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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27 (토) 22:05
분 류 사전3
ㆍ조회: 1049      
[교육] 교육-각 나라 교육의 역사 (한메)
교육-각 나라 교육의 역사

세부항목

교육-개관
교육이란 무엇인가
근세교육의 이념과 전개
국민교육제도의 발전
각 나라 교육의 역사
한국의 교육

[각 나라 교육의 역사]

미국·독일·중국·소련 및 인도네시아의 교육에 관해서 그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교육>

⑴ 식민지시대

1620년에 시작된 청교도의 북부 뉴잉글랜드로의 이주는 미국식민지건설의 제일보였다. 1642년 의무교육령이 공포되고, 1647년에는 각 도시에 초등학교가 의무적으로 설치되어 아이들은 독서능력과 유용한 손재주를 몸에 익힐 수가 있었다. 그보다 앞서 1638년에 하버드칼리지가 생겨 그 입학을 위한 준비교육을 하는 중등학교로서 라틴그래머스쿨이 설립되었다.

남부는 농장의 일손이 부족하여 영국 본토로부터 <연기계약고용노동자(年期契約雇傭勞動者)>가 투입되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자식의 장래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정부는 책임상 이들 아이들을 위해 도제제도(徒弟制度)를 보급하고, 또 약간의 자선학교와 농장학교를 설립하였다.

⑵ 18세기의 교육사정과 미국의 독립

18세기 초기 북부 뉴잉글랜드에서는 상인계급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것은 북부의 사회와 문화·교육을 크게 변모시켰다. 상업적·현실적 관심이 종래의 종교적 관심에 대치되었다. 칼리지 입학 준비교육을 주로 했던 라틴그래머스쿨은 쇠퇴하고 실제적인 교육내용인 항해술·측량술·부기·프랑스어·에스파냐어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고등교육기관의 교육내용 재편이 이루어져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칼리지(킹스칼리지-뒤에 컬럼비아대학, 필라델피아칼리지 등)가 창립되었다. 남부에서는 흑인노예제가 도입되면서 종래 남부의 노동구조를 바꾸어 사회체제의 변혁을 촉진시켰다.

버지니아주에서는 10만 에이커, 30만 에이커의 농장소유자가 나타났고 이들 대지주가 정치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기 자녀에게 가정교사를 두거나 유럽의 학교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내륙 깊숙이 피해가지 않을 수 없었던 소농민계급은 고달픈 개척생활을 보내야 했고, 또 자식교육을 위해 스스로 관리·운영하는 지역학교(district school)를 세웠다.

1776년 7월 4일 제퍼슨은 인간의 자유·평등을 기조로 하는 <독립선언>을 기초하였다. 1783년 미국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787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합중국헌법 제정을 위한 희의가 열렸다. 북동부 상공업자와 보수파 정치가가 이 헌법의 제정·비준과 신정부의 실현에 힘썼다.

그들은 국사(國事)를 장악하고 교육·문화상의 특권도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립혁명 당시의 교육기회의 확대 및 무상(無償) 공립학교제도에 대한 관심은 퇴조하고 위정자의 교육에 대한 정열은 오로지 아카데미의 변모와 칼리지 확충에 집중되었다.

⑶ 19세기의 교육사정, 특히 교육개혁운동

미국은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 및 그에 수반하는 경제활동의 확충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1819년·37년·59년 수 차례에 걸쳐 근대적인 경제공황을 경험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미국의 근대산업화는 공장제도의 확대와 공장노동인구의 증가를 촉진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계층의 출현을 의미하였다.

교육면에서는 공교육제도의 성립을 볼 수 있다. 북부는 입법조치와 공교육의 행정기구 정비 등으로 무료수업제학교의 설치, 특정 종교와 정당에 기울지 않는 중립적 교육내용의 확보, 모든 시민 자녀의 의무취학을 철저하게 추진하였다. 1860년 공화당의 링컨이 제16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861년에는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이 미국사상 최대의 내란은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남북전쟁 후의 교육문제 가운데 특히 흑인교육이 중요문제였다. 그것은 노예제 문제가 남북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남부 교육계가 조금씩 눈뜨고 흑인의 자각도 늘어나 남부에서의 흑인교육은 보급되어 갔다.

남북전쟁의 여파도 가라앉고 초등교육의 의무제화가 각 주에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 페스탈로치주의의 오스위고(Oswego)운동과 헤르바르트학파의 5단계 교수법 등 유럽교육사상에 바탕을 둔 교육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듀이가 실용주의적 교육사상의 교육론을 정력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미국의 교육은 유럽교육의 직수입을 중지하고 독자적인 교육이론에 바탕을 두는 경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또 교육제도면에서는 공립하이스쿨이 급속하게 늘어나 피교육자의 진학률 증가를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주립대학이 보급되어 1910년대 중반에는 주립대학이 53개교에 이르러 학생수도 13만명에 달했다. 1876년에 창립된 존스홉킨스대학은 미국 최초의 대학원을 설치하였고, 그 뒤 19세기말까지 15개의 대학원이 증설되었다.

⑷ 20세기 전반의 교육사정

20세기에 접어들어 미국은 전형적인 산업부르주아지 국가체제를 성립시켜 자본 독점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후의 미국 교육정책은 다음의 3가지 점이 특징적이었다.

① 교사의 충성선서 규정 ② 교과서의 통제(특히 역사교과서의 규제가 엄격하였다) ③ 진화론 금지운동 등이다.

진화론은 인간을 동물 차원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비판이 그 운동을 받쳐주고 있었다. 1929년 10월의 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당시의 교육자들은 미국 민주주의와 교육이 취해야 할 방향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향은 특히 진보주의 교육의 대두와 커리큘럼 개조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자는 사회적·정치적 압력에 의해 위로부터 억제되었고 후자는 커리큘럼의 유형·구성방법 등에 관해서 여러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⑸ 20세기 후반의 교육사정

제2차세계대전 후의 미국 교육정책의 특색은 전쟁중·전쟁후 일관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3가지를 들 수 있다.

① 대중노선의 교육구상인데 모든 청소년이 최저 12년간의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다. 또 하이스쿨 졸업 후 1∼2년의 교육을 희망자에게는 공립교육기관에서 무상으로 제공한다. ②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능력주의 구상인데, 과학적 천재에 대한 연방정부의 장학금 계획 등이 그 일부분이다.

③ 반공주의의 고취로서 미국민주주의가 반공의 원칙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한 때부터 미국의 교육은 국방의 도구로 변하였다. 더구나 반공이데을로기의 철저화가 그 주요과제였다.

1957년에는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으로 소련에 대한 대항의식을 자극하였고, 또 소련과의 군사과학경쟁을 격화시켜 마침데 <과학기술 엘리트> 양성을 긴급 교육과제로 삼기에 이르렀다. 1957년부터 58년에 걸쳐 하이스쿨의 커리큘럼 개조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종래의 생활 커리큘럼에서 학문중심의 커리큘럼으로 변모하였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케네디·존슨정권은 미국의 또하나의 중요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현대의 빈곤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가 그것이었다. 1965년 초등중등교육법·고등교육법이 성립되었다. 초등중등교육법은 빈곤가정의 자녀 교육지원을 규정하였고, 또 고등교육법은 빈곤가정의 자녀 가운데 능력있는 자에 대하여 교육의 기회와 장학금 대여를 주요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곧 이같은 공립학교 능력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실력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1968년 무렵부터 발생한 자유학교운동(Free School Movement)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리 아카데미(Street Academies)> <흑인지역사회학교(Black Community School)> 등이 그것이며 중도퇴학자들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오늘날 미국은 긴 세월에 걸친 능력주의적 교육체제에 대한 비판에 부응하여 사회 저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간해방 운동을 시작하였다.

<독일의 교육>

⑴ 동서독의 통합

1945년 5월 나치스가 지배하는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고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연합군에 의해 분할통치를 받게 되었다. 49년 서독(BRD), 동독(DDR)이 각각 독립국가로서 탄생하였으나 90년 10월 통일독일을 이루었다.

⑵ 중세의 교육사정

9세기에 성립된 동(東)프랑크왕국은 대체로 오늘날의 독일 서부지역을 영토로 하였고, 962년에는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어 그 뒤 영토를 확장하면서 10세기 무렵에는 전 유럽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주교좌 사원학교(寺院學校)가 보급되고, 또, 세속적 목적을 가진 학교(scholaexterior)가 설립되었다.

14세기에는 시(市)당국이 관리하는 학교가 탄생하고,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각 시에 쓰기학교(scrifschola)가 생겼다. 쓰기학교는 주로 독일어의 쓰기·읽기를 가르쳤다. 그리고 1347년 보헤미아왕국에 프라하대학이 개설되어, 16세기초까지 20개의 대학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⑶ 근세·근대의 교육사정

16세기 독일 최대의 사건은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그 무렵 종교계는 물론 학교교육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비텐베르크대학이 학제를 개혁하였고, 몇몇 개신교 대학이 창립되었다. 그리고 대·소도시에서 개신교 김나지움이 설립되고, 농촌에서 교리문답서학교(敎理問答書學校)·부락담당수사학교가 개설되어 대중의 복음주의적 교화에 한몫을 했다.

17세기가 되어 영방국가(領邦國家)시대를 맞이한 독일은 각 영방에서의 독자적인 실권을 지닌 절대군주가 군림하였다. 사람들은 영주의 착취와 압박으로 고통을 받는 가운데 17·18세기의 합리주의·낭만주의사상의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즉 독일 중부지방 튀링겐의 바이마르나 고타에서는 근대교수법의 창시자인 W.라트케의 진보적 교육사상에 바탕을 둔 교수활동이 실천되었던 것이다.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1세가 1694년에 할레대학을 창설하였다. 171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모든 농촌에 강제 취학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일반 지방학사통칙(地方學事通則, 1763) 및 가톨릭파 지방학사통칙(1765)을 공포하여 근대의무교육제도에 법적근거를 부여하였다. 그의 사후 고등학무국이 설치되고, 프로이센 일반국법전(一般國法典)이 제정되어 차츰 프로이센 공교육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프로이센 교육체제를 마무리지었다. 그는 고등학무위원회 설치령을 제정하고 근대국가에 걸맞는 통일적인 교육행정기구를 만들었던 것이다.

⑷ 독일제국 성립 전후의 교육사정

19세기의 독일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에 대한 대응으로 몹시 바빴다. 그 중에서도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독일의 중요과제는 종래의 봉건적 사회기구를 자본주의사회에 어떻게 순응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독일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1848년의 독일혁명이 군주제를 옹호하고, 귀족·지주층과 타협한 부르주아지가 정치상의 실권을 얻어, 새 시대의 막이 열리기에는 아직 10년이 더 필요하였다.

1858년 왕의 아우 빌헬름이 섭정을 하면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71년에 염원이던 통일적인 독일제국을 실현하였다. 이 독일제국을 지배한 것은 절대주의적 군주인 프로이센 국왕이었다.

교육에 관한 권한은 대체로 각 영방에 맡겨져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독일제국의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18년 11월 독일제국은 붕괴되었는데 그 동안의 교육의 주요한 움직임은 3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① 보습학교(補習學校)의 취학 의무화 움직임 ② 종래의 중등학교 커리큘럼과 제도의 개선 ③ 통일학교 실현의 요망 등이다.

⑸ 바이마르헌법하의 교육사정

1914년에 시작된 제1차세계대전은 18년 11월에 종결되고, 독일은 공화국으로 변모하였다. 19년 8월 바이마르헌법이 의결되어 청소년의 교육을 공립학교에서 실시할 것, 취학의무제를 서민학교와 보습학교에서 실현할 것, 통일학교의 원칙을 고수할 것, 학교교육을 초종파적(超宗派的)인 것으로 할 것, 어린이를 혹사와 방임에서 옹호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

이 바이마르기(期)의 교육은 20세기 첫머리의 독일 교육개혁운동을 무시하고는 논할 수 없다. 이 개혁운동은 신인문주의적 교육이론에 의거하여 한편으로는 헤르바르트파 교육이론을 비판하면서 아동중심주의 입장에서 주지주의적 교육론을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지(經驗知)와 생산적 능력의 발달을 중요시하였다.

교육개혁운동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시작되고 결실을 맺었다. 19년의, 독자적인 인간학〔人智學〕에 바탕을 둔 교육실천가 R.슈타이너에 의한 <자유바르돌프학교>의 창설 및 20년에 부활한 라이프치히의 합과교수(合科敎授) 등이 그것이다.

⑹ 히틀러정권하의 교육사정

1933년 1월 30일에는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되고 히틀러내각이 성립하여 의회제 민주주의시대가 개막되었다. 히틀러정부는 민주주의적 세력에 의한 국민적 조직을 금지하고, 일당지배의 국가체제를 구축하는 데 전념하였다. 교육도 이에 대한 협력을 강요당하였다.

즉, 교육은 나치스정신에 비추어 청소년을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게 하는 교수·훈련을 으뜸으로 삼게 되었다. 그 결과 학교의 자치나 교사의 교수의 자유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39년 독일군은 폴란드에 침입하였고 싸움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갔다.

1945년 5월 독일군은 연합국측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독일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연합군 감시하에 재건작업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생 독일은 국내의 나치스 잔존세력의 일소에 힘쓰는 한편, 점령통치를 맡고 있는 연합군 정책에 대응해 나갔다.

⑺ 2개의 독일로 분열

동독에서는 지방자치기관의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소비에트적 민주주의에 의한 국가기구가 실현되고 있었다. 서독에서는 1946년 8월에 연합군에 의한 대(對)독일 교육정책 기본방침이 시달되어 정치적·도덕적 재교육에 의한 정의의 원리 회복이 요구되었다.

미국 교육사절단은 미국 점령지구의 교육사정을 시찰하고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것은 강제력을 가진 것으로 나치즘의 근절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교육의 기본으로 할 것, 단선형(單線型) 통일학교제도를 실시할 것, 교육기회를 넓히고 그 균등을 보장할 것, 그리고 미국식 사회과를 교과목으로 채용할 것 등이었다.

이윽고 동·서냉전이 격화되기 시작하자 1947년의 트루먼선언 및 마셜계획을 통하여 서방측의 대독일정책은 소련의 협력을 거부하기까지 되었다. 서독은 서방측 방위공동체의 일환으로 편입되어 그 시점에서 동·서 독일의 통일구상은 절망적이었다. 1949년 5월 미국·영국·프랑스 지구에서는 독일 기본법이 공포되어 같은 해 9월에는 서독이 발족되고 10월에는 동독이 성립, 동독은 소련의 영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⑻ 동독·서독의 교육

서독에서는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국민교육의 계획확충과 그 근본적 개혁이 시작되었다. 서독은 11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이며 각 주에는 광범한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교육에서도 각 주의 독자성이 존중되어, 다양한 교육제도가 보장되었다.

각 주는 학교제도를 각 주의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따라 자주적으로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교육정책 결정에 있어 연방정부의 권한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학교행정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1969년 기본법 개정에서는 이 점이 고려되어 교육계획 책정에 있어 연방정부의 권한의 확대가 명문화되었다. 교육제도는 초등교육에서는 전일제(全日制) 의무교육 연한을 10년으로 하며, 전기 중등교육에서는 처음 2년간을 관찰지도단계(觀察指導段階)로 조직하여 조기에 진로를 고정하는 폐해를 막는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후기 중등교육에서는 김나지움의 현대화·민주화·효율화가 시도되고, 고등교육에 있어서는 1976년의 <대학강법(大學綱法)>의 제정으로 대학의 조직·관리와 개혁·재편이 진행되었다. 1965년 이후 6세부터 16세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하였다.

교육은 기술교육에 중점을 두며 이것을 담당하는 <10년급·일반교양·종합기술고등학교>는 초급(4년)·중급(3년)·상급(3년)으로 나누어져 있다. 특히 상급학교에서는 직업교육과 결부된 기술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해 대학진학률은 낮은 편이다.

교육비는 초급에서 대학까지 무료이며, 교육의 기회균등원칙이 중시되며 조기영재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90년 10월 동·서독 통합으로 독일교육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중국의 교육>

중국의 교육사는 1912년 2월, 중국 최후의 황제 푸이〔溥儀〕의 퇴위를 경계로 그 이전의 교육사와 그 이후의 교육의 흐름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⑴ 푸이 퇴위 이전의 교육

주(周)나라에서 청(淸)나라에 이르는 교육사를 생각할 수가 있다.

① 주·한(漢)나라의 교육사정

주나라는 은(殷)나라 이전 2대(代) 문화의 집대성에 착수했다. 또 주나라에는 상고(上古)의 학제 외에 주대(BC 11, 12세기∼BC 256)에 특별히 설치한 학교가 있었다. 교육대상은 왕실 일가의 태자·세자에 한정되었고, 장차 천하에 군림할 군자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윽고 주나라의 쇠퇴기로 접어들자 주왕실의 제왕교육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유사상이 제후의 계몽·지도에 한몫을 하였다. 다음의 한대(BC 202∼AD 220)의 교육은 관료의 교육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나라의 통일이 비원(悲願)이어서 주대의 봉건제도와 진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아울러 갖춘 군국제도(郡國制度)를 폈다. 중앙에 대학을, 지방의 군현에 학교를 설립하여 유능한 관리의 육성에 힘썼으나 나라의 붕괴와 함께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통제교육도 그 기반을 잃고 말았다.

② 당(唐)나라의 교육사정

당대(618∼970)의 교육에서는 학교제도가 주목할 만하다. 학교제도는 복잡하여 중앙에 정부직할의 학교가 설치되고, 정계(正系)로서 칠학(七學) 또는 칠관(七館)과 방계(傍系)로서 5종의 학교가 있었다. 별도로 지방정부가 경영하는 학교도 설치되었고, 그 정계로서 삼학(三學), 방계로서 이학(二學)이 있었다.

일반적인 학제의 특징은 귀족적인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아이들의 입학자격은 부모의 계급신분에 따라서 제약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 과거제도의 확립은 학교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③ 송(宋)·명(明)나라의 교육사정

송대(960∼1279)에는 이미 인쇄술도 보급되어 있어서 서민문화가 융성하였다. 대부분의 서원은 지난날과 같이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관리의 양성소가 아니라 인간교육의 도장을 지향하였다. 그 교육은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모범으로 하고, 교사는 자신의 인격향상에 힘써 자율적인 덕이 있는 선비가 젊은이의 교육을 맡았다.

원(元)나라를 세운 몽골족은 무력에서는 뛰어난 점이 있었으나 문화면에서는 한문화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여, 결국 송나라의 교육을 뒤따르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음의 명대(1368∼1644)는 한민족이 다시 국가적으로 부활한 시대였다. 그런 만큼 학교제도나 교육방법은 당·송시대의 것을 정비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일반적으로 명나라의 학교제도는 정부의 강력한 교육통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은 서원에도 파급되어 종종 사상의 통제와 탄압이 강행되었던 것이다.

④ 청나라의 교육사정

청조(1616∼1912)는 반정부적인 학자·지식인·문화인을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예컨대 건륭제(乾隆帝)의 금서령(禁書令)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청말로 접어들자, 지식인들은 서양의 여러 학문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윽고 봉건적인 국가체제에 대한 비판을 낳아 근대국가로서의 중국 탄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⑤ 변전하는 중국의 교육사정

1912년 2월, 중국의 왕실체제는 그 막을 내리고 난징[南京]의 중국정부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도움이 되는 교육의 방향을 명백히 하였다. 그 교육지침은 교육의 근본을 도덕교육에 두고 자유·평등·박애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 그것은 실리교육과 군사교육으로 부국강병의 결실을 얻을 것, 그리고 예술교육을 진흥하여 휴머니즘 정신을 고양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 신교육지침은 1915년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애국·상무(尙武) 등의 봉건적 유교윤리로 개변되고 말았다.

신해(辛亥)혁명 이후의 군벌전제정치, 계속되는 내전, 그리고 민생의 피폐 등은 한편으로는 혁명에 의해 중국사회를 변혁하려는 민중그룹을 낳았다. 예컨대 1919년의 5·4운동은 이 그룹이 한 일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량주의에 의한 중국사회의 점차적인 개선을 획책하는 민중그룹을 낳았다. 이 점차적인 개선 사상의 근거는 청말의 실업교육과 중화민국 초기의 실리교육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적으로는 미국의 실용주의교육에 의해 점차 개선 운동이 촉진되었다.

새로운 중국의 국가건설은 내부에 이같은 대립된 노선을 포함하면서 진행되어 갔다. 1925년 장제스[蔣介石]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군벌정부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혁명군은 처음에는 중국공산당과 제휴하여 국가건설에 힘쓰기도 했으나 이윽고 갈라지게 되었다. 이 혁명군의 교육방침은 민족주의의 실현, 민권주의의 발전, 민주주의의 심화였다.

⑵ 신중국의 교육사정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으로 인한 중·일전쟁은 사이가 나빴던 국민정부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철저한 항일연합전선을 실현시켰다. 45년 8월의 전쟁 종결까지 8년간의 전란은 중국 각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46년 1월에 <화평건국강령(和平建國綱領)>이 공포되어, 문맹의 일소, 직업능력의 고양, 교사의 질적 향상 및 어린이의 민주과학정신 육성 등의 구체적 방침이 밝혀졌다. 그러나 국·공 양당의 대립은 날로 심각해져, 1949년 12월 마침내 국민정부는 타이완[臺灣]으로 옮겨갔다.

대륙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을 지도자로 하는 중국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954년 9월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헌법의 교육규정에 다음과 같은 여러 항목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학습권을 보장한다. 국가는 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청소년의 지력·체력 발달에 힘쓴다. 사람들은 과학·문학·예술, 그리고 그 밖의 문화활동을 할 자유를 보장받는다 등이었다. 1952년에는 전(全)국토의 토지개혁이 끝났다.

1953년에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고, 인민정부의 사회주의교육 구상이 발표되었다. 거기에는, 과학기술 수준의 향상, 공업건설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 근로대중의 물질적·문화적 생활의 보장과 개량 및 소수민족의 문화발전의 촉진 등이 들어 있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고 지식 일변도의 교육과 입신출세주의적 교육을 분쇄할 목적으로 대학입시제도의 개혁이 문제가 되어, 중국 전토는 3년간에 걸쳐서 격동 속에 지냈다. 학교교육의 목적이 노동자·농민에 봉사하는 인재의 양성에 있음을 재확인하고, 아동·학생들은 공장과 농업의 생산현장에서 학습할 것이 요구되었고, 학교의 관리·운영에 교육 전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바람직스러운 일이라 하였다.

그 결과, 일정한 교육내용을 조직적으로 학습하는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태도를 조장하고, 나아가서는 아동들의 학력을 저하시키고 말았다.

그러다가 <광기의 시대>라고 불렸던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지나고, 1976년 10월 사인방(四人幇) 추방 후 중국은 이상과 같은 교육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4가지 근대화를 내걸고 전진하였다. 1978년, 소학교 취학률은 94%에 달하였다(신중국발족 당시의 소학교 취학률은 20%).

또, 소학교의 수업연한을 문화대혁명 이전의 6년제로 환원하고 월반제도를 채용하여 우수아동의 교육성과를 올리려 하였다. 그것은 소·중·대학의 중점학교 설치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중점학교는 능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교육조건이 보다 좋은 학교에서 교육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소련의 교육>

1917년 2월 차르 전제정체의 붕괴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탄생을 경계선으로 하여 그 이전을 러시아교육사, 그 이후를 소련교육사로 구분할 수 있다.

⑴ 러시아교육사

10세기 무렵 러시아는 루시로 불렸다. 러시아라는 나라이름은 14·15세기 무렵부터 역사상에 나타난다. 1613년 로마노프왕조가 시작되었고, 그 후 300년간에 걸쳐서 러시아제국을 지배하였다.

① 18세기 전반의 교육사정과 표트르대제

18세기의 최초 25년간 러시아는 군사·경제·문화·교육의 각 방면에 걸쳐서 근대화를 진행하였는데, 표트르대제의 개혁이 바로 이것이다. 1701년 표트르대제는 학교설립에 관한 삼칙령(三勅令)을 발포, 그에 따라서 실과학교가 모스크바에 설립되었다.

대제는 초등교육의 보급에도 관심이 많아, 14년에 러시아 최초의 의무교육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25년 과학아카데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립되어 러시아의 과학·문화·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② 18세기 후반의 교육사정과 옐리사베타여제(女帝)

대제의 사후 귀족 특권의 확장·강화가 진행되어 오로지 귀족과 사제의 교육이 보급되었다. 또 육군귀족유년학교·종교학교 등이 폐쇄적·특권적 중등학교로서 탄생하였다. 1755년 옐리사베타는 모스크바대학 설립 법령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김나지아(중학교)도 개교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는 농노(農奴)를 제외한 모든 희망자가 응시할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의 러시아는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여서 반봉건사상의 확대나 농노제·전제정체에 대한 비판 등을 볼 수 있었다. 교육면에서는 학교체계의 확립, 국민교육 조직화 움직임이 있었다. 1782년 국민학교 설치위원회가 설립되어 교원양성기관의 설립과 러시아제국 국민학교령의 공포를 담당했던 것이다.

③ 19세기의 교육사정

1804년 대학관할하의 여러 종류의 교육기관에 관한 규정이 공표되어 러시아제국은 6학구(學區)로 나뉘게 되었다. 각 학구는 교구학교·군학교(郡學校)·김나지아·대학의 4단계 시스템을 정비하였다. 12년 나폴레옹 지휘하의 프랑스군대가 러시아에 침입하고, 이윽고 그들은 총퇴각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전쟁의 승리감과 자유사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전제정체와 농노제를 폐기하고, 전국민의 교육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러시아국가의 건설을 바라게 되었다. 1961년의 농노해방선언은 이 기운을 한층 높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또 정부에 의한 탄압 움직임도 있어서, 곧 원래의 보수적 노선으로 되돌아갔다.

학교교육도 이 움직임 속에서 왔다갔다 하였다. 1964년의 초등국민학교규정, 김나지아 및 프로김나지아(4년제의 불완전 중등교육기관이며, 중학예비교)에 관한 규정으로 모든 신분의 자녀가 취학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지방자치회·단체·개인에게도 국민학교를 개설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70년대의 정치적 반동기로 접어들자 전제적 학교정책이 잇따라 단행되었다.

④ 혁명 전의 교육사정

19세기 후반의 러시아는 봉건제의 권력과 자본주의의 발달, 노동운동의 고양 등의 혼재(混在)로 특징지을 수 있다. 1895년 레닌은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러시아제국은 세계 경제공황에 휩쓸렸고, 러·일전쟁에서도 패배하였다.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1905년 1월 125개의 기업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정부는 총검과 거짓으로 개혁을 약속하는 등 인민을 회유하였다.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정부 교육성은 혁명이 두려워 특히 교원에 대하여 엄한 규제를 가하였다.

확실히 제1차세계대전에 승리하기 위해 계급투쟁은 일시 중지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국민생활의 파탄, 즉 인플레, 소비물자의 부족, 식량위기 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정부는 적절한 대응책을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15년에 노동자들은 파업을 감행하였다. 이 움직임은 2월혁명, 10월혁명으로 확대되어 갔다.

⑵ 소련교육사

1917년 차르 전제는 막을 내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갑자기 군복을 걸친 농민의 손에 의해 달성되었다. 소련정부의 사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계몽·실시에 있었다.

① 혁명 후의 교육개혁

교육면에서 학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대학의 신설 및 대학에서의 자치의 부활·확대가 착수되고, 또 중등교육의 재편성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전러시아교원조합이 결성되었다. 1917년 4월 24, 25일 볼셰비키당 제7회 전국협의회가 개최되어, 크루프스카야가 교육조항을 초안하였다.

10월 25일 레닌 지휘하에 볼셰비키당은 무장봉기하여,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에 의거한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였다. 소련의 신정권은 곧 <교육인민위원으로부터>에서 교육활동의 일반적 방향, 교수학습과 교육, 교육자와 사회 등에 대하여 명확한 노선을 내놓고, <학생 여러분에게>에서는, 사회주의적 학생의 본연의 자세를 명확히 하였고, <교사 여러분에게>에서는 근본적 사회개조 및 단계적 사회주의화의 필요성과 협력을 호소하였다.

② 소련교육의 특색

1918년 1월, 전(全)러시아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 제3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노농동맹을 기초로 한 혁명그룹에 의한 소련의 최고권력기관이 승인되었다. 그 때 통일노동학교령과 기본원칙, 그리고 공산당강령 교육조항의 개정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문맹퇴치운동과 피오네르(공산주의 소년단)운동이 교육운동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20년 레닌은 <청년동맹의 임무>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그는 인류의 모든 문화유산을 학습하여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할 것, 그 유산을 책으로부터가 아니라 생활·노동을 통하여 학습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레닌의 이 문제 제기는, 그 후 소련의 학교교육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1923년에는 구스프로그램[敎授要目]이 실천에 옮겨졌다. 그것은 학교교육의 중심을 노동에 두고, 노동과 문화의 접합점으로 학교의 위치를 설정하고 오로지 실생활과 교육과의 직접적 결합을 추구했던 것이다.

소련의 국민교육은 어린이의 전면발달을 지향하여, 사회주의 국가건설 노선 가운데, 전국민교육을 염원으로 삼았다. 그 염원에서 태어난 것이 교외교육조직·기관의 성립이고, 콤소몰[共産主義靑年同盟]과 피오네르의 조직화였다.

1928년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고, 소련의 공업화·농업집단화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또 그와 보조를 맞추어 의무교육이 성과를 올렸고 종합기술교육이 소련 학교교육의 기본원칙이 되었다. 1934년에는 새로운 국민교육제도가 전 연방적인 규모로 확립되었다. 소학교(8∼12세)·불완전중학교(8∼15세)·완전중학교(8∼18세)가 그것이었다.

③ 20세기 후반의 교육사정

1941년 나치스 독일은 소련 침략을 단행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소련이 지불한 희생은 컸다. 1946년 소련은 부흥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고, 제4차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1952년의 제19회 당대회는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 법칙과 조건을 명백히 하였다.

또 소련의 학교교육 중심문제로서, 7년제 의무교육의 수행, 10년제 의무교육으로의 이행준비, 중학교에서의 종합기술교육의 실시, 공산주의적 도덕교육의 철저 및 교수·훈육활동의 질적 향상 등에 동의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노선이 발족하였다. 종합기술교육 체계가 밝혀졌고, 전쟁피해자 자녀를 위한 기숙학교가 설립되었다. 1964년 흐루시초프의 해임 뒤에,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집단지도체제가 승인되었다.

1973년 국민교육기본법이 제정되었다. 그것은 전문(前文) 14장 65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산주의적 인간상 및 도덕규범을 명시하고 있다. 또 종합기술교육 원칙이 재확인되었고, 사회과의 신설과 노동과의 특설이 눈길을 끈다.

크게 보아 소련교육은 다음 2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학생이 여러 교과를 충분히 학습함으로써 자본주의 여러 나라로부터의 간섭에는 의연한 태도로 대응하고, 오로지 공산주의적인 인생관·세계관으로 일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는 집단의 이해와 개인의 이해는 일치한다는 공산주의적 국가이념하에서 유아기부터 노동을 통해 국가·당·집단에 대한 봉사정신을 획득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교육>

인도네시아는 섬이 많은 나라로 크고 작은 섬 1만 700여 개가 흩어져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큰 섬은 수마트라·자바·보르네오·셀레베스·뉴기니 등이다. 이들 섬에 2억 41만(1995)을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일찍이 유럽인과 일본인에 의해 짓밟힌 쓰라린 추억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인도네시아의 교육은 과거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다른 나라의 속박과 간섭의 침략사를 모르고서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⑴ 16, 17세기의 인도네시아

1498년 바스코다 가마는 인도항로 개척에 성공하였다. 인도네시아는 그 무렵 유럽인의 생활필수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향료(육두구·정향나무·후추나무)의 산지였다. 유럽인은 이때문에 인도양과 태평양을 건너 인도네시아에 내항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향료무역을 독점하였다.

일반적으로 포르투갈에 이로운 것은 인도네시아 원주민에게는 해로운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원주민이 이제까지 얻고 있었던 해상무역의 이익이 반감하였기 때문이다. 16세기 말이 되자 인도네시아에서의 포르투갈의 세력은 크게 쇠퇴하여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대신하게 된다.

1594년 수 명의 네덜란드 상인이 암스테르담에 판 펠레회사를 창립하고, 두 차례의 항해를 감행하여 거액의 이득을 얻었다. 1602년 네덜란드는 연합동인도회사를 창립하고 동양항로무역의 독점권을 손에 넣었다. 이 회사는 무역에 의한 부의 획득에만 전념하고, 서양문화와 기술의 보급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것은 서양식 학교설립에 무관심하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⑵ 18, 19세기의 인도네시아

18세기 말 유럽에서의 프랑스의 대두는 네덜란드에 정변을 가져왔다. 네덜란드 오란예가(家)의 빌렘 5세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인도네시아문제에 대하여 영국에 원조를 청하였다. 1811년 영국군은 인도네시아군도를 점령하였고, 이리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치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실각과 네덜란드의 독립회복 등으로 16년 네덜란드는 다시 인도네시아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일찍이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교의 포교와 더불어 학교와 같은 형태의 것이 창립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575년 중부 자바에 마타람이슬람왕국이 탄생하였다.

이슬람교는 코란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학교에서의 주요 과업은 성전 코란을 아이들에게 아랍어로 외우게 하는 것과 어른의 행동·습관을 아이들에게 모방시키는 것이었다. 예컨대 코란학교와 프산트렌(pesantren;이슬람교에 관한 계몽서를 교수하는 학교)은 이슬람교를 가르쳤다. 또한 코란학교, 프산트렌을 포함한 모든 학교는 왕국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신문화의 도입 및 사회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⑶ 인도네시아인을 위한 최초의 학교

1816년 네덜란드가 다시 지배하게 된 한동안은, 인도네시아교육은 인도네시아인에 관한 한 무풍지대였다. 1830년 이후 인도네시아의 여러 대도시에 유럽인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832년 창립된 자바학교는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원주민의 자녀는 그 혜택을 입을 수 없었다.

1848년이 되어서야 인도네시아인을 위한 서양식 학교가 설립되어 1848년부터 1852년 사이에 설립된 학교는 15개 교에 이르렀고, 사범학교도 창립되었다. 1870년이 되자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자유주의적 원리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생겨 1882년까지 거의 700개의 학교와 9개의 사범학교가 설립되었고, 학생수도 증가하여 거의 4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⑷ 20세기의 학제개혁과 격동

20세기로 접어들자, 학교제도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어가 교과목으로 편입되어 수업연한도 연장된 제1급학교, 도시의 일반주민·임금노동자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 제2급학교, 지방에 거주하는 일반대중을 위한 새로운 학교인 국민학교(마을학교) 등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마을학교에 부설된 계속학교, 나아가 제2급학교나 마을학교 졸업생을 서양식 학교로 연결하는 연쇄학교(連鎖學校)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또 인도네시아인을 위한 중등교육·고등교육기관이라 하더라도 그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뮤로학교와 보통중학교가 생기고, 반둥에 공과대학,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법과대학·의과대학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은 인도네시아의 발전에 커다란 불행을 가져왔다.

1942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형 식민지에서 일본형 점령지로 바뀌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철저한 동화정책의 실시로, 일본은 언어교육(일본어의 강제보급)을 중심으로 하는 6년제 국민학교를 보급하는 데 열중이었다. 그리고 45년 8월 마침내 인도네시아는 염원하던 독립의 기쁜 날을 맞이하였다.

⑸ 독립 후의 기본방침과 교육사정

1945년 6월 1일 원주민을 구성멤버로 한 <독립준비조사회>는 독립 후의 기본방침을 내놓았다. 이른바 판차 실라이다. 그것은 인도네시아 건국의 대원칙을 뜻하였고, 동시에 인도네시아교육의 기본이념이기도 하였다. 즉 ① 신성하고 전능한 신에 대한 신앙 ② 인간성의 존중 ③ 민족주의의 고양 ④ 인민의 주권 확립 ⑤ 사회주의의 발전 등이다.

인도네시아는, 헌법상의 교육규정 및 교육기본법에서 교육권과 학교선택의 자유, 교육상의 무제약성(無制約性)을 명시하고, 문맹의 퇴치와 민족의식의 심화, 인도네시아 통일의 강화와 신앙의 자유 및 종교교육을 중시하는 결의를 명백히 하였다. 또 철저한 의무교육이 교육의 중점목표로 되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가 안고 있는 문제는 낙도·벽지에 관한 교육문제와 교원 부족 문제이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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