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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8 (화) 20:21
분 류 사전3
ㆍ조회: 557      
[현대] 현대-광복 이후의 과학 (민족)
과학(광복 이후)

세부항목

과학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과학(통일신라)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과학(광복 이후)
과학(참고문헌)

1. 광복 후의 과학기술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의 과학기술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전문학교 수준의 훈련을 받은 기술자는 1000여명 있었으나 당시 일본의 이공계 대학을 나온 한국인은 200명 정도였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훈련받은 과학기술자가 100명 가까이 되었다. 의학은 특별해 의사 3,000명에 의학박사는 350명쯤 되었다.

순수과학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수학은 최윤식(崔允植, 경성광산전문학교)·장기원(張起元)을 비롯한 20여명, 물리학은 최규남(崔奎南)·조응천(曺應天)·박철재(朴哲在) 등 박사를 포함해 20명, 화학은 응용까지 합하여 이태규(李泰圭)·이승기(李升基)·김양하(金良瑕)·최황(崔晃)·조광하(趙廣河) 등 박사 5명과 50명, 생물학은 석주명(石宙明)·조복성(趙福成)·강영선(姜永善)·김준민(金遵敏) 등 10여명이었다.

미국 군정통치 3년은 일본인들이 떠난 공백을 메우는 문제에 부딪쳤다. 미군정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기상관측이었다. 과학기술 전담부서가 없는 상태에서 문교부 기상국과 중앙관상대가 서둘러 개설되었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철(李源喆)이 국장 겸 대장에 임명되었다. 미국 기상전문가단이 파견되어 남한 전역의 기상관측실태를 조사했고 단기과정의 기상관측훈련학교가 설치되었다.

1946년 초에는 미국 지질전문가단이 도착해 광물자원 조사사업을 벌였다. 특히 금광에 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사사업은 4년이나 계속되어 1950년에야 끝났다.

한편, 산업기술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초기에는 상무부에 기술교육지도위원회를 두어 정책을 세웠고, 1948년에야 문교부에 직업기술교육국이 신설되어 기술인력 양성 등을 추진하였다.

기초과학을 진흥시키려는 노력도 부분적으로 있었다. 생물학 분야에서만은 미국인 고문관이 상주하면서 교과과정·실험설비 등에 관한 조언을 해 주고 지원활동을 벌였다. 교사들을 훈련하는 임시학교를 열기도 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은 광복 후 경성대학으로 바뀌었고 1946년에는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하는 안이 발표되었다. 경성대학·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약학전문학교·수원고등농림학교 등을 통합해 종합대학교로 만드는 안이었다.

그러나 일본식 대학에서 탈바꿈해 미국식 대학으로 만들려는 국대안(國大案)은 교수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대학의 자율성 침해, 특성 상실, 미국인 총장과 이사, 현실적 기반의 결여 등이 반대이유였다.

국대안을 둘러싼 좌우의 극한대립은 미군정이 원안에 부분적인 수정을 하는 것으로 수습되었지만 막심한 타격을 주었다. 연구분위기는 크게 훼손되었고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대학을 떠났다.

서울대학교가 발족하면서 경성대학 이공학부는 문리과대학 이학부와 공과대학으로 나누어졌다. 이학부는 경성공업전문학교와 중앙공업연구소, 공과대학은 경성대학 이공학부와 경성광선전문학교의 건물과 시설을 이용해 개강하였다. 미군정의 집중지원이 있기는 했으나 시설이 미약하고 교수진도 크게 부족해 실속 있는 교육, 연구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한말 고종이 설립한 전환국(典珤局) 광물분석소에 기원을 두고 1912년 개편된 중앙시험소는 광복 후 안동혁(安東赫)을 소장으로 재출발하였다. 그것은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로 개편되었고 건국 후 상공부 소속으로 되었다.

중앙공업연구소는 하나밖에 없는 종합공업연구기관으로서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까지 과학기술 연구활동을 주도하였다. 이 연구소는 정원 146명의 규모였고, 무기화학·유기화학·요업·염직공예·기계공작 및 식품의 6개 연구분야로 나누어졌다.

연구소의 ≪연구보고≫는 우리말로 된 첫 과학기술 논문이었고, 연구소는 공업기술의 지도, 보급과 공업기술자, 교사의 양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초창기 연구원들은 모두 뒤에 학계와 산업계에서 지도적인 몫을 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가장 먼저 발족한 조선학술원은 학계의 모든 부문을 포괄한 단체였다. 그 안에는 이학부·공학부·기술총본부가 있었고 주요 과학기술자들이 망라되었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이견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아 효율적인 운영을 할 수 없었다.

기술자들이 주축이 된 조선공업기술연맹도 결성되었다. 이 연맹은 공업정책 수립에 자문하고, 공업발전에 이바지하며, 기술자의 양성과 배치를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어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함께 조선과학기술연맹을 결성하였다. 또한 학회도 생겼는데 조선수물학회·조선화학회·조선생물학회·조선토목기술협회·조선건축기술협회·조선전기기술협회·조선기계기술협회 등이다. 1945년에 12개, 1946년에 6개, 1947년에 14개 학회가 탄생하였다.

광복 후에는 과학기술자들이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잡지의 발간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주요 과학잡지로는 ≪대중과학≫·≪현대과학≫·≪과학세기≫·≪과학나라≫·≪과학과 발명≫ 등이 있었다.

과학잡지들은 과학기술의 계몽이 주목적이었고 과학의 실용적인 면에 치우쳤으나, 과학기술의 역사와 과학정책에 관한 글도 가끔 있었다. ≪현대과학≫은 전문과학자들의 참여가 높아 선진 과학기술의 소개가 두드러졌고, ≪과학나라≫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해 순 한글로만 만들어졌으며, ≪대중과학≫은 좌익성향이 뚜렷하였다.

광복 당시 과학기술자들은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대다수가 남쪽에 있었다. 그러나 1948년 남북분단이 임박하자 상당수의 과학기술자들이 북쪽으로 넘어갔다.

정치적 신념이 확고해 월북한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국대안 반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물러나거나 탄압을 받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밖에도 북한에서 실시된 과학기술 진흥정책에 이끌려 월북한 사람들도 있다. 비날론을 합성해 일본에서 유명하게 된 공업화학자 이승기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2. 1950년대의 과학기술

1948년 단독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의 과학기술은 새출발할 기회를 맞았으나 미처 전열을 정비할 사이도 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그나마 빈약하기 짝이 없는 산업시설·대학·연구소에 큰 피해를 주었고 적지 않은 과학기술자들을 앗아갔다. 과학기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일부는 군에 입대해 기술장교, 교관이 되거나 조병창(造兵廠) 등에서 문관으로 일하였다.

국방부 병기행정본부 소속 과학기술연구소와 조병창 실험실은 1954년 국방부 과학연구소가 되었고 초대 소장은 정낙은(鄭樂殷)이었다. 국방부 과학연구소는 비교적 좋은 연구시설을 갖추었고 군사원조로 물자를 조달 받아 군사연구는 물론, 기초과학과 공업 연구도 활발히 하였다.

이 연구소는 우수한 이공계 대학졸업자들을 뽑아 파격적인 병역특혜를 주고 유능한 과학기술자를 길러냈다. 연구실적은 비공개가 많았으나 ≪과연휘보≫를 7권까지 발행하였다.

한국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간 1952년부터 해외유학생이 늘어나기 시작해 휴전 후에는 해마다 1천명 이상이 해외로 나갔는데 그 가운데 반이 이공계였다.

1950년대 유학생 6,700명 가운데 교수가 1,100명이었다. 이것은 혼란기에 부실했던 학교교육을 보충하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열망 때문이었지만 이공계 대학은 한동안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일어나 교육에 큰 지장을 가져왔다.

유학국은 미국이 85%로 편중이 심했고 분야도 당시 유망했던 화학계열이 압도적으로 많아 불균형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업을 마친 유학생들이 귀국을 꺼려 두뇌 유출이 심각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주로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복구사업이 시작되었다. 해외활동본부(FOA)를 비롯한 여러 원조기관이 참여했는데 기술원조도 포함되었다. 기술원조는 기술자 해외파견, 외국기술자 초청, 용역계약, 물자도입으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용역계약과 기술자 파견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외국기술자 초청이 크게 늘어났다. 기술원조 가운데 단일사업으로 가장 컸던 것은 1955∼1961년에 시행된 서울대학교 재건사업이었다.

서울대학교 안의 다른 대학들도 지원을 받았지만 산업부흥과 직결된 공대·의대·농대가 주요 지원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대행기관으로는 미네소타(Minnesota)대학이 뽑혔다. 이 사업은 인사교류, 기구구입, 건물복구, 도서구입 등으로 나누어 추진되었다. 인사교류는 총 214명으로 64명이 배정된 공대의 경우 전체 교수의 80%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학위를 받은 교수는 19명이었고 나머지는 단기연수를 받는 데 그쳤다. 또한 미네소타대학 교수들이 각 학과에 배치되어 학과 조직, 교과과정, 실험설비, 도서 등 모든 부문을 재구성하는 일을 맡았다.

그밖에도 서울대학교에는 다른 원조기금과 물자도 지원되어 그 액수는 6년 동안 1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것은 같은 기간 외국 기술원조의 30%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이 사업의 결과 서울대학교의 기술교육은 미국식 체제로 개편되었고 교육여건이 크게 향상되어 교육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는 주로 학부과정의 교육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점이 주어졌으므로 교수와 대학원생의 연구여건은 여전히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초과학 분야는 별다른 주목을 못 끈 채 낙후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950년대 한국 과학기술계의 톱 뉴스는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탄생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광복 전으로 역사가 올라가는 다른 연구소들과는 달리 정부가 완전히 새로 만든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연구소였다.

1953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Eisenhower, D.D.)가 제창한 ‘평화를 위한 원자계획(Atoms for Peace Program)’에 따라 1955년 주네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한국은 미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 회의에 박철재 등 세 사람의 대표를 파견하였다. 박철재는 귀국하자 서울대 교수 윤세원(尹世元)에게 원자력 연구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윤세원은 과학자·공학자 15명을 모아 원자력을 공부하는 비공식 세미나 그룹을 만들었다. 이들의 연구가 원자력연구소의 기초가 되었다.

1956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한미쌍무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어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가 신설되었다. 협정에 의해 한국은 35만 달러의 원자로 구입비를 미국으로부터 받게 되었고 내자 3억원의 예산도 통과되었다. 1959년 원자력원이 발족했고 박철재를 소장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연구소에는 47명의 연구관을 두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원자력연구소가 정부의 집중투자 끝에 단시일에 출발하게 된 데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힘이 컸다. 이승만은 국위선양, 국방 등 이유 때문에 당시 첨단기술분야인 원자력의 개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최대한의 지원이 주어졌던 것이다.

원자력연구소는 당시 시설이 잘 갖추어진 유일한 종합연구소였다. 따라서 연구조건이 나쁜데다 포화상태가 된 대학으로부터 많은 과학자·공학자들을 얻어 화려한 진용으로 출발하였다.

원자로 구매단이 미국에 파견된 것은 1958년이었다. 제너럴 어토믹(GA)의 트리가 마크(Triga Mark) II 연구용 원자로를 들여오기로 결정되었다. 원자로 부품은 이듬해부터 도착하기 시작해 원자로 설치공사가 기공되었다. 1년 만에 완공될 예정이던 건설공사는 곡절을 겪은 끝에 1962년에야 가동을 보게 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파격적인 예산조치의 특혜를 받아 막대한 돈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연구소는 경험의 미숙에서 온 시행착오와 일관성 없는 정책, 인화의 결핍으로 초창기에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그래도 연구소는 기초·응용과학 연구와 산업에 작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원자로가 완성되기 전에도 미국에서 수입한 동위원소를 이용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196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시작으로 여러 병원에 방사성 동위원소진료실이 설치되었고, 원자력연구소는 이에 부응해 1962년 방사선의학연구실을 설치했고 이듬해 원자력원 직속으로 방사선의학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비슷한 때 농사원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동위원소를 농학에 이용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1965년 연구소는 농학연구실을 만들었고 1년 만에 방사선농학연구소로 독립하였다.

원자력 연구는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종합적 과학연구였다. 1959년 원자력원이 주관한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는 한국과학계가 총동원된 큰 잔치였다. 550명의 학자들이 회의장을 메웠다. 이후 학술회의는 해마다 커져 1962년에는 10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1966년까지 8차나 계속되었다.

3. 1960년대의 과학기술

1960년대에 들어와 한국 경제는 급속한 성장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낙후된 기술로 말미암아 공업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수출증대에 총력이 기울여졌지만 국제시장에서 경쟁에 이기려면 도입된 선진기술의 소화는 물론,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 시급하였다.

외국에서 돌아오지 않는 과학두뇌들을 불러들여 기술혁신의 중추역할을 할 산업연구기관을 창설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정부도 이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문교부의 종합연구소 설립계획과 각각 국립공업연구소와 금속연료연구소를 중심으로 종합연구소를 만들려던 경제기획원의 안은 모두 엄청난 재정부담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한·미 양국 정부의 합의에 의해 산업을 뒷받침할 기술의 전략적 개발을 목표로 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이 발표된 것은 1965년이었다.

1966년 발족한 KIST에는 정부가 부지를 무상 제공하고 기금 19억원, 건설비 18억8000만원을 출연한 외에 미국원조 841만달러(무상 656만, 차관 185만)가 투입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연구소는 비영리적인 재단법인체로서 연구개발과 기술지원이 필요한 정부 또는 산업계의 요청에 따라 계약에 의한 수탁연구를 하는 종합연구기관의 성격을 띠었다.

KIST는 외국의 대표적인 다섯 연구소를 본따고 장점을 취해 만들어졌다. 곧 캐나다의 국립연구회의(NRC)처럼 정부의 전적인 재정지원 아래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했고, 국가에 필요한 과제에 대한 우선적인 연구분야 선정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를, 기초연구·응용연구의 균형과 연구소·대학의 관계에서는 막스 플랑크연구소(MPI)를 따랐다.

연구실 운영에서 단위연구실제 및 그 독립성에 관한 원칙은 일본의 이화학연구소(理硏)와 같으며, 계약연구기관의 형태와 운영은 바텔기념연구소(BMI)의 것을 채택하였다.

초기 3년은 연구소 건설, 운영체제의 확립, 연구요원의 충원, 훈련 등 창설업무에 주력하였다. 국내산업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 연구범위와 연구우선순위를 결정한 다음, 준공된 해인 1969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KIST는 계약에 의한 연구요원 채용제도와 책임회계제도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연구능력의 평가에 따른 대우를 뜻하며,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최대한의 능률적인 연구를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각 연구실은 실장 책임 아래 독립된 기업체와 같이 운영되고, 연구소는 최소한의 통제로 조정하는 몫을 하게 되어 있었다.

한국은 급작스런 산업의 팽창으로 크게 늘어난 기술의 수요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은 불가피했는데 그 대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1962∼1967년에 외국의 특허권 또는 기술적 노하우를 사들이는 데 120여만 달러가 쓰였다. 차관이나 직접투자에 따라서 도입된 기술의 대가는 훨씬 컸다. 또한 외국 기술진에 지불되는 용역대도 상당한 액수였다. KIST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산업계로부터의 연구수탁은 미미하였다. 따라서 자립운영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정부와의 계약에 의한 연구가 이를 보충하였다. 처음에는 기술지도와 단기적 연구과제를 주로 다루었는데, 1970년대에는 선진국에서 개발된 새 기술의 기업화를 겨냥한 개발연구에 중점이 두어졌다.

KIST는 여러모로 꽤 성공적이었다. 첫째, 해외에서 우수한 과학기술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둘째, KIST는 연구목표를 적절하게 설정하여 다섯 가지 전략분야인 식품산업·재료과학·전기전자공학·화학공학·기계공학에 집중되었다. 셋째, KIST는 정부와 산업에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설립된 지 2년 만에 연구계약고가 120만 달러에 이르렀고 4년 뒤에는 산업체와 맺은 계약고가 정부와의 계약고를 웃돌게 되었다.

1960년대 초 정부가 자립경제 건설을 지상목표로 내세우게 되자 이를 뒷받침할 과학기술의 진흥이 다급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나오면서 그 연관계획으로서의 기술진흥 5개년계획이 발표되었다. 이 해 부흥부 안에 신설된 기술관리국이 처음으로 과학기술백서를 내놓았다. 1964년에는 경제 및 과학분야의 주요정책을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헌법상의 자문기관 경제과학심의회의가 설치되었다.

1966년 과학기술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1967년 4월에는 진통 끝에 이 법을 바탕으로 각 부처에 분산되어 있던 행정기구와 연구기관을 승격, 통합해 과학기술처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과학기술처는 의욕적인 20년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을 만들었고 〈과학기술진흥법〉을 제정하였다. 그 뒤 과학기술 전반에 관한 체계적인 조사가 추진되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와 국립천문대가 설립되었고 전산망도 구축되었다.

1950년대에 과학기술 학회는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지질학·토목공학·전기공학·금속공학·요업공학·항공공학 등 10개 분야뿐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 과학기술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나마 후반에는 회원들이 대거 해외로 떠남에 따라 학회활동은 거의 마비되었다.

이런 상황은 1960년대에 들어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자들이 돌아왔고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연구비가 많이 나와 연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1965년 학회는 20개로 늘어났으며, 그에 따라 논문 발표가 많아졌고 학회지들도 자리가 잡혀갔다. 학회들은 과학기술처가 발족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66년 발명의 날을 맞아 열린 전국과학기술자대회는 과학기술 단체들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고 과학기술인의 지위향상을 위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해 가을 창립된 과총은 과학기술회관의 건립에 착수하는 한편 과학의 날 제정을 건의하였다. 과총은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지만 과학기술 학회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한 것은 가장 큰 성과로 보아야 한다.

4. 1970년대의 과학기술

정부는 과학기술입국을 내세웠으나 대학은 관심 밖이었다. 1950년대의 미국 원조, 1960년대의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교수 파견, 기재 도입이 있었지만 학부교육을 꾸려 갔을 뿐, 연구의 중심이 되어야 할 대학원은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실한 대학은 쓸모 없는 졸업생을 양산했고 외국유학을 마친 유능한 인재들은 귀국하지 않아 연구인력의 부족은 심각하였다. 두뇌유출과 연구인력 부족이라는 난제에 대한 답으로 학계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971년 한국과학원(KAIS)이 설립되었다.

한국과학원은 파격적으로 유리한 조건 때문에 유능한 교수진과 우수한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한국과학원 설립의 기초가 된 터먼보고서(Terman Report)는 그 목표를 세계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가 아니라 산업과 연구기관에 필요한 잘 훈련되고 혁신적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졸업생들은 해외로 나가지 않고 대다수가 국내에서 자리잡았다. 그들은 실험과 실무경험이 풍부해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었으므로 산업계의 환영을 받았다.

한국과학원은 처음에는 산업에서 긴급히 요청되는 공학부문의 석사학위과정에 치중하고 점차 연구개발을 맡을 박사학위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따라서 전공분야는 기계공학, 화학공학 및 응용화학, 전자공학, 통신 및 시스템공학, 산업공학 및 경영학만 중점 육성하고 기초과학과 응용수학은 공학교육을 돕는 것으로만 고려되었다.

그러나 설립과정에서 한국과학원의 목표와 구조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곧 목표는 과학기술 고등교육을 전담해 과학기술 영재(英材)를 집중양성하는 것으로 크게 격상되었다. 이렇게 해서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과 같은 과학 분야가 독립된 학위과정으로 설치되었고 박사과정의 비중이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졌다.

결국 한국과학원의 규모는 학과·학생·교수·설비 등 모든 면에서 당초의 계획보다 크게 늘어났다. 학과는 통신 및 시스템공학이 제외되고 수학 및 물리학과, 생물공학과, 재료공학과가 더 설치되었지만 학생수는 2배 이상이 되었다.

그에 따라 예산도 큰 폭으로 증액되지 않을 수 없었다. 5년 동안의 건립 및 운영비가 56억원에서 92억원으로 늘어났는데, 같은 기간 정부가 지원한 전국 대학의 실험실습비가 150억원이었던 것에 견주면 얼마나 파격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한국과학원은 터먼보고서가 추천한 것보다 빠른 1975년에 박사과정을 개설했으며 석사과정 확대, 학과 증설, 대덕과학단지에 제2캠퍼스 신설을 추진하였다. 학생들은 등록금 면제, 기숙사 제공과 함께 병역특혜를 받았다.

한국과학원은 1975∼1980년에 석·박사학위 1천명 이상을 배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국 대학에서 해마다 나오는 이공계 석·박사의 30%를 넘는 수였다. 연구성과도 다른 대학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한국과학원은 기존 대학원을 앞질러 한국 이공계대학원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한국과학원의 성공은 다른 대학들에 큰 자극을 주었다. 서울대학교가 1970년대말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전환한 것은 그 한 보기다.

1973년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재단법인으로 재출발하였다. 연구소는 원자력발전의 설계, 제작, 건설, 관리를 자력으로 할 계획을 세웠으며, 원자력산업 육성, 안정된 핵연료 공급, 핵연료기술의 자립을 추진하였다.

국립지질광물연구소는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1918년 창설된 시험연구기관이었다. 1975년 석유탐사에 서광이 비치면서 이 연구소는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드디어 정부는 1976년에 이것을 특수법인체 한국자원개발연구소로 개편, 발족시켰다.

정부는 또한 중화학공업 건설과 수출전략산업의 구축을 위한 연구개발에 착수하였다. 이 분야의 기술개발은 종합연구기관인 KIST가 맡아 왔으나 집중적인 육성을 담당할 전문연구기관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5대 전략산업연구소의 설립과 이들을 수용할 대덕연구학원도시의 건설계획은 1973년 확정되었다. 이 해에 세워진 선박연구소와 해양개발연구소는 우선 KIST에 부설되어 있다가 1976년 한국선박해양연구소로 통합, 발족하였다.

그밖에 기계기술연구소·화학연구소·전자통신연구소·중전기시험연구소·핵연료개발공단도 단계적으로 설립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와 별도로 1975년에 창립된 한국표준연구소는 중화학공업 발전에 바탕이 되는 계량계측기술을 국제수준급으로 올려 공산품의 국제적 신용도를 높이고 정밀계측표준과 기술을 보편화함을 목표로 하였다.

5. 1980년대의 과학기술

1980년 군사쿠데타와 함께 과학기술계에도 큰 변화가 몰아닥쳤다. 연구기관의 대대적 통폐합이 그것이다. 연구기관들은 그 기능에 따라 종합연구기관·국책연구기관·산업기술연구기관으로 나누어졌다.

국책연구기관은 국가표준, 원자력, 에너지 자원 등과 같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이면서도 민간이 하기 힘든 분야를 맡도록 되었다. 산업기술연구기관은 핵심 산업의 연구개발을 수행해 산업계를 지원하도록 하는 몫을 맡았다.

이에 따라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은 새로이 9개로 통폐합되어 과학기술을 관장하는 과학기술처 소속으로 되었다. 새 부설 연구기관으로 천문우주과학연구소·항공우주연구소·유전공학센터·시스템공학센터·과학기술정책연구평가센터 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연구기관 개편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서로 다른 조직을 통합하다 보니 조직의 안정이 크게 저해되었다. 연구개발의 정체가 나타났고 연구원들의 이직률(移職率)이 높아졌으며 조직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특히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한국과학원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의 통합은 불행한 일이었다. 결국 1989년 연구부분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으로 분리, 독립함으로써 원상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었다. 1985년 과학기술대학이 창설되었고 1989년 과학기술원과 과학기술대학의 학과통합이 이루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은 교육에만 주력했을 뿐, 연구활동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1980년대에는 정부가 일반 이공계 대학원에 대해서도 지원을 늘려갔고 그 결과 연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급속한 팽창으로 과학기술원만으로는 고급 과학기술인력의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77년 설립된 한국과학재단(KOSEF)를 통해 대학의 연구활동을 본격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1980년부터는 문교부 소속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이공계 대학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병역특례가 대학원생으로 확대된 1982년 이후에는 이공계 대학원이 크게 발전하였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의 연구실적은 한국과학기술원이나 포항공대에 점차 가까워졌다.

1980년대 한국과학기술계의 중요한 사건은 포항공과대학의 탄생이다. 국내외의 많은 반대와 우려 속에 1968년 출범한 포항제철은 1983년 제4기 설비를 완공함으로써 단일공장으로는 세계최대의 제철소로 자랐다.

포철이 정보통신분야 같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고 제철에 관련된 연구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과학기술 연구인력이 필요하였다. 다각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구인력의 확보에 실패하자 포항제철은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포항공과대학(POSTECH)과 그에 인접한 산업기술연구소(RIST)였다.

포항공과대학은 소수정예식 교육을 하는 캘리포니어공과대학(CalTech)을 모델로 해서 추진되었다. 교육부담이 적고 우수한 연구시설을 갖춘 연구중심대학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1년 동안 국내외에서 우수한 인력을 뽑은 포항공과대학은 1986년 문을 열었다.

포항공과대학은 포항제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신 연구기관의 위축을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일반 대학들의 발전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포항공과대학은 또한 설립 초부터 야심적인 방사광가속기 건설을 추진하였다. 1987년 방사광가속기사업 기본계획 보고가 만들어졌고 이듬해 방사광가속기 추진본부가 발족하였다.

당초 추정한 예산 527억 6천만원은 설계과정에서 곱절 이상으로 늘어났다. 포항제철에서 이미 확보한 739억원을 뺀 나머지 600억원을 정부에서 부담하게 되어 방사광가속기는 1991년 착공해 1994년 준공하였다. 방사광가속기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기초연구뿐 아니라 광범한 응용의 잠재력을 가진 획기적인 연구의 구심점으로 출발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단순히 경제발전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도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제 양적인 경제성장보다 과학기술에 의한 질적 발전을 이끄는 데 중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책은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산업기술의 연구개발을 가속화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산업의 창출을 선도할 첨단기술의 연구개발을 추진하는 데도 집중되었다. 이렇게 모방에서 창조로 연구개발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서는 기초과학의 활성화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 시기에 정부가 추진하는 특정 연구개발사업에 기업체들의 연구소가 참여하면서 기업의 연구개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싹텄다. 기업의 연구소 설립이 활발해졌고 연구비 지출이 크게 늘어났다. 기업부설 연구소와 연구인력은 이 기간에 5배 이상으로 커졌다. 1990년 연구비의 민간 부담액은 84%를 차지하였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연구기관들의 역할분담이 분명해졌다. 정부는 첨단기술과 공공기술, 기업체는 산업기술, 대학은 기초과학을 각각 맡는 것으로 되었다.

한국의 현대과학기술은 늦게 출발해서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1970년대 이후의 성장은 세계적인 기록을 세워왔다. 1980년대에는 한때 세계7강을 노리고 일본을 따라잡는 꿈을 꾸기도 했으나 1990년대 말 경제위기를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그러나 한국 과학기술의 저력은 여전히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송상용>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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