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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28 (일)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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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195      
[교육] 입시제도-중등교육기관 (민족)
입시제도(중등교육기관)

세부항목

입시제도
입시제도(역사)
입시제도(중등교육기관)
입시제도(고등교육기관)
입시제도(과제 및 전망)
입시제도(참고문헌)

중등교육기관의 입시제도가 변천해 온 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해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학교관리제(1945∼1950)]

8·15광복 후, 중등학교의 입시제도에 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946년 5월 13일에 개최된 각 시·도 학무과장회의에서였다. 즉, 해방 직후에는 중학교장의 관리하에 필답시험성적과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내신서에 의하여 선발하였다.

그 당시는 믿음과 정직과 신의의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신서에 의한 평가는 정확성과 공정성을 결한다는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이를 폐지하였다.

그 후 한 때는 출신학교장의 추천서, 면접시험 및 신체검사 결과를 종합해 참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점차 입학시험 성적에 의해서만 선발하였다. 이 시기는 중학교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에서는 전·후기로, 농촌에서는 전기에 준하여 실시하였는데 이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즉, 하나는 응시할 기회를 한 번만 주어야 학교선택에 신중을 기하여 소위 일류학교에 집중하는 경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후기로 나누어야 개인적으로나 국가·사회적인 측면에서 인재의 손실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출제과목은 국어·산수(지금의 수학)를 중심으로 여러 교과에 걸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주관식 출제방법을 적용하였다.

이 시기의 문제점으로는 해마다 학교별 시험문제의 누설이 교육계의 추문으로 떠들썩하였다. 시험문제의 적부와 선발의 공정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지원자의 대부분이 일류교로 집중되어 ‘입시지옥’이란 말이 생겼다.

또한 입시준비 교육으로 인하여 학생의 신체적 발육이 저해되며 학교에서는 지·덕·체를 겸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육에만 치중하므로 덕과 체는 도외시되는 절름발이 교육이 행해졌다는 비판이 대두되었다.

여기에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서는 1948년 5월 21일 종래의 입학시험에서 학과시험을 폐지하고 지능시험 및 신체검사 만으로 전형하도록 중학교 입시안을 결정하고 다음날 중등학교 입시를 위한 ‘가려잡기’·‘메우기’·‘짝 맞추기’ 등의 창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입학시험이 완화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지능검사에 대한 예비연습이 성행되어 지능마저 기계적인 연습이나 기능으로 둔갑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에서 1949년 5월 25일, 입학시험은 다시 학력본위로 시행하기로 결정하여 1950년에는 필답시험 위주의 입시로 환원되었다.

이렇듯 1945∼1950년 사이에 적용한 방법은 ㉠ 1945∼1948년에는 학과시험과 내신서 또는 학과시험, ㉡ 1949년은 지능검사와 신체검사, ㉢ 1950년에는 학과시험 위주로 선발하는 방법이 실시되었으나 학교관리제로서는 그 어떤 방법도 입시제도를 합리화시킬 수 없었다.

[국가연합고시제(1951∼1953)]

1950년 초는 새 교육법에 의해서 학년 초를 종래의 9월에서 4월로 바꾸기 위한 과도적인 조치로 6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달도 못되어 6·25전쟁이 일어났고, 9·28수복이 있었지만 피난민들이 자기 집으로 찾아 들기도 전에 1·4후퇴로 다시 피난 길을 떠나는 바람에 학교는 제대로 수업이 될 리가 없었다.

이렇듯 부산 피난시절에는 학생 거주지의 유동, 수업진도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종래의 학교관리제의 폐단이었던 정실입학·부정입학 및 관리상의 불공정성 등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모의 고사방법으로 구상한 국가연합고시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요점은 전쟁으로 피난학생이 각처에서 방황하는 상황에서 중학교 입시의 혼란을 막고 입시의 공정성은 물론이요, 입시전후에 야기되는 불상사를 일소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된 제도였다.

이 국가연합고시는 전국 학교가 동일 출제로 시험을 치르고, 그 성적에 따라 선발하였는데 1954년까지 3년간 실시하다가 다시 학교관리의 자유출제제로 환원되었다.

그렇지만 이 제도가 중학입시의 공동출제제, 또는 5·16군사정변 후의 각종 국가고시의 선구를 이루게 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방법에 의한 시험은 1951년 7월 31일을 기하여 남한의 수복지구 전 지역에 걸쳐 실시하였다. 그런데 전투관계로 실시 못했던 경기도에서는 9월 30일, 서울에서는 10월 30일에 실시하였다.

학생이 득점한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학교를 선택하게 되므로 종전에 흔히 있었던 정실·부정입학 등의 불상사를 일소하고, 공정·명랑한 입학으로 일반사회의 교육계에 대한 신망을 두텁게 하였다든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의 최대 최선의 시책이라는 등의 반향도 많았다.

그러나 자기 득점에 따라 학교를 결정하는 작전계획에 골몰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학교차에 따른 입학점수의 기준이 달라 억측과 낭설이 유포되어 근래 대학입학에서의 소위 ‘눈치작전’이 이때부터 비롯되어 새로운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제도는 교육법시행령, 제77조에서 규정한 학생의 입학·퇴학·전학 및 휴학에 관하여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학교장이 허가한다는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제를 가급적 소규모의 범위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배치되는 일이라하여 논란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 제도가 공정한 입시에 공헌했다는 일반적인 반영과는 달리 권력층의 후문 입학의 길은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장점도 많았으나 많은 문제점이 생기게되어 사회적으로 논란이 높아짐에 따라 1953년 5월 27일, 제51차 중앙교육위원회에서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내신·필답합산제(1954∼1956)]

1954년부터 국가연합교시제에서 학교단위관리제로 다시 환원되었다. 국가연합고시제도는 1·4후퇴로 피난학생의 범람과 사회적 혼란 중에서 감행된 획기적인 방법이었으며, 또 입시의 공정성을 위한 공이 컸었다.

그러나 1953년 8월 서울환도가 이루어지고 민주질서가 회복되면서 국가연합고시제는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학생의 입학에 관한 권한은 법으로 학교장에게 맡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학교의 입시제도는 학교관리제로 환원되어 유시험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교부는 입시준비교육의 과열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신서에 의한 무시험전형제도를 장려하였다. 이렇게 해서 유시험·무시험을 병행할 수 있었으나, 문교부의 권장에 따라 많은 학교에서 무시험제도를 택하였다.

국민학교 재학중의 교과 성적은 5단계 평점의 환산기준에 따라 중학교에서 정하되 상관회기선법을 적용하여 전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각 국민학교에서 보내는 내신서의 신뢰성이 문제되자 유시험제·무시험제 두 가지로 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무시험제도의 신뢰성 결여에서 생겨난 변용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시험제도에 의한 선발은 학생들의 부담을 크게할 뿐만 아니라 시험문제는 질적으로 저급하였다. 그리고 무시험제도는 학교에 따라 기준을 달리하게 되어 객관성과 타당성을 결하게 되어 1957년에는 시·도의 입학자전형위원회의 승인 하에 무시험제도와 연합출제제 중에서 학교별로 선택하여 실시케 하였다.

그러나 시험제도를 택하는 경우에는 전 교과에 걸친 출제를 원칙으로 하되 보건·음악·미술은 실시평가를 하며 그 성적 배점비는 교육과정 시간배당을 기준으로 고려토록 하였다.

한편 고등학교의 입학은 동일계 중학교 졸업자에게는 무시험 전형을, 동일계 졸업생이 부족한 경우에는 타계 중학교 졸업자에게 입학시험의 기회를 주어 선발토록 하였다.

[무시험전형제·연합출제병행제(1957∼1961)]

학교관리에 의한 유시험과 무시험제에 따른 시비와 더불어 과열된 입시준비교육의 폐단은 많은 논란을 격화시키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는 완전 유시험제도, 일부 무시험제도, 완전 무시험제도가 동시에 실시케 되었다.

이때 유시험제도를 택하는 경우 몇 개교가 연합해서 출제하였다. 또 문교부는 유시험제도를 택하는 경우 지역별, 또는 선발기별로 학교장이 자진하여 연합출제 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합출제제인데 1961년까지 실시되었다.

그리고 학교단위로 유시험를 택할 수 있었으나 유시험의 공정성을 높이고, 무시험의 불신요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학교는 연합고시제를 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1958년의 입시는 많은 시·도의 경우 단기별(單期別) 실시, 무시험제 전형제, 공동출제라는 3가지 원칙을 적용하였다. 그런데 1959년부터는 단기제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전·후기별로 나누어 적용하는 외에 큰 변동 없이 1961년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나 연합출제제도는 유·무시험 병행의 학교관리제가 빚게된 많은 문제점은 해소하였다. 그렇지만 이 제도 역시 좁은 문을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

즉, 당시의 신문들은 “공동출제 역시 어린이들을 울렸다.”고 제하여 괴팍스럽고 어려워서 시험준비교육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무시험의 경우는 “……내신이 어떤 표준 아래 전형되었는지가 적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유리한 내신을 얻기 위한 학부형들의 불미스러운 경쟁이 격화되고 나아가 내신에 부정이 개입될 우려가 없지 않다.”고 비난하였다.

요점은 연합출제도, 무시험제도도 더불어 많은 문제점을 개재케 하였으며 또 입시경쟁은 여전히 완화되지 않고 있음을 논란하였던 것이다.

한편 고등학교는 종전과 같이 동일계 중학교 졸업자는 무시험 진학을 허용하되, 중학교 졸업성적을 기초로 전형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경쟁을 시키지 않도록 하고, 모집정원을 엄수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동일계 중학교 졸업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교육의 기회균등에 위배되는 처사라는 비난이 많았다.

[국가고시제(1962∼1963)]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혁명정부는 광범한 교육혁신을 추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1961년 8월 12일, 법률 제 681호로 공포한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의 입학에 관한 임시조치법〉, 8월 24일 각령 제107호로 공포한 동 시행령, 10월 23일 문교부령 제91호로 공포한 동 시행세칙은 말 그대로 입시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즉, 〈입학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주요 골자는 중·고등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지역을 제한하고, 전형방법은 필답고사와 체능검사를 구분해서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입시의 국가관리 하에 서울특별시와 도별로 공동출제하고, 임시조치법에 따른 입시제도를 관리하기 위하여 문교부에 입학고사중앙위원회를, 서울특별시 및 도에 입학고사지구위원회를 두는 일 등이었다.

이 임시조치법의 배후에는 교육계의 부정과 부패, 또는 구악을 일소한다는 방침 아래 선택의 공정성을 기하려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의도의 여하를 불문하고 입시에 관한 국가통제가 8년만에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고시제는 1950년대 초의 경우와 같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누적된 교육계의 부조리를 없애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당국이 의도한 대로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는데 다음의 특징은 찾을 수 있었다.

첫째로, 이 제도에서 부각된 것은 모두 4지선다형의 출제방식을 적용했는데 종전의 필답시험에서 지식을 주로 재던 출제경향과는 달리 사고력과 응용력을 재기 위한 출제방향을 제시하였다.
둘째로, 입학시험에서 처음으로 점수화한 체능검사가 실시되었는데 이 제도는 수험생이나 학부형들에게 학생들의 체력관리에 관심을 갖게하는 좋은 계기였다.

셋째로, 동일계 고교진학에 특전을 주지 않았고 반면 전국적으로 공동출제가 실시된 데에 더하여 채점의 공정성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학교나 소위 2류학교의 우수한 학생들이 일류고등학교에 많이 진출하였다.

[시·도별 공동출제제(1964∼1965)]

국가고시제는 1950년대의 경우와 같이 논란도 많았지만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시·도별 공동출원, 또는 연합고시제를 실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정책변화로 중·고등학교입시의 시·도별 공동출제와 공동인쇄방법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은 모두 공동출제제였지만, ㉠ 해마다 선발방법을 달리한 점 ㉡ 정원의 3% 이내에서 군경유자녀에 대한 입학 특혜조치를 부여한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즉 문교정책을 조령모개라 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의 입시는 시·도별 공동출제제였으나 해마다 선발방법을 달리하여 수험생은 물론,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었다.

그 개요를 살펴 보면 첫째로, 1963년에는 중·고등학교를 불문하고 지원학교의 선택에 거주지별 제한을 하였는데 1964∼1965년에는 제한을 하지 않았다.

둘째로, 선발방법은 시·도별 공동출제로서의 필답고사와 체능검사를 실시하였다. 중학교의 경우 1963년에는 체육을 제외한 중학교 3년간의 전 교과를 과하였다. 그런데 1964년에는 수험생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 학습의 기본능력을 잰다는 취지에서 중학교에서는 국어·산수, 고등학교에서는 국어·영어 및 수학만 과하였다.

이것이 1965년에는 다시 중학교에서는 체육을 제외한 국민학교 최종학년의 전 교과 고등학교에서는 체육을 제외한 중학교 최종학년의 전교과 범위 내에서 출제하였다.

셋째로, 체능검사는 중·고등학교 동일하게 전 교과 성적의 8분의 1로하며 기본점수를 체능만점의 3분의 2로 하였다. 그러다가 1965년에는 체능검사를 점수화하지 않았으며 신체검사 및 면접은 수학상 지장의 유무만 보기로 하였다.

넷째로, 음악·미술·체육·무용 및 글짓기의 5개 영역에 걸친 특기자 전형은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정원의 3% 내에서 선별하다가 1965년에는 2% 내에서 선발하였다.

1963∼1965년에 실시한 제도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입시제도의 명칭은 시·도별 공동출제라 하였다. 그렇지만 이 제도에 대하여는 국가연합고시제, 학교공동의 연합출제제를 경험해왔고, 주·객관식 출제도 해보았으며, 또 출제의 범위도 달리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체능검사·면접시험 및 특기자 선발도 이미 경험하였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이 기간에 실시한 전형방법은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었다. 다만 새 제도가 반영된 것은 군경유자녀에 대한 특혜조치의 시행이었다.

한편 이 기간의 입시제도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국민학교, 중학교에서는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말썽 많던 체능검사의 점수화 문제도 수학상의 지장 유무를 보는 정도로 그치게 되어 어느 정도는 궤도에 오르는 듯 하였으나 갖가지의 입시파동을 야기케한 것은 큰 흠이었다.

그 중에서도 1965년의 입학시험에서는 우리 나라의 교육사상 씻을 수 없는 많은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즉, 국민학교에서는 소위 일류중학교의 진학에 대한 집념이 강한 나머지 학구위반자가 많아서 사회문제화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입시에서는 무즙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고등학교에서는 입시문제가 누설되어 다시 한 번 놀랍게 하는 등, 모두가 서울의 교육에서 빚어진 사안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입시에 따른 불상사는 언필칭 문제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었었다.

[공동·단독 출제 병행제(1966∼1968)]

입시제도에 관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장단점이 따르게 되어 입시파동은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문교부에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입시제도의 합리적 운영, 준비교육의 배제를 강조해 왔으며, 입시파동을 경험한 교육계는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과 긴장 속에서 새로운 입시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1966년에는 학교장 책임하의 학교단위의 단독출제제와 교육감 책임 하의 공동출제 중에서 학교장이 택일하여 실시하는 공동·단독출제 병행제도를 채택하게 되었다. 입학시험은 필답고사·체능검사·신체검사 및 면접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입시과목은 전 교과를 과하였으나, 출제범위는 국민학교 교장단의 건의를 반영시켜서 국민학교 교과서 내에서 기초적이고 평이한 내용을 출제키로 하였다.

고등학교는 현재 중학교 교육과정(구과정) 3학년 부분에서 체육과를 제외한 교과활동(반공·도덕포함)내에서 출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중학교·고등학교가 더불어 반공·도덕이 포함된 것이 예년과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이 밖에 문교부는 1966년 5월 23일, 교육법시행령 중 제 77조의 2항을 “인문계 고등학교의 장은 동일구 내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한 자로서 당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는 자에 대하여는 선발고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 입학을 허가할 수 있다.”고 개정하여 동일계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특혜조치를 법제화하여 1969학년도부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1966년의 입학시험에서 가장 특징을 띠게 된 것은 바로 반공·도덕을 필기시험과목으로 과한 일이다.

반공·도덕은 일상생활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시험과목으로 과하는 것은 옳지 않다든가, 입시과목으로 과하는 반공·도덕은 교과운영이 형식화되고, 내용을 잃게 된다는 등의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반공·도덕이 지닌 특성과 사회적 요청에 비추어 행동의 규범, 도덕적 판단, 행동양식 결정 전의 심적 경향 등은 교육평가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측정이 가능하며 이 분야의 측정을 통해서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험과목으로 과해야 한다는 문교부의 주장에 따라 입시지침대로 시행하게 된 것이다.

[중학교 무시험 추전제(1969∼현재)]

우리 나라의 입시제도는 교육적 의의가 크고 사회적 영향이 심대하여 그 개혁을 위한 노력은 항상 문교정책의 주요과제로 제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중·고등학교의 입시제도는 반복적인 변화를 거듭하게 되어 입시지옥의 해소는 여전히 현안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마치 교육에서 암적 존재화 되었는데, 그 주요요인은 시험을 전제로 한 입시제도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입시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은 시험제도를 철폐하는 방식 외에 합리적 방안을 모색할 수 없다는 단계에 이르게 되어 교육계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절실히 요청되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요청에 비추어 보다 근본적인 해결이 촉구되어 오던 중 문교부는 1968년 7월 15일에 중학군의 설치와 추첨을 골자로 1969년부터 연차적으로 시행한다는 무시험 진학제도를 발표하였다.

이 조치는 바로 입시개혁에 따른 교육개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960년대 후반기에 가장 획기적인 문교시책으로 손꼽혔다. 그런데 그 혁신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1969학년도부터 중학교 입학시험제도를 폐지하고 ㉡ 중학군을 설치하며 ㉢ 추첨으로 입학을 결정한다.

또 동시에 중학교 입학시험지옥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 세칭 일류 공·사립 중학교 14개교를 연차적으로 폐교하고 ㉡ 그 시설은 고등학교로 전용한다.

그리고 중학교 입시폐지에 따른 실시절차는 ㉠ 1969년도는 서울특별시만 실시하고 ㉡ 1970년도는 부산·대구·광주·인천·전주·대전의 6개 도시에 적용하며 ㉢ 1971년도부터는 전국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의 실시를 위해서 서울은 모든 중학교를 4개 군으로 나누며 지방은 시·군을 단위로 지방의 실정에 따라 정한다.

문교부에서 입시폐지의 결정이 발표되자 국민들은 갈채, 의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체적으로는 입시지옥에서 어린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정부의 용단을 대부분은 크게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입시개혁, 교육혁명, 경우에 따라서는 ‘7·15어린이해방’이라는 용어가 나도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교육사상 일종의 쿠테타라는 표현까지 나돌기에 이른 것이다.

추첨방식은 1969학년도에는 은행 알을 이용한 추첨배정이었으나 1970학년도부터는 우리 나라 교육사상 최초로 등장한 전자계산기(IBM 1401)를 이용하여 추첨번호를 배정하였다. 그리고 1971년도에 전국적인 무시험진학제도 실시 이후, 추첨방식은 컴퓨터에 의한 무선추첨으로 해당 학군 내에 있는 학교번호를 배정하였다.

그런데 중학교 무시험진학제 이후에 초등학교 아동들의 신체적인 성장이 향상되었으며, 교육과정 운영이 정상화의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학부모 및 학생의 과중한 입시준비를 위한 경제적, 심리적 부담감을 경감시켰고 중·고 재수생 문제가 해소되었다. 또한 이 제도 이후 중학교 진학율이 급증되는 등의 변화를 낳게 되었다.

[고등학교 공동·단독 출제 병행제도(1966∼1973)]

1968년까지의 고등학교의 입시제도는 앞에서 고찰한 것처럼 동일계 고교진학문제를 제외하고는 중·고등학교가 같은 제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9년부터 중학교에서 무시험제도를 실시하게 된 후부터 완전히 분리시행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각 시·도의 교육위원회에서는 종전에는 중·고등학교의 입시요강·실시요강을 발표하였으나 1969년부터는 고등학교 입학자전형 요강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1969년의 고등학교 입학자전형은 필답고사·체능검사·신체검사 및 면접으로 실시하였다. 특기자는 정원의 3% 내에서 전형하되 체육특기자는 육상경기특기자를 우선적으로 선발하도록 하였다.

필답시험의 범위는 체육과를 제외한 중학교 최종학년의 반공·도덕을 포함한 전 교과에 걸쳐 문제은행식 출제방식이었고, 체능검사 배점은 입시총점의 30분의1 이상으로 하였으며, 신체검사 및 면접은 수학상 지장의 유무만을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1969년부터는 동일구 내 인문계고교의 무시험진학이 시행되었다. 1970∼1972년의 입시전형은 1969년과 비슷하였다. 다만 필답고사에서 반공·도덕의 출제비중을 높였으며 각 학교의 요청에 따라 전·후기별로 구분한 후, 인문계 고교와 실업계 고교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그런데 1972년의 고교입학은 중학교 무시험진학을 한 첫 졸업생들이 고교로 진학하는 해였다. 그리고 필답고사에서 교과별 배점은 교육과정 시간배당 기준령의 범위 안에서 교과별 배점비율을 적용한 것이 다른 점이었다. 또 1973년의 고등학교 입시전형부터는 체능검사를 없애고 각급학교에서 시행중인 체력장제도를 활용하였다.

한편 원호대상 자녀의 경우는 ㉠ 무시험진학을 희망하는 원호대상 자녀가 고등학교 모집정원의 3% 이내의 경우에는 무시험진학, ㉡ 진학희망자가 고등학교 모집정원의 3% 이상일 경우에는 학교장이 별도로 전형하여 정원의 3%까지 수용하고, ㉢ 수용능력이 남는 유시험교를 지원하는 경우에는 지정된 장소에서 응시하도록 하였다.

위에서 살펴 본 바과 같이 1966∼1973년에 걸친 고교입시는 해마다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비교적 오랫동안 공동·단독출제제가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공동·단독출제의 병행제였다.

그렇지만 1967년 이후에는 공동출제로 문제은행식 출제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이들 문제와 더불어 가장 주요한 또 하나의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중학교 무시험진학으로 인하여 국민학교에서의 입시준비교육이 중학교로 옮겨져 고등학교 입시준비가 과열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학교수업보다도 학관수업이나 과외수업이 성행하게 되어 또 다시 새로운 과열과외현상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연합고사 및 추첨배정제(1974∼현재)]

1969년부터 실시한 중학교의 무시험진학제도는 우리 나라의 입시제도에서 일대혁명을 수행한 것 임에 틀림없었다. 그에 따른 문제점은 아직도 존재하지만 말 그대로 과감한 조치를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입시준비를 위한 과열과외는 중학교로 옮겨졌고 고질화한 일류학교 지망의 집착성이 초래한 입시준비 과열현상은 사회문제로까지 갖가지의 부작용을 드러내게 했다.

학생들은 과중한 학습부담으로 신체적 발달이 저해되었고, 정서적 불안감 등 정신적 결함을 낳게했으며, 학교에서는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교육과정 운영이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또한 과외비 부담으로 학부모들의 가정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풍조가 조성되었다.

또한 간판위주의 인간평가풍조로 소위 일류병이 만연되어 갔다. 이에 문교부는 1973년 2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서 고교입시제도에 있어 인문고는 학군제, 과정별 지원, 추첨배정, 대학의 입시제도는 대입예비고사자의 시·군단위 사정제와 체력검사를 골자로 하는 입시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제점 및 보완책을 검토, 수정하여 그해 3월 13일에 입시제도의 확정안을 공표하였다.

문교부는 입시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를 교육적 측면과 사회·경제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고교 입시제도 개선에 따른 시행상의 제반 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 고교 평준화를 위한 조치, ㉡ 고교 비진학자 및 탈락자에 대한 교육기회 확장, ㉢ 교육부조리 현상 일소 등 강력한 행정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고 이 중에서 학교 평준화에 역점을 두기로 하였다.

개선된 고교입시제도는 연합고사에 합격 후, 학군별 추첨제를 적용한 것으로 1차년도인 1974년에는 서울·부산에서 실시하였다. 그 밖의 지역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도별 공동출제 및 문제은행식 출제방식에 의한 입학시험이 실시되었고, 1975년도에는 대구·인천·광주시에 확대 실시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는 서울·부산·수원·인천·성남·춘천·원주·청주·대전·천안·전주·군산·일산·광주·목포·대구·안동·마산·진주·제주 등 20개 도시에서 실시되었다. 입학고사의 명칭도 처음 ‘연합고사’에서 후에는 ‘선발고사’로 바뀌었다.

문교부는 1973년 7월 16일, 입시제도 개선에 따른 1974학년도 고등학교 전형요강을 확정하여 각 시·도 교육위원회에 시달하였다. 이에 의하면 전형절차는 전·후기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전기전형교는 실업계 고등학교, 2부 고등학교, 고등전문학교 및 특수목적 고등학교, 후기전형교는 2부를 제외한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필답고사는 체육과를 제외한 중학교 3년의 전 과정의 교과학습 범위로 하되 학교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학생이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원리적인 기초학력을 측정할 수 있도록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체력검사는 체력장으로 대신하되 사전에 별도로 실시하고 성적은 선발고사 총점의 10%였다.

또한 동점자 처리는 교육감의 승인을 받아 학교장이 정하는 순위에 따라 사정하였다. 그리고 특기자 전형은 모집정원의 3% 범위 내에서 선발하였다. 그리고 군경유자녀의 전형은 각 시·도별로 실시하되 2부를 제외한 인문계 고등학교는 소정학군별로 학군별 배정인원을 균형있게 하기로 하였다.

1974년 이후 실시해 오던 고등학교의 연합고사는 1978년 9월에 다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자전형에서 큰 변혁 중의 하나는 바로 학군설정에 관한 문제였다. 즉, 1973년 2월 28일 문교부 발표대로 고등학교의 입시제도개혁에서 초점 중에 하나는 시·도별 연합고사 합격 후, 학군별 추첨으로 배정하는 방법이었다.

여기에서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의 예를 들면 공동학군과 일반학군으로 나누었는데, 공동학군은 도심 4㎞ 내외의 지역에 설정하고, 일반학군은 5개군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 학군설정은 통학거리에 따른 문제점이 제기되어 일반학군의 구역배정을 조정해서 계속 공동학군과 9개의 일반학군으로 세분해서 조정하였다.

1974년 초부터 시행된 현행 고등학교의 입시제도는 누적된 한국교육의 병폐를 시정하고 교육의 정상화를 저해하는 요인을 제거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세칭 일류고교에 대한 지나친 집념이 사라지게 되었고, 과열경쟁이 완화되어 중학교 교육내용의 정당화를 촉구함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다음의 여러 측면에서 문제점을 낳게 하고 있다.

㉠ 문교부가 전제로 한 고교 평준화를 위한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고교의 평준화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즉 각 학교간에 학생의 평준화는 이루어졌지만, 시설·설비 등이 다르기 때문에 학교간의 격차는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교의 평준화가 이름만의 평준화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 전기 고교와 후기 고교간의 학교차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기 고교의 경우 일부 실업학교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하는 데에 비해 대부분의 나머지 실업계 학교에는 학생의 적성과는 관계없이 인문계 학교인 후기 고교에 입학할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업계 전기 학교로 지원하는 예가 많다. 따라서 전기 고교간에도 실력의 격차가 크지만 전기 고교와 후기 고교간에도 그 격차는 크다.

㉢ 후기 고교의 경우 추첨 배정이기 때문에 학교선택의 자유가 축소되었다. 학생·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없으며 학교의 입장에서도 원하는 학생을 입학시킬 수 없어 학교의 특수성을 살릴 수가 없다. 특히 사립학교의 경우에는 자율성이 상실되기 때문에 중학교와 마찬가지로 사립학교의 준공립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 학교 내에서 개인 차가 심해서 교사가 학습지도에 곤란을 겪게 된다. 우수한 학생과 열등한 학생이 한 학급 내에서 수업을 받게되어 이들 모두가 학습의욕이 감소되고, 학생들의 생활지도에도 또한 문제점이 많다.

㉤ 학교군이 공동학군과 일관학군의 구역배정을 다소 조정하고 계속해서 소학군으로 구분·시정하고 있으나, 학생들의 통학거리에 따른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 종전과 마찬가지로 과외수업이 성행되어 학부모와 학생의 부담이 증가되고 있다. 학생, 학부모들은 이질집단 내에서의 학교수업을 불신하게 되므로 대학입학을 위한 입시준비교육을 미리 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함종규(咸宗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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