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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8 (금) 07:42
분 류 사전3
ㆍ조회: 1701      
[근대] 을사의병 (민족)
을사의병(乙巳義兵)

1905ㆍ1906년 러일전쟁ㆍ을사오조약 등 일련의 일제침략을 계기로 일어난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특히 1906년(丙午)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까닭에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고도 한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을미의병은 1896년 10월을 고비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의병항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동기만 유발되면 언제라도 재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ㆍ한일협약이 잇달아 체결되어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어가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민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였다.

을사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은 을미의병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던 원주ㆍ제천ㆍ단양 등 중부일대였다. 1905년 9월 원주 동쪽 주천(酒泉)에서 을미의병 당시 유인석(柳麟錫) 의병진에서 활약한 원용석(元容錫, 일명 容八)ㆍ박정수(朴貞洙) 등이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고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의병진은 활동 개시 전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 일진회(一進會)의 급습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뒤를 이어 단양에서 정운경(鄭雲慶)이 단양ㆍ제천ㆍ영춘 등지의 의병 300∼400명을 규합하였으나, 역시 원주진위대의 습격으로 정운경ㆍ박정수 등 주모자가 붙잡혔으며 의병도 해산 당하였다.

을사의병 중 제일 규모가 크고 가장 치열한 항전을 벌인 의병진은 민종식(閔宗植)ㆍ안병찬(安炳瓚) 등이 주축이 된 홍주(洪州)의병이었다. 홍주의병은 안병찬이 1906년 3월 박창로(朴昌魯)ㆍ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수 천명의 의병을 규합, 의병진을 편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홍주성을 활동 근거지로 삼기 위해 공략하였으나 실패, 안병찬 등 중심 인물들이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 전 참판 민종식이 이용규(李容珪)ㆍ이세영(李世永)ㆍ채광묵 등과 함께 조직한 제2의 홍주의병은 그 해 5월 19일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 5월 31일 성이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을사의병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을사의병 중에서 군사활동은 비교적 미미하였지만 전국의 의병항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최익현(崔益鉉)의병진이다. 최익현은 대원군 집정 때부터 강직한 관리로 널리 알려졌고, 또한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한 배일운동의 선봉에 서왔기 때문에 그의 거의(擧義)는 곧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현재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거의한 최익현의병진은 진군을 시작하여 정읍ㆍ순창을 지나 담양 방면으로 향하던 중 전주ㆍ남원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자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교전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이 틈을 탄 진위대의 공격으로 의병진은 참패를 당하여 최익현 이하 임병찬(林炳瓚)ㆍ고석진(高石鎭) 등 주모자 13명이 붙잡힘으로써 의병진은 해체되고 말았다.

영남일대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한 을사의병으로는 신돌석(申乭石)의병진과 정환직(鄭煥直)ㆍ용기(鏞基) 부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있다. 신돌석은 1906년 4월 영해(寧海)에서 거의한 뒤, 산남의진과 서로 호응하면서 동해안 일대에서 항일전을 벌였다. 이 의진은 한때 3,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특히 규율이 엄하고 유격전술에 뛰어나 많은 전적을 올릴 수 있었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정용기를 중심으로 이한구(李韓久)ㆍ정순기(鄭純基)ㆍ손영각(孫永珏) 등이 영천에서 영남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한때 의병장 정용기가 붙잡히는 큰 고난도 겪었지만, 청하ㆍ진보ㆍ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성ㆍ경주ㆍ신령 등지의 여러 의병진을 아우르며 지속적인 항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 밖에 죽산ㆍ안성의 박석여(朴昔汝), 양평ㆍ여주의 이범주(李範疇), 양구의 최도환(崔道煥), 홍천의 박장호(朴長浩), 예안의 김도현(金道鉉), 경주의 유시연(柳時淵) 의병진이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을사의병의 봉기 양상은 본질적인 면에서 을미의병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을미의병이 해산된 뒤 은거 중이던 대부분의 의병장이 구국결사의 신념을 새롭게 다지면서 의병을 다시 규합하여 전국 각처에서 대일항전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을미의병 당시 항일의지는 있었으나 미처 거의하지 못한 유생과 지사들이 을사의병에 대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을사의병은 여전히 무기와 편제가 조잡하고, 더욱이 훈련되지 못한 민병(民兵)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전력을 구비하지 못하였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을사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에는 보다 확대, 발전하여 최후의 구국항일전인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義兵運動史(金義煥, 博英社, 1974), 의병과 독립군(윤병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獨立運動史硏究(朴成壽, 創作과 批評社, 1980), 大韓帝國期 義兵硏究(朴敏泳, 한울아카데미, 1998), 義兵運動의 韓國民族主義上의 位置 上(趙東杰,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 지식산업사, 1986).

<윤병석>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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