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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24 (수) 11:52
분 류 사전3
ㆍ조회: 1176      
[현대] 토지개혁 (한메)
토지개혁 土地改革 land reform

토지소유·토지이용 형태의 제도적 변혁.

특히 농업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방해하는 봉건적 제도의 일소(一掃)를 목표로 하는 변혁을 말한다. 개혁의 성격·결과는 계급적 힘의 관계나 주도적 계급 등에 의하여 바뀌어 왔다.

영국·프랑스 등 부르주아혁명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농민적인 토지개혁이 완수되고 봉건적 토지소유가 해체되었다. 반면 독일 등 부르주아혁명이 미약했던 나라에서는 봉건적 토지제도가 강하게 남아 토지개혁의 완성이 그 뒤에도 과제로서 남게 되었다.

생산력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속박관계에 이르자 토지개혁을 더욱 철저히 하여 자본주의적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생겼고 노동자와 근로농민이 민주주의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의 하나로서 그것을 수행하게 되었다.

[옛 소련의 토지개혁]

혁명 전 러시아는 지배계급 유지를 위하여 <위로 부터> 토지개혁을 행한 나라의 한 전형이었다. 크림전쟁 패배와 농민봉기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1861년의 농민개혁은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 분여지(分與地)는 모두 농촌공동체(mir)를 통해 분배되었으며, 지주들이 다량의 좋은 땅을 가지고 난 뒤 농민이 비싼 환매금(還買金)으로 사들여야 비로소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농민 채무 아래 <고역제(雇役制)>가 남아 있어 사실상 농노제가 형태를 바꾸어 유지된 것으로 세계적인 농업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농업위기가 진행되자 러시아는 1905∼1907년 혁명으로 다시 토지개혁을 추진해야 하였다.

그러나 1906년 스톨리핀개혁은 대토지 소유 지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차리즘(tsarizm:차리專制)의 사회적 기반으로서 부유층을 육성하려는 데 머물렀다. 1917년 2월혁명도 위기에 부딪친 지주의 토지소유를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구제하려 한 것이었다.

같은 해 10월혁명 때에야 비로소 철저한 개혁이 수행되어 제2차 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 채택된 <토지에 관한 포고>는 지주소유지와 황실·교회·수도원 등의 소유지를 부속건조물·농기구·가축과 함께 무상으로 즉시 몰수하고 사적 토지소유권을 영구히 폐지시켜 모든 토지를 국유화함과 동시에 근로농민의 토지용익권을 인정하고 몰수지 대부분을 균등용익원칙에 따라 재분할할 것을 결정하였다.

지주소유지 몰수와 토지 국유화는 모든 봉건적 제도를 없애고 절대지대를 폐지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철저히 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 밑에서 노동동맹을 강화하여 사회주의적 농업개조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미 <토지에 관한 포고>에서도 수준 높은 대농장은 몰수한 뒤 분할하지 않고 국영모범농장으로 하는 방침이 제시되었고, 농민의 각종 집단경영 조직화가 장려·지원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사회주의 농업경영은 한꺼번에 이룩될 수 없었고, 당시의 근로농민 대다수의 요구로 우선 몰수지의 균등재분할이 이루어지고 농민 자신이 체험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방향을 선택하도록 지원하는 방침이 취해졌다.

1918년 2월의 <토지사회화에 관한 포고> 중에는 균등토지용익의 실시가 규정되고 구체적 조건에 따른 각 지방별 토지용익 기준이 설정되었으며 집단농장에 유리한 용익권이 인정되어 집단경영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토지분할은 1917년 12월부터 18년 봄에 걸쳐 농민은 옛 대토지소유지 약 1억 9000만ha의 용익권을 획득하였고 연 7억 금(金)루불을 웃도는 지대·환매금 지불을 면제받게 되었다. 그러나 상당한 토지가 부농의 소유로 남았고 중농(中農)이 늘면서도 빈농의 경영곤란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빈농으로부터 균등분할비판이 제기된 것을 받아들여, 1919년 2월 <사회주의적 토지정리 및 사회주의농업으로의 이행 조치에 관한 규정>이 채택되었다.

[동유럽의 토지개혁]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서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승리로 근로농민을 위한 토지개혁과 농업혁명이 수행되었다. 예전 이들 나라에서는 지주가 대토지를 소유하고 영세농민이 경작하는 형태였으므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뒤얽힌 반(半)봉건적 착취를 제거하는 것이 농업생산력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혁명적 기운에 의해 촉진된 토지개혁(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 1919, 루마니아 1919∼21, 폴란드 1920∼25, 불가리아 1921, 헝가리 1922∼24)은 부분적인 것으로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불가리아에서는 농민적 토지소유가 우세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개혁 후 자본주의적 농업발전으로 봉건잔재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근본적인 토지개혁은 1944∼48년의 반제국주의·반파시즘·민주주의혁명 과정에서 <토지는 그것을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슬로건 아래 행하여졌다. 먼저 파시스트·전범(戰犯)·독일점령 협력자 등의 소유지가 무상 몰수되었고 다음 각 나라의 개혁법에 규정된 최고한도(20∼100ha) 이상의 토지가 대부분 유상(有償)으로 수용되었다.

토지국유는 일부의 대토지소유와 대삼림용지, 도로용지, 공업용지 등으로 한정되었다. 수용된 토지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유상(토지의 1∼2년분 수확에 상당하는 가격을 10∼20년에 지불한다)으로 근로농민에게 분배되었으나 나중에 농민부채말소로 무상화되었다.

분여되는 토지면적의 기준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평균 5ha 정도였으며, 불가리아 남(南)도브루자지방 8ha, 동독 열등지(劣等地) 10ha, 헝가리 8.5ha 등 구체적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 결과 지주 토지소유는 사라지고 중농화(中農化)가 진행되었으나 빈농 소경영의 어려움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관농(官農)계급에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전면적인 토지국유화는 행해지지 않았으나 동유럽 모든 나라에서 개인적 토지용익에 대한 일정한 제한을 두어 토지개혁으로 입수된 토지는 매매·분할·입질(入質) 등이 금지되었다.

이리하여 농민층 분해에 일정한 제동이 걸렸고 또한 근로농민의 이익옹호 시책도 취해져 농촌의 집단화운동이 장려되고 국영모범농장이 설립되었다. 48∼49년 인민민주주의혁명이 제 2 단계로 이행되자, 그러한 것을 토대로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로 가는 제1보를 내딛게 되었다.

[중국의 토지개혁]

중국의 토지개혁은 그 주체가 국민정부이냐 공산당정권이냐에 따라 성격이 전혀 다르다. 국민정부에 의한 것은 위로부터 이루어진 완만한 소작료 인하와 유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으로, 1929년 중국대륙의 저장성[浙江省], 이어서 푸젠[福建]·쓰촨[四川]·광시[廣西] 등 각 성에서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1951∼53년에 걸쳐 타이완[臺灣]에서 실시되어 성공하였다.

타이완에서는 제1 단계에서<375감조(減租)>라고 하는 최고 37.5%까지 소작료 제한을 단행하였고, 제2 단계에서는 공유지 불하(拂下), 제 3 단계에서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정책 아래 소작인에게 10년 20회 균등지불에 의한 지주소유지 매각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지주 10만 6049가구(지주 총가구수의 59.3%)의 소작지 13만 9247ha가 19만 4823가구(소작농의 64.1%)에게 매도되었다.

한편 공산당정권 아래에서는 해방투쟁기간 동안 각지의 근거지에서 <아래로부터의 무상분배>를 기본으로 한 농촌 내 사회·정치구조 전환을 목표로 폭력적인 농촌혁명이 전개되었다.

그 운동은 정치상황에 따라 좌우되어 일관되지는 않았지만 1947년 <중국토지법대강(中國土地法大綱)>과 50년 <중화인민공화국토지개혁법>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과 직후의 토지개혁 노선이 정해지고 중국대륙 전지역에서 토지개혁이 추진되었으며 1952년 완료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서 4666만ha의 토지가 3억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대륙에서의 토지개혁은 다음 단계로 추진되었다. 제1 단계는 상부에서 공작조(工作組)가 파견되어 각 마을에서 가난한 소작인들을 조직하였다. 제2 단계에서는 그들에게 계급구분을 하도록 하여 누가 지주로서 타도되어야 하며 누가 동료인가를 결정하였다. 제3 단계에 궐기한 빈농들이 지주·부농을 타도 또는 처형하고 그들의 토지·자산을 분배하였다.

따라서 운동이 과열되면 지나친 행동이 나타났으며, 공작조가 이를 조정하였다. 중국 본토에서 있었던 토지개혁은, 농촌과 농민을 배경으로 도시와 권력을 탈취하는 중국혁명에 있어 불가결한 과정이었고, 그 뒤 계속해서 일어난 농업집단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개발도상국의 토지개혁]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서는 제 2 차세계대전 후 민족독립운동 전개와 함께 토지개혁 실시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이들 나라는 경제적 후진성을 극복하고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확보하기 위하여 종래의 토지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농업생산관계는 복잡하고, 지주형 경영의 봉건적 관계, 농촌공동체 형태의 가부장적·씨족적 관계, 식민지적 토지소유와 플랜테이션경영에 바탕을 둔 관계 등이 서로 얽혀 나라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대체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봉건적·반봉건적 관계가 널리 지배하였고, 아프리카에서는 가부장적·씨족적 관계가 특색이었다. 특히 멕시코의 경우, 제 1 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 토지개혁법이 채택되어, 당시 멕시코를 식민통치했던 에스파냐에 의한 라티푼디움(latifundium;아시엔다제도)의 폐지가 시도되었으며, 그 토지는 매수되어 농민공동체에 인도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의 실시과정은 완만하였고, 더구나 1921년의 포고로 토지소유 확대가 인정되는 등 차츰 대토지소유에 유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밖에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1950~60년대의 끊임없는 사회적·정치적 불안으로 토지개혁이 필요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부르주아나 지주적 성격의 것이어서 여전히 라티푼디움의 대토지소유, 현물소작료를 지불하는 영세한 경영의 토지부족, 미국 독점자본에의 종속 등이 남아 있었다.

이와 달리 아시아나 북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근본적인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지주계급이 잔존하면서도 상당한 토지가 유상으로 수용되어 옛 소작인인 소규모 토지소유자로 바뀌어가고 있다.

인도에서는 1950~51년의 토지개혁법과, 1952~58년의 토지용익·소작관계로 59~61년에 봉건지주의 토지소유 제한이 실시되었으나 상층지주에게만 타격을 주는 데 그침에 따라 소작관계의 개혁에 한계가 드러났다. 이집트에서는 1952년과 61년의 법률에 의해 봉건적 대토지소유의 해체가 시도되어 매입에 의한 농민 토지분배, 소작제한, 외국인 소유지의 국유화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아시아·북아프리카의 토지개혁도 아직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네팔이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본질적으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도 있어 전체적으로 개발도상국의 토지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

한편 북한·베트남·라오스·쿠바 등도 사회주의정권 아래에서 토지개혁의 철저화가 시도되었으며, 또한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이룬 나라나 그러한 방향을 목표로 하는 나라도 있다. → 농지개혁

<강석승>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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