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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31 (수)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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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256      
[문학] 한국문학-상고~고려시대의 문학 (두산)
한국문학 韓國文學 상고~고려시대의 문학

세부항목

한국문학-상고~고려시대의 문학
한국문학-조선시대의 문학
한국문학-근대 현대문학

상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발생한 문학작품.

I. 개관

한국 민족은 역사적으로 역경과 고난을 뚫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문학에도 그런 시련을 끈질기게 견디고 줄기차게 생존 투쟁을 거듭해 온 민족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인상이 짙다. 또한 동양적인 윤리관(倫理觀)이 지배하는 전통적인 사회성향(社會性向)으로 한국의 문학에는 동적(動的)이고 전향적(前向的)인 경향보다는 회고주의(懷古主義)나 과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국문학을 개관할 때 원시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장구한 길목마다 독자적인 전통의 바탕과 역사적 현실에 대한 독특한 창조의욕이 고갈되는 일 없이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옴을 보게 된다.

한편, 한국 민족은 태곳적부터 스스로의 사고와 감정을 나타내는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표기하는 고유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였다. 즉, 조선시대 초기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기까지는 음운(音韻)과 문법체계를 달리하는 중국의 문자인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표현해야만 되었다.

그것이 곧 삼국시대에 이미 이루어진 향찰(鄕札) 또는 이두(吏讀)이지만, 이와는 달리 중국의 전통적인 한문체(漢文體)에 의한 문학활동도 매우 왕성하여 이는 한글이 출현한 후에도 끊이지 않고 대략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문학의 시대구분 방법은 역대 왕조의 변천사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므로,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이 성립하기까지의 문학을 ‘상고시대의 문학’, 그 3국이 정립하던 시대의 문학을 ‘삼국시대의 문학’, 신라가 3국 통일을 이룩하고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을 ‘통일신라시대의 문학’, 고려가 창건되고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을 ‘고려시대의 문학’, 그리고 조선이 건국된 후 임진왜란기까지의 문학을 ‘조선 전기 문학’, 그 이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을 ‘조선 후기 문학’이라 일컬으며, 이것을 모두 아울러 고전문학이라 한다. 그리고 이들 고전문학과 대조적인 개념을 가지는 새로운 문학, 곧 서구문학의 영향으로 발달한 문학을 신문학(新文學)이라 불러 2가지를 구분하였다.

ll. 고전문학

1. 상고시대

한국문학의 여명기(黎明期)는 멀리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민족의 경우이거나 문학은 시가(詩歌)와 무용과 음악이 한데 어울린 종합적인 원시예술의 형태로 발생하였음을 본다.

한국의 경우도 옛 기록에 나타나는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그리고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삼한(三韓)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통해 이루어진 가무(歌舞)와 음주(飮酒)의 습속에서 고대가요의 원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대가요는 민족 고유의 신앙이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어떤 특정한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집단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와 같은 종합예술은 사회적인 통일을 위한 정치적인 기능과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고 악령(惡靈)에 의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기능 및 노동의 피로를 줄이고 식생활에 안정을 누리기 위한 경제적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형식으로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이 점차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고 생활수단이 분업화되어가면서 예술도 차차 종합적인 형태에서 해체·분화되어 표현방법이 다양해지자 시가·무용·음악 등 개별적인 분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따로 떨어져나온 시가는 구전(口傳)의 형태로 전승되면서 구비문학(口碑文學)을 이루고 문자를 갖게 된 이후 그것이 문헌에 정착됨으로써 신화와 전설 또는 고대가요의 한역가(漢譯歌) 등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와 같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된 옛 문헌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이 있고, 금석문(金石文)인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비문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이들 옛 기록들에는 한국의 국조(國祖) 신화인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 고주몽(高朱蒙) 건국신화, 신라의 시조(始祖) 신화들 및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 신화 등이 실려 있다.

또한 고대가요의 모습을 고문헌에서 찾아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구지가(龜旨歌)》를 비롯하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유리왕조(瑠璃王條)의 《황조가(黃鳥歌)》, 그리고 중국 진(晉)나라 때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는 《공후인(뱄茸引)》(公無渡河歌라고도 함) 등의 한역가가 그 유래와 함께 실려 전한다.

그 밖에도 이 무렵 신라에는 《도솔가(兜率歌)》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삼국유사》 〈신라본기〉 유리왕조(儒理王條)에 실려 있다. 이상의 기록이 모두 한문으로 된 기사로 전해옴은 물론이며 기원후 85년에 세워진 점제현신사비(泯蟬縣神祠碑)가 평남 용강군(龍岡郡) 해운면(海雲面)에 현존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한자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대개 짐작이 갈 것이다.

이와 같이 한자 문화가 전래된 시기는 매우 오래 되었으나 중요한 것은 한국민족에게 문자가 없던 시대에 그것이 오히려 한국 고유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음운의 체계가 전혀 다른 외국 문자인 한자를 빌려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도 사실이지만 또 그만큼 문학다운 문학을 출현시키는 데 힘이 된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은 일찍부터 대륙문화와의 접촉이 있었다. 특히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가장 잦았던 고구려에서는 국립교육기관에서 한자와 중국 고전을 가르치는 한편, 일찍이 고구려의 역사를 편찬한 《유기(留記)》가 있었고 그것을 뒤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신집(新集)》으로 개찬(改撰)하였다.

또한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는 한국 최초의 한시로 일컬어지는 우수한 작품이며,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고구려의 웅대한 판도와 아울러 그 찬란한 문물을 짐작케 하는 산 증거이다.

그 밖에도 만주와 한반도에 걸치는 웅대한 판도를 개척하던 고구려인의 기개는 웅혼(雄渾)하고 동적(動的)인 서사문학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건국 신화 이외에도 《유리왕전설》 《온달(溫達) 설화》 《미천왕(美川王) 설화》 《호동왕자(好童王子) 설화》 등의 여러 전설·설화를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가요로서 그 가명(歌名)만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명주가(溟州歌)》 등이 있으나, 당(唐)나라의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그 고도의 문물에 놀라 모든 전적(典籍)을 불살라버려 오늘날 고구려 문학의 전모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백제는 육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는 한편 해상으로도 중국 육조(六朝)의 문물에 자주 접할 수 있어 한문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에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흥(高興)이 375년(근구수왕 1)에 지은 《서기(書記)》라는 역사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왕인(王仁)은 일본에 처음으로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전해주어 그들의 한문학을 일으키는 등 일본 문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잡아 온화한 기후와 풍요한 풍토의 혜택을 누리던 백제에는 주로 서정적인 문학이 융성하여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방등산(方等山)》 《지리산(智異山)》 등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요를 많이 낳았으며, 오늘날 그 모습을 알 수 있는 노래로는 《정읍사(井邑詞)》 1편이 전한다. 그 밖에 백제의 대표적인 설화로는 《도미전(都彌傳)》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가로막혀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고유문화와 외래문화를 서서히 융합시키는 작용을 하여 3국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신라 역시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시기에 한자가 전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거칠부(居柒夫)가 《국사(國史)》를 편찬한 시기는 545년(진흥왕 6)으로 백제보다 거의 2세기나 뒤진 때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지은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은 비록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굴욕적인 송시(頌詩)이기는 하나 운치가 깃들인 주옥 같은 내용으로 신라 문학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

가악(歌樂)을 숭상하던 화랑의 등장은 후일 향가문학(鄕歌文學)이 성립되는 요람 구실을 하였으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고신라시대에 《서동요(薯童謠)》 《혜성가(彗星歌)》 《풍요(風謠)》 등의 향가 작품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회소곡(會蘇曲)》 《물계자가(勿稽子歌)》 《우식악(憂息樂)》 《달도가(씻옅歌)》 《실혜가(實兮歌)》 등 많은 가요와 여러 설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또, 신라의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강수(强首)와 설총(薛聰) 등의 학자가 등장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2.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민족적인 통일국가를 이룩해 놓았다는 정치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단일(單一)한 고유문화를 처음으로 형성시켰다는 문화적 측면에서도 그 의의는 크다. 그 때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견제하기에 여념이 없던 신라의 국력은 이제 그 힘을 안으로 돌려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때마침 황금기를 맞이하던 당나라의 문학은 신라에 큰 자극을 주어 신라 조정에서는 해마다 많은 견당(遣唐) 유학생을 중국에 파견하여 난숙한 한문화(漢文化)를 흡수 ·수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미 전대(前代)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이제 확고한 자리를 굳혀 신라의 귀족층을 형성한 승려나 화랑의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예술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무르익은 문화적 환경 속에서 나타난 것이 이두(吏讀)와 그것을 표기수단으로 하는 향가문학이다. 설총이 생존한 시기를 전후하여 정리 ·종합된 것으로 보이는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한국말을 표기하도록 만든 일종의 차자문자(借字文字)로서, 이 이두문자의 창안(創案)으로 한국 고유의 향가문학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한국문학에서 완전한 문학으로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려서 전해지는 14수가 전부이지만, 이는 당시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향가가 지어진 최고(最古)의 연대는 진평왕대(眞平王代) 이전이며, 아래로는 헌강왕대(憲康王代)에 이르는 280여 년 간에 걸쳐 작품이 분포되어 있다.

이들 향가 작품 중에서도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祭亡妹歌)》, 충담사(忠談師)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영재(永才)의 《우적가(遇賊歌)》 등에서는 뛰어난 수사(修辭)의 기법과 숭고한 시정신(詩精神)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처용가(處容歌)》는 후대에 윤색 ·첨가되어 조선시대의 궁중가무로 이어졌다.

이들 작품에 공통되는 특징은 현실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정토(淨土)를 희구하는 관념이 그 바탕을 이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진성여왕(眞聖女王) 때에 대구화상(大矩和尙)과 위홍(魏弘)이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엮었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었다.

통일신라의 서정문학이 불교문학에서 그 정점(頂點)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서사문학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불사(佛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를 비롯한 수많은 설화문학을 탄생시켰다. 이와 같은 신라의 설화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서 전해지는 것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을 다시 옮겨 쓴 고려 때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에는 삼국통일기 이전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설씨녀(薛氏女)》 설화를 비롯하여, 의인법(擬人法)으로 왕을 풍유(諷喩)한 《화왕계(花王戒)》, 인생의 허무함을 묘사한 《조신몽생(調信夢生)》, 김현(金現)이 호랑이를 감화시켰다는 《호원(虎願)》 등 많은 설화문학 작품이 수록되었으며, 특히 《조신몽생》은 불교적인 교훈이 짙게 풍기는 불교설화이지만 압축된 주제와 짜임새 있는 구성이 이미 소설의 경지에 다다랐는가 하면, 《화왕계》는 설총이 그 작자로 밝혀진 작품이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 이전의 설화는 뚜렷한 작자가 없이 다만 전승되던 구비문학(口碑文學)이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개인의 작품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성립한 설화 문학은 뒷날 조선 후기에 발달한 고대소설의 근원설화(根源說話)로 되살아나게 되는데, 예컨대 조선시대에 쓰인 《토끼전(傳)》은 김유신(金庾信)의 전기에 나오는 <귀토설화(龜兎說話)>가 그 근원설화이고, 《흥부전(興夫傳)》의 근원설화는 <방이설화(旁嘲說話)>였다.

이 밖에 본격적인 한시를 비롯하여 사륙변려문(四六폿儷文)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발전을 본 통일신라시대의 한문학은 강수 ·김인문(金仁問) ·설총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등으로 대표된다. 특히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동방 한문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그의 《계원필경(桂苑筆耕)》이 남아 있고 《동문선(東文選)》 등에 그 시문(詩文)이 전한다.

3. 고려시대

신라시대의 향가는 고려 초기까지 그 명맥이 유지·계승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서 고려 광종(光宗) 때까지 생존한 고승(高僧) 균여(均如)가 불교의 정토사상(淨土思想)을 읊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향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 빛을 더한다.

균여가 지은 이 11수가 예술적으로 비록 높은 경지의 것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불교문학적인 향취와 세련된 수사(修辭)의 기교는 신라 때 향가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균여의 작품으로는 이 밖에도 수십 수의 향가가 있었다고 하나 모두 실전(失傳)되었다.

또한, 예종(睿宗:재위 1105∼1122)이 고려의 개국공신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과 김낙(金樂)을 추도하여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와 정서(鄭敍)가 유배지(流配地)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정과정곡(鄭瓜亭曲)》 등은 그 형식이 다소 변화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향가의 흔적이 남은 고려가요들이다.

이 무렵, 문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시가 형식에 별곡(別曲)이 있다. 이 별곡은 당시 성행하였던 팔관회(八關會)나 연등회(燃燈會)의 가무백희(歌舞百戱) 등에서 연희되기에 알맞도록 만든 분장(分章) 형식의 장가로서 새로이 등장한 시가 형태였다. 그것은 《처용가》의 경우를 보더라도 곧 알 수 있는데, 신라시대의 향가 작품인 《처용가》가 단장(單章) 형식의 짧은 시가였음에 비하여 고려 때의 것은 비교적 장형(長形)으로 변화하였다.

이와 같이 변모·발전한 고려의 시가는 고려 중기 이후 더욱 성행하면서 말기까지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작품으로는 《서경별곡(西京別曲)》 《청산별곡(靑山別曲)》을 비롯하여 《정석가(鄭石歌)》 《유구곡(維鳩曲)》 《귀호곡(歸乎曲:가시리)》 《상저가(相杵歌)》 《이상곡(履霜曲)》 《만전춘(滿殿春)》 《쌍화점(雙花店)》 등 많은 가요를 들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별곡의 이형(異形)이라 할 수 있는 한문체(漢文體) 가사의 경기체가(景幾體歌)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이 그 효시를 이룸으로써 ‘별곡체’ 또는 ‘한림별곡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이 모두 여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들 고려 중기 이후의 시가 작품은 때마침 몽골의 침략과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전횡 등 불안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 내용이 퇴영적 ·향락적인 경향으로 흘렀으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척신(戚臣)과 무신의 횡포 및 몽골 세력이 구축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대두한 주자학(朱子學), 곧 유학자(儒學者)들의 손으로 새로운 시조(時調) 시형이 창조되었다.

시조는 초기의 성립단계에는 딱딱한 한문투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나, 이윽고 서정성(抒情性) 넘치는 한국말을 자유로이 구사하게 되면서 간결하고 아름다운 고유의 정형시(定型詩)로 다듬어졌다. 이와 같은 단가형(短歌形)의 시조 이외에 장가형의 율문시(律文詩)인 가사(歌辭) 문학이 대두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렇게 볼 때 고려시대의 문학은 시가문학에 있어 마치 물을 모아두었다가 흘려 보내는 보(洑)와 같은 구실을 한 셈이다. 곧, 그 초기에는 신라 향가의 마지막 등불을 밝혔는가 하면, 다음에는 고려 당대의 문학인 별곡을 만들어냈고, 나아가 조선 시가문학의 꽃이라 할 시조와 가사의 태동을 알렸기 때문이다.

한편, 서사문학(敍事文學)에 있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설화문학을 계승·발전시킨 신화·전설·민담(民譚)과 불교설화의 자취를 고려 초엽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과 중엽의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서사문학은 그 기록자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끊임없는 정서(整序)·통합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점차 창작적인 성격을 뚜렷이 띠어 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고려 중기부터 말기에 걸쳐 유행한 것이 임춘(林椿)의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 이곡(李穀)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이첨(李詹)의 《저생전(楮生傳)》 등 가전체(假傳體) 소설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서사문학의 백미편(白眉篇)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과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이 두 작품이 비록 한시의 오언(五言) 또는 칠언(七言)의 운문체(韻文體)를 빌려 기술되었지만, 그 바닥에는 외적(外敵)에 대한 의연한 항거정신이 맥맥히 흐르는 가운데 장중하고도 웅대한 구성과 묘사로 빼어난 민족의 영웅서사시를 이루어 놓았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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