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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3 (목) 17:00
분 류 사전3
ㆍ조회: 600      
[근대] 조선사편수회 (민족)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게 된 일제(日帝)가 그들의 어용목적(御用目的)으로 한국사를 연구 편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부설기관으로 1925년에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

한반도를 무력 강점한 일제는 초대 데라우치(寺內正毅)총독 때부터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역사적 자료의 수집 조사를 위해 취조국(取調局)을 두고 학자들을 고용해 구관제도조사사업(舊慣制度調査事業)과 고적(古蹟)조사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뒤 1915년 구관조사사업을 중추원(中樞院)으로 이관하고 따로 일본의 식민지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한국사로의 역사 편찬을 위해 중추원에 편찬과(編纂課)를 신설하고 ≪조선반도사 朝鮮半島史≫의 편수 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방대한 작업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시일을 끄는 가운데 1919년 3·1독립운동을 맞았다. 민족적 자각과 역사적 각성에 터전한 거족적 저항에 놀란 일제는 이를 계기로 정치적인 유화정책(柔和政策)을 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역사의식을 깨우쳐 한 민족의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온상의 역할을 하는 한민족사를 민족혼을 뺀 빈 껍질의 역사로 꾸미기 위하여 ≪조선사 朝鮮史≫ 편수를 서둘게 되었다.

이 목적에서 중추원의 조선사 편찬, 사무를 조선총독부의 직할사업으로 추진시키기 위해 1923년 12월에 조선총독부 훈령(訓令) 제64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朝鮮史編纂委員會規程)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관계 관료와 일본의 어용사학자 그리고 일부 우리 사학자를 간선해 고문과 위원으로 임명해 조선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조선사편수회는 다음해부터 수차에 걸쳐 위원회를 열어 한국인의 사서(史書)에 대한 ‘절멸책을 강구하는 것은 수고는 많으나 효과가 적은 일일뿐더러 반대로 혹 전과를 격려할는지 모른다. 차라리 구사(舊史)의 금압에 대(代)하기를 공명 명확한 사서(史書)로 함이 지름길이고 효과는 더욱 뚜렷함과 같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독립의 관청을 설치하고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한 ≪조선사≫ 편수를 담당케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1925년 6월에 칙령(勅令)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를 공포하고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켰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을 회장으로 하고 일본과 한국학자를 수사관(修史官)·수사관보(修史官補)로 임명하고 조선사 편수 실무를 담당케 하였다.

≪조선사≫편수를 10개년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그 기초 작업으로 사료(史料) 수집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일본·한반도·만주 각지에서 기록·고문서·사적(史籍)문집·영정(影幀)·고지도·탁본(拓本) 등을 광범위하게 구입하고 지방사 자료와 개인 소장의 사료는 차용 등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집하였다.

그리고 한편 조선과 관계 깊은 쓰시마도주(對馬島主)의 고문서 자료를 구입하였다(고문서류 61,469枚, 고기록류 3,576책, 고지도 34매, 고서화 18권과 53매). 사료가 점차 수집됨에 1927년 6월에 편수 실무를 다음과 같이 분담케 하였다.

사료 수집·사무-채방부(採訪部, 수사관 洪憙)·정비부(整備部, 촉탁 中村榮孝), 사료 편찬사무-사적정본(史籍定本-촉탁 今西龍)·사적해제(史籍解題-수사관보 高橋琢二), 직관표(職官表-수사관 洪憙), 조선사 편찬-제1편찬부에서 제6편찬부까지 6부로 나누고 각기 2명씩 담당편수관을 배치하였다(촉탁 今西龍, 수사관보 李丙燾, 촉탁 中村榮孝, 수사관 稻葉岩吉, 수사관보 鶴見立吉, 수사관보 高橋琢二, 촉탁 瀨野馬熊).

편수관은 그뒤 사정에 의해 이동이 있었다(申奭鎬, 荻原秀雄, 趙漢稷, 園田庸次郞, 田保橋潔 具瓚書, 田川孝三, 周藤吉之, 丸龜令作, 黑田省三, 石原俊雄, 松岡巖 등이 후에 참여했다.).

1938년 마침내 전 37책으로 된 ≪조선사≫가 편찬 간행되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인 위원과 한국인 위원 사이에는 고조선 문제나 민족성 배제 문제를 가지고 상당한 논쟁도 있었으나 결국은 조선총독부 의도대로 편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사의 편간 이후 관변사료(官邊史料)의 열람을 극도로 봉쇄하니 연구자들은 ≪조선사≫를 자료로 이용할 수밖에 없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충분히 일본측에 의한 한국사 왜곡이 주효했다고 할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 편수를 위해 수집한 사료 가운데 20종을 택해 ≪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3책으로 된 귀중 기록·고문서·사적·필적·화상 등은 콜로타이프 판으로 ≪조선사료집진 朝鮮史料集眞≫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해산의 운명을 맞았다.

≪참고문헌≫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朝鮮總督府朝鮮史編修會, 1938), 日本 韓國에 있어서의 韓國史敍述(金容燮, 歷史學報 31).

<이원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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