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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30 (화) 21:59
분 류 사전3
ㆍ조회: 945      
[종교] 천주교=로마가톨릭교-가톨릭의 형성 (브리)
로마가톨릭교 ─ 敎 Roman Catholicism 가톨릭의 형성

세부항목

로마가톨릭교-가톨릭의 형성
로마가톨릭교-선교활동과 교회조직
로마가톨릭교-신조와 의식, 현대 가톨릭
로마가톨릭교-한국 천주교

그리스도교의 3대 주요교과 가운데 하나.

개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비판자나 옹호자 모두가 동의하는 바와 같이 서양 문명사에서 결정적인 정신적인 힘이 되어왔다. 전세계 로마 가톨릭 신자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 교파의 신자를 합한 것보다 많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혹은 불교도보다 더 많다.

교황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오는 절대군주제이다 (→ 색인 : 교황제). 많은 사람은 교황을 신적 계시에 대한 절대무류(絶對無謬)의 해석자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고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교황을 말세가 되면 출현할 것이라고 성서가 예언한 적(敵)그리스도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통계적·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와 제도, 신앙과 예배, 세계내의 위치 등을 이해하는 것은 삶과 죽음 및 신앙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개인적으로 답하는 것과 상관없이 문화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더욱이 다른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 중 어느 한 종파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그 종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관계를 고찰해보아야 한다. 그 예로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왜 분열되었는가, 영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열은 불가피했는가 등을 들 수 있다.

반대로 이러한 질문은 로마 가톨릭 교회 자체를 정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도시대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는 데 반해, 옛날 이집트의 콥트 교회로부터 오늘날 상가에 세워진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파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보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견해를 정의하는 데도 필요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거쳤으므로 다양한 시각과 여러 방법론을 통해서만 그것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자체가 복합적이지만, 맨 꼭대기의 교황으로부터 저변의 신자들에 이르기까지 통상적인 피라미드 도형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되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 내에는 성성(聖省), 대주교구와 주교구, 관구, 수도회, 신학교와 대학, 본당(本堂)과 신심단체 및 기타 무수히 많은 기관이 있는데, 이것들은 가톨릭 교회 지도자의 역할, 사회적 역학(力學), 그밖에 가톨릭 교회가 독특하게 대표하는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사회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세계 종교로서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앙과 예배의 다양한 생활영역에서 인류의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비교종교학적 방법론이 요구된다.

처음 3세기 동안의 초기 교회사는 '그리스도교'항목에서 상술(詳述)했기에, 여기서는 일반적인 개요만 다루기로 한다. 이 글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이 보편적 교회, 즉 동일한 교리와 규범, 확고한 교권구조, 모든 인류를 포괄하는 보편성('가톨릭'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뜻함)을 갖기 시작한 교회로 전환하도록 작용한 역사적 힘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역사

보편적 그리스도교의 출현

비록 미완성의 형태이지만, 〈신약성서〉 안에는 교의와 권위, 보편성 등 교회의 모든 요소들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풀이 죽은 예수 제자단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이야기가 시작된 지 10여 년이 채 안 되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권위있는('사도의') 가르침과 행동, 권위없는 가르침과 행동을 구별하는 몇 가지 초보적인 규준을 마련했다. 이들은 또한 마지막 장의 극적인 문장인 "우리는 마침내 로마로 갔다."(사도 28:14)가 선언하는 대로 이미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2,3세기에는 더욱 구체적인 규준이 필요하게 되었다. 리옹주교인 이레나이우스(130경~200경)가 공식화한 사도적 권위의 3개 요소는 보편적 그리스도교를 위한 권위의 3 가지 주요요소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3개 요소는 그리스도 제자들의 작품인 〈신약성서〉(그리스도교화된 〈구약성서〉와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의 교회 통치 권한을 이어받을 후계자의 자리로 설립한 주교좌(主敎座), '신앙의 규칙'과 그리스도인 행동의 표준인 사도의 규범적 교의 전승(傳承) 등이다 (→ 색인 : 주교제도).

이 3개 요소 중 한 요소의 정당성은 다른 2개 요소와의 부합 여부에 달려 있었다. 즉, 어느 성서적 문헌이 실제로 사도의 작품인지는 그 문헌이 사도 전승이나 사도 교회의 관용어 등과 부합하는지를 대조해 봄으로써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도 이 권위의 3가지 요소 사이에, 또는 '사도적'인 주교들 사이에서 교의와 관할권, 예배와 사목적 업무, 사회 정치적인 방법에 대한 갈등이 생겨났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도회의(사도 15장)를 소집하여 그 판결에 의존하거나, 또는 "모든 교회가 필수부가결의 요소로 반드시 동의해야 할 이 교회(로마 교회)의 탁월한 권위"(이레나이우스의 말)에 의존했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바야흐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출현

내적 요인

초기 교회라는 보편적 그리스도교로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출현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요인이 있다. 교회 내에서 로마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옹호론자들이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해온 요인은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베드로의 수위권과 베드로와 로마 교회의 동일시였다.

사도들에 대해 여러 가지로 열거한 〈신약성서〉의 내용(마태 10:2~5, 마르 3:16~19, 루가 6:14~16, 사도 1:13)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필사본에는 더욱 차이가 많지만, 공통적으로 "베드로라고 하는 첫 시몬"(마태오의 표현에서)을 열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서〉에 보면 그리스도가 제자 베드로에게 "자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그리스어로 'petra')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 16:18)라고 말했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교회, 즉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설립 강령인 것이다.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기에 또한 중요시되었다. 첫째가는 도시의 교회는 모든 교회 중 첫째여야 했기 때문이다. 묘한 것은 새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에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여 로마의 권위가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특권이었던 대신관 (Pontifex Maximus) 직함이 교황에게 위임됨으로써 천도는 오히려 로마의 권위를 강화시켜주었다.

천도는 또한 새 수도가 교황청과 동등한 교회의 권위를 갖는가를 놓고 로마('구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신 로마') 사이에 분쟁을 야기시켰다. 제2차 공의회(381, 콘스탄티노플)와 제4차 공의회(451, 칼케돈)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구가 로마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고 공포했으나 로마 교황청은 이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 색인 : 칼케돈 공의회).

외적 요인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것 외에 중세 초기에 최소한 2가지 외적 요인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하나의 독특한 그리스도교 형태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7세기 이슬람교의 융성이었다. 632년 예언자 마호메트 사망 후 한 세기 동안 그의 추종자들은 초기 교회의 5개 총대주교구(Patriarchate) 중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3개 교구를 점령하고, 동·서 대분열의 양극이 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을 남겨놓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하나의 뚜렷한 실재(實在)로 출현하게 된 2번째 요인은 당시 게르만 민족과 여타 민족이 유럽으로 이주하여 결국에는 그들이 유럽의 주된 인구를 구성하게 된 민족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가톨릭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2년 개종을 하지 않았다면 당시의 형태를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개종한 결과 그리스도교는 몇 세기만에 로마 제국에서 불법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합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그리스도교 국가의 통치자는 신앙고백을 해야 했으며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의 성격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회 권력이 교황에게 집중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끊임없는 문제거리가 되었다. 교회사의 첫 1,000년이 끝날 무렵, 교회는 지나간 수세기 동안의 정신적·행정적·지적 자원의 상속자가 되어 있었다 (→ 색인 : 로마사).

중세 초기 및 중기의 교회

1000년까지의 교회

중앙집권 체제이던 그리스도교의 상당부분이 11세기 무렵에 와서는 주교관구와 개별적인 관구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중세기에는 대학과 '가톨릭'의 학문이 융성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은 아라비아 학자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전해진 데서 비롯되었다 (→ 색인 :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중세의 대가들에 의해 고도의 형식을 갖춘 철학적·신학적 체계인 스콜라주의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 사상을 지배했으며, 유럽의 지적인 전통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중세기에는 수도원제도가 발전했다.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은 그리스도교와 로마 문명의 갈등에 대한 한 대응으로 볼 수도 있다. 중세 초기의 교육은 대학과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

대성당 부설학교가 거의 없었으며, 시골에서는 라틴어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었던 신부도 드물었다. 지방에서는 경건한 종교 의식과 신앙이 종종 미신이나 선의(善意)의 마술 행위와 융합되기도 했으며, 신부의 입회 없이도 적법한 결혼으로 인정되었던 그 당시의 결혼관습은 결혼을 금지한 촌수가 복잡했으므로 더불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첫 개혁가들인 레오 9세와 니콜라우스 2세

레오 9세(1049~54 재위)는 교회 전반에 걸쳐 교황의 권위를 강조한 첫번째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직에 보편적 의의를 다시 부여했고 수위권을 강조했다. 또한 교황의 자문위원회인 추기경단에 비(非)로마인들을 임명하고, 교황의 교령을 실행하도록 교황사절을 파견하는 관례를 만들었다.

그는 왕성한 활동력과 분명한 영적 목표를 지녔지만, 노르만족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던 전쟁에 대한 책임과 1054년 완고하고 광포한 훔베르트를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파견하여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불화를 일으켜 결국 동·서 교회가 분열된 데 대한 책임은 모면할 수 없었다.

니콜라우스 2세(1058~61 재위)는 짧은 교황 재위 기간에 교회 내부 개혁을 촉진시키고 교황권을 강화했다는 중요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선거가 추기경들의 선출에 의할 것을 규정한 '교황 선거령'을 발표하여(1059) 세속권력의 개입과 간섭을 배제하고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그는 힐데브란트(후에 그레고리우스 7세)의 보좌를 받아 교회 개혁에 노력했고, 노르만의 세력과 결탁하여 황제에 대항하는 체제를 정비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치세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 재위)는 그의 가계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서 당대 어느 누구보다도 교회의 중앙집권화 등 교회의 외적 조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개혁을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한 교황이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목표는 '교회의 자유'였으며 교회를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는 교회와 수도회가 왕후와 귀족에 의해 양도되는 것, 속인(俗人)에 의한 임직(任職), 성직매매를 공격했다. 또한 교회의 자주성을 보장하기 위해 자유로운 선거권 회복 등 교회 고유 권한의 회복을 요구했다. 따라서 자연히 정치권력과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무제한적 임무(마태 16:18~19)를 계승한 후계자라고 공언했다. 그의 이러한 강력한 주장에는 가장 영향력있는 측근들(이들은 가장 비옥한 봉토를 소유했음)을 관직에 임명하는 전통적인 교황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과 옛 교회법과 교황교서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비록 고독한 유형지에서 생을 마쳤지만, 그의 개혁 원리는 전유럽에 걸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십자군 운동

십자군운동은 그레고리우스 개혁을 통해 각성되었던 유럽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식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기사적(騎士的)인 충동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어서, 때때로 비그리스도교적인 유혈 사태를 불러일으키고, 중세의 난폭한 사건들을 유발시켰다.

유럽의 기사도는 성지 탈환 및 이슬람교에 대한 투쟁을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투르크인의 예루살렘 정복(1071)과 그들의 갖가지 방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불평은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대한 호소 같은 인상을 주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의 세력 팽창을 통제할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황제 알렉시우스 1세(1081~ 1118)가 로마 교회에 간절하게 도움을 호소했을 때, 교황 우르바누스 2세(1088~99 재위)는 1095년 클레르몽(프랑스) 교회회의에서 라틴 그리스도교계에 호소했고, 그 결과 대규모의 자원군대가 형성되었으며 교황이 그 수장(首長)이 되었다.

6차례에 걸친 원정에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1099) 팔레스타인에 라틴 제국을 건설했으며, 교황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2세기 동안의 십자군 원정은 결과적으로 교황권에 정신적·재정적 부담을 가중시켜 교황권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중세 후기의 교회

교황권의 전성기(12~13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흔히 그의 개혁 기반이 될 만한 전임 교황이나 그의 개혁정책을 이어받은 진정한 후임 교황이 없었던 개혁자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중세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황권의 역사는 그레고리우스 7세와 그의 신봉자들의 업적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면서도 중세교황권의 특징이었던 무능함은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신봉자들이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국가'와 '교회'를 서로 다른 사회적 실체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는 통합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직분을 수행했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적 역학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인 황제에게까지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했다. 향후 2세기 동안 교황청은 정치문제에 대해 직접적·간접적으로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교황직이 기본적으로 명예직이라는 생각은 사라지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교황의 지도력은 결국 교회를 지배하는 교황의 군주정치로 바뀌고 말았다. 또한 성직 겸임(성직록을 하나 이상 소유하는 것)이나 13세기 중엽부터 교회개혁자들이 잘못을 지적했으나 시정되지 않은 채 지속되던 비거주 성직록 소유(관할구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성직록을 소유하는 것) 등 특유의 성직록 남용 문제가 나타났다. 마침내 교황권은 개혁을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신앙의 시기

교황권 아래 계층에서는 신앙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2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신심이 깊거나 세속적이거나 근본적으로 신자들이었으며, 또한 종교적인 동기와 관심(십자군운동, 수도원 창설, 교회 건축, 교육 및 자선사업 원조 등)이 교양있는 시민과 행정가들 생활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12세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신앙의 시대였다. 이때 아시시의 프란키스쿠스(프란체스코)와 스페인의 도미니쿠스 등의 지도 아래 설교와 가르침, 선행에 헌신하는 탁발수사회가 생겨났다.

13세기는 또한 사상과 신학, 예술 영역의 활동이 왕성했고 성숙을 이룬 시기였다. 전체적으로 유럽의 13세기는 주교들과 대학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이 교구와 본당 조직을 개선하고 많은 악습을 개혁하려고 노력한 시기였다. 13세기의 마지막 25년은 점차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대감과 핍박이 몰아치기 시작한 시기였다.

스콜라 신학의 황금시기는 갑작스런 종말을 맞게 되었고 종교재판소(이단자들을 다루기 위해 1229년 설립한 교회재판소)와 교황청 법원은 이단 혐의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판결을 내림으로써 증오심을 유발했다 (→ 색인 : 종교재판).

중세 후기에서 종교개혁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 역사 중 가장 결정적으로 치명상을 입은 시대는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2세기 동안이었다. 이 시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결정적인 분열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출현하여 그리스도교 지도에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른 그리스도교계, 심지어는 서양의 다른 그리스도교계 분파와 구별되는 실체로 등장하게 된 때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의 결과라는 주장에는 재론의 여지가 많다.

1378~1417년의 시기는 분열의 정도가 비숫했던 1054년의 동서 대분열과 구분하기 위해 서방교회 대분열의 시기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교황 2명이 서로 상대방과 그 신도들을 파문하여 유럽 교회가 둘로 갈라진 사건이었다. 이들의 갈등으로 인해 제국, 교구, 수도회, 본당, 심지어는 가정까지 분열되었다.

양 교회는 서로 니케아 신조에서 명시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했는데, 실제적 교회의 모습은 둘 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비웃음만 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두 교황들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회회의를 소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여러 차례 공의회가 열렸는데, 첫번째 회의는 1409년 피사에서 개최되어 교회 분열 문제를 비롯하여 그동안 발생된 규율과 교의에 대한 여러 문제를 다루었다 (→ 색인 : 피사 공의회). 유럽 교회 대분열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8)로서 끝을 맺게 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주요의제 중 하나는 서로 대립하는 양 교회와 교황 및 공의회의 권위에 도전한 체코 프라하의 설교가이며 개혁자인 얀 후스(1372~1415)에 대한 것이었다. 1411년 후스는 오늘날 대립교황이라고 부르는 교황 요한네스 23세(1410~15 재위)에 의해 파문당했으나, 화해의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으며, 지기스문트황제(1368~1437)는 후스에게 안전통행권을 약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약속과는 달리 후스가 소환에 응해 1414년 11월 콘스탄츠 공의회에 나왔을 때 체포·감금되었다. 그는 특히 교회에 대한 과격한 교리 때문에 이단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아 1415년 7월 6일 처형되었다.

중세에서 종교개혁으로 변천하는 과정은 점진적인 것이었으나 14,15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콜라 신학 자체가 경건주의자의 공격을 받았고,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문명의 기초, 즉 그리스와 라틴어 고전, 성서학과 교부학으로 복귀하여 교회를 개혁할 것을 역설했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에서 사상 유례없는 큰 재난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에 있어 비길 만한 것이 없을 만큼 근세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으로 일치가 파괴되고 신앙의 공동기반이 근본적으로 동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사고가 종파적 사고로 분열되었다.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유럽 각 국가의 교회들은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종교개혁 시기 동안 하나의 가톨릭 교회를 대체하여 다채로운 국가교회들이 출현하려는 움직임이 엄연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전에는 어떤 이단이나 이교도 유럽 그리스도교를 돌이킬 수 없이 항구적으로 분할시키지 못했지만, 이 기간 중에는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의에 충성을 표명하고 분열을 증오한다고 고백하는 운동에 의해 교회분열이 행해졌다. 종교개혁이 끝나기 전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미 지난 여러 세기, 심지어는 중세 후반기의 가톨릭 교회와도 다른 교회가 되어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기원은 극히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중세교회의 여러 가지 폐해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의 개혁운동을 통해 참된 회복으로 이끌었어야 했다는 주장도 또한 적잖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내적인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종교개혁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종전의 관례적인 흑백이론을 극복했고, 중세 후기 교회의 절대적인 도덕적 타락에 대한 이제까지의 왜곡된 견해들을 시정했다.

어쨌든, 비종교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든간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의 긍정적인 업적과 부정적인 결과의 원천이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일어났다. 서구 유럽의 정치적 질서와 계급구조가 바뀜에 따라 교회의 위치는 중세 후반기를 통해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가 교황권의 영적 권위에 도전해 일어났을 때에는 그에 대항할 어떤 정치적 방법도 없었다. 교회의 특정 교리들 외에 '고리대' 금지와 청빈의 찬양도 유럽의 신흥 상인계급에 어울리지 않았다.

중세 말엽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치적·사회적 세력들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일으키도록 거들어준 주요요인으로는 영적·신학적인 요인이 있었다. 15세기 말엽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는 교회개혁을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시도가 충분하지 못함을 공감하고 있었다.

즉 교황권은 자체개혁을 거부했고, 공의회는 항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실패했으며, 직업적인 신학자들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에 대한 훈육보다는 현학적인 논쟁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심지어는 고위 성직자 층에서도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라는 예언자 다니엘의 말이 생각날 정도로 재정적 부패와 이교도적 부도덕이 횡행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머리와 지체의 개혁'이 철저히 일어나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 대한 여론은 그 자체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이 한 사람의 로마 가톨릭 교도인 루터의 개인적인 투쟁과 일치하고 그 투쟁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면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발생하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본질적으로 중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나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가 결국 찾았던 대답은 하느님은 죄인이 값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비로우시다는 확신(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로마 가톨릭 신학 전통에서 전혀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루터가 이를 주창하는 방식은 가톨릭의 가르침과 성사적 생활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루터는 1520년에 발행한 그의 논문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 관한 서곡 Prelude Concerning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A>에서 중세 그리스도교의 모든 제도는 인간이 부당하게 꾸며낸 것을 교회에 삽입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루터는 그의 생애 동안 줄곧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도덕적·재정적·행정적 남용에 대해 공격했는데, 그 대상은 교회의 생활이 아니라 가르침이었으며, 교회 조직의 부패가 아니라 복음의 왜곡이었다.

중세 후기의 미사가 '용의 꼬리'가 된 것은 전례상 건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교회에 허락한 은총의 수단으로 미사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회가 하느님에게 제공하는 성사로 규정하는 중세의 미사 이해가 갈보리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반복 불가능한 희생의 유일회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루터는 생각했다. 루터는 여러 차례에 걸쳐 경고를 받았지만 복종을 거부했으며 1521년 마침내 교황 레오 10세에게 파문을 받았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도전은 다시 부흥하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근본방침을 명확히 하고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위한 충동을 잠재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 개혁을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16세기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자체 개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뚜렷한 역사적 운동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1545~1563년 사이에 간헐적으로 25차례나 열렸던 트리엔트 공의회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서와 전통의 권위에 근거하여 믿음과 선행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교리를 채택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의와 실천을 주도적으로 이행한 곳은 새로 설립된 수도회, 특히 예수회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여타 수도회도 이 개혁 시기에 시작되었다.

교회의 내적 생활과 규율을 개혁하기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 제정은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규정들 가운데 가장 널리 영향을 미친 것은 모든 교구는 교구 내 신학교의 신학생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규정과 성직자, 특히 주교는 설교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따라서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교황제도는 다듬어져 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반종교개혁

반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있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어났지만 그 개혁의 성공 여부는 지역마다 달랐다. 루터가 활동했던 대부분의 '독일 영지들'은 1546년 루터가 죽은 뒤 프로테스탄트로 남아 있었지만, 주요 영토들, 특히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는 16세기 말경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회복했다. 아마도 반종교개혁이 이룩한 가장 완벽한 승리는 후스파가 지배한 보헤미아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절대적 위치를 회복한 것으로 본다.

흔히 최초의 현대식 전쟁이라고 하는 30년 전쟁은 중부유럽의 로마 가톨릭 교회 인구를 프로테스탄트 인구만큼이나 파괴시켰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개혁으로 발생한 종교 다원주의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규정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자신만이 지구상의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 교회임을 선언했지만 여러 교회 중 하나의 존재가 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17,18세기 교황권에서 명백해졌다. 1622년 6월 6일 그레고리우스 15세(1621~23 재위)는 신앙 전파 성성(Congreatio de Propaganda Fide)을 설치했다.

'성성'이 하는 일은 통상적인 교회 행정이 없는 지역(예를 들면 1908년까지의 미국)에서 교회 업무를 관장하면서 그리스도교 지역에 대한 교회의 선교사업을 조직·감독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현재도 그렇다. 따라서 '성성'은 프로테스탄트 지역과 일부 동방정교회 지역 로마 가톨릭 교회 회복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18세기의 종교생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생활은 17,18세기 예배와 예술에서 '어머니와 교사'로서 지속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중 현대 문명과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갈등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발생했다. 그 예로, 1616년과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극단적 이단 혐의자'로 단죄한 사건은 과학과 신학의 단절을 알리는 신호였다.

후에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도한 18세기 계몽주의는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사유를 강조하면서 많은 유럽 지성인들의 신념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 시기에는 많은 주요 수도회들이 설립되거나 확장·발전되었는데, 특히 1633년 빈켄티우스가 설립한 애덕자매회(Daughters of Charity)와 라트라프의 시토회 수도원의 이름을 딴 트라프회가 대표적이다 (→ 색인 : 트라피스트 수도회).

트라프회는 1664년에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엄률 수도회'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리고 책임있는 가톨릭 학문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이루어졌다.

근세기의 교회

피우스 9세(1846~78 재위)의 치세

19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사의 많은 부분은 두 교황의 교황직 재위 기간과 일치한다. 그들은 재위 기간이 한 세기의 1/3에 달했던 교황 피우스(비오) 9세와 그의 계승자로 1/4세기 동안 재위했던 교황 레오 13세이다.

피우스 9세만큼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활동을 주관한 교황도 드물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교황의 절대 무류성(無謬性)에 대한 교의가 반포됨으로써 근대 교황권의 발전은 절정에 달했다 (→ 색인 : 교황무류성).

'진리의 기둥이자 성채'로서 교회는 신적 계시의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결함이 없고' 심지어 '오류가 없다'는 교리를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가르쳐왔고, 또한 교회의 가시적(可視的)인 수장이며 권한을 부여받은 성서의 수호자인 교황은 신앙과 도덕에 대해 오류없이 말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부여받았다고 가르쳐왔다.

이 교의가 반포되기 이전에도 교황 피우스는 자신이 부여받은 이 권위를 행사했었다. 1854년 그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하여 공의회를 거치지 않고 성모 마리아의 무원죄잉태설 교리를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으로 규정했다. 또한 1864년 12월 8일 여러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 오류에 대한 교서요목'(Syllabus of Errors)을 발표했다.

이 교서요목에서 교황은 범신론, 사회주의, 교회를 통하지 않은 결혼, 세속 교육, 종교적 자유주의를 포함한 현대의 다양한 '오류들'을 단죄했다. 따라서 이 교서요목의 반포로 인해 가톨릭교회는 마치 자유주의 물결을 거스르고 현대 세계의 조류에서 퇴각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교서요목은 당시 여러 방면에서 위협을 받고 있던 교회의 입장에서 교회 가르침의 정체를 분명히 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레오 13세(1878~1903 재위)의 치세

레오 13세는 보수적인 신학 성향에서 전임 교황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점이 피우스 교황과 다르다. 교리와 가르침에 대한 그의 방침은 엄격했다.

그의 명확한 신학적 관점은 1879년 8월 4일에 반포한 회칙 '영원한 아버지'(Aeterni Patris)에 드러나 있는데, 이 회칙은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철학 및 신학 체계로서의 토마스주의(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에 기초한 중세 신학체계)의 부활을 위한 장전(章典)이었다 (→ 색인 : 아이테르니 파트리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레오 13세의 정치·사회 사상은 잘 알려져 있다. 교회와 현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레오 교황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회칙들이었다. 이 회칙들은 '오류에 관한 교서요목'의 신학적 전제하에 방어적인 사회철학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사회철학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1888년 6월 20일에 공포된 회칙 ' 자유'(Libertas)에서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 민주주의, 양심의 자유와 관련해서 무엇이 선인가를 단언하고자 했다. 특히 1891년에 반포된 사회노동문제에 관한 회칙인 '새로운 것들에 관하여'(Rerum Novarum)에서는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19세기의 사회주의 정강(政綱)을 거부한 동시에 착취적인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가혹한 비난을 하면서, 국가는 모든 시민의 복지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레오 13세의 이러한 사회사상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같은 구체적인 사회활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19세기가 끝난 직후 레오 교황이 죽었을 때 교회는 여러 방면에서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전쟁·불황·혁명의 소용돌이가 이를 방해했다.

20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발전은 교회 안팎에서 일어난 2개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외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의 대변동을 수반한 2차례의 세계대전(1914~18, 1939~45)이며, 내적으로는 교회의 생활과 가르침에 대변화를 가져온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였다.

세계대전 시기

흔히 19세기를 사실상 마감한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전쟁과 이에 따른 혁명으로 인해 호헨졸렌(독일)·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로마노프(러시아) 왕조가 몰락했으며, 교회는 민주주의·공산주의·파시스트 정권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인 베니토 무솔리니와 맺은 일련의 협정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929년 가톨릭 교회와 이탈리아 정부는 라테란 조약을 맺어 마침내 양측의 관계를 정상화시켰으며, 바티칸 시는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1933년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교회와 히틀러 정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피우스 11세(1922~39 재위)와 피우스 12세(1939~ 58 재위)는 몇 차례에 걸쳐 히틀러 정권의 부당성을 공박했으나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스페인 내란(1936~39) 기간에 교황청은 더욱 격렬하게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비난했다. 폴란드와 헝가리를 비롯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깊이 뿌리내린 국가들이 공산화되자 20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많은 관측통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20세기 후반에 현대 세계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방어적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네스 23세(1958~63 재위)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이러한 결론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교황 요한네스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몇 건의 중요한 회칙을 공포했다.

그중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1961년에 반포한 회칙 '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인데, 이 회칙은 사회적 행위의 규범으로서 정의와 공동선을 주창한 점에서 레오 13세의 '새로운 문물에 관하여'라는 회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2년 후에 나온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라는 회칙은 교인들뿐 아니라 '선한 의지를 지닌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회칙이었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다른 어느 역대 교황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평화와 국가간의 평화를 위한 사회철학을 정립시켰다.

이러한 개혁과 관여의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공의회는 요한네스가 소집했으나 교황은 공의회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전례에서 자국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모든 면에서 평신도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촉진시킴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생활과 예배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보다 훨씬 더 역사적인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조치일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이단자로 비난하던 종래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들에게 형제적인 일치의 손길을 뻗쳤다.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서도 화해의 말을 건네면서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반유대주의 행각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혔다. 또한 공의회는 세계의 여타 종교에 대해 그리스도를 모르는 그들의 전통 속에 간직되어온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신자와 비신자 모든 사람들에게는 인간성의 고결함과 자유로움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고,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강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배격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교회 발전에 기여한 중요도를 놓고 본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마도 니케아(325)·칼케돈(451)·트리엔트(1545~ 63) 공의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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