 경향을 띠어왔다. 경제성장으로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공산품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소비지향의 생활양식이 자리잡게 되어 황금 만능, 물질 숭상, 쾌락 추구의 풍조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특히 대중매체의 발달과 그에 따른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욕구는 다원화되고 기대 수준은 끊임없이 높아지는 한편, 출세주의 지향의 교육열이 경쟁을 자극하여 이기면 그만이라는 목표 달성을 최우선으로 삼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법주의가 자행되기에 이르렀다. 경쟁에서 뒤떨어진다고 느끼는 집단에서는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의식이 생겨나고, 이러한 격변으로 인한 부적응의 문제가 개인과 제도 차원에서 모두 일어나 개인적으로는 인간성 왜곡현상을, 구조적으로는 격렬한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동반하는 물질사회화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추세와 가치관의 혼란으로 1990년대 말에는 외환위기에 직면하여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 의존하여 경제구조 조정에 의한 경제회복의 진통을 겪어야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준비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급속도로 전개하는 정보화로 인한 사회문화적 변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소위 IMF 위기는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유형 및 조직원리 등을 서방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체계의 자본주의적 원칙에 맞추어야 하는 변혁을 요구했고, 이는 한편 우리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사회 모든 부문에서 합리화, 효율화, 전지구화(globaliaztion)를 추구해야 하는 선진화를 촉진시키는 효과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단기적으로 실업이 증가하여 사회적 갈등의 씨를 뿌렸고 우리 경제의 전지구적 종속상태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정보사회화는 아직도 초보적인 진행을 보이고 있는 변동이므로 뚜렷한 추세를 읽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하는 부문이 정부와 기업 뿐 아니라 연구와 교육, 가계와 개인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급속히 확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령, 사이버공간 혹은 전자공간 속의 커뮤니케이션은 일상생활의 대인관계에서 직접적·대면적인 의사소통을 약화시킴으로써 공동체적인 삶의 세계를 다칠 소지가 크고, 주로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다양한 신매체, 멀티미디어와 뉴미디어를 타고 전사회 구성원들에게 수시로 다가갈 수 있는 문화 내용이 자칫 비속한 외래문화의 홍수에 떠밀려 문화의 저질화와 도덕성의 마비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산업사회화와 계층구조의 변화


그림3. 산업별 취업자 구성비
산업사회화가 가장 뚜렷하게 표출되는 부문이 산업별·직업별 취업자의 구성이다. 한국의 15세 이상 64세의 노동력 인구는 광복 직후 1949년에 1,066만 3,000명(15~59세), 경제성장을 시작한 1963년에 1,459만 5,000명이었으나 1990년에는 2,970만 1,000명으로 1997년에는 3,279만 1,000명으로 늘었다. 그 중 경제활동 인구는 1963년에 56.3%였으나 1997년에는 65.9%로 증가했다. 이들이 종사했던 산업은 1963년 현재 63.0%가 농림어업 등 1차산업, 8.7%가 광공업 중심의 2차산업, 그리고 28.3%가 사회간접자본과 서비스업 등의 3차산업이었으나, 1997년에 이르면 그 비율이 각각 11.0%, 21.4% 및 67.6%로 거의 완전히 역전했다. 가장 변화가 심한 부문이 농림어업으로 지난 30여 년 사이에 거의 1/6로 줄었고 광공업이 2.5배, 3차산업이 2.4배 가량 늘었다. 이는 산업사회화의 주요 지표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한 정보화의 지표 몇 가지만 살펴보면, 1963년에 전화가입자 수는 15만 7,000명으로 100명당 전화보급률은 0.6%에 그쳤는데, 1997년에 오면 2,042만 2,000명으로 보급률 44.4%로 무려 130배의 신장을 보인다. 1974년 이동전화 가입자수는 겨우 278명에 1,000명당 0.01%의 보급률에 머물렀으나, 1990년에 8만 명을 넘고 1997년에는 724만 3,000명으로 보급률 15.7%로 1974년 대비 2만 6,000배가 늘었다. 개인용 컴퓨터(PC)의 생산량은 1983년에 3,900만 달러 수준에서 시작한 것이 1989년에는 17억 3,300만 달러로 무려 44배의 신장을 보였고 1997년에는 12억 5,5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주요 PC 통신 가입자 또한 1988년에 총 1,185명 정도였으나, 1994년에 57만 8,000명을 넘기고 1996년에는 171만 1,000명에 이르고 있다.

직업별 취업자의 구성도 1963년 농림어업 종사자는 62.9%였으나 1997년에는 10.5%로 급격하게 감소한 반면, 생산근로자와 단순노무자는 15.0%에서 36.6%로 늘어났다. 판매·서비스직은 같은 기간에 15.6%에서 23.1%로, 사무직은 3.5%에서 12.2%로, 그리고 전문기술직과 관리직은 3.3%에서 17.6%까지 각각 증가했다. 특기할 사항은 정보화의 정도를 보여주는 직업구조의 변화 추세다. 전문기술직과 행정관리직을 정보직업군으로 분류할 때 1990년에 8.7%였던 것이 1992년에 10%를 기록하고 1997년에는 17.6%로 급신장했고, 정보처리부문의 상대적 비중도 1990년의 25.1%에서 1995년에는 28.4%로 증대했는데, 이런 수치들은 대체로 1990년의 일본의 수준과 근접하다.

이러한 산업과 직업상의 변화는 사회계층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로 인구조사 자료로써 직업의 성격에 따라 국민의 계급 구분을 하는 사회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중간계급과 근로계급(또는 노동자계급)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계급 구성의 변화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자본가와 정치 엘리트로 구성되는 상류계급은 극소수로서 계급 구성상의 상대적 비중이 미미하지만 1960년 이래 꾸준한 증가를 보인다. 중간계급에는 크게 3가지 범주가 있는데, 첫째는 학력이 높고 전문지식을 요하는 전문직으로 고위 행정관리직을 포함하는 중상계급이다. 1960년의 0.9%에서 1992년에는 1.7%로 2배가 늘었지만, 그 비중은 역시 한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 팽창이 가장 뚜렷한 2번째 중간계급이 이른바 신중간계급이다. 교육연한, 훈련기간, 전문지식의 수준이 중상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전문·기술직과 사무직으로 구성되며, 1960년의 6.6%에서 1992년에는 무려 22.3%로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3번째가 구중간계급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가고용을 하거나 가족 단위의 경제활동을 하고, 소수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각종 자영업자들이다. 이들도 1960년대에는 13.0%이던 것이 1992년에는 22.3%로 대폭 늘었다. 산업사회화의 진전에 따라 가장 급격하게 증가한 계급은 근로계급으로, 1960~92년 사이에 8.9%에서 33.3%로 증가했다. 도시의 하층계급은 초기 경제성장 과정에서 오히려 약간 늘어나다가 1980년에는 다시 줄어들었다. 산업화로 인하여 농가 인구가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이다. 계급구성에서도 농촌의 독립자영농층이 1960년에는 40%나 되었지만, 1992년에는 11.6%로 줄었으며, 농촌하층계급도 24%에서 5.2%로 축소되었다. 다른 계급분류법을 채택하여 분석하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큰 추세는 별로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위의 관찰에서 1가지 주목할 것은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화 해가는 과정에서 중간계급이 점차 비대해지는 소위 '중산층 사회'로 자리잡아간다는 점이다. 중상계급·신중간계급·구중간계급만 해도 1980년에는 46.3%나 되고, 여기에 농촌의 독립자영농까지 합치면 60%가 중간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회조사에서도 밝혀지듯이, 한국 국민의 60.6%(도시 표본의 63.6%, 농촌 표본의 54.7%)가 자신을 중류계층으로 간주한다는 자료도 있다. 이처럼 중간계층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은 일단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여러 가지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듯이, 한국의 중산층은 아직도 정치적으로 일정한 성향을 확고히 갖추고 있다기보다는 상당한 정도 유동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특수한 정치·경제적 쟁점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기도 하지만, 또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근로계급보다도 더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현실이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 중산층이 우리 사회에서 교육을 가장 많이 받고 의식이 뚜렷한 계층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한국사회의 계층구조가 계속 변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계급적 구조의 고착화 같은 현상은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1997년 이후의 IMF 관리체제 아래 실업이 늘고 거품이 빠진 경제규모가 1인당 소득 1만 달러에서 다시 6,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는 진통 속에 과거 중산층으로 간주하던 사람들의 1/3 정도가 이제는 중간계급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조사보고가 있었다.

사회계층의 구성이 이처럼 변하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는 사회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왔다는 사실도 함축되어 있다. 우선 공업화에 따른 도시화는 주로 농촌 인구의 이촌향도라는 지리적·수평적 대규모 이동에서 연유하는데, 그와 같은 수평적 이동에 의하여 농업에서 비농업으로 직업을 옮김으로써 결국은 사회계층적 지위의 상향 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모는 농사를 지었지만 자식세대에는 비농업으로 상향이동을 함으로써 이촌향도가 세대간 이동을 가능하게 한 반면, 도시 내의 직업구조가 바뀜에 따라 도시에서도 세대간 상승뿐 아니라 세대 내 사회이동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한국사회의 계급 구성이 아직은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최근의 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60% 이상의 응답자들이 세대간 이동의 가능성이 높다는 희망적인 대답을 했고, 과반수 이상이 세대 내 이동까지도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응답자의 학력이 높을수록 사회이동에 대해 더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희망적인 전망이 금융위기를 겪은 1997년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지는 재검토해야 할 사항이다. 아마 21세기에 들어서서 경제가 건전성을 회복하고 다시 성장을 지속할 때에는 밝은 전망도 되살아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줄 안다.

노동과 노사관계

계급구조의 변동에서 특기할 현상은 근로계급이 확대 일로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로계급 또는 노동자계급이라고 해도 전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선 크게 나누어도 생산직·판매직·서비스직은 일의 성격이나 조직체의 피고용률이 같지 않고,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위면에서도 분명히 차이가 난다. 생산직이라 해도 숙련도의 다양성에 따른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취업자수는 1963년에 756만 3,000명이었으나 경제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1975년에 1,169만 2,000명, 1997년에는 2,104만 8,000명으로 30여 년 사이에 3배나 늘었다. 이 중 여성취업자수도 1963년에 34.8%에서 1975년에 36.4%, 그리고 1997년에는 41.0%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실업률은 8.1%에서 4.1%, 2.6%로 꾸준히 줄어 들었으나, 1998년 IMF 관리체제 이후 급격하게 증대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한편, 취업자의 피고용률도 1963년의 31.5%에서 1975년에 40.6%, 1997년에는 62.8%로 높아졌다. 이중 여성의 피고용률만 보면, 1965년에 20.9%였으나 1975년에 29.4%, 1996년에는 59.6%로 확대되었다. 상시 고용률도 1965년의 67.7%가 1975년에 72.8%, 1996년에는 86.2%로, 여성의 경우에도 같은 기간에 65.2%로부터 77.0%, 83.9%로 각각 증대되었다. 그러나 대기업체 근로자의 비율은 1970년의 52.1%에서 1996년에는 27.2%로까지 떨어졌다.

제조업 부문의 주당 근로시간은 1970년에 53.4시간에 1975년에는 50.5시간으로 줄었으나, 1980년에는 오히려 53.1시간으로 늘었다가 1988년부터 다시 빠르게 감소하여 1997년에는 47.8시간으로 떨어졌다. 제조업의 명목임금지수는 1980년을 100으로 잡았을 때, 1985년에 183.8이었으나 1991년 중반에 4,446.9까지 올라갔다. 실질임금지수도 1980년의 100.0에 대하여 1985년에 130.3, 그리고 1991년 중반에는 223.5라는 증가를 보였다. 한편, 소비자 물가지수는 같은 기간에 각각 100.0, 141.0 및 200.0의 상승을 기록했다. 이에 비해 노동생산성 지수는 1990년을 100으로 할 때, 1970년에 23.4 수준에 머물렀고, 1975년에 37.8, 1980년에 47.8, 그리고 1996년에는 187.0으로 계속 상승했다. 근로자의 임금수준은 우선 남녀간에 약 2대 1의 격차를 보인다. 1971년에 여성의 월평균 임금이 남자의 45.0%이던 것이 1987년에야 51.0%로 과반 수준을 기록했고, 1997년에는 61.5%로 올랐다. 임금수준은 학력에 따라서도 상당히 차이가 난다. 대학 졸업자와 대비한 고교 졸업자의 임금수준이 1971년에 57.4%에서 1975년에 47.2%로 하락하여 1980년대까지는 계속 50% 이하에 머물렀다가, 1988년에 52.4%까지 회복하고 1996년에는 67.9%로 올랐다. 산업별, 직업별 격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간의 기복이 나타난다. 가령 1975년에는 전기가스, 수도사업을 으뜸으로 금융, 보험, 부동산, 용역업에 이어 건설업, 서비스업, 도소매 및 음식숙박업, 광업, 농림수산업, 운수창고 및 통신업, 그리고 제조업이 가장 저조했는데, 1996년에 오면 우선 산업별 격차가 대폭 줄었을 뿐 아니라, 그 순서도 바뀌었다. 가장 높은 부문은 여전히 전기가스 및 수도사업이고 다음이 서비스업, 건설업, 금융보험, 부동산 및 용역업, 광업, 운수창고 및 통신업, 그리고 도소매 및 음식숙박업에 이어 제조업이 또한 가장 낮은 부문이다. 직종별 임금격차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추세이고 순서도 달라진다. 1975년에 행정관리직을 최고로 전문기술직이 다음이고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 생산직 그리고 농림수산직이 제일 낮았으나, 1996년에는 행정관리직, 전문기술직, 사무직에 이어 생산직이 다음이고 농림수산직, 판매직, 서비스직의 차례로 바뀌었다 (→ 색인 : 3D기피현상).

한국사회의 노동 일반과 관련하여 1가지 더 언급할 것은, 지난 1960년대 경제성장에 착수하던 때에 비해 근로자들의 일에 대한 의욕과 성취동기가 점차 저하하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이른바 3D, 즉 '더러운 일, 어려운 일, 위험한 일'(dirty, difficult, dangerous)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만연하고 있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생산성도 크게 악화되었고 일의 질도 나빠져서 수출시장에서 반품이 늘어나고 있다는 불평이 높다. 이처럼 일에 대한 욕구가 변하게 된 것은 경제성장에 따르는 생활수준의 향상과 여가 선호의 기풍이 작용한 탓도 있지만, 노동운동의 성격이 이념적·정치적인 것으로 변한 데에서도 기인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성향은 1997년에 맞은 외환위기 이래 IMF 관리체제 아래에서도 변함이 없이 나타났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 때는 기업과 정부의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 명목의 대량 실업이 불가피하게 발생했음에도 3D 직종의 기피현상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성격은 더욱 노골화하는 방향으로 변절하고 있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토착적 자본주의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던 19세기말부터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조직적 움직임에서 그 가냘픈 뿌리를 엿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초기현상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상당히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식민 지배하에서 제한된 활동밖에 할 수 없었고, 민족독립운동과도 연결되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노동운동이 제법 활발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좌우 대립이 극심했으나 정부수립 후 국가에 의해 불법화되었고, 이에 맞서기 위한 친정부 노동단체인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이후의 노동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해체되었다가, 다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노총은 외형상으로는 산업별 노조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영향 아래 하향식 조직으로 운영되는 비민주성을 지니고 있었고, 고도경제성장과 안보의 이름으로 노동운동은 일정한 수준에서 억제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63년의 노동관계법 개정은 정부 개입의 폭을 넓혔고, 1972년의 유신 이후에는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결국 노사관계는 정부의 노동억제·경영옹호라는 일방적인 정책의 비호 아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전개되었다.

지속적인 성장 속에서 국가의 억제와 경영층의 무관심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근로자들이 격렬한 저항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으나 1979년 10·26사태 이후 발족한 제5공화국에서는 노동운동에 대한 억제책을 오히려 더 강화했다. 산업별 조합 체제를 기업별 조합 체제로 개편했고, 교섭 당사자인 노동조합이 외부의 전문가나 상급 노동단체에다 교섭권을 위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제3자 개입 금지조처를 취함으로써 조합의 교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경제성장에 따르는 빈부격차의 확대와 저소득 근로자층의 분배불균형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사회적인 민주화 요구가 확대되는 가운데, 정부의 억제적인 노동정책과 노사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간섭, 그리고 기업 내의 권위주의적 차별제도 및 관행 등에 깊은 불만을 지녔던 근로자들은 1987년 6·29선언이라는 정치권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자율화의 의지 표명이 있은 뒤부터 폭발적인 노사 분규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 뒤의 변화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노동조합의 성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산업별 노조의 수가 1963년의 16개에서 1997년에는 41개로 늘었으나, 1980년대부터는 산업별 노조의 성격이 달라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수는 1963년의 1,820개에서 점차 증가해 1970년대 후반에는 4,000개를 넘었다가, 1980년부터는 다시 2,000여 개로 줄었고, 1987년 후반부터 획기적인 증가를 보이기 시작하여 1990년에 이르면 무려 7,698개나 되었다가, 다시 1997년에는 5,692개로 줄었다. 조합원수도 꾸준히 늘어나서 1963년에 22만 4,000명에 불과했던 것이 1990년에는 188만 명이 넘게 증가했다가 1997년에는 148만 4,000명으로 감소했다. 비농가 상시고용 인력에 대비한 조합원의 비율은 1963년의 20.3%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다가 1980년대에 상당히 줄었으나, 역시 6·29선언 이후에는 신장세를 다시 보이다가 1993년에는 또 다시 17.2%로 줄었다.

지난 한 세대에 걸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노사분규 발생건수와 그 원인 및 형태에서 나타난다. 가령 1970년대만 해도 연간 100건 내외이던 분규가 1980년 한 해에 407건으로 증가했고, 다시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6·29선언 이래로 폭증해 1987년에는 3,749건으로 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그후 다시 감소하여 1990년에는 322건, 1996년에는 85건으로 급격히 줄었다. 분규 원인도 임금인상이라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의 쟁점과 근로조건 등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했고, 분규 형태 또한 농성·작업거부·시위 등 과격하고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동안 임금은 1987년에는 10.1%, 1988년에 15.5%, 1989년에 21.5%, 1990년 18.8% 인상하여 4년간 무려 72.8%의 인상을 기록했고, 실질임금도 각각 6.9%, 7.8%, 14.5%, 9.4%로 4년간 41.3%나 인상했다.

6·29선언 이후 노동법이 개정되어 1980년말의 법개정에서 후퇴한 것을 바로잡고, 노동조합의 조직과 활동을 대폭 자유화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기여했다. 노동운동은 노조의 조직확대와 강화를 어느 정도 실현했으며, 한국노총도 과거의 부정적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체제내 운동, 준법, 비폭력뿐만 아니라 노사간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협조를 강조하면서 성과 배분 요구를 하는 자세로 자리잡고 있다. 한편 재야운동 세력은 사회일반과 노동운동의 민주화, 조직활성화, 정부와 사용자의 의식화라는 면에서 기여한 바 있는 반면, 좌파 이데올로기를 표방함으로써 급진적·체제부정적 논리와 과도한 정치투쟁 편향의 성격을 띠고, 노조활동에 대한 외부 간섭을 강화하고 경영참여에 대한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불법·위법·폭력·파괴 등의 수단에 빈번히 의존하는 등 갈등을 격화시킨 점도 있다. 1980년대 후반 자유화 이래로는 일부 노동운동 세력이 이른바 민주노총을 결성하여 노동운동을 진보적인 정치운동으로 연결시키고자 시도하면서 때로는 과격한 노동쟁의를 주도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에서 노사관계가 상당히 대등의 것으로 정착되는 기틀을 마련했고,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단체 교섭의 효율성 제고 등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오고 있다. 이러한 추세로 가면 노동운동과 노사관계의 성격이 질적으로 향상될 소지는 있으나, 아직도 노사 양측이 서로에 대해 가져온 부정적인 관념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노조의 정치성향이 규칙 위반 또는 국가의 일방적 개입 같은 관행도 극복함으로써 산업평화와 공생적인 노사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가족과 사회정책

미시적인 수준에서 가족과 관련된 한국사회의 특성을 일별하고, 사회정책의 특징을 개관하기로 한다. 가족과 사회정책을 동시에 취급하는 이유는 과거 공업화와 도시화가 일어나기 전, 사회적 분화가 저급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가족의 기능이 다원성을 유지했고, 그 속에는 여러 형태의 사회보장도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 노인과 장애자 등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했고, 친족집단이 일종의 사회보장 기구 구실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여파로 사회적 분업이 확대되는 한편, 가족의 성격 자체가 바뀌게 됨으로써 가정이 사회보장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사회보장은 사회정책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총가구수는 1960년에 430만 정도였으나 1985년에는 거의 1,000만을 육박하는 957만 가구로 증가했으며, 1995년에는 약 1,296만 가구에 이른다.

가족의 외형적인 구성뿐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특성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가부장제도 아래 남성 중심의 위계서열적 권위주의가 가족 내의 인간관계를 지배했으나, 점차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민주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이 일반화되면서, 가족 내에서도 친자간·부부간·형제간에 상당히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가 확산되고, 남녀 성별에 의하여 차등화되었던 가사도 남녀가 공동으로 수행하는 유형이 젊은 세대로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다.

한국 가족의 또 하나의 특성은 가족주의다. 특히 핵가족을 중심으로, 드물지만 때로는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혈연과 가족 관계를 축으로 하는 폐쇄적인 집단이기주의가 형성되고 타집단이나 개인의 당연한 권리 같은 것은 쉽사리 묵살할 수 있는 성향을 조성한다. 과거에는 폭넓은 친족집단을 주축으로 하는 가족주의가 공동체적 유대를 지키는 기둥이 되었으나, 개방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사회 전반 또는 지역공동체의 포괄적인 발전에 역기능을 하는 측면을 안고 있다.

사회가 분화하고 제도가 다양해짐에 따라 가족의 사회적 기능도 인구의 재생산, 자녀의 양육과 초기 사회화, 정서적 안정의 유지, 소비경제와 여가 및 오락의 관리 등으로 축소되고 종교, 정치, 교육, 생산적 경제, 사회통제, 복지와 사회보장 등의 기능은 약화 내지 상실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보장이라는 측면의 사회정책이 문제로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가족과 친족의 사회복지 및 보장 기능이 당연시되었으므로 특별한 재해나 전란에 의한 난민을 구호하는 제도 외에는 뚜렷한 사회보장정책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기(1944)에 제정하여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승계되었던 '조선구호령'이 식민지시대의 사회보장제도를 규정하는 법으로서 이 또한 주로 빈민을 구호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미군정의 구빈사업 역시 이재민과 빈곤층에 대한 구호위주의 소극적인 것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공포된 구헌법에는 제19조에 '노령·질병 등의 근로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규정만 두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회보장 정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기틀은 마련하지 못한 채, 전란을 겪고 외국 원조에 의존하며 생존하던 중 1960년대초부터 비로소 사회보장에 관한 법제화를 시도하고자 보건사회부에 사회보장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사회경제적 발전단계에 걸맞게 제도 도입을 연구하여 법제화를 시작했고, 1963년에는 포괄적인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사회보장정책은 대략 3가지 분야로 나누어진다. 첫째 국가와 개인, 고용주와 피용자가 안정된 생계와 건강한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연대적으로 적립하고 혜택을 공유하는 사회보험제도, 2번째 무능력자, 군경 및 기타 국가 유공자, 이재민 등에게 국가가 재정과 의료 보호를 제공하는 공적부조사업, 3번째 어린이와 노약자·여성·장애자 등에게 각종 도움을 제공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이다. 이 가운데 어느 분야이든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전개되어온 양상은 처음에는 특수 부문에 대한 보험·보호 등을 위주로 한정된 범위에서 실시하다가 사회경제적 발전이 진전됨에 따라 자원의 확충도 고려하여 점차 혜택의 종류와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진전시켜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분야별로 개략적인 것에 대해서 살펴본다.

사회보험 분야에서는 공무원연금법(1960. 2. 6 시행)을 비롯한 선원보험법(1962 제정, 미시행)·군인연금법(1963. 2. 6)·산업재해보상보험법(1964. 6. 9)·사립학교교원연금법(1973 제정, 1975 시행)·의료보험법(1964. 6. 5)·국민복지연금법(1973 제정, 1988 시행)·군인보험법(1962 제정)·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법(1977 제정) 등의 법률적인 조처들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공무원연금법 적용대상자수는 1960년에 23만 7,476명이던 것이 1970년에 41만 5,393명, 1980년에 96만 4,812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가 1990년 현재 84만 3,262명, 1996년에는 97만 1,000명으로 다시 증가 추세에 있다. 사립학교교원연금법에 해당하는 교직원 수도 1975년에 4만 명 정도이던 것이 1980년에 8만 9,493명으로 늘어나서 1990년에는 15만 3,922명, 그리고 1996년에는 19만 2,000명을 기록하고 있다. 국민연금제도는 공무원·교원·군인 등을 제외한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며, 1996년 현재 가입자는 742만 6,000명이다.

한편 의료보험제도는 근로자를 중심으로 한 직장보험에서 출발하여 지역보험조합, 직종별 단체들의 직종조합, 그리고 공무원·사립학교교직원·군인가족·연금수급자를 대상으로 공교(公敎)의료보험공단이 잇달아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1977년에 의료보험 적용인구가 320만 명이었으나, 1980년에는 911만 3,000명으로 대폭 증가했고, 1990년 4,017만 6,000명, 1996년에는 4,437만 5,000명에 이른다. 여기에는 물론 공적부조사업에 속하는 의료보호 대상자는 제외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의료보험 대상자는 총인구 대비 97.4%(1996)이고, 의료보호까지 합치면 거의 100%가 의료보장 적용률에 해당한다. 여기서 국민개보험 정신에 입각해서 아직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는데, 이들은 도시자영업자와 5인 미만의 종업원을 고용하는 사업장 근로자들이다.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산업재해도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실시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시행 첫해인 1964년에 64개 사업체 8만 2,000명 정도의 근로자가 적용 대상이었는데, 1970년에 이르러 5,583개 사업체의 약 78만 명, 1975년에는 2만 1,369개 사업체의 160만 3,454명, 1986년에는 7만 865개 사업체의 474만 9,342명, 그리고 1990년 현재로는 12만 9,687개 사업체의 근로자 754만 2,752명에게 적용되고 있다. 업종별로는 역시 제조업이 으뜸이고 이어 건설업·운수업·창고업·통신업·광업 기타의 순으로 많은 사업체와 근로자들이 가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적부조사업 부문에서는 1961년에 제정한 생활보호법을 시작으로 군사원호보상법(1961 제정), 재해구호법(1962),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1968), 의료보호법(1971), 국가유공자 등 특별법(1962), 기타 재해구조로 인한 의사상자 구호법 등이 제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생활보호는 거택보호·자활보호 및 시설보호의 형태로 구분하는데, 1966년에 대상자가 약 330만 명이었고 이는 총인구의 11.5%에 이르렀다. 1970년대 전반에는 15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그 비율도 5% 미만이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증가했다가 1990년에 220만 명(5.2%), 1996년에는 150만 6,000명(3.3%) 수준으로 감소했다. 의료보호 대상자는 1977년에 200만 명 가량으로 총인구에 대한 비율은 5.8%였는데, 1980년대초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86년에 439만 명 정도에 10.6%로 정점을 이루었다가, 다시 1990년 393만 명(9.9%), 1996년에는 174만 명(3.8%)으로 떨어지고 있다.

사회복지 서비스 부문에서는 1970년에 전반적인 사회복지사업법을 만들었고, 1973년에는 모자보건법, 1981년에는 아동복지법·심신장애자복지법 그리고 노인복지법을 제정했다. 이 방면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종래 복지시설은 주로 전쟁고아·부랑아 등을 중심으로 운영했으나, 경제사정이 호전되고 사회가 달라짐에 따라 사회복지시설 수용대상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모자보호와 부녀자 직업보호 및 아동 복지시설은 수가 줄어들고 수용 인원도 감소하는 데 반해서 노인과 장애자를 위한 시설과 수용자가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생활수준이 더욱 향상되고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더욱 산업사회화되며 물질사회화의 물결에 휩싸여 변화가 계속 진행됨으로써 가족의 사회복지적 기능은 점차 줄어들고, 국가에 의한 보장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재원의 확보, 수혜 범위의 확대와 공정성의 신장, 전달체계의 합리화와 사후 관리 효율화 등의 정책적인 과제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족의 사회적 구실에 관련하여 지금과 같이 핵가족화하는 상황에 비추어 가족 성원들이 각자 개인화하고 공동체적 관심과 상호부조의 정서를 상실해가는 현재의 경향을 방치해도 좋을지, 전사회적으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끝으로, 근대화의 결과로 한국사회가 얼마나 질적으로 개선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대체로 근대화는 경제적 풍요를 가져왔고 물질사회화를 초래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질적인 측면을 두고 볼 때 부정적인 변화도 놓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간단한 몇 가지 자료를 살펴보면 인명에 관련하여 교통사고 발생 건수와 인원 및 사망자수는 지난 40여 년 사이에 각각 24.4배, 19.2배 및 3.1배가 늘었고, 산업재해 발생 건수는 1990년까지 2.5배로 증가했다가, 그 후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그로 인한 사망자수는 15.3배나 된다. 환경오염도 대개 악화되는 경향인데, 1990년대의 적극적인 환경정책 시행으로 그나마 대기오염 시설을 줄이고 있다. 사회생활 면에서는 먼저 이혼율이 비록 미미하지만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고, 비행학생수도 20년 전에 비해 5.5배, 범죄 발생 건수도 약 3배로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는, 근대화가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반면 부정적인 결과도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며, 특히 1997년의 금융위기는 이러한 근대화의 음지가 전사회적으로 노출된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동(金璟東)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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