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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24 (수) 18:10
분 류 사전3
ㆍ조회: 1914      
[현대] 경제-광복 이후의 경제 (민족)
경제(한국자본주의의 전개)

세부항목

경제
경제(고대 한민족의 경제생활)
경제(중세봉건제하의 사회경제)
경제(근대산업사회로의 발돋움)
경제(개항 후 서구문화의 수용과 시련)
경제(한국자본주의의 전개)
경제(참고문헌)

[자유 민주 체제의 경제 건설]

한국 사회의 근대적 발전 과정에서 세번째의 전환기는 광복에서 시작되었다. 광복 후 우리 민족은 일제 지배에서 벗어나 서구제국과 직접 교류하게 됨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광복 후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전기는 미군정과 자유당집권(제1 공화국), 그리고 극히 짧은 기간의 민주당집권(제2 공화국)의 약 17년간이며, 그 후기는 5·16군사정변 후 공화당집권(제3·4 공화국)과 그뒤를 이은 제5 공화국의 25년간이 된다. 전기에 해당되는 기간 중 그 초기에는 미군정이 있었고 또 좌우의 사상적 대립이 심했으며, 6·25전쟁이라는 혼란과 격동을 겪었으나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해 국민경제건설을 시도한 시기였다고 하겠다.

후기에 해당하는 공화당집권 및 제5 공화국의 기간은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체제 안에서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성장이 모색되어온 시기였다. 광복 직후 한국이 처해 있던 내외정세는 민주국가건설에 결코 유리한 여건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과 북에 주둔하고 있어 국민이 바라는 통일정부가 바로 수립될 수 없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일제가 남기고 간 경제적 유산이 국민경제건설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과거에 한반도 내에 건설된 주요 산업은 대부분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에 의하여 건설된 것이었으며, 또 그러한 산업은 일본 내의 산업과 계열화되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남북한의 분단은 양지역간의 생산체계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광복 직후 남한에 잔존한 공장은 거의 모두 가동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며, 따라서 비축물자가 바닥이 난 때부터 국민의 일상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생산활동은 마비되고 따라서 생활필수품의 품귀현상이 심화되고 있을 때, 그것을 타개하는 긴급대책은 해외로부터 물자를 도입하는 일이었으나, 군정 초기에는 경제행정부서가 정비되지 못해 정상적인 무역의 길도 열리지 않았다. 이러한 실정하에서는 밀무역으로 속칭되는 무허가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무역의 가장 유리한 대상국은 일본이었다. 대일사무역은 주로 연안 어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국내에서 물자가 부족하고 품귀물자의 가격이 급등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소형발동선으로 일본을 내왕하며 교역을 했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중국 정크선(junk船)의 내항이다. 1945년 겨울부터 시작되어 1946년 봄 인천항에 들어온 정크선은 하루에 30∼40척에 달했다. 이러한 초기의 정크무역선은 톈진·다롄(大連)·칭다오(靑島) 등지의 군소상인들이 이끌고 왔으나, 1947년 이후 상해(上海) 등지에서 거상들이 진출하여 양국간의 물자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무역선은 과거의 정크선과 같은 소형선박이 아니고 2000t급 이상의 대형상선이었으며, 교역량도 격증하였다. 또, 상선의 출항지도 마카오 및 홍콩으로 바뀌었으며, 한국에서의 입항지도 인천항과 더불어 부산항에 대거 진출하였다. 이 마카오 및 홍콩무역에서 우리 나라 무역선도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우리 나라 무역업자는 이 때 처음으로 해외시장진출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 직후에는 남한과 북한과의 교역도 있었다. 남북한은 38선을 경계로 양분되어 주민의 내왕은 자유롭지 못했으나, 양지역간의 민간인의 물자교역은 6·25전쟁 직전까지 이루어졌다. 남북한의 교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1947∼1948년이며 이때 교역액은 17억 원에 달하였다. 당시 북한으로부터 남한으로 반입된 물자는 명태·비료·카바이드·시멘트 등이었고, 남한에서 북한으로 반출된 물자는 면직물·생고무·의약품 등이었다.

광복 직후에 남한의 경제생활난을 타개해 준 또 하나의 요인은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였다. 미군정 3년 동안 우리 나라는 미국으로부터 약 4억6034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받았으며, 이 원조는 점령지역구호계획(GARIOA) 자금에 의한 것으로서, 민생안정을 위한 긴급구호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따라서, 이 원조에 따라 도입된 물자는 식량·피복·직물 등 가계와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 전체금액의 49.2%였고, 그 다음이 농업용품으로 17. 7%로서 비교적 많은 금액이 책정되었다. 그 밖의 물자로는 석유 등의 연료와 철도·해운·자동차·통신용기재·의료약품·건축자재 등이 도입되었다.

미군정의 기본목표는 당면한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고, 국민경제건설이라는 긴 안목의 정책은 없었다. 미국이 점령지역의 산업시설을 재건하고 항구적인 민생안정을 기하는 것이 전후 세계경제질서를 회복하는 길이 된다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47년 경부터이며, 이에 따라 점령지역경제재건을 목적으로 경제조정법(ECA)이 제정된 것은 1948년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이 법에 의한 경제원조를 받게 된 것은 1949년 이후였다.

민생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국민경제건설의 개발정책은 정부수립 후에 시작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30일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연설에서 신정부의 경제건설은 국민 각 계층을 위한 정책이 될 것이라는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

즉, 정부는 농가경제의 자주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소작제도를 철폐하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을 할 것이라는 것과, 기업활동은 개인의 창의와 경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 그리고 근로자는 이익균점의 권리를 향유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책방향은 국민을 의식하고 국민의 여론을 반영하고 수립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직후에는 이 정책방향에 따라 국민경제건설이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정부수립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불과 2년 여의 단기간에 일부 산업 분야는 신속히 재건되어 광복 전의 생산수준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비교적 일찍 재건된 공업으로는 면방직공업을 들 수 있다. 면방직공업은 정부의 특별한 지원을 얻어서 시설을 복구, 개선하여 1950년 초 방적기 31만6572추(錘), 직포기 9,075기(機)가 모두 가동하게 되고, 새로이 시설을 확장함으로써 일제 말기의 생산수준을 능가할 수 있었다.
이 공업 분야는 광복 전부터 민족계자본의 진출이 활발하였던 것이어서, 타공업 분야에 비해 경험 있는 경영인·기술자 및 기능노동력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전력 부문에서는 남한은 전적으로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1948년 북한이 갑자기 단전하면서부터 남한의 전력사정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발전함(發電艦)을 도입하여 긴급한 사태에 대처하는 한편, 수력과 화력발전소를 건설함으로써 1948년 말 27만2825㎾의 전력을 개발할 수 있었다.

석탄생산의 경우 남한지역의 석탄자원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정부의 재정금융지원으로 개발사업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1946년 연간생산력이 22만7000여 톤에 불과하던 것이 1949년 말 113만 톤의 증산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의 광업 분야에서는 중석·흑연 등이 수출과 관련하여 괄목할 만한 생산성과를 올렸다. 중석은 1946년 겨우 376에 불과하였으나 1949년 말 1,405를 생산하게 되어 주요 수출품의 하나로 등장하였고, 흑연 역시 같은 기간중 204에서 1만5958으로 생산증대를 나타냈다.

6·25전쟁으로 인해 남한이 입은 경제적 피해는 생산시설 42%, 공장건물 46%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특히, 격심한 피해를 입은 공업 부문은 경인지방에 밀집해 있었던 섬유공업이었다. 6·25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생산시설의 파괴만이 아니었다. 전비조달을 위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켰다. 이 때문에 물가상승은 폭발적이었으며, 1947년을 기준으로 한 도매물가지수는 1950년 6월 348%, 1951년 말 2,294%, 1952년 4,721%, 1953년 말 5,446%로 치솟아올랐다.

이러한 경제적 여건하에서는 기업인의 관심은 장기적 생산활동보다는 단기간 내에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유통 부문에 집중되기 마련이었으며, 전시하의 모험을 수반하는 투기가 성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6·25전쟁은 생산시설 및 인적 자원의 파괴, 재정금융기능의 파탄, 불건전한 경제풍토의 조장이라는 악조건을 조성하여 경제건설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52년 휴전설이 대두되면서부터 전후복구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는 전재를 복구하고 나아가서는 경제부흥을 기하기 위해서는 빈약한 국내자원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외국원조를 적극 도입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다수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정부와의 협동하에 전쟁으로 입은 재해의 실태를 조사하고 재건계획을 수립하였다. 1952년 2월 한미간에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 해 12월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협정’이 이루어졌다.

1953∼1961년에 이르는 전후경제복구기간중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약 22억8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외국원조와 더불어 내자조달로서는 산업복구국채 및 산업금융채권 등을 발행하여 경제재건자금에 충당하였다. 이리하여 한국경제는 1954∼1960년에 이르는 기간중 연평균 4.7%의 성장률을 보였고, 특히 공업 부문에서는 12.2%의 높은 성장을 달성하였다. 그 결과 산업구조도 개선되어 제2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4년의 14.0%에서 1960년에는 20.5%로 상승하게 되었다. 휴전 후 비교적 급속한 발전을 이룬 공업으로는 역시 섬유공업 분야를 들 수 있다.

섬유공업은 종래의 면방직 및 모방직이 크게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일론 등 신제품의 생산시설도 도입, 건설되어 1957년 이미 국내수요를 자급할 수 있었다. 섬유공업 다음으로 활발한 건설이 이루어진 분야는 화학공업이었다. 충주비료·나주비료 등 대규모공장이 건설되었고, 시멘트공업도 삼척공장이 보수된 외에 문경에 신규대규모공장이 건설되었다.

제지공업에서는 새로운 시설이 도입됨으로써 신문용지 등 주요 지물의 국내수요를 자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고무공업은 종래의 고무신 중심의 생산에서 자동차타이어·고무호스 등 신종산업자재 생산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유리공업 부문에서는 1953년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밖에 합성수지·화학가성소다 및 일반화학공업약품 등 신규제품의 생산시설도 이 시기에 도입, 건설되었다.

그런 반면 1950년대 후반기에 이상비대(異常肥大)한 공업 분야로는 제분·제당업을 들 수 있다. 제분업은 1950년대 이래 급속한 발달을 보았으며, 7개 공장이 경합, 건설되어 1960년대 초에는 생산과잉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재공업 부문이 이 기간에 급속한 발전을 보인 반면, 제철·제강 및 기계공업 등 생산재공업 부문에서는 이렇다 할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제철업에서는 대한중공업에서의 아연광철판 및 철선 등의 생산과 삼화제철공장에서의 고로(高爐) 2기가 보수되어 가동이 시작되었다. 기계공업에서는 한국조선회사의 기존시설이 보수되고 상공부관하의 한국기계제작소가 가동됨으로써 각종 자동차부속품·원동기·자전거·방직기·각종 철선 및 공작기계 등 소규모기계공업이 건설, 가동될 정도였다.

이와 같이 휴전 후, 즉 1950년대 후반기의 한국경제는 이전에 비하여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이 시기에 건설된 한국의 공업화는 국민경제라는 시각으로 보아, 그 기틀이 건전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는 문제점도 많이 드러내고 있다. 즉, 소비재 위주의 공업건설의 치중과 기간산업 부문 건설의 경시, 그리고 원료의 90% 이상을 해외로부터의 도입에 의존함으로써 국내조달이 가능한 원자재의 개발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는 점 등이다.

휴전 후 경제재건에서 가장 발전이 뒤떨어진 산업 분야는 농업이었다. 공업 부문의 높은 성장에 비해 농업 부문의 성장률은 연 2.3%에 불과하였다. 정부는 1950년 3월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우리 나라 농촌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소작관계를 철폐한 바 있었으나, 불과 3개월 뒤 6·25전쟁이 일어나 국토의 3분의 2 이상이 초토화되면서 개혁의 효과는 무산되고 말았다.

농업부진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대량 도입한 데에 있었다. 정부는 1955년 5월 한미간에 ‘미잉여농산물도입협정’을 체결하였고, 이 협정에 따라 연평균 60만 톤의 양곡을 도입했다. 이 시기에 도입된 잉여농산물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미곡과 소맥이었으나 원면·우지(牛脂) 등도 다량으로 도입되었다. 이와 같은 다량의 양곡도입은 국내곡물가격의 하락을 초래하였고, 농업생산의 수지를 악화시켰다.

이와 같이 광복 후의 경제개발정책은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었으나,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미군정 3년간에는 민족항일 말기의 전시통제체제를 철폐하고 자유경제체제를 확립하였으며, 그러한 체제하에서 자유당집권 12년간 미국을 비롯한 우방으로부터 경제원조를 얻어 6·25전쟁중의 전재를 복구하고 국민경제건설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개발정책하에서의 경제성장과 국민생활]

5·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부가 내세운 통치의 기본방향은 정치 및 경제의 혁신을 단행한다는 데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구정권과 결탁하여 성장한 경제세력을 거세하고, 양심적인 경제인을 육성하여 한국경제건설을 맡게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부 및 그 뒤를 이은 공화당정부(제3 공화국)가 역점을 둔 정책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이었다.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주도하의 개발정책이 계획되었으며, 이 정책에서는 정부가 국민경제전반에 적극 개입, 간섭하여 계획된 성장목표를 달성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운영의 기본방침에 따라 공화당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실시하였다.

1962년부터 1981년에 이르는 4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1950년대의 경제재건정책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전환이 있었다.

첫째, 1950년대의 경제재건의 중점은 미약하나마 수입대체산업 건설에 두었으나, 1960년대 이후의 개발계획에서는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펴나간 것이다. 한국과 같은 협소한 지역과 국내의 빈약한 자원 및 시장으로는 공업화에 한계가 있으므로, 대외지향적인 개발전략을 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농업과 공업과의 균형을 이루는 건설보다는 공업 부문을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공업의 발전이 농업에 파급되도록 하고, 공업 부문 안에서도 특정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선정하여 지원, 육성함으로써 그 밖의 산업의 발전을 유도하는 불균형 성장전략을 펴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1960년대의 제1차 및 제2차 계획기간에는 경공업 부문이, 1970년대의 제3차 및 제4차 계획기간에는 중화학공업 부문이 전략산업이 되었다.

셋째, 1950년대에는 자유경제체제가 추구되어 경제건설은 민간주도형으로 이루어져왔으나, 1960년대 이후 개발전략에서는 정부가 적극 간여하는 정부주도형으로 산업건설을 추진시켜나갔다.

넷째, 1950년대의 경제재건은 미국으로부터의 무상경제원조를 주재원으로 하여 추진시켜왔으나, 1960년대 이후의 개발계획에서는 외자도입을 적극화하여 이를 주재원으로 하는 경제건설을 기도하였다.

미국의 경제원조정책이 1958년경부터 무상원조에서 차관정책으로 바뀐 데 대한 대응책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해외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전략산업을 건설하였고, 또 외자진출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와 더불어 1965년 오랫동안 현안이 되었던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룩하여 경제교류의 길을 터놓았다. 이와 같이, 정부는 외자도입을 주재원으로 하는 개발정책을 추진시킴으로써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에서는 막대한 액수의 차관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4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는 정부가 추구해 왔던 성장목표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성과가 있었다. 계획기간 동안의 국민총생산의 성장률은 연평균 9.3%라는 놀라운 성장세를 나타냈고, 수출신장률 또한 연평균 39.9%를 보였다.

1978년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41달러에 이르렀고, 수출은 1961년 5480만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1978년 151억4390만 달러로서 급격한 신장을 달성하였다. 수출의 신장은 이러한 물량증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출상품구성의 다양화, 수출대상지역의 다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출상품은 경제재건기였던 1950년대만 하더라도 고령토·중석 등 광석류와 한천·해태 등 해산물, 그 밖에 식품류가 대종을 이루었으나, 제1차 및 제2차 경제개발기간인 1960년 중반기에 와서는 의류·신발·합판 등 경공업제품이 점차 수출품으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전기·기계·동판·합성섬유제품 등이 유망수출상품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전략산업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옮겨짐에 따라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상품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8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수출상품구성을 보면 경공업제품이 전체의 53.6%, 중화학공업제품이 35.1%, 식료품 및 원료품이 2.9%, 기타 상품이 8.4%로서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이 점차 높은 비율로 증대하고 있다.

경제성장면에서는 계획기간중 제2차산업이 연평균 19.1%로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제3차 산업으로서 13.6%였다. 그러나 농업을 위주로 한 제1차 산업은 3%도 미치지 못했다. 이와 같이 경제개발계획 기간중 한국의 경제성장은 공업 부문의 성장이 주도해왔고, 공업화의 과정도 경공업 부문에서 점차 중화학공업 부문으로 이동했다.

정부의 수출주도형 공업화전략으로 산업구조도 점차 고도화하고 이를 통하여 확대재생산과 고용증대를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격한 성장은 그 과정에서 많은 취약점을 노정시켰다.

첫째, 수출제일주의적 정책은 수출기업에 과도한 지원을 계속하여 기업은 생산확대를 부차적 목적으로 하고, 오히려 정부의 제반지원특혜를 얻기 위한 수출이라는 풍토를 조장하였다.

둘째, 저임금정책에 기초를 둔 수출확대과정은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각 생산요소의 생산적 기여에 상응하는 대가의 지불이라는 배려가 제도적으로 무시된 채, 임금노동자 또는 농민 등과 같은 생산종사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한 결과가 되었다. 즉, 1960년대 이후 성장위주의 경제정책하에서는 소득재분배정책이 거의 실시되지 못했다.

셋째, 우리 나라의 농업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정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상태는 미군정과 자유당집권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경제개발계획에서는 우선 농업정책의 일대전환이 필요하였으나 그렇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산업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정부는 제1차 5개년계획에서부터 ‘농업생산력의 확대에 의한 농업소득의 증대’라든가, ‘식량의 자급’ 등을 목표로 세워왔으나, 이 목표달성을 위한 정책적 배려가 미흡하였다.

넷째, 외국자본의 비중이 너무 컸다.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이 추진됨에 따라 정부의 정책적 투자배분은 수출주도형 산업구조확립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며, 그 투자재원의 절대량은 해외 부문에서 도입된 것이었다.

다섯째, 1960년대 이후의 경제발달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체하였다. 중소기업이 제조업 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78년의 경우 사업체수 96.2%, 종업원수 47.4%인데 생산액에서는 32.7%에 불과하여 사업체수와 종업원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1978년의 경우 국민총여신에 대한 중소기업 대출률은 23.0%, 총정책금융 중 중소기업정책금융비율은 10.1%로서 극히 저조한 수준을 드러내어 중소기업자본의 부족현상을 보이고 있다. 즉, 중소기업정책금융비율이 10.1%에 불과하였다는 점은 중소기업이 정책적으로 소외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정부의 공업화정책이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와 같은 기술적인 취약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개발철학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공화당정부의 개발철학은 선성장 후분배(先成長後分配)에 있었다. 그러나 그 개발정책은 끊임없는 성장욕에 치우쳐 분배문제는 항상 뒤로 미뤄졌다.

1962년 이후 경제정책에서는 국민총생산은 크게 늘어났으나 국민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소외되었던 것이다. 즉, 재원의 분배에서부터 기회균등이 무시되고 소득의 분배 역시 형평을 이루지 못해 사회계층간의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게 되었다. 광복 이후 우리 국민이 원하던 것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대중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국민경제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국민경제에서는 그것이 이룩되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의 실태와 전망]

우리 경제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 1960년대와 1970년대의 20년 동안 고도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여러 문제점들이 일시에 드러났다. 특히, 양적인 경제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인풀레이션이 고질화되어 저축을 줄이며 국제수지를 적자로 만들고 생산성향상을 위한 노력을 소흘히 하도록 하는 등의 부작용을 위한 잠재력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물가안정과 국제수지의 개선을 위하여 긴축적인 재정·금융정잭을 집행하였다. 그 결과 GNP 대비 통합 재정수지 적자는 1976∼1982년의 연평균 3.1%부터 1983∼1986년의 기간중에는 1%로 대폭 축소되었고, 1987∼1988년에는 0.8%의 흑자로 바뀌었다. 총통화(M2)의 증가율도 1976∼1982년의 기간중에는 연평균 30%나 되었으나 1983∼1986년에는 15%로 반감되었다.

이처럼 강력한 안정화정책의 집행으로 1980∼1981년의 기간중 연평균 25% 이상에 이르렀던 물가상승률(소비자물가 기준)이 1983∼1997년 중에는 2.8%로 급속히 안정되었다. 물가안정성으로 임금상승률과 금리도 크게 떨어졌다.

제조업 실질임금의 상승률을 보면 1976∼1979년에는 연평균 18%를 넘었으나 1980∼1987년에는 4.7%로 크게 떨어져서 같은 기간중 노동생산성의 연평균 증가율인 6.7%보다 낮았다. 3년만기 회사채의 수익률로 표시되는 금리도 1980년에는 30%나 되었으나 1986∼1987년에는 12%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강력한 총수요억제정책으로 경제의 안정기반을 다진 한국경제는 1985년의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이후 전개된 저(低) 달러(즉, 円高), 저금리 및 저유가 등 이른바 3저현상의 도래로 높은 경제성장률과 큰 폭의 국제수지 흑자를 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 1988년에는 GNP의 성장률이 11.3%나 되었고 경상수지의 흑자도 145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 국제수지 흑자로 말미암아 해외 부분에 의한 총통화의 공급이 크게 늘어나 1988년에는 총통화의 증가율이 21.5%에 이름으로써 1980년대 전반기에는 안정기조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국제수지 흑자의 누적으로 선진국들의 원화절상 압력이 높아지자 1980년대 후반에는 원화가 큰 폭으로 절상되었다. 예로 1988년에는 원화가치가 달러에 비해 전년 연말 대비 15.8%나 절상되었다.

그 영향으로 수출의 증가율은 통관기준 1988년의 28.4%에서 1989년에는 2.8%로 급감하였다. 이와 더불어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임금상승률도 급속히 높아졌다. 한편, 1989년의 경제승장률은 수출의 급감 등으로 6.4% 수준으로 떨어 졌다. 정부는 1989년부터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초가수요 압력이 팽배하여서 1990∼1991년중 물가상승률은 9%대로 뛰었고, 경상수지도 큰 폭의 적자를 내게되었다.

이에 다시 1992년 이후 안정화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기에 이르렀고 그 영향으로 1992∼1993년중 성장률은 둔화되었으나 물가는 다시 안정되었다. 1980년대 이후 경제안정화를 위한 재정·금융정책 이외에 금융자율화·수입자유화 및 자본자유화 등 각종의 경제자유화정책도 추진되었다.
즉, 지난 20년 동안의 고도 성장기중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각종의 규제를 가한 것이 여러 부작용을 초래하였으므로 이제는 시장기구에 더 많이 의존하는 방향으로 경제자유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첫째, 금융자유화는 고도성장기 동안 정부 주도로 정책금융 위주의 신용할당을 하던 것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시중은행의 민영화, 정책금융의 축소, 금융규제의 완화 및 금리자유화 등이다. 금융이 산업정책의 시여(施與)로서 주로 산업지원금융의 성격을 가진 데서 벗어나 금융산업에 개방과 경쟁원리를 도입하여 그 효율성을 높이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각종 금융기관의 중소기업에 대한 의무대출비율의 상향조정 등의 실시로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1984∼1988년의 기간중에는 해외건설·해운·섬유·기계·목재업체 등에 대한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은행들이 인수기업에 원금탕감, 이자유예 및 감면, 장기저리의 신규대출 등 대규모의 산업합리화자금을 지원하게 되자 금융자율화는 크게 퇴색하였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에야 금융자율화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금융시장의 개방도 시작되어 외국의 은행·보험·증권회사의 국내 진출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1993년 8월에는 금융거래의 실명사용을 의무화하는 금융실명제가 도입됨으로써 획기적인 제도개선이 일어났다. 특히, 1996년부터는 금융소득이 4천만 원 이상인 경우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가 부과되었다.

둘째, 국내산업의 과보호를 시정하고, 국내경쟁에의 노출로 국내기업의 기술개발 및 품질개선 노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예시제를 사용하여 국제경쟁력이 있는 품목부터 단계적·점진적으로 수입자유화가 1980년대 이후 추진되었다. 특히, 1986년 이후 국제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그 폭이 커짐에 따라서 1989년에는 한국이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1조 국으로 이행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수입자유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1983년의 수입자유화는 80%이었으나 1994년에는 99%로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평균 관세율도 1983년의 24%에서 1994년에는 8%로 크게 떨어졌다. 또한, 비관세장벽도 1980년대 후반 대미무역 흑자의 확대로 한미간 통상마찰이 심화되자 1989년부터 철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입자유화조치로는 공산품에 한정되었고 농산품은 지극히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비로소 1995년에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농산품에 대해서도 비관세장벽을 철폐하고 예외없는 관세화가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우리의 쌀 시장도 개방되었다.

셋째, 자본자유화도 추진되었다. 먼저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제조업 부분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가 전면 허용되어 개방이 완료되었다. 그 뒤에는 서비스 부분의 외국인 직접투자 허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조치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직접투자가 한국경제에서 점유하는 비중은 지극히 미미하였다. 외국인 직접투자와 더불어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의 개방도 시도되었다.
1981년에는 국내 투신사에게 외국인 전용수익증권의 발행을 허용함으로써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외국인 증권투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외국인 전용투자 펀드인 코리아 펀드(Korea Fund)가 설립되기도 하였으며, 1985년에는 국내기업의 해외전환사채(CD) 발행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통털어서 금융·자본시장의 개방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엄격한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국제수지가 적자였던 1980년대 전반기에는 상업차관과 뱅크 론(Bank Loan)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자금융통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예를 들어 기업은 상업차관을 자본재와 원자재의 수입을 위해서만 도입할 수 있었다. 금융기관도 도입된 뱅크 론을 기업에게 외화표시대출로만 운용할 수가 있었다. 국제수지가 흑자인 1980년대 후반기에는 민간기업의 상업차관이나 금융기관의 뱅크 론 도입이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1992년에는 국내 주식시장에 외국인들이 직접투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본자유화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특히, 1993년 이후 미국 등 선진국의 압력으로 금융·자본시장의 개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입을 위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해외에서 급속도로 차입을 늘렸다. 1994∼1996년의 기간중 순(純) 외자도입은 무려 523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그 대부분이 상환기간이 1년 미만인 단기 차입이었다.

1997년 중반에 이르면 민간 부분의 단기차입이 외한보유고를 훨씬 초과하게 되었다. 그 해 10월 홍콩의 증권시장이 폭락하면서 전염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외국투자가들에게 한국경제가 취약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신뢰도의 상실을 가져와 갑자기 외자가 유출되면서 한국경제는 외환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지난 1980년대, 정부가 자본이동을 엄격하게 규제하였을 때는 갑작스런 단기 자본의 이동으로 인한 국내경제의 교란요인을 차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93년 이후 금융·자본시장을 자유화하고 개방하면서 일방적으로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만 풀고 금융기관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사려깊은 규제와 감독을 하지 않은 것이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었다.

1980년대 이후 안정기조의 정착을 위한 재정·금융정책과 각종의 경제자유화정책을 추진하는 이외에 산업구조조정정책도 실시하였다. 먼저 1970년대 중반 이후 강력하게 추진된 중화학공업화는 중복·과잉투자를 초래했는데 이를 시정하기 위해 투자조정을 단행하였다. 주요 내용을 보면 한전의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업체가 참여한 발전설비 부분을 한국중공업으로 일원화하였다. 또한, 자동차산업의 경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에 위해 차종별로 전문생산체제를 구축하였다.

디절·엔진·중전(重電)기기·전자교환기 및 동(銅)제련의 경우에도 투자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투자조정 조치는 중복·과잉 투자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경제합리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흡수·합병으로 경제력집중이 늘어나고, 독과점적 시장구조가 심화되는 문제점도 있었다.

산업지원정책도 종전의 특정한 전략산업에 대한 개별적인 세제·금융면의 지원에서 탈피하여 불특정 다수기업의 인력개발·기술혁신·에너지절약 등을 촉진하기 위한 지원처럼 간접적·기능적인 지원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에는 종래의 7개 특정산업(기계·전자·섬유·철강·비철금속·석유화학·조선 등)을 위한 산업별 지원법을 〈공업발전법〉으로 단일화하였다. 정부는 또한 중화학 투자조정 이후 산업합리화 조치를 실행하였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에 해운, 해외건설의 합리화가 단행되었는데 부실회사의 통폐합, 비업무용 부동산의 처분, 설비 감축 등이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각종의 조세·금융 지원이 주어졌다. 아울러 78개 부실기업의 정리도 추진되었다.

이 때에도 금융·세제면의 각종 지원이 뒤따랐다. 〈공업발전법〉의 제정 이후에는 합리화 대상업종을 지정하여 신규 진입의 제한, 금융지원 등을 합리화지정업종에 대해 실시하였다. 1980년대 이후 추진된 산업합리화정책은 주로 불황산업이나 부실기업의 회생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시장기구의 산업구조조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한, 부실기업의 정리에 있어서도 과도한 보호와 특혜, 각종 지원 등으로 기업 스스로의 자구 노력보다는 정부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부실기업을 재벌이 인수한 것도 경제력을 집중시켰다. 1980년대 이후에는 또한 농업 부분의 구조조정도 이루어졌다. 먼저 농업정책의 기조가 종래의 주곡 자급에서 농가소득 증대로 전환되었다. 또한 고미가정책이 수정되었으며, 농산품의 수입자유화도 시작되었다.

농가소득의 증대를 위해서는 농촌공업의 육성을 통한 농외소득 증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를 위해 1984년부터 농공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나 여기에 입주한 대부분의 업체들이 경영난에 봉착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탈농을 억제하기 위한 농어민후계자 육성도 실효를 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쌀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축소, 수입자유화 및 소 값 파동으로 농가 수지는 크게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부채도 급증하게 되었다. 정부는 1980년대 후반 농어가 부채경감조치를 잇따라 단행하였으나 이는 대응요법에 불리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으로 농산품의 시장개방 압력이 증대되는 등 농업구조 조정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1990년에는 영농규모의 확대를 위한 〈농어촌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농지소유의 상한제를 완화하고 임대차의 허용을 추진하였다. 이어서 1994년에는 〈농지법〉을 만들어 농지소유의 상한제를 철폐하였고 농지의 거래 이용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였다.

또한, 1992∼2001년의 10년 동안 모두 42조 원을 농업 부분에 투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농어촌구조 개선대책도 발표하였다. 이는 농축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농정의 주된 목표로 삼는 것으로서 개방화시대에 처하여 바람직한 방향설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곡물의 자급률이 지난 1965년의 94%에서 1996년 말 현재에는 30% 수준도 못미치고 있는 현실을 상기 할 때 정확한 규모의 농업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자국의 농업보호정책을 견지하고 있음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0년에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즉,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였다. 지난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는 독과점적인 시장구조를 초래하여 경쟁적인 시장환경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공정거래법은 바로 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금지, 경쟁제한적 기업결합의 제한, 공동행위와 불공정거래행위의 금지 등이다. 또한, 1986년에는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여 재벌의 경제력집중을 실질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장치인 지주회사의 설립금지, 계열사간 상호출자의 금지, 출자총액의 제한 등을 추가로 도입하였다.

아울러 재벌에 대한 편중여신의 억제도 별도의 예산관리제도를 이용하여 실천에 옮겨졌다. 1992년 다시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여 재벌계열사간 상호채무보증을 규제하였다. 아울러 주력업체제도도 도입하였다. 1994년에는 업종전문화를 유도하기 위해 주력업체 대신 2∼3개의 주력업종을 선정하여 여신관리를 완료하기도 하였다. 공정거래법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공산품시장의 경우 지난 1990년 현재 독가점형 시장의 비중은 64%로서 선진국에 비해 매우 높다.

또한 30대 재벌 또한 대규모기업집단의 부가가치가 광공업 부분의 총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85년에는 33.1%이었으나 1992년에는 31.6%로서 다소 떨어졌으나 아직도 높은 편이다. 또한, 우리 나라 GNP의 약 5분의 1이 30대 재벌에 의하여 생산되고 있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1980년대 이후에는 경제안정화를 위한 재정·금융 정책의 실시, 각종의 경제자유화정잭의 추진, 산업구조 조정정책의 실시 및 공정거래법의 제정 등을 추진하였다. 그 방향은 경제의 안정기조 아래서 정부의 개입을 줄이며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산업합리화를 이룩하여 시장개방과 경쟁요소를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국경제의 발전단계가 진보함에 따라 이러한 방향전환은 바람직한 것이다.

지난 1962년 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뒤 1997년 11월 외환 위기를 맞기까지 한국경제는 급속한 고도성장과 괄목할만한 구조적인 전환 및 형평의 증진을 동시에 달성한 성공사례의 하나였다. 동아시아의 기적을 이룬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선두주자에 속하였다. 1995년에는 경상가격 기준 1인당 GNP가 1만 달러를 넘어섰다. 또한, 1995년 현재 GNP규모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하였다. 같은 해 교역량은 세계 12위이며 1인당 GNP도 32위에 이르렀다.

19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였다. 지난 35년 동안의 급속한 선진국 따라잡기 과정에서 실수와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성장만을 추구하다 보니 물가안정을 소흘히 하였으며, 공업화에 역점을 두어 농업 부문이 개방화시대에 구조적으로 취약하였다. 조립·가공공업과 부품·소재공업이 균형적인 성장을 하지 못해 기계류와 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성장을 못하였다.

사치적이고 낭비적인 서비스 부분이 과잉 팽창했으며 기술력이 아직도 크게 뒤떨어져 있고 수도권에 경제활동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으며, 생활의 질이 크게 훼손된 것 등이 몇 가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부작용 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도성장을 이룩한 데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후진국들 가운데 동아시아의 극소수 국가들 만이 경제성장에 성공했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

한국이 성공한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근면·절약을 중시하는 정통적인 동양의 유교사상에 의해 지배되는 교육수준이 강하고 풍부한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밖에 우리의 여건에 맞는 수출촉진을 위주로 하는 대외지향적인 경제발전전략을 채택한 것도 성공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턱에서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금융의 세계화가 몰라볼 정도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동남아의 위기는 한국으로 급속히 전염되었다. 이는 현재의 국제금융제도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취약점이다. 설령 어떤 나라의 경제적인 기초가 건실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위기는 흡사 가축 떼 처럼 움직이는 외국 투자자들의 행태로 말미암아 건실한 나라로부터 급작스런 자본유출을 초래할 수 있고, 이는 그 나라를 위기에 빠뜨려 수많은 무고한 선량한시민들에게 실직·도산·소득감소·물가상승 등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다.

이러한 전염효가가 외환 위기를 초래한 대외 요인이라면 고비용·저효율 체제의 장기간 방치는 외환 위기의 내부요인이다. 특히, 지난 1987년의 민주화 이후는 10년 동안 임금·금리·물류비용 및 토지가격이 높아 고비용이 체질화된 반면에 정치·정부·기업 및 사회일반에 저효율은 만연하였다. 그 결과 국제경쟁력은 실추되었고 무역 수지적자는 쌓여갔으며 외채는 누적되어 외환보유고도 지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나머지 세 호랑이들이 전염효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훨씬 덜 타격을 입은 이유는 바로 충분한 외환보유고의 축적에 힘입은 바 크다. 고비용·저효율이 문제임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으나 이를 바로잡지 못한 이유는 엄청난 고통과 저항이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제 때에 스스로 고비용·저효율 체제를 개혁하지 못함으로써 외환위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IMF는 거시적인 경제안정화정책 이외에 금융·기업·노동 부분에 대한 강도높은 미시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하게 된다. 대부분의 개혁안은 원래 우리가 실행하였고 했던 것들이 반대와 저항에 부딪쳐서 유보되었던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1년여 동안 상당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금융 부분에서는 부실 금융기관의 폐쇄, 금융기관간의 인수·합병, 제일·서울은행의 해외매각, 부실채권의 정리, 건전 금융기관의 증자, 고용조정 등이 실천에 옮겨졌다. 이를 위해 64조 원의 재정지원이 집행되었다.

한편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었다. 재벌개혁에서는 부실기업의 정리, 생존가능한 대기업의 검정, 투명성의 확보를 위한 결합재무제표의 작성, 상호채무보증의 금지, 부채 자본비율의 축소, 소액주주의 권한 강화, 책임경영체제의 확립,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 합병(M&A)의 허용, 책임역량을 지닌 분야에의 집중 등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지난 35년의 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으로서 평상시에는 실천에 옮기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외환 위기 이후 1년이 지나면서 외환율·금리·주가지수가 나타내듯이 금융시장은 급속도로 안정을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입은 타격의 강도에 비추어 완전한 회복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정창영(鄭昌泳)>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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