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1 (금) 15:42
분 류 사전3
ㆍ조회: 1680      
[근대] 김복진 (이광우)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

이광우 (청주대학교, 미술교육)

김복진은 1925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경미술학교에서 근대적인 조각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작품을 발표한 최초의 근대조각이다. 그는 배제고보 재학시절 톨스토이에 심취했었고 오스카 와일드나 니체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애초에 문명비평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그는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인 '다카무라 고우운' 교수로부터 조각을 배웠다.1923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토월미술연구회, 파스큐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다가 다카무라 교수의 권유에 따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후 로댕의「이브」를 본뜬 「여인 입상」을 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였는데 각기병으로 귀국하여 고향에 누워있던 김복진에게 이 수상소식은 그가 조각작업에 매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다. 따라서 김복진이 본격적으로 조각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1925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해는 그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조직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때이기도 하다.

그는 배제고보 교사로서, 또한 경성여자상업고 강사와 고려미술원연구소 강사로서, 무산청년들을 위한 야학의 강사로서 교육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졌으며, 청년학관(YMCA)에서 근대조각 가르치기도 했다.

김복진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일본에서 조각을 배우고 돌아오기 전에 김진석이 조선에 조각을 수입하기로 하였으나 연구 도중에 요절하고, 진남포의 곽윤모 역시 일찍 병사하니 실제로 최초의 근대조각가는 김복진 자신이며, 뒤이어 김두일이 그를 이어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운 후 활동하였다.

따라서 김복진이 토월미술회와 청년학관에서 가르친 학생들은 한국 근대조각의 1세대임이 분명하며, 이국전, 구본웅, 박승구, 윤효중, 장기남, 양희문 등 한국 근대조각의 형성기에 활동했던 대부분의 조각가가 김복진에 의해 양성되었던 것이다.

「여인 입상」을 제작한 배경에 대해 그 자신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김복진이 영향을 받은 조각가는 로댕이었다. 그러나 김복진의 이런 점 때문에 그가 근대성의 획득에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 김복진이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으로 투옥된 후, 1933년에야 5년간에 이르는 수감생활을 청산하고 작업에 임할 수 있었으므로 그의 조각작업은 1925년을 전후한 몇 년간과 1933년 이후 1940년 그가 죽을 때까지 불과 몇 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간 근대 식민시기의 의식있는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행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실제 작업기간이 매우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옥 이후 그가 제작한 작품은 20년대의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예술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테면, 「여인 입상」이 로댕의 완전한 모작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제작한 「백화」 (1938년작)와「소년」(1940년작)은 한국 근대조각에 있어서 사실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보다 발전된 면모를 보여준다.

「백화」는 한복을 입고 족두리를 쓴 여인이 두 손을 다소곳이 잡고 서있는 형상으로 비례의 고전적 품격과 단아한 자태가「위리암선생상」(1937년작)이나 「다산선생상」(1940년작)과 같은 초상조각에서 볼 수 있는 사실성이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습작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누드조각으로부터 전통의상을 입은 전신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조각이 그 스스로 추구하고자 한 '토속성'과 '민족성'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그의 조각이 관학주의나 향토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조각에 있어서 관학주의란 50년대 이후 줄곧 지배세력의 주변을 맴돌며 기념조각의 제작에 여념이 없었던 조각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다.

김복진에게 있어서 향토성 역시 감상벽을 자극하고 박제화된 과거에의 집착으로서 토속적인 물건이나 대상에 대한 환기가 아니라 민족이 공유할수 있는 정서적 토양을 일컫는 것이며, 이또한 전통적인 물건의 집적적인 차용과 거의 착취라고 할만큼 반복적으로 향토성을 모사해내는 우리 구상조각의 센티멘탈하여야할 성질이다.

김복진의 작품 중에서 「백화」와 더불어 그가 죽던 해에 제작한 「소년」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로댕보다 훨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의 「아나비소스의 쿠로스」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아나비소스의 쿠로스 보다 훨씬 동적이며 인간적으로 처리된 「소년」은 일본을 통해 근대적인 조각기법을 입수해야 하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에 사실주의 조각이 정립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탄력있는 근육의 풍부한 볼륨과 균형잡힌 몸매, 소조의 흔적을 남겨놓은 적당한 질감과 생명감넘치는 포즈 등「소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적 특징은 한국 근대조각이 바야흐로 고졸한 추상성으로부터 객관적인 사실주의로 전이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김복진의 작품이 현재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 평가는 언제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이 조각가로서 김복진의 미술사적 위치를 규정할 때 언제나 최초의 근대조각가로 머무르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더 이상의 비평적 진단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복진이 한국미술에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것이며 비단 전통조각의 제작 및 사용맥락으로부터 독립하여 근대적인 조각의 길을 개척한 조각가란 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조각의 현대적 성격을 찾아가는데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김복진이 일제시대에 생애 거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조각작업의 양이 많지 않고 서구적인 인체조각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그가 생전에 주장했던 민족성의 구현이란 과업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작품으로 구체화시키지 못한 사실은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

말년에 그가 한국의 전통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한 결과 불상조각에 착수하지만 그것 역시 미완의 상태로 끝났다는 의미에서 미술사적, 비평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미흡한 측면이 있다.

즉 그는 근대성을 자각한 지식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단지 서구적 차원에의 추종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국미술의 독자적 방향을 찾기 위해 고투하였으나 끝내 그것을 실현시킬 수 없었던, 따라서 식민통치란 비극에 의해 자신의 이상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사라져간 작가이며, 그의 작품이 소실된 이상 결국 그는 기록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출전 : 이광우의 로댕 홈페이지-미술교육
   
윗글 [근대] 청산리대첩 (민족)
아래글 [조선]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재조명 (정읍)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868 사전3 [현대] 서울올림픽대회-성과 및 의의 (민족) 이창호 2004-01-11 1704
2867 사전3 [근대] 개화기의 교육 (민족) 이창호 2003-05-13 1704
2866 사전3 [근대] 을사의병 (민족) 이창호 2003-03-28 1701
2865 사전3 [조선] 김정희 (민족) 이창호 2002-11-29 1699
2864 사전3 [현대] 박경리 (브리) 이창호 2004-01-09 1697
2863 사전3 [현대] 육이오=6.25전쟁 (브리) 이창호 2003-12-02 1691
2862 사전3 [현대] 조연현론 (김윤식) 이창호 2004-01-02 1690
2861 사전3 [근대] 청산리대첩 (민족) 이창호 2003-07-02 1686
2860 사전3 [근대] 김복진 (이광우) 이창호 2003-11-21 1680
2859 사전3 [조선]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재조명 (정읍) 이창호 2003-02-28 1673
1,,,1112131415161718192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