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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18 (화) 14:52
분 류 사전3
ㆍ조회: 552      
[근대] 영화 (브리)
영화 映畵 motion picture

세부항목

영화
영화의 종류
영화예술
한국의 영화

연결된 일련의 필름을 연속적으로 영사해 재현시킨 움직이는 영상 및 그 기술.

지금은 영상에 음향을 포함시킨 뜻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카메라와 마이크로폰이 창출하는 현실의 신비와 영상 및 음성의 몽타주에 의해 독자적인 영화 예술이 탄생했는데, 즉 과학과 예술의 결합이다. 영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유력한 수단인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오락의 주체가 되어 막대한 제작비와 흥행상의 요청으로 산업화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발달과 보급은 영화의 존재 형태에 큰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

1894년 4월 14일 영화는 어느 발명가의 이론과학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그것이다. 이것은 1명씩 동전을 넣고 보는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약 15초 동안 실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사람과 물체의 필름을 구경할 수 있었다. 1895년말에 런던·파리·뉴욕에서 각종 영사기가 완성되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 루이· 오귀스트)는 파리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했다. 이것이 현재와 같은 형식의 최초의 영화였다.

곧이어 에디슨이 발명한 비타스코프가 1896년 4월 23일 뉴욕에서 공개되었다. 그해에는 미국 및 각국에서 여러 가지 영사기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흑백의 그림자로써 살아 있는 움직임을 재현시켜 보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대하여 갑자기 높아진 대중의 강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거의 75년에 걸친 국제적 규모의 연구·실험·발명의 성과가 축적된 것이었다. 운동중인 물체의 광학적 특징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영국의 피터 마크 로제로부터 시작되어 존 허셀, 마이클 패어리 등에게 영향을 주어 여러 가지 실험·연구를 촉진했다.

유럽에서는, 벨기에의 조제프 앙투안 플라토, 오스트리아의 지몬 리터 폰 슈탐퍼 등이 운동의 위상을 나타내는 일련의 그림을 보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1853년 오스트리아의 폰 우하티우스는 원반과 환동의 그림을 결합해서 스크린 위에 애니메이션을 영사했다. 플라토와 슈탐퍼의 연구는 조이트로프의 발명에 공헌했다.

이것은 회전하는 원통 틈새로 들여다보면 속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이다. 에밀 레노가 발명한 같은 원리에 의한 프락시노스코프는 더욱 정교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이 기계를 개량했고, 1892년에는 파리에서 테아트르 옵티크('시각 극장')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다.

이것은 운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수백 개의 그림을 연결해 15~20분 길이로 편집한 이야기 필름이었다. 1900년까지 레노는 이러한 움직이는 그림을 공개했는데, 진짜 영화와의 경쟁에는 이기지 못하고 흥행을 중지했다.

사진

영국에서 로제가 시각적 성질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실용적인 사진기술의 연구가 진전되고 있었다. 1822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조잡하지만 연속성 있는 사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루이 다게르의 협력을 얻어, 1839년에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라고 불리는 실용적인 사진술을 개발했다.

또 그해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벗은 근대 사진술의 기초가 된 네거와 포지티브에 의한 인화법을 개발했다. 1860년 미국의 콜먼 셀러스는 처음으로 사진을 조이트로프의 원리와 결합시키는 데 성공, 이듬해 키네마토스코프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따냈다.

이 방법을 응용하여 1870년에 헨리 레노 헤일은 파즈마트로프의 영사를 1,600명의 관객에게 공개했다. 1872년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는 기사 존 D. 아이잭스와 공동으로 셔터가 장착된 12대(후에 24대)의 카메라로 이루어진 1벌의 장치를 고안하여 질주하는 말의 움직임을 분석한 사진을 찍었다. 그후 셔터 장치가 개량되어, 1877년에는 동작이 빠른 피사체도 촬영할 수 있게 되어 노광(露光) 속도 1/2,000초라는 단시간에까지 이르렀다.

영화 발전상의 다음 단계는 고속의 속사 사진이 가능한 단일 카메라의 개발이었다 (→ 색인 : 모션 픽쳐 카메라). 프랑스의 에티엔 쥘 마레가 1882년에 발명한 ' 사진총'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성공한 최초의 것이었다. 사진총이란 라이플 총 모양으로 윤동(輪胴)에 인화지판을 끼우고 방아쇠를 당겨 연속적으로 노출시키는 장치였다. 그후 10년간 그는 조수 조르주 도메니노와 함께 일련의 실용 카메라의 개발을 계속하여, 1888년 크로노포토그래프를 발명, 이에 의해 매초 60매의 사진 촬영이 가능해졌다.

1885~95년 10년 동안에 전세계의 발명가들은 사진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일에 주의를 돌렸다. 영국의 윌리엄 프리스 그린을 비롯한 몇 사람은 1890년을 전후해 촬영기·영사기 등의 특허를 땄지만, 상업적 성공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에디슨은 조수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과 함께 띠 모양의 사진 필름 등의 실험 고안에 힘썼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딕슨은 조지 이스트먼이 1889년에 제조하기 시작했던 질화면(窒化綿)을 기초로 한 사진용 필름을 채용하여 1890년에 키네토그래프를 개발했다. 그후 에디슨이 그것을 다시 키네토스코프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대체로 높이 122cm, 너비 61cm 크기의 기계로 필름은 내부의 확대경과 광원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회전 셔터에 의해 화면이 순간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필름의 길이는 50피트가 한도이고, 화상은 매초 48컷의 속도로 들여다보이는 구멍의 앞을 지나가는데, 1회 상영 시간은 13초가량이었다 (→ 색인 : 프레임). 화면수는 뒤에 매초 16컷으로 줄었지만 이것이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이 되었다( 토키의 경우는 매초 24컷).

필름의 너비(35㎜)나 화면의 형상, 필름을 보내는 스프로킷(필름 구멍과 맞물려 필름을 움직이게 하는 원형의 톱니바퀴) 등도 대형 화면이나 대형 필름이 출현하는 1952년까지는 표준이었다. 키네토스코프는 실험실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1894년 4월 14일 처음으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그것을 공개하는 축음기관이 개관했다. 가을에는 몇 대가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윽고 유럽에서도 영화는 최종 발전단계를 맞이 했다. 에디슨의 발명이 계기가 되어 영국에서는 로버트 W. 폴이 포터블 카메라를 고안했고, 독일에서는 스크라다노프스키 형제가 비오스코프를 개발했다. 프랑스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레노의 테아트르 옵티크의 투영화상을 결합시켜서 그것을 영사하는 시네마토그래프를 고안하여 1895년 2월 13일 특허를 받았다(→ 색인 : 오귀스트 뤼미에르 , 루이 뤼미에르).

이것은 카메라·영사기·인화기를 일괄한 것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는 1895년 12월 28일 그랑 카페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의 탄생이었다. 이것은 즉시 유럽으로 퍼졌고, 이듬해에는 미국에까지 침투하여 에디슨의 경쟁 상대가 되자 에디슨 자신도 다른 발명가에 대한 대항 때문에 키네토스코프 영사기의 개발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드빌 레섬, W.K.L. 딕슨, 잔 릴로이, 유진 로스트 등도 각기 독자적인 카메라와 영사기를 발표했고, 1895년 토머스 아멧이 현대 영사기의 원리를 고안했다. 이것은 연속되는 영상을 정지시키고, 그동안은 영상이 움직이고 있을 때보다도 많은 광선을 받을 수 있는 몰타 십자형의 화면전송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다 필름에 구멍을 내어 필름이 영사기 속을 통과할 때의 부담을 경감시켰다는 점에서 에디슨이나 뤼미에르의 영사기와는 달랐다 (→ 색인 : 아멧 루프). 이것이 후에 비타스코프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6년 에디슨의 영사기로 공개된 것은 이 아멧의 기계장치이다.

초기 영화는 미국·유럽 모두 50피트의 필름을 사용했고, 상영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었다. 모든 발명에 전기의 응용을 생각하고 있었던 에디슨은 거의 피아노만한 전지로 움직이는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를 제작했고, 이것을 수용하기 위해 '죄수 호송차'라고 일컬어졌던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이것은 타르 칠을 한 종이를 바른 조그마한 스튜디오로, 거기에서 연예·서커스 같은 구경거리와 뉴욕의 인기있는 연극 따위가 상연되었다. 한편 유럽인은 비교적 가볍고 기동성있는 수동식 카메라에 만족했으며 어디로든 가볍게 떠나 무엇이든지 촬영했다. 따라서 초기 영화는 행진이나 열차의 도착, 도시의 군중 등 현장감이 강조되었다 (→ 색인 : 기록영화). 이 특징은 영화의 특성과도 잘 어울려서 에디슨도 그뒤를 따랐다.

연예장의 구경거리의 하나로 등장한 영화는 영사기의 능력에 맞추어 필름의 길이는 1,000피트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연예나 구경거리 1편의 상연시간과 같았으며, 이 길이가 현재 1권(305m)의 기준이 되었다 (→ 색인 : 릴).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단순한 움직임의 신기함만으로는 싫증을 내게 되었기 때문에 제작자는 보다 야심적이고 이색적인 소재를 찾게 되었다.

최초로 이야기를 가진 영화(스토리 영화)가 상영된 것은 1897년 호라만이 전문 배우와 본격적인 세트를 사용하여 제작한 3권짜리 수난극일 것이다. 파리에서는 조르주 멜리에스가 카메라 트릭을 주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환상적인 상상력을 구사하여 도처에서 인기를 얻었다.

영국에서는 1900년 직후 이른바 '브라이튼파'의 활약이 활발해져 즉각 창조적인 영화 제작에 진출했다. 그러나 스토리 영화의 진정한 탄생은 1903년 에디슨 회사의 에드윈 S. 포터가 감독한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로 시작된다.

고작 8분 정도의 1권짜리였지만, 거기에는 현대의 편집기술의 싹이 보였고, 그 급속한 인기상승에 의해 여기에 니클오디언(5센트 극장)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대열차강도〉는 영화의 예술·산업의 2분야에 있어서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소리

영화 초기부터 발명가는 영사에 소리를 접합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디슨은 처음부터 카메라는 축음기를 위해 제작한 부수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레온 고몽이 1900년 이전에 콩스탕 코크랑이나 사라 베르나르 등의 명배우가 출연하는 단편 토키 영화 연작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영상에 축음기의 음성을 일치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이것은 많은 발명가들이 생각했던 바였는데, 에디슨도 1권짜리 토키를 몇 편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로스트가 필름에 직접 녹음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내고 전시했다.

1912년경 영화 흥행은 니클오디언의 단계를 끝냈다. 극장이 커짐에 따라 토키 영화는 소리의 증폭 문제에 직면했다. 그러나 로스트의 기계나 초기의 축음기로는 홀 구석구석까지 퍼질 만한 충분한 음량을 낼 수는 없었다. 이 결함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리 디 포리스트가 개발한 셀레늄 진공관을 사용한 오디오 증폭기에 의해 해결되었다 (→ 색인 : 진공관 검파기).

제1차 세계대전 후 필름에 소리를 옮기는 방법이 개발된 데서부터 문제는 해결되었고, 거기에서 뒷날의 폭스 무비턴이 생겨났다 (→ 색인 : 포노필름). 한편 바이타폰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인 〈돈 주앙 Don Juan〉이 1926년에 워너브러더스사에 의해 발표되었고, 이듬해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에 의해 영화계는 일약 토키 시대로 돌입, 얼마 후 디스크식 음향장치는 필름식 음향장치로 대체되었다.

1930~52년은 기술혁신시대로 일컬어지지만 영화의 음성기술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1952년 시네라마의 등장은 스피커를 스크린 뒤로부터 해방시켰고, 해저드 리브스가 개발한 7채널 방식에 의해 보다 충실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1953년에 등장한 시네마스코프에는 경제적 이유로 퍼스펙트 A. 사운드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색채

채색되어 움직이는 화상에 대한 탐구도 영화시대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20세기초까지는 필름의 화면마다 손으로 채색을 했는데, 프랑스의 파테사는 1905~30년경 반자동으로 인쇄해넣는 방식(형치법 [stencil system])을 채택하고 있었다 (→ 색인 : 스텐실).

1906년 영국에서 찰스 어번, G. 앨버터 스미스가 2색법의 키네마컬러의 특허를 땄는데 촬영과 영사 때 렌즈 앞에 빨강과 녹색의 회전 필터를 붙여 그것을 통해 발색시키는(필름 속도는 1초에 32컷)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색채는 매우 불완전했다.

1915년 허버트 캘머스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연구 팀에 의해 개발된 테크니컬러(선명한 색채)는 3색분해법에 의한 컬러 사진 재판법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의 〈숲속의 아침〉(1932)은 그 방법에 의한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거기에 루벤 마물리언의 〈베키 샤프 Becky Sharp〉(1935)는 예술적인 최초의 장편 컬러 영화로서 주목을 받았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의 흥행 성공으로 컬러 영화 시대의 도래가 확실해졌다. 테크니컬러에 이어 다층식 발색법에 의한 미국의 코닥컬러, 독일의 아그파컬러, 이탈리아의 퍼라니아컬러가 실용화되었다. 다층식 발색법은 촬영이 간단하기 때문에 이스트먼 코닥과 안스코 계통은 표준형일 뿐만 아니라 대형영화의 제작도 용이하게 했다.

와이드 스크린( 대형화면)

1947년에 최전성기를 누렸던 미국의 영화 산업도 1948년말경부터 관객을 텔레비전에 빼앗기자 영화계는 그 타개책으로 1952년 대형영화 시네라마와 입체영화 3D(three dimensions picture)를 개발했다(→ 색인 : 영화관, 영사막).

3D 영화는 관객이 색안경을 껴야 했으므로 흥행에 실패했고, 오래지 않아 사라졌지만, 3벌의 필름을 이어 합친 만곡된 대화면과 6개의 사운드 트랙으로 완전한 입체음향을 재현시킨 시네라마는 그 입체적인 박진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1952년에는 20세기폭스사의 대형영화 시네마스코프도 발표되었다. 이것은 세로 대 가로의 비가 1 대 2.3의 스크린으로 3개의 입체음향장치를 가졌으며, 제1회 작품 〈성의(聖衣) The Robe〉(1953)의 대성공 이후, 순식간에 미국은 물론 유럽·아시아에까지 보급되었다.

얼마 후 시네라마와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효과를 노린 비스타비전에 기타의 여러 방식이 서양 여러 나라에 등장했다. 또한 〈오클라호마! Oklahoma!〉(1955)는 70㎜ 필름을 사용한 토드 AO(Todd-AO) 방식의 첫작품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이래 표준이었던 35㎜로부터 영화용 필름의 크기는 대폭적으로 바뀌었다.이어 테크니컬러가 개발한 테크니라마를 비롯하여 갖가지 대형화면이 등장했으나, 모두가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비스타비전(1954), 토드 AO 등의 원리를 기초로 한 것들이었다.

영화제작

장편영화의 대부분은 극영화이고, 극영화는 시나리오를 기본으로 하여 제작된다. 따라서, 시나리오를 어떻게 제대로 스크린에 옮길 것인가가 극영화 제작상의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영화제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 먼저 시나리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

시나리오

시나리오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말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예산이나 흥행에도 신경써야 하며, 동시에 대본에 책임을 지는 제작자 밑에서 일하게 된다. 시나리오는 각본가와 감독의 협력에 의해 준비된다. 이러한 방식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관행으로 행해져 왔고, 미국에서도 독립 프로덕션의 증가에 의해 차츰 일반화되어가고 있으며 시나리오 작가가 감독을 겸하는 경우도 많다.

시나리오는 보통 개요·경개(梗槪)· 각본의 순서로 쓰인다. 개요는 이야기나 행동의 요점을 알리고, 창작물인가 혹은 앞서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던 무대극, 또는 소설을 각색한 것인가를 알려준다. 다음에는 개요를 바탕으로 경개를 꾸민다.

이것은 현재형으로 쓰인 산문체의 이야기로서 최종적으로 스크린에 영상화될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경개는 시나리오 형식으로 분해되어 대사나 배우의 동작과 반응이 설명되고 낱낱의 장면이 분석되며, 간단한 역할의 지시를 덧붙이고, 각 장면에서의 카메라 사용과 음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정해진다.

물론 시나리오는 세트·배역·의상·분장·음악에 대한 안내역할도 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말에 의한 대화는 물론이고, 영상에 의한 대화에도 숙달되어 있으며, 시각적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완성된 영화로서 그것을 머리 속에 그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가 잘 짜여진 것이면, 제작 일수나 경비 절약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감독에게 형식의 통일과 액션(연기)의 영화적 구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게 하며, 배우와 밀접하고도 집중적으로 일할 여유를 줄 수도 있다.

오늘날과는 달리 초기의 시나리오는 아무런 극적 형식을 갖지 않은 단순한 예정 장면의 도표였을 뿐이었다. 그 내용은 영화화될 때에 표의 순서대로 이어 붙여지기만 할 뿐이고, 필요한 설명은 모두 자막으로 대용했다. 그러나 영화가 발달함에 따라 시나리오도 상세해졌다.

시나리오 작가의 선구자로 등장한 사람은 토머스 H. 인스였다. 그는 최종적으로 편집을 끝낸 영화를 머리에 그릴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세한 대본을 쓸 수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데이비드 W. 그리피스는 대본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 제작 기술에 대한 공헌도는 누구보다도 컸다.

1920년대 초기까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쇼트(장면)를 지시했지만, 지금은 영상보다 대화에 더 많은 신경을 쓰며 영상 선택은 감독에게 맡기고 있다. 이 방법은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할 때 채택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가는 극적·영화적인 상세한 전개과정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작가라면 더 손쉽게 각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극과 달라 막간이 없기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극작가보다도 관객의 주의를 지속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영화는 연극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가장 영화에 가까운 것은 단편소설이다. 영화도 단편소설처럼, 관객의 주의를 클라이막스에 이르기까지 끌고 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플롯(줄거리)을 착실히 전개하고 흥미를 돋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데, 어느 경우에든 특히 시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도록 표현되어야 한다. 주의를 끌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은 서스펜스인데 그것은 상황 자체 속에 잠겨 있거나,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음에는 무엇이 일어날까?'하는 기대를 갖게 하는 종류의 서스펜스여야 한다. 관객 자신이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서스펜스는 장면 속의 등장인물이 모르는 정보를 관객에게 주는 과정에서부터 생겨난다.

연극에서는 배우의 연기가 관객의 흥미를 이어가기 때문에 말과 사상이 있으면 충분하지만, 영화의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스크린 위에 전개되는 이야기의 광범위한 구성요소를 환경·인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사 속에 숨겨놓아야 한다.

연극을 각색하는 경우, 시나리오 작가는 좀더 광범한 영화적 방법을 구사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되도록 무대적 방법 그대로가 좋다. 3면이 벽인 무대에서는 '문간에 있는 것은 누군가?'하는 의문이 극에 있어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며, 만일 카메라가 방 밖으로 이동하면 극적인 긴장도 사라져 버린다.

무대를 그대로 사진으로 찍는 것을 피하려는 사고방식은 영화 고유의 기술발달과 함께 생겨났다. 그 가장 중요한 예로 그리피스가 꼽힌다. 일찍이 메리어스는 카메라를 무대 전면에 설치했는데, 그리피스는 그것을 배우의 클로즈업으로까지 이동시켰다.

다음 단계로 그리피스는 에드윈 S. 포터 등의 초기의 시도를 개선해나가면서 필름의 단편을 일련의 장면(sequence)과 리듬이 일체가 되게 연결했다. 이것이 몽타주로 알려진 것이다. 이것에 의해 연극을 영화화하는 경우에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극적 액션을 전개시킬 수 있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소설가가 인물을 창조하는 것 같은 여유가 없다. 그는 그것을 줄거리의 전개와 병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소설가도 극작가도 가지지 않은 색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물건'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 색인 : 미장센).

이것이 바로 영화의 요소 중 하나이다. 시각적으로 '물건'을 짜맞추고 시각적으로 이야기하며, 고유한 말과 정서적 효과를 가진 영상을 병치하여 극적 악센트를 구체화하는 것이 영화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전화박스라는 한정된 공간일지라도 충분히 영화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강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아무 데라도 자유롭게 옮겨질 수 있는 점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건' 또한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배우 못지않게 중요하며, 바로 물건에 의해서만 인물을 훌륭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숙련된 시나리오 작가라면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토키 출현 당시와 같이 지나치게 대사에 의존하는 일이란 없다.

토키의 출현으로 대사가 우세해지면서 영화는 연극과 같이 고정적으로 되어버렸다. 카메라의 기동성도 살리지 못해 그저 장면을 쫓아가 움직일 뿐, 영화적 양식과 상상력은 없어졌다. 대화가 영화에 도입된 결과 오로지 영상에 의해서만 인생을 전체적으로 표현한다는 영화 특유의 예술성이 상실되게 되었다.

세련된 시나리오 작가라면 두 요소를 나누어 대화 장면은 대화에, 그 이외의 장면은 시각적인 것에 주력하고, 항상 대사보다 영상에 의지해야 한다. 때로는 어떤 장면을 시각적으로 설명해야 할지, 한 줄의 대화로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도 있는데, 액션을 구체화하는 경우든,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감독

영화용 카메라를 가진 어떤 남자가 그 카메라를 친구에게 맞추어 무슨 동작인가를 해보라고 신호한 것이 영화에서의 감독의 시초이다. 카메라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꾸며내는 일이 영화감독의 변함없는 목적이다. 기록영화의 감독은 이와는 달리 편집자이거나 '발견자'이다.

그 소재는 애초부터 사회에 실재하는 것으로서 카메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영화는 그것 자체가 현실적인 움직임과는 관계가 없다. 예컨대 어떤 남자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쇼트 1을 먼저 내고, 다음에 갓난아기의 쇼트 2를 보이고 나서, 그 다음에는 그가 미소짓고 있는 쇼트 3을 낸다.

그리고는 이들 쇼트를 차례로 영사함으로써 감독은 이 남자가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는 특징을 만들어놓는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있는 쇼트 1과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쇼트 3은 그대로 두고, 갓난아기 쇼트 2 대신에 수영복 차림의 여자 사진 쇼트 2를 보이면, 감독은 이 남자의 특성을 바꿔 찍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영화감독은 연극을 떠나 독자의 세계로도 발을 들여놓았다. 또한 여러 가지 영상을 병치함으로써 영상의 크기에 현저한 변화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수한 감독은 이러한 가능성 모두를 알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

감독이 할 일의 절반은 이미 대본 속에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그때 대본은 카메라 앞에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미리 머리 속에 완성시킨 스크린 위의 영상의 기록이 되기도 한다.

영화감독은 이야기가 대평원이건 전화부스 안이건 그밖에 어디든 간에 카메라에 의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감독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인가 새로운 방법으로 전하도록 늘 연구해야 하며, 가장 절제된, 최소한의 쇼트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각 쇼트는 극적인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필름 편집이 가능하게 되도록이면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특히 관객들의 눈을 확실하게 고정시켜 두려면 강렬한 충격을 지닌 영상이 중요하다. 무대와는 달리 영화 관객은 감독이 의도하는 대로 이끌려가기 때문에 카메라의 이야기는 소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영화의 관객과 소설의 독자는 극장에 있건 독서 중이건 간에 눈앞에 제시된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감독은 어떤 식으로 영상을 구사하여 관객의 마음 속에 새로운 기분과 정서를 창출해내는가가 문제이다. 즉 영화는 강한 충격을 가진 영상에 의해 직접 관객의 감정에 호소한다.

영상에 온갖 변화를 부여하는 감독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해당하는데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스타일이다. 그것은 주제의 선정방법과 연출방법으로부터 알아볼 수 있다. 뛰어난 감독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데 에른스트 루비치와 찰리 채플린이 그 예다.

일반적으로 미국영화의 경우, 세실 B. 데밀의 대작이나 그리피스 및 인스의 작품 이외에는 스타일의 확립이 늦어졌다. 스튜디오 때문인지 개인적인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리츠 랑이나 F.W. 무르나우 등에게는 분명한 스타일이 있었다. 감독에 따라 새로운 주제를 찾기보다는 스타일이나 내용의 취급방법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즉 감독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에 있고, 그것이 참신할수록 진부한 것에 대한 반역이 된다. 그러한 감독은 멜로드라마를 혁신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극히 평범한 것도 다루는 방법에 따라 비범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 일종의 대위법(동시적인 2가지의 결합)이나 급격한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만일 관객이 작품의 질적 수준을 충분히 파악한다면, 영화는 더욱 풍부한 오락의 원천이 되리라 생각되지만, 미술이나 음악과 달라 대중은 영화기법에 대해 아무 것도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줄거리를 좇을 뿐이므로 영화는 그들의 옆을 지나치기만 한다. 그러므로 감독은 이점에 유의하여 시정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 정서를 창출하기 위한 기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연출로 개성적인 스타일을 주장할 수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풍조를 드러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의 참담함을 다룬 네오레알리스모(신사실주의)라는 방법 또는 스타일이 생겨났다. 독일의 무성영화시대에도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새로운 발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감독은 영화적인 것에 뛰어난 이해를 가지고 있고, 독창성있는 카메라맨과 미술감독을 거느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리얼리즘으로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촬영이나 세트 같은 주요부문에서 감독은 아직도 인공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제작을 강요당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호화스런 세트는 순수한 분위기를 손상시키고 리얼리즘을 파괴하는 것이다. 장치·조명·음악 등은 감독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하지만, 잉그마르 베리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은 배우의 얼굴에서 시작된다. 관객의 눈을 끄는 것도 얼굴이고, 감독이 가장 고심하는 것도 이 달걀 모양의 얼굴을 어떻게 네모난 화면에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감독이 어떤 쇼트를 선정하든지 화면은 충격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극적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고, 이 사실이 곧 정서적 충격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스크린에는 정감이 넘쳐야 한다.

감독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의도가 낭비없이 표현될 수 있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가 될 만한 영상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제3자가 감독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액션을 실제로 영상화하는 것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연출은 액션을 짜맞추어 가는 기계적인 하나의 과정이고, 이것에 의해 배우는 감독의 엄격한 지도 아래 움직임과 감정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무대의 경우, 배우는 장기간 집중적 연습을 한다고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으므로, 관객앞에서 생생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촬영소에서 배우는 토막토막의, 대개의 경우 비연속의 액션을 연출하는 감독에 의존하여 움직인다. 감독은 배우의 모든 동작을 조정하면서, 보통은 배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을 진행한다. 한 장면(scene)에 담기는 액션의 양은, 감독이 전하고자 의도한 것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여서도 안 된다.

배우는 임의로 즉흥적인 연기를 할 수 없다. 또 얼굴에도 특별한 고려가 기울여진다. 이 점에서 좋은 영화배우이기 위한 필수조건은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는 능력이다. 또한 감독은 그 원인이 알려질 때까지 관객에게는 표정의 정확한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이 표정의 반응은 극히 조심스럽다. 배우와 '물건' 양쪽이 똑같이 중요한 표현력을 가지는 세계에 대사를 도입한 것은 리얼리즘의 최후의 마무리 작업이었다. 대사의 등장으로 입은 움직이고 있지만 음성은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의 마지막 비현실성은 사라졌다.

극영화에서 본래 대사는 2차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의 스크린을 점유하고 있는 영화에서는 이야기는 대사로 말해지고, 카메라는 대사의 설명에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창의력이 부족한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게서 발견하기 쉬운 결점은 대사로 이야기를 보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무성영화시대의 선배가 '자막으로 보충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제작 방법

세트와 미술감독

감독은 연출시 온갖 수단을 다 이용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세트의 설계 담당인 미술감독과 도구를 장치하는 장치담당의 기술과 지식이다. 원래 영화의 세트는 오늘날과 같이 완성된 것도 정교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의 세트는 일종의 속기 기호와도 같은 것이어서 곧잘 평범한 쇼트로 어떤 장소의 인상을 전한다. 낯선 광경을 사용하면 관객에게 혼란을 주게 되기 때문에 워싱턴 국회의사당, 뉴욕의 마천루 등의 낯익은 풍경을 비춘다.

미술감독에게는 건축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가 요구되는 한편, 어떤 주거의 형태로부터 거기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직업을 나타내기 위하여 방의 벽에 걸려 있는 물건을 이용할 수가 있고, 또 흐트러지고 어지러운 모습을 통해서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

현실을 실사(實寫)하는 카메라의 성능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감에 따라 실내의 세트에도 사실성이 요구되게 되었다. 따라서 널빤지와 회반죽으로 만든 세트는 뒤쪽에서 보면 매우 부자연스러울지라도 카메라를 향해서는 되도록 진짜같이 보이게 해야 한다.

재료비와 인건비가 높아질수록 세트는 예산상 중대한 문제 거리가 된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온갖 형태의 모형, 트릭 장치, 여러 가지 특수효과, 트릭 쇼트 등이 연구되었다. 경제적인 면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대본을 쓰는 단계이다.

대본은 미술 관계 일을 착수하기 훨씬 이전에 준비해두어야 한다. 미술감독에 있어서는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관객이 스크린 상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눈의 움직임까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명

세트의 조명(照明)은 일반적으로 디자이너의 일로 생각되기 쉬운데 사실은 사진사가 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카메라맨이라고 일컬어졌지만 지금은 조명담당이라고 불리며 카메라는 그의 지시를 받은 기사에 의해 조작된다. 전기기사나 촬영기사의 감독에 더하여 조명담당은 장면의 분위기와 영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한다.

세트는 조명을 위해 설계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세트의 조립단계에서 미리 조명 계획을 세울 수도 있지만, 실제 장면의 조명은 특수한 작업이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 및 구도에 관한 뛰어난 판단이 그 자리에서 요구된다.

카메라

어떠한 카메라 기술을 구사하든지 그 목표는 영상의 극적 충격을 낳는 것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에는 크게 나누어 2가지가 있다. 첫째,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는 경우로 관객에게 카메라의 움직임을 의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인물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움직임은 늘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카메라가 움직이고 있더라도 인물은 정지하고 있어 그 효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인물은 정지한 채 카메라를 이동시키는 경우로서 항상 극적 효과를 노린다.

처음에 카메라가 이동하여 인물의 표정을 근접촬영으로 잡거나 혹은 카메라를 끌고가 방 한가운데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인물을 비춘다. 카메라를 이렇게 사용함으로써 카메라는 어떤 상황을 말하는데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낱낱의 이야기의 종합인 것이다.

소리

토키와 무성영화에서 기술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던 점은 영상과 대사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였다. 씌어진 대사는 촬영 때에는 쓸데없는 여분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배우의 표정이 대사와 맞먹을 만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리에는 다른 많은 용도가 있어서 액션의 진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입 밖에 내지 않는 의식의 흐름이나 인물의 내면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음악

음악이 없는 영화란 없다. 무성영화의 초기에는 적어도 1대의 피아노 즉흥 연주로 음악을 덧붙였다. 후에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쓰였는데, 때로는 특별히 영화용으로 작곡된 것도 있었다. 토키가 출현하면서 음악은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일류 작곡가도 영화음악에 손을 대어 영화에 분위기를 더하는 한편 곡 자체가 하나의 독립 작품인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의 존재는 영화의 목적과 완전히 합치된 것으로서 그것이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색채

색채도 소리와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라 극적 효과를 위해 사용되지만 사실적인 목적보다는 장식적인 목적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여성의 얼굴이나 풍경 등 미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색채를 써서 주제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극 따위의 전투 장면이나 장려한 장면같이 극적·정서적인 효과를 북돋우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색채는 용도가 다양해 장치에서부터 배우의 의상에까지 미치지만, 자연색에 의한 리얼리즘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는 색채는 주로 장식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와이드 스크린

와이드 스크린은 흥행을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시네마스코프이다. 가로로 넓게 퍼진 4각형의 스크린 탓에 현재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며 촬영소에 따라서는 스크린의 양끝을 잘라 폭을 좁히는 곳도 있다.

편집

편집은 때로 몽타주라고도 하는데 영화 제작 기술의 기초로 꼽히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순서로 필름을 이어붙이는 일이다. 최초에 필름은 단일 시퀀스로 연결되었다. 극영화의 선구자 조르주 멜리에스조차 고정된 카메라의 시점에서 줄거리를 따라가는 단순한 방식을 채택했다.

그런데 영국의 G.A. 스미스와 브라이튼파의 그의 동료들, 미국의 에드윈 S. 포터 등은 이른바 편집과 몽타주의 기본 원리에 의거한 실험을 시작했다. 에이젠슈테인이나 푸도프킨 같은 소련의 감독들은 1920년대 후반에 창조적인 편집 또는 그들이 말하는 몽타주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시퀀스뿐만 아니라 개개의 쇼트를 병치함으로써 인물을 표현하고 사상을 전하며 또는 정지된 대상을 병치하여 움직임까지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편집방법은 감독의 기호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영화 제작의 진행에 따라 편집자가 대본을 보고 자료를 모은다.

어떤 방법을 쓰건 간에 영화는 시각에 의한 서술이요, 영상은 그 언어라는 사실을 감독은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영화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구문법을 가지며 거기에 따라 영상을 배치하고 정리하여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것이다.

제작 기구

영화 제작의 방법에 관해서는 1편의 영화 제작에 필요한 것과 100편의 영화 제작에 필요한 것을 구별해야 한다. 즉 개인적인 제작과 대규모 제작과의 구별이 필요하다. 독립 프로덕션이 기획하여 1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 간접비는 들지 않으며, 장소에 대해서도 제작중에만 적당한 장소를 빌리면 된다.

스탭도 그 기획에 필요한 사람을 모으고, 장치·비품류도 빌려 쓰면 된다. 독립영화제작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10년 동안 두드러지게 등장했었는데, 이것은 영화 제작면에 일어난 변화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것으로서 이론상으로는 다른 제작자보다도 영화의 내용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20년간 할리우드에서는 영화가 최성기를 맞아 아돌프 주커, 제세프 스켕크, 새뮤얼 골드윈, 워너 형제 등 수많은 제작자가 활약했다. 그들은 대중의 오락을 주도했으며 멜로드라마·코미디·뮤지컬 등을 산업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그들은 기술 개발을 위해 거액의 비용을 투입하여 카메라, 음성, 편집, 음악의 녹음, 입체영화나 와이드 스크린 등의 발달을 촉구했는데, 이와 같은 시도는 스크린에 매력을 부여하여 변덕스러운 관객을 새로운 것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계산된 것이었다.

현재의 영화 제작의 기본도 당시의 방법을 답습한 것으로서, 대본을 제작부에 돌리는 일로 제작이 시작된다. 제작부에서는 대본을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분석하고, 경비의 견적과 예산을 결정한다. 대본이 승인되고 예산이 통과되면 대본의 복사본이 모든 부문으로 보내어지고, 제작진의 책임자에 의해 결정된 일정표에 따라 촬영일에 맞춰질 수 있게 준비가 시작된다.

미국의 영화 제작 기구는 아직도 대개 제작자 중심이다. 이 제도는 영화의 대량생산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필요에서 생겨났다. 한때는 모든 책임이 제작자의 어깨에 걸렸고, 감독은 아무런 권한도 없이 단지 배역까지 결정된 완성대본을 건네받는 정도였다.

또한 감독이 이미 촬영을 끝낸 필름을 제작자가 새로 편집하는 일도 있었다. 배우·제작자·감독을 겸하는 일이 일반화되고부터는 이러한 제도도 사실상 없어졌다. 따라서 독립 제작자의 경우 감독과 배우를 겸하는 일도 종종 있다.

A.L. Mayer R. Griffith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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