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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2-28 (금)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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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673      
[조선]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재조명 (정읍)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재조명

명칭

1894년 연대기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일대 사건'이 1백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마땅한 제 이름을 갖지 못하고 있다. '갑오동학농민혁명'(甲午東學農民革命)은 한동안 역사의 뒷전에 익명으로 묻혀 있었고 한동안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역사의 왜곡에 시달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 익명과 오명을 보상 받으려는 듯 너무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한 때의 명명법은 시대적 정치적 편의에 따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집권세력의 의도에 가름된 적도 있었다.

오늘날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명칭이 제시되고 있다. 대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성격규정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을 내놓고 명명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90년 6월에는 명명 문제만을 놓고 학계의 대규모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일치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상태다. 여기에서 채택한 '갑오동학농민혁명'도 공증을 받은 정통 역사용어가 아님은 물론이다. 1894년 사건의 이름짓기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사건 자체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던 데 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사실복원과 규명에 있어 끈질기고 치열한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1894년 사건은 역사의 적자(嫡子)로서 떳떳하고 당당한 이름이 지어져야 한다. 사건과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 각종 기념비나 기념관, 심지어 1백주년을 맞아 여러 곳에서 준비하는 기념사업 등의 이름이 제각각으로 불리고 있음은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올바른 명명이야말로 모든 재조명 작업의 시작이자 끝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에 처음 부여된 이름은 '동적(東賊)의 난(亂)', '동학배(東學배輩)의 난', '동학비도(東學匪徒)의 난', '동학도당(東學徒黨)의 난', '동학비란(東學匪亂)', '동학변란(東學變亂)' 등 이었다. 이는 구한말 봉건 지배세력의 시각에 비친 모습이었다. 사건 당시나 직후에 기록된 각종 관찬 사료나 양반 지배계급에 의해 씌어진 문집 등이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일제시대인 일본인 관학자들의 연구시각도 당연히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동학농민군들이 제거하려 했던 외세가 바로 일제(日帝)였음에 비추어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사학자들이 사건 자체를 공정하게 다뤄주기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직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축소왜곡하고 박제화, 형태화 하는 데만 기여했을 뿐이었다. 결국 구한말부터 일제기간 동안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난'(亂)의 개념으로 정리된 채 일반화 됐다.

저서《한국통사》(1914)를 통해 '동학란'이 양반 지배층의 압제와 관리의 탐학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봉건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반봉건운동으로 파악해, 당대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탁월한 역사적 식견을 보여주었던 사학자 박은식(朴慇植, 1859∼1925)도 용어사용에서는 '동학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동학란'을 조선 민중운동사의 일대 선구로 평가했던 김제출신 사학자 김상기(金庠基)도 1931년 8월 21일부터 10월 9일까지 당시《동아일보》에 36회에 걸쳐 연재했던 본격적인 학술연구 논고의 효시를 이름하여 '동학과 동학란'이라 했다. 해방이전까지 '동학란'(東學亂)이라는 용어는 대중적인 명칭이기도 했으며 학계에도 보편화되었을 뿐 아니라 완고하게 사용되었다.

용어 사용에서 엄정해야 하고 따라서 조심스러운 입장인 학계와 달리 천도교측에서는 1920년대부터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천도교에 의한 '동학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의 근대성과 민족 주체성만을 부각시켜 반외세 반봉건의 역사적 변혁운동을 동학과의 연관속에서만 인식하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여 학계의 일반적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東學革命'이라는 명명은 한편으로 60년대 후반부터 교과서의 공식용어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난(亂)으로 평가절하됐던 표기법을 주체적, 근대적, 발전적으로 한 차원 끌어올리자는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4·19를 계기로 한 시민의식의 용출, 식민주의사학의 극복이라는 학계의 부담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내놓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동학혁명'이라는 이름짓기도 의욕만 앞선 근대화와 철저하지 못한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으로 인해 ' 갑오동학농민혁명 '의 사회경제적 배경 및 성격 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따르고 있다.

더욱이 당시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5·16의 주체세력들이 5·16을 혁명으로 명명받으려는 노화한 착상에서 교과서의 용어를 '난'(亂)에서 '혁명'(革命)으로 '승격'시켰다는 분석까지 제기되고 있다.

오랫동안 용어에서 '동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자로 보였다. 이에 일대 타격을 가한 시도가 월북 경제학자인 전석담(全錫淡)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저서《조선사 교정》(1947)에서 1894년 사건을 '농민전쟁'이라는, 당시에는 다소 생소하고 획기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 했다.

동학이라는 종교적 껍데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참가 민중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고 지도자가 농민적 의식을 가졌으며 투쟁구호가 반봉건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여 사실상 농민전쟁이라는 것이 전석담의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태동한 '농민전쟁'이라는 명명법은 국내외 학자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동학'을 거세한 '갑오농민전쟁'을 공식용어로 채택·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1959년 동학의 역할이나 연관성 문제를 놓고 일대 토론을 벌인 뒤 "농민전쟁의 발발과정에서 동학도들과 동학의 조직망이 담당한 역할을 도외시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으나 공식용어에서는 이를 배제한 채 '갑오'(甲午)라는 연대명을 붙여 사용키로 했다는 것이다.

지난 1989년 월북작가의 작품이 원전 그대로 출간 판매됨으로써 화제를 모았던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박태원(朴泰遠, 1908∼1986)의 대하역사소설 제목이 ≪갑오농민전쟁≫이었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교과서를 통해 '동학난'이나 '동학혁명'으로 배웠던 대부분의 일반 대중에게 여전히 낯설기만 한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농민전쟁'은 흔히 봉건사회 내부에서 개혁을 목적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농민운동으로 정의되고 있다.

14세기 프랑스와 영국에서, 15세기 독일에서, 17세기 이후의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영주권력과 농민(농노) 사이의 계급투쟁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때의 투쟁은 봉건체제를 전복해 버리려는 혁명적 의지가 배제된 채 영주의 권력을 부정하거나 농민층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제한적 소극적 항쟁의 권력을 부정하거나 농민층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제한적 소극적 항쟁에 불과한 형태였다. 좁은 지역적 이익에 의한 결합, 통일된 조직의 불비, 취약한 계급의식 등의 한계로 인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농민전쟁'의 명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1894년 조선의 농민들에 의해 번진 변혁운동이 중세유럽의 농민전쟁과 내적 성격이나 외적 형태면에서 모두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즉 1894년 사건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내재적 흐름에 따라 조선봉건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전쟁'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또한 사회 계급적인 제한성을 갖는 농민들이 혁명적 부르조아나 노동계급의 영도를 받지 못한 한계 때문에 봉건제도 자체를 철폐하는 문제와 결합하지 못했던 중세 유럽 농민전쟁의 결함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는 한민족의 독특한 변혁운동을 역사발전의 세계사적 도식 속에 지나치게 틀 지으려 하며 따라서 ' 갑오동학농민혁명 '의 성격이나 역사적 의의를 왜소화하지 않나 하는 일부의 우려에 부딪혀 있다. 특히 역사학에 정통하지 못한 일반 대중들은 '전쟁'이라는 어휘에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오늘날 '1894년 사건'에 대한 용어 규정은 크게 두 가지의 논점에서 다뤄지고 있다. 하나는 '동학'(東學)이라는 종교사상적 요소를 포함시켜야 하느냐 하는 치장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농민전쟁', '혁명운동', '혁명'등 성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본질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곧 사건의 주체와 동력을 어디에 설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즉 동학사상이나 동학교문의 비중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에 대한 편차이다.

여기에는 전면 부정과 완전 인정이라는 양극단의 주장과 외피론과 절충론 등으로 설명되는 중도적 견해들이 스펙트럼처럼 깔려 있다. 동학의 역할을 전면 인정하거나 부분적으로 연관짓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연구자들은 접두어로서 '동학'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쪽이다. 반면 동학사상이 지도이념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동학교문의 활약도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미미했다고 보는 학자들은 '동학'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대신 '갑오', '1894년' 등의 연대명을 이용하자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혁명이냐 농민전쟁이냐는 논쟁이다. 동학사상이 지닌 혁명적 요소를 중시하거나 사건 자체가 근대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위상과 성격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경우 '혁명'이라는 용어를 택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지향, 투쟁방법, 조직 등에서 보이는 느슨함과 특히 결과적으로 실패했음을 지적하는 학자들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농민들에 의해 전개되는 유럽식 농민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신용하(愼鏞廈·서울대) 교수는 "형태적 방법으로 볼 때는 농민전쟁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역사적 성격으로 볼 때는 농민혁명운동의 특징을 갖는다"고 지적, 성격규정의 어려움과 함께 양자의 입장을 함께 수용하는 명명법을 제시한 적도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일단 동학난, 동학농민봉기,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등의 용어사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에 잠정적 합의가 이뤄져 있다. 따라서 '갑오(또는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등 4가지 조합이 학계나 일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학계의 일각에서는 '새로운 가치나 신념체계'를 뜻하는 한국적 어휘인 '개벽'(開闢)의 사용을 검토해 보자는 주장도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은 서구적인 역사관으로 한국사의 특수성을 제대로 파악해낼 수 없다는 지적과 함께 동양적인 역사발전론을 찾고자 하는 그룹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제시했던 '다시 개벽'이라는 용어를 주목하고 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개의 얼굴과 성격을 지니고 있는 ' 갑오동학농민혁명 '이 한 가지의 통일된 이름을 갖기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학계에서 이름짓기를 합의해 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따라서 학계의 전문용어와 일반인들이 부르는 대중용어가 따로따로 정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북한학계의 연구 동향

북한학계의 '1894년 사건'에 관한 연구는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남한학계에 앞서 해방 직후부터 활발히 이루어졌다. 북한학계의 연구성과는 일정 부분 남한학계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사건 자체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상당한 시각 차이를 나타낸다.

북한학계의 연구 동향은 시기적으로 크게 3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해방 이후 50년대 후반까지 제 1 기에서는 사회주의계열 학자들의 연구가 단연 돋보였다. 이청원의 "갑오농민전쟁의 성격과 그 력사적 의의" (≪력사제문제≫, 1948), 전석담의 "이조 봉건사회의 총결로서의 동학농민란"(≪조선경제사≫, 1949)이 이 시기의 대표적 논문이다. 이청원이 사용한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용어는 지금까지 북한학계의 '1894년 사건'에 대한 공식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북한학계의 연구는 오길보의 "갑오농민전쟁과 동학"(≪력사과학≫, 1959) 논문으로 본격화된다(70년 말까지 2기). 이 논문에서 오길보는 종래의 종교적 외피설을 전면 비판하고 동학의 역할보다 농민군의 활동과 격문이 중요하다고 논쟁의 불을 지폈다. 이 논쟁은 <갑오농민전쟁에 관한 과학적 토론회>로 연결됐다. 토론 결과 대체로 종교적 외피론을 부정하고, 농민전쟁 전개과정에서 동학교도와 조직망이 담당한 역할을 도외시하거나 과대평가할 수 없으며, 전봉준이 동학접주였는가 여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가 누구를 위해 투쟁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 결론은 이후 북한 학계의 공식견해가 됐으며 "조선근대혁명운동사"(1961), ≪력사사전≫(1971)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후 오길보의 "1894∼1895 농민전쟁의 성격에 대하여"(1964)와 "갑오농민전쟁"(1978) 등이 있을 뿐 활발한 연구나 토론이 없었다. 80년대 간행된 ≪조선전사≫와 ≪근대조선력사≫(라종현, 1984) ≪조선통사≫(1987) 등에서도 2기의 학설을 계승하고 있디. 다만 70년대 이래 '역사의 비판적 계승'이라는 관점 아래 '선진계급의 지도부재'를 농민전쟁의 종요 실패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북한학계는 결국 동학과 농민전쟁의 관련성에 부정적이며, 혁명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관되게 농민전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공식견해다.

또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에 대해 반봉건, 반침략적 지향을 지닌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봉건제도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근본적인 정치적 요구를 못한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주체, 주도세력

1백년도 채 안되는 시간 속에서 이미 그 실체를 매장당한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바른 모습을 복원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과제는 바로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되지 못한 채 농민혁명의 성격 문제, 주도·주체 세력 문제, 그것의 사회 경제적 지향 문제를 비롯한 주요 쟁점들이 여전히 논쟁점으로 남아 있는 오늘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자들의 다방면에 걸친 연구가 이루어져 왔음에도 기존 연구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과학적인 해명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여전히 논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농민혁명을 배태시킨 당시대의 복합적인 시대상황이 정당하게 규명되어 있지 못한데다 이 역사의 실체를 복원시킬 수 있는 사료가 이미 없어지고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역사의 올바른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고삐를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될 절박한 시점을 맞고 있다.

역사 변혁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 동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오늘에도 변혁운동의 가장 중심점이고 실천적인 문제로 서 있다. 우리의 매장된 역사 갑오동학농민혁명에서도 그 주체·주도세력을 규명해내는 작업이 갖는 중요성은 예외가 아니다. 사실 농민혁명의 주체·주도세력을 밝히는 작업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배경, 그 지향 등 역사적 역할과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도 직결된다.

여타의 주요 쟁점들과 마찬가지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도·주체세력에 대한 기존 연구의 입장은 다양한 시각으로 제기되어 있다. 연구의 진전과 연구시각의 변천에 따라 일정하게 변화되어온 기존 연구자들의 입장은 대략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그 첫째는 잔반(殘班)주도설이다. 70년대까지 유력한 견해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잔반주도설은 북한 학자 리청원에 의해 주창되어 김상기를 비롯한 초기 연구자들을 거쳐 한우근에 와서 완성됐다. 한우근은 자신의 논문 "동학의 리더십"에서 "동학의 교주를 포함한 동학교의 접주(接主)들은 몰락한 양반 후예, 즉 잔반계층에 속하는 자들로서 이미 지체와 체모를 갖출 수 없게 된 지 오래됐을 뿐 아니라 그들의 처지가 평민(농민)의 그것과 다름 없이 되었던 자들이었다"고 밝혀 양반 지배계층으로부터 탈락한 잔반들이 그들과 처지가 비슷한 일반 농민들과 이해를 같이하여 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보았다.

또 다른 견해는 부농(富農)주도설이다. 주로 일본인 학자인 미촌수수, 마연정리 등에 의해 주장된 이 입장에 따르면 농민혁명 전후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볼 때 농민혁명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부르주아적 부농층에 의해서 이끌려졌다.

세 번째의 입장은 빈농(貧農)주도설이다. 신용하·조경달(趙景達) 등의 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빈농주도설은 대체로 조선후기 사회에서 부르조아 계층은 계급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농층은 근대사회로의 변혁주체로 등장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부농층은 혁명성을 상실하고 제국주의 세력과 결합함으로써 이들로부터 수탈당하고 억압받고 있던 빈농층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혁명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견해다.

이 입장은 기본적으로는 시각을 같이하면서도 연구자들에 따라 농민혁명과 '부농'의 관계를 상정하는 입장에 따라 또 다른 세부적인 관점으로 분류되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다.

또다른 견해는 빈농주도설을 비판하고 나선 양반주도설과 혁명적 농촌 지식인의 주도설이다. 신영우(申榮祐)에 의해 주장된 양반 주도설은 영남 북서부지역의 농민군 지도자의 출신을 사례연구한 결과로 제기한 주장이어서 관심을 모았다. 그는 "영남 북서부지방(예천, 상주 등)에서 활동한 농민군 지도자 21명중 7명이 상급 양반이었고 10명이 상급 양반 이외의 양반이었다"는 사례연구를 근거로 경상도 북서부 지방에서의 농민혁명을 주도한 계층은 동학교단에 의해 접주, 접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동학교단의 간부들이었으며 신분상으로 이들 중 다수는 양반이거나 향리층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 또는 부농층이었다고 밝혀 기존의 입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혁명적 농촌지식인 주도설(이윤갑·계명대 교수)은 혁명적 농촌지식인의 이념적 사상적 지도 아래 농민층이 주도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시기별로 참여세력을 달리 설정하는 견해도 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도자 명단조차 시기별로 각각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과 관련시켜 볼 때, 시기별 참여세력을 당시의 시각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또한 중요한 쟁점의 여지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개개인의 시각과 그들이 주목한 참여세력의 차이로 농민군은 혁명초기의 다양한 구성에서 집강소시기를 거치면서 평·천민층으로 집중되어가는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처럼 농민혁명의 주도세력에 대한 견해가 각각 엇갈려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그 위치를 규정해야 하는 이원적인 사회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일원적으로 단정지으려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농민혁명의 주체·주도세력에 대한 각각의 주장은 현재 학계 연구자들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중세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전환점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적인 방법으로 근대사회를 수립하려는 변혁운동이었다는 역사적 의의에 비추어 볼 때 그 주체의 실체를 가려내는 작업은 참으로 절실한 과제이다.

그것은 농민혁명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 역사적 의미와 맥락을 올바로 파악하는 바탕으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역사의 시점마다 그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온 민중운동의 실상을 밝혀내는 작업으로서의 의의 또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일치되지 않는 각각의 견해를 한 고리로 엮어 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모색되지 못하고 있는 한 그것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할 연구와 논란의 대상으로 앉혀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러나 80년대부터 더욱 두드러져 있는 연구 작업들을 일별해 볼 때 기존 연구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총체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또한 폭넓은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각 주제별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는 주장들을 통일된 시각으로 모아내기 위해서는 각 지역별·시기별 연구가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가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기존의 연구작업들이 사료의 한계와 각 시대가 안고 있었던 상황으로 말미암아 도식적인 연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도·주체세력을 규명하는 일은 결국 봉건적 위기와 근대화 정책의 추진과정에서 비롯된 재정부담의 가중이 국가 재정의 위기를 초래하고 결국은 농민층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시대 상황하에서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변혁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란 물음으로부터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계급구성과 또한 신분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세력이 뿌리내리고 있던 당대의 사회상황에서 봉건적, 민족적 모순을 껴안아 감수하고 있는 진정한 민중세력을 찾아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어쩌면 역사의 한 중간에서 늘상 그래왔듯이 불의에 항거하며 떨쳐 나가 올바른 현실을 이어내려 온몸으로 부딪쳤던 수많은 민중들의 신원을 회복시켜내는 작업과도 맞닿아 있다.

'역사의 변혁을 담당한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고통 받으며 당대를 살았는가?'를 규명하는 일이 어찌 과거의 역사에서만 절실한 일일 수 있겠는가.

동학사상

갑오동학농민혁명에 있어 동학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동학과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관련성을 따지는 이 같은 문제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전체적인 성격을 규명하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학계의 주요 연구과제로 부각됐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있는 이 문제는 동학사상의 내용과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있다.

기존의 연구경향은 대체로 동학사상을 단순한 종교사상으로 이해하는 견해, 동학사상을 그 자체 내의 부르조아 혁명 원리를 내포하는 혁명이념으로 보는 견해, 동학사상은 혁명의 원리나 이념은 아니지만 그것이 지닌 현실부정 성격에서 드러나고 있는 반봉건·반침략적 지향들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의 결합에 의해 혁명적 원리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견해 등으로 나뉘어 있다.

농민혁명과의 관계뿐 아니라 농민혁명의 성격, 농민혁명의 주도·주체세력에 대한 문제들을 해석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가 되는 동학(東學)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당시대 민중들에게 파고들었는가를 살펴보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遇)의 창도

19세기 중엽 조선왕조는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와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사회·경제적으로는 수취제도의 문란과 지방수령들의 일반 민중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가중되는 가운데 민중들의 봉기로 인한 지배체제의 모순이 날로 심화되었다. 또한 주기적인 전염병의 유행과 자연재해는 민중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지배체제를 주체적으로 개혁하고자 등장했던 실학사상마저 이 시기에는 거의 영향력을 잃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던 동아시아 문명권은 물밀듯 밀려오는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던 시기다. 특히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침략과 조선연안의 잦은 이양선 출몰로 인해 민중들의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 왕조 말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다름아닌 피지배층들의 의식의 변화였다. 민중들은 악화된 삶의 환경개선을 수령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 같은 요구는 점차 조직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감록(鄭鑑錄)≫에 의지하거나 '미륵불사상'을 빌어 봉기한 민란이었기에 조직이념은 아직 엉성하였고, 지역성의 한계를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학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遇)에 의해 창도 됐다. 1824년 경주(慶州)의 몰락양반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내내 혼란한 시대 속에서 방황하고 고뇌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어야 했던 고난과 시대의 아픔을 이중으로 안으며 상당기간 동안 전국을 유랑하였고, 유랑기간동안 수련을 거듭한 끝에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했다.

동학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일정하게 성숙하고 있던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삼아 피지배층들의 요구와 이해를 집약적으로 대변하여 창도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학은 이중의 모순에 의해 시달리던 조선후기 민중들이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제시한 '조선민중의 자기확립사상'이었던 것이며, 최제우는 바로 조선후기 민중을 대표하여 당시의 민중의식을 조직화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동학사상의 특징

동학의 모든 사상적 요소는 최제우에 의해 거의 완성된 것으로, 그가 저술한 동학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와 ≪동경대전(東經大全)≫에 담겨 있다. 이 두 경전은 사본으로만 전해지던 것을 수운이 처형된 이후 2대 교조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구송(口誦)으로 대신 씌어져 편찬되었다고 한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는 데 활용한 지적 자원은 일차적으로 종래의 유교·불교·선교의 지식체계와 서적들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또 민간에 전승되어온 주술적 신앙이나 도참사상까지 포섭하여 개인의 구제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도래를 예언하였다.

수운에 의해 확립된 이 같은 동학사상의 특징은 대체로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 시천주(侍天主)와 수심정기(修心正氣)사상, 치병(治病)과 유무사상(有無相資), 척왜(斥倭)와 반서양(反西洋)사상, 정감록적 민중사상의 수용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후천개벽종말론 주장

수운은 한글경전 ≪용담유사≫에서 자신이 득도하기 전까지의 시대를 '개벽 후 5만년', '하원갑', '전만고' 시대라고 표현하고 이 시대는 '각자위심'(各自爲心, 진리로부터 이탈하여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의 시대로서 모순이 가득찬 시대임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는 '다시 개벽', '상원갑', '후만고', '오만년지운수'의 시대로서 이 시대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호시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혼란한 시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終末論)을 주창하면서도 다가오는 새 시대야말로 이상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을 주창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운자신이 확립한 동학사상이야말로 오만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금까지의 문명을 해체시키고 다시 오만년 동안 지속될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천명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수심정기(修心正氣)

수운은 ≪동경대전≫ 속의 <논학문>에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말과, ≪용담유사≫ 속의 <교훈가>에서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뭄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 말가' 등의 표현을 통해 한울님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나타냈다.

즉 한울님은 어떤 초월적 존재로서의 의미가 아닌 바로 자기 안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수련을 통해 한울님과 일체화할 수 있고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를 체험할 수 있다는 수운의 한울님사상을 시천주(侍天主)사상이라고 한다.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이 사상은 당시 반상(班賞)·적서(嫡庶)·남녀(男女) 구별이 엄격한 봉건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반계급적 평등사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운에의해 확립된 동학의 평등사상은 최시형을 통해 실천적으로 전개되어 동학농민혁명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면 인간이 한울님과 일체화를 이루는 길은 무엇인가. 수운은 '수심정기'(修心正氣)라는 수행법을 통해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이 수심정기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는 주문과 성경신(誠敬信)의 수행법을 말하였다.

척왜양(斥倭洋)의 민족사상

수운은 자신의 깨달음을 동학(東學)이라 명명한 것은 바로 서학(西學)을 제압하고자 한 것이라 하여 민족주체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자신이 제정했던 동학의 주요 의식인 검무(劍舞)와 검가(劍歌)를 통해 당시의 조선에 밀려들고 있던 서양 오랑캐에 대항, 전투적 의지를 고양시켰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왜(倭)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내용의 '개같은 왜적놈들'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에서 일본에 대한 수운의 격렬한 적개심을 살필 수 있다. 이 같은 척왜양사상은 그 후 1890년대에는 보은취회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반침략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어 1894년 반봉건 반침략노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치병(治病)과 유무상자(有無相資)사상

수운은 동학을 전파하면서 조선후기 널리 유행하던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대한 약방문도 제시한다. 즉 자신의 가르침을 성심으로 믿고 따르게 되면 병도 자연 치유된다고 했다. 이때 자신이 천주로부터 받은 신령스런 부적(부적 혹은 乙 적)을 그려 태워 물에 타서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전파했다.

또한 수운은 그의 제자들 중 경제적 여력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가난한자를 돕도록 했다. 이 유무상자(有無相資)사상은 동학조직이 수운 당시부터 매우 끈끈한 공동체로 자리잡아 그가 처형된 후에도 수십년간 지하조직으로 존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했다.

출전 :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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