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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1-19 (월) 19:23
분 류 사전3
ㆍ조회: 3057      
[근대] 동학농민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 (한국사)
동학농민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

1862년 2월부터 12월에 걸쳐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지방에서 주로 발생하고 70여 곳이 넘는 지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임술민란은 그 초기과정에는 삼정의 문제, 즉 부세제도의 모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면서 진행되었다. 도결(都結)·군역세(軍役稅)·환곡(還穀)의 문제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란발생의 직접적인 계기였을 뿐 난의 진행과정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지주·전호관계의 모순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19세기 중엽의 일반적인 경우라고 보이는 진주 나동리의 상황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62.8퍼센트에 달하는 빈농층이 전체 농지의 18퍼센트만 소유하고 6퍼센트의 지주가 44퍼센트의 농지를 소유한 형상이 그것이다. 이것으로 빈농층이 임술민란의 주력을 이룬 것이 기이한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수백에서 수만에 이르는 농민군들은 백성 주도의 향회로부터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전면봉기에 이르는 것이 특징이다. 이 빈농층 중에는 양반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계급적 이해를 같이하는 그들은 신분적 관계를 뛰어넘어 참여했음이 드러난다.

2∼3월의 민란에 대해 봉건정부는 농민항쟁의 원인이 수령의 실정에 있다고 보고 안핵사(按拷使)·선무사(宣撫使)·어사(御史) 등을 파견하여 '조가(朝家)의 덕의(德意)'를 선포하여 난을 진정시키는 온건한 방책을 썼다.

그러나 4월 들어 민란은 진정 기미가 없고 오히려 선산·성주·개령·울산·군위·비안·인동·밀양·경주 등 경상도 일대에 확산되었으므로 4월 21일의 함평봉기를 계기로 강경진압책이 하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강경진압이 이루어진 곳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중앙에서 파견한 선무사·안핵사의 행차가 농민들의 위협을 받았고, 체포된 주동자들이 농민들에 의해 탈취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5월 들어서는 농민봉기가 고산·부안·금구·장흥·순천·강진 등 전라도내 여러 지역으로 파급되었고, 은진·공주·회덕·청주·회인·문의·임천·진잠·연산·진천 등 충청도 지역에도 퍼져갔다.

결국은 주모자의 선참후계(先斬後啓) 지시가 감영에 전달되어 농민봉기군을 적자(赤子)로 보던 시각이 화외필주지적(化外必誅之賊)으로 바뀌었고, 오가작통(五家作統)이나 전통적인 향약(鄕約)으로 백성들을 묶어두고자 하였다.

5월 이후 봉건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으로 인해 농민봉기의 진정을 위한 개혁안을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에는 부세문제 논의기구로 이정청(釐整聽) 설치를 공포하고, 8월에는 삼정이정책(三政釐整策)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삼정이정책은 전정에서는 구제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과외징수 금지 등의 수세상의 결함과 폐단을 제거하고, 군정에서는 계방(契房) 등의 제도를 유지한 채 동포제(洞布制)의 채택을 허용하며, 환곡의 경우 이를 혁파하고 토지 1결당 2냥씩 걷어 환곡이자로 운영되는 부분에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이 반포되자마자 곧 폐지되는 과정에서 농민봉기는 재차 유발되었다. 10월에서 12월에 걸쳐 일어난 함흥·창원·고원 등지의 민란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주·전호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부세제도의 개선이라는 미온적인 개선조차 이루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임술민란은 고립성·분산성이 극복되지 못한 채 진행되었으므로 전국적인 규모로 난이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층의 봉기는 성과없이 좌절되었다. (이상은 중세사회의 해체-서설-중세사회의 동요와 해체-민중의 저항에서)

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

19세기 중엽을 지나자 각 지역과 각 계층별 저항은 더욱 빈번하고 강력해졌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주들의 지나친 지대착취에 저항하여 항조운동(抗租運動)의 일환으로서, 그리고 봉건말기적 조세수탈에 저항하여 일어난 소빈농층의 봉기였다. 소빈농층이야말로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들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 기본계급으로서 조선봉건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층세력이었다.

빈농 유계춘(柳繼春)이 이회(里會)를 열고 직접 통문을 만들어 돌림으로써 시작된 농민봉기는 악질지주와 탐관오리의 집을 부수고 진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1862년(철종 13)의 임술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방을 선두로 전국적으로 번졌다.

1876년(고종 13)에 강요된 개항을 맞이하자 농촌경제는 더욱 무너져내렸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농민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1879년에는 울산에서 농민들이 관아로 쳐들어가 관리들을 구타하고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방면시켰다. 이들은 아전들이 마구잡이로 거두어 들이는 조세에 불만을 품어왔던 것이었다.

1880년 황해도 장련에서도 같은 성격의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1883년 동래에서도 비슷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성산·여주·원주·북청·정선·인제·광양·함흥 등지에서도 해마다 농민들이 지방의 탐관오리와 악질지주에 대항하여 횃불을 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농민봉기와는 달리 명화적(明火賊)이라는 일정한 조직을 갖춘 농민도적떼들이 경향(京鄕) 각지에서 출몰하여 부호의 집을 털기도 하고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894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이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올리기 전 곧 척왜양운동(斥倭洋運動)이 한창 진행되던 1893년 한 해만 해도 평안도의 함종·중화, 경기도의 인천, 황해도의 재령·개성·황주, 충청도의 청풍·황간, 강원도의 금성 등지에서 연이어 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봉건정부는 민씨집단의 부패타락한 정치로 인하여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이상은 근대민족의 형성-민족으로서의 결집과 민중운동-갑오농민전쟁-조선 봉건체제 해체기로서의 19세기-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에서)

출전 : [한국사], 한길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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