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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8 (화) 20:09
분 류 사전3
ㆍ조회: 413      
[조선] 조선 후기-실학자의 과학기술 (민족)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세부항목

과학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과학(통일신라)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과학(광복 이후)
과학(참고문헌)

1. 그 배경과 장인의 기술

과학기술은 15세기를 고비로 차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다가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정유의 왜란은 조선에 극심한 피해를 입혀, 절정에 달하고 있던 15세기의 조선과학은 거의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위축되고 말았다.

모처럼 기틀을 굳혀가던 과학기술의 자주적 기반은 이미 안정을 잃었고, 그 뒤 주자학(朱子學)의 융성과 서구과학과의 단편적이고 불연속적인 접촉은 조선과학의 자주적이고도 계통적인 발전에 더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거기에 또 17세기 전반 청나라의 침략에 의한 커다란 피해가 뒤따랐다.

이 두 전란에 의한 피해는 과학기술 전통의 단절로써 나타났으며, 세종 대에 만든 과학기기는 더 이상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이르러 그것은 다시 가능해졌다. 그러나 18세기에 있어서의 청나라의 과학기술은 조선으로서는 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앞서고 있었다.

18세기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고 호소한, 이른바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은 조선의 이러한 현실을 배경으로 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청조가 받아들인 서구의 학문과 기술을 동경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학문적인 노력은 기술과 과학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과학의 역사는 거의 기술적 전통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실제적 경험과 숙련이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고 시대에서 시대로 발전하였다.

우리의 과학자들은 현상의 추구에 치중하였을 뿐 그 이론적 설명을 경시하였다. 이론적 연구와 원리적 과학보다 경험적 연구를 중시한 결과, 기술의 응용과학으로서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공장들의 구전비법과 경험적 방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정부관리인 과학자들은 정부의 정책을 따라 필요한 실용적 연구와 제작에 종사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의 창의에 의한 연구나 제작을 위한 여유를 가지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기술자들은 하급관리로서 장인으로 천시되었으며, 정신적 자유와 물질적 여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자신들의 체험과 구전에 의하여 얻은 비법을 기록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에 속하였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생산적인 사업에 대한 사회적 자극도 없었으며, 더 나은 기술의 향상을 위한 노력에서 얻는 것도 별로 없었으므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 비법에 의존하여 생존의 기계적 활동을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러한 공장기술은 17,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수광(李邈光)·유성원(柳聲遠)을 비롯한 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의 이용후생학파의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과학으로서의 학문적 발판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서구의 근대과학기술의 자극을 받아 철학적 사색에만 치중하던 사조에 반발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이상으로 삼는 과학정신에 입각한 실학운동을 벌여 서구학문을 수입하고 과학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한역(漢譯)한 서구 과학서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의 탐구와 전파뿐만 아니라,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수사들과 직접 접촉하여 서구 과학지식과 문물의 도입에 힘썼다.

서양천문학의 영향은 실학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학자들에게 새로운 우주체계를 형성하고 지구중심의 지전설(地轉說)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서양지리학의 영향은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게 하여, 대지는 구체(球體)이며 세계는 유럽·아프리카·아시아·남북아메리카·메가라니카(남방대륙)의 5대륙으로 이루어졌고, 기후는 위도를 따라서 5대(帶)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들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들 실학자들의 노력은 우리의 전통과학과 함께 전통적 공장기술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체계를 세우는 일에도 힘썼다. 그것은 서양의 각종 기계기술서와 중국의 선진적 기술과 전통기술서에 의하여 더욱 자극된 것이기도 하였다. 실학자들은 이러한 선진적 기술을 받아들이기를 역설하였고, 한편으로는 한국의 우수한 전통기술을 계승하게 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랜 기술적 유산들은 모두 정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미 완전히 잊혀진 경험적 비법이 많았다는 데 큰 원인이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을 중국의 기술서에서 인용하였다. 거기에는 물론 중국의 기술이 더 우수하고 선진적이라는 보편적 선입견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노력이 유산을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더 효율적인 기술향상을 하는 데 주목적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노력이 정책적 제도의 개혁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서구와 신흥 청나라의 문물제도에 지나칠 만큼 몰두한 나머지,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은 이상론적 개혁사상을 주장하기에도 이르렀다. 그것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볼 때 오히려 당연하였다고도 생각된다.

그러므로 실학자들이 쓴 많은 저서들은 박물학서와 같은 성격을 띠었거나 기술론 및 과학사상을 담은 것이 되었고, 경험론적 및 실용적 기술서로서 새로운 것이 적은 결과가 되었다.

실학자들의 저서 대부분은 17세기 중국의 기술서인 ≪천공개물≫이나 15세기에 정초(鄭招)가 편찬한 농업기술서인 ≪농사직설≫과 같이 실용적인 것은 되지 못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다분히 비현실적인 주장과 문헌의 집성 및 열거에서 끝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의 업적은 과학기술에 있어서의 실용적 가치로서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과학기술사가에게는 커다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 나라 과학사의 문헌과 자료는 수집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완전한 체계를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우리 나라 과학기술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주덕(成周悳)의 ≪서운관지 書雲觀志≫, 남병철(南秉哲)의 ≪의기집설 儀器輯說≫, 서유구(徐有梏)의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와 ≪오주서종박물고변 五洲書種博物考辨≫,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정약용의 여러 저서들과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 김정호 (金正浩)의 ≪대동지지 大東地志≫와 ≪청구도 靑邱圖≫ 및 ≪대동여지도≫, 최한기(崔漢綺)의 ≪명남루문집 明南樓文集≫, 유희(柳僖)의 ≪문통 文通≫ 등은 무엇보다 귀중한 자료들이다.

조선 후기 영조·정조대에, 세종 때 과학문화의 르네상스라고도 하던 모든 분야에서의 제도를 재정비한 것은 실학자들의 학문적·사회적 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영조·정조대의 과학기술 수준이 세종 때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되었을 때, 조선의 과학은 이미 청조를 통하여 들어온 서구과학의 영향에 압도되어 소화불량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뒤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 나라에의 진출은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 전통을 깨뜨리는 결과가 되었다. 거기에는 일본의 식민지주의가 심어 놓은 우리 나라 과학의 전통에 대한 부당한 경멸과 일본과학의 우월에 대한 과대한 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서구 근대과학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에 압도되어 있던 우리에게 그것은 결정적인 과학풍조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또 하나의 한국과학 전통의 단절이었다. 한국과학의 역사는 이렇게 현재와 단절된 채, 과거의 불행한 역사의 일부로 남겨졌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나라의 문화는 고대로부터 중국 문화의 깊은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래서 한국과학사는 실질적으로 중국과학사의 한 지류였으며 그 변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과학의 진보는 내적 요구에 의해서라기보다 외부에서의 자극과 압력에 의하여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 중국의 과학과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언제나 우리다운 것으로 개량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속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창조적 발견과 새로운 발전적 산물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과학이 창조적 모습으로 투영되는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2. 실학과 서양과학

조선학자들이 서유럽을 뚜렷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603년에 도입한 리치(Ricci,M.)의 〈세계지도〉(1602)를 본 뒤였다. 그것은 조선학자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고도 정확한 이해를 가진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은 그 뒤 세 차례에 걸쳐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31년 망원경과 자명종, 한역된 서구의 천문·지리학서 등이 도입되어 서유럽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과 호기심을 북돋워 주었고, 실학자들의 과학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학과 기술에 관심을 가졌던 실학자들은 그때까지 학문적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공장기술까지도 그들의 학문적 대상으로 삼았다. 그 동안 평행선을 그어왔던 학자적 전통과 공장기술의 전통이 여기서 만나게 된 것이다.

1648년 청나라가 시헌력(時憲曆)을 조선에 보내 옴으로써 조선 천문학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역법을 개정하게 하였다.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연례적으로 중국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예수회 수사와 접촉하려고 애썼고, 과학기술을 배워 많은 책을 사 옴으로써 우리 나라에 서양과학을 이식시켰다.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인정한 초기의 실학사상가로는 이익을 꼽을 수 있다. 그의 백과전서적 저술 ≪성호사설≫에는 서양과학 지식이 여기저기 엿보이는데, 서양과학의 정밀성을 높이 평가하고 공자(孔子)가 다시 태어나도 서양과학을 수용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특히 서양과학이 확실히 구명해 준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에서 둥근 지구 위에서는 어느 곳에도 중심은 없다, 따라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누구나 자기 사는 곳을 중심으로 생각해도 좋다는 실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여 주는 중국 중심적 사상에서의 독립은 바로 이런 지구설에서 자극 받아 성장한 것이 확실하다.

서양과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실학자로 홍대용을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진 그의 지전설도 사실은 당시 중국에 소개된 서양과학서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갈릴레이 이후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소개하지 않았지만, 서양에는 예로부터 지동설이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홍대용은 서양선교사가 틀렸다는 지동설의 일부를 자기 나름대로 맞다고 판단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의산문답 醫山問答〉이라는 그의 글 속에는 지전설 외에도 우주의 기원이나 은하수의 정체에서부터 천문기상의 여러 현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나열되어 있다. 또, 그는 자기 나름대로 우주무한론을 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록은 단편적이어서 아직 근대과학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대로 전통적인 동양의 자연관이 서양의 자연과학에 영향 받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766년 중국에 간 홍대용은 많은 선교사들과 만나 서양문물들을 보고 그 지식을 소개받았으며, 자기 집에는 농수각(籠水閣)이라는 조그만 천문대를 만들어 서양식 천문의기를 만들어 두기도 하였다.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은 자기가 젊었을 때 서학책을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빛의 굴절에 관한 서양과학책을 읽었음이 분명하여 렌즈에 대한 소개가 있는가 하면, 원시·근시에 관한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1792년 수원에 성을 쌓을 때 왕명을 따라 기중기를 고안해 내어 건설비를 크게 절약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때 그가 참고한 책이 테렌즈(Terrenz,J., 騰玉函)가 17세기 초에 지은 서양기계의 소개인 ≪기기도설 奇器圖說≫이었다.

그는 ≪경세유표 經世遺表≫에서 중국과 서양의 앞선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이용감(利用監)’이라는 정부기구를 둘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은 박제가(朴齊家)가 북경을 통하여 서양기술자를 초빙해오자고 한 데서도 보인다. 정약용은 중국에 소개된 제너(Jenner, E.)의 우두법을 받아들였는데 국내에서 시행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까지도 아직 우리의 실학자들 혹은 다른 학자들은 서구의 근대과학을 폭넓게 이해하고 국내에 이를 소개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서양과학 도입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 뒤 서양과학의 수용은 일단 단절되었다가 1830년 이후 다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활약한 최한기는 비로소 체계적으로 서양과학을 소개하고 있다. 1836년 그가 쓴 ≪신기통≫·≪추측록 推測錄≫이라는 저서(氣測體義로 통합됨)에서는 아직 18세기까지의 서양선교사들 작품만을 소화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1857년의 ≪지구전요 地球典要≫에서, 그는 20년 사이에 완전히 달라진 서양과학을 발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서양과학 도입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같이 서양인들과의 직접적 접촉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한역된 서양과학서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천문·역산학·지리학 및 일부 기계기술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 도입된 서양과학은 폭넓지 못하였고, 단편적이며 불연속적인 것이 되어 조선과학의 자주적이고 계통적인 발달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조선과학은 17세기 이전에 있었던 것같이, 외부의 영향과 자극을 전통 속에 받아들이고 소화하여 새로운 변화와 창조로 이어나가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의 단절을 발견하게 된다. 최한기에 의하여 서양과학이 폭넓게 체계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할 때, 조선과학은 이미 청조를 통하여 들어온 서구과학에 압도되어 소화하지 못하였다.

1876년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이미 어느 정도의 서양과학기술 서적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우리 나라 서양과학기술 이해는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우선, 중국에서 아편전쟁 이후 새로 나온 책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책의 공급도 충분하지 않았고 이해도 만족할 정도가 못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개국 이전의 서양과학 수용은 일부 지식층 사이에 개화의 필요성 정도를 인식시켜주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그 뒤의 우리 나라 과학발달에 연결될 만한 바탕을 마련해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개화사상가들로 계승되었다.

개국과 더불어 몰려든 외세 앞에 정치는 혼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방황하였고, 개국 이전에 시작된 서양과학기술의 수용은 그 방향을 찾지 못하였다. 1880년대부터 전기·통신·광산 등 외국기술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철도가 놓이고 전기가 들어오는 등의 표면적 변화를 겪었으나, 모두가 외국기술자들의 힘에 의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러한 가운데도 1881년 유학생을 인솔하여 청나라에 갔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은 천문·지리·수학·물리·화학·항해·증기기관·채광·야금·화약 등 각종 과학기술서적 53종을 수입해 왔다.

또, 1883년 무렵 담배공장·두부공장·인쇄소·양조장 등의 공장이 처음 생겼으며, 최경석(崔景錫)은 근대적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을 시작하여 품종개량에 힘썼으나, 1886년 그가 죽자 이 사업도 시련에 부닥치고 말았다.

1880년대 후반부터 서양의 과학기술은 중국과 일본에서 간접적으로, 또는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도 흘러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탕이 되어 과학의 교육과 계몽은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모든 제도는 표면상 근대화하게 되었고, 1896년부터의 독립협회 활동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그 배경이 된 제도를 받아들이겠다는 일부 새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 의하여 이끌어졌다.

독립협회의 주장 가운데는 과학기술을 이용한 ‘산업혁명’이라는 표현도 포함되어 있어, 처음 우리 나라에서는 서구사회의 특성을 산업혁명을 이룬 사회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 과학기술을 연구, 교육하며 공장을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보내어 과학을 배우게 하고, 외국의 과학책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전통사회의 모든 비합리적 폐습을 과학적으로 극복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신타파에 앞장을 섰다. 이들은 또한 당시 세계의 정세를 사회진화주의의 처지에서 파악하고 있어, 당시 기세를 부리고 있던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를 자연적 현상으로 보고, 이 경쟁의 세계에서 적자(適者)가 되어야만 생존해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개화기의 선각자로 일본·미국에 잠깐씩 유학하였던 유길준(兪吉濬)은 1895년 ≪서유견문 西遊見聞≫을 저술하여 서양의 여러 도시와 문물·제도를 소개하였다. 전신·기차 등 그가 후쿠자와(福澤諭吉)의 ≪서양사정≫을 참고하여 그의 견문을 소개한 서양문명의 이기(利器)는 한 가지씩 우리 나라에도 들어오고 있었다. 1898년 서울의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가 달리기 시작하였고, 1899년에는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기차가 놓였다.

세계우편연맹에 가입하여 외국과 직접 우편교환이 시작된 1900년 처음으로 종로에 전등이 켜졌고 이듬해부터는 전신·전파도 가설되었다. 이처럼 ≪서유견문≫ 속의 이기는 들어왔으나, 그것들을 담당할 만한 과학기술자를 교육할 기관은 사실상 없었다.

<전상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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