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7:00
분 류 사전3
ㆍ조회: 3327      
[현대] 대한민국10-문화 (한메)
대한민국10

관련문서

대한민국1-개관 자연환경
대한민국2-주민 인구 취락
대한민국3-역사
대한민국4-정치
대한민국5-국제관계
대한민국6-군사
대한민국7-통일
대한민국8-경제 산업
대한민국9-사회
대한민국10-문화
대한민국11-해외의 한국연구

문화

[교육]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가장 시급한 교육정책 과제는 국민교육제도의 근간이 될 교육의 기본법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1949년 12월에 교육법이 공포되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교육이념으로 삼게 되었으며 전 국민의 6년간 의무교육제도를 선언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1951년 전시하(戰時下) 교육특별조치요강을 제정하여 피난학생이 피난지 소재 각 학교에 등록해 수업을 계속하게 하고,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어 6500명의 대학생이 수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중의 교육방침은 도덕교육·1인1기능교육(기술교육)·국방교육 등을 표방하였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사친회(師親會)·한국교육학회가 창립되었다.

1951년 3월 역사적인 6·3·3·4제의 현행 학제가 수립되었다. 한편, 교육자치제의 실시를 위하여 꾸준히 추진한 결과, 1952년 6월에 각 교육구와 교육위원회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란으로 파괴된 교육시설을 복구하고 교원의 수급조정 및 인사 등에 관한 체계 확립, 반공·도의교육의 강화 및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등에 중점을 두어 교육정책을 추진하였다. 1950년대에는 교육인구도 크게 증가하여, 광복당시와 60년도를 비교하면 국민학교의 경우 학생수가 2.6배 증가하고 중학교의 학교수는 11배, 대학교의 학생수는 12배 이상 증가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5·16군사정부는 교육에서 인간개조운동을, 사회교육면에서는 재건국민운동을 추진하였다. 1961년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공포하여 교원의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추고, 명예교수제를 신설하며 교육대학을 설립케 하였고 교육자치제를 폐지하여 교육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어 1963년 2월에는 종래의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하였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서는 교육의 중앙집권화, 관료의 통제와 획일성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특히 민족중흥과 국가발전을 위한 교육개혁이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1968년에는 잇따른 교육정책상의 개혁이 실시되었다. 중학교평준화시책에 따른 중학교무시험진학과 대학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 지역간의 격차 해소를 위한 대학입학 예비고사 실시와 통신교육제도의 도입, 장기종합교육계획심의회 설치, <국민교육헌장>의 제정 등이 그것이다.

1968년 12월 5일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은 교육법에 명시된 홍익인간의 이념과 더불어 한국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정착되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는 <국적 있는 교육>을 표방하여 반공안보교육·주체성교육 등에 역점을 두어 국사교육강화위원회 구성, 반공·도의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윤리 과목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과학기술교육과 산학협동기술이 강화되어 전국민의 과학운동이 실시되었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개발하기 위한 새마을교육이 전개되었다. 1970년대 교육의 성격은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한국적 교육의 탐색이며 급속한 경제성장 속에서 정신적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과업을 교육이 짊어지고 있었다.

학교교육에서는 중등교육의 보편화가 이루어져 1979년에는 중학교 진학률이 91%를 나타내었으며, 대학 입학정원이 대폭 확대되었고 전문대학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이 대폭 증가되어 고등교육의 보편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입시제도에서는 고등학교 평준화와 지방교육 발전을 목적으로, 고등학교 추첨입학제도 확대와 함께 대학입시에 고교내신성적을 반영하였다.

1980년대에 와서는 7·30개혁조치로 주요 교육정책이 결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① 국민정신교육 강화 ② 평생교육 및 전인교육 강화 ③ 고등교육 내실화를 위한 대학 졸업정원제 실시 ④ 대학입시제도에 국가학력고사 실시 및 고교내신제 적용 ⑤ 조기유아교육 진흥 ⑥ 학원자율화 ⑥ 과외수업 금지 ⑧ 해외유학에 관한 개방정책 추진 ⑨ 교육세 부과 등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1980년대에 이루어진 교육개혁을 통해 교육본질을 추구하고 교육의 민주화와 자율화를 기하며, 사회 균형발전에 기여하도록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데 교육정책의 방향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입시제도 개선, 교육자치제 실시, 실업 및 산업기술교육의 대폭적인 체제 확충이 이루어졌다.

[체육]

분단이 고착화된 이후 한국의 체육활동은 조선체육회와 그 가맹단체인 각종 경기단체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 때의 체육은 대표선수를 중심으로 한 경기력 향상 및 국제 스포츠 교류와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레크리에이션 보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1948년 7월 런던올림픽에 사상 처음으로 한국 국적으로 참가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52년 헬싱키올림픽대회에서는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약 40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입상함으로써 한국체육의 탁월함을 발휘하였다.

제 3 공화국은 <체력은 국력>이라는 슬로건 아래 체육을 지원하였다. 1960~70년대는 한국의 체육이 경제성장과 더불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특히 청소년 체육의 사회적 기반이 확충되어 학교체육이 강화되었으며, 어린이들의 체육복지시설로서 1970년 어린이회관 건립, 1972년 전국소년체육대회 개최 및 청소년 스포츠의 국제교류, 레크리에이션 보급을 통한 여가선용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제5공화국 정부는 <체육입국>이라는 슬로건 아래 체육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정책을 실시하였다. 1982년 정부는 국민체육진흥법을 전면 개정하여 체육진흥의 목표에 국위선양을 추가하고 체육의 가치를 한결 더 강조하였다.

1982년 체육부를 신설하여 국민체육을 획기적으로 진흥시키며 체육을 통한 국민화합과 복지증진 및 국위선양을 도모하였다. 이와 더불어 체육시설 확장도 급속히 추진되어 1984년까지 전국에 59개의 체육공원이 조성되었고, 1986년 한강고수부지에 체육공원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또한 1985년 한국사회체육진흥회가 발족하여 국민체육 기반을 확대하였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2위,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에서는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를 차지하여 한국 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쾌거를 이룩하였다. 제24회올림픽 서울 개최는 세계에 한국을 부각시키고, 공산권 및 비동맹권 미수교국과 외교관계 개선에도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한국의 체육정책은 서울올림픽대회를 개최하기까지 학교체육·사회체육 발전 강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이른바 엘리트체육에 힘을 기울여 왔다. 물론 엘리트체육의 중요성이 무시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한 나라에서 체육이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대중체육 발전의 기초 위에서 엘리트체육 발전이 추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양대 국제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계기로 체육정책은 장기적이고 범국민적인 정책방향으로 수정되었다. 체육부의 1989년도 계획은 이를 잘 보여주는데, 당면과제로 ① 국민생활체육 육성 ② 우수선수 양성과 지속적 국위선양 ③ 국제체육협력 증진 ④ 서울올림픽대회 성과 확산 ⑤ 청소년 건전육성에 대한 범국민적 참여 분위기 확산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 중 국제체육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북방 체육외교 강화, 세계한민족체육대회 개최, 남북체육교류 실현 등을 추진하려는 것이 특히 주목을 끈다. 한편 한국이 종합 2위를 기록한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를 통해 남북체육장관회담이 이루어지고, 이어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리는 등 체육을 통한 남북교류와 화해 무드가 고조되었다.

1992년 알베르빌에서 열린 제16회 동계올림픽대회에서는 동계올림픽 출전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고, 세계10강대열에 진입하였다.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5회 올림픽에서는 마라톤종목에서 황영조(黃永祚)가 1위를 차지하며 종합성적 7위를 기록하였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는 금 4, 은 1, 동 1로 종합 6위를 차지하였고, 1996년 애틀랜타에서 열린 제 26 회 올림픽에서는 금 7, 은 15, 동 5로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프로스포츠와 국민생활>

1980년대는 한국 체육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시기였다. 프로야구·프로축구·프로씨름 등 프로스포츠가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들었고, 서울올림픽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스포츠의 경우 1960~70년대에 이미 레슬링과 복싱이 국민들로부터 많은 성원을 받아 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제 5 공화국 정부의 체육진흥 정책에 힘입어 본격적인 프로스포츠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프로야구는 1982년 3월 27일 해태 타이거즈(광주·호남)·삼성 라이온즈(대구·경북)·MBC청룡(서울)·롯데 자이언츠(부산·경남)·OB베어즈(대전·충청)·삼미 수퍼스타즈(인천·경기·강원) 등 6개 구단이 지역별 연고제를 가지고 정식 출범하였고, 곧 이어 같은 해 5월 현대 호랑이·대우 로얄즈·포항제철 돌핀스·럭키 금성 황소·할렐루야·유공 코끼리 등 프로축구팀의 슈퍼리그도 개막되었다.

1997년 현재 프로야구는 해태·삼성·롯데·LG·현대·OB·한화·쌍방울의 8개팀, 프로축구는 현대·대우·포철·LG·SK·일화·전북·전남의 9개팀이 있다. 이 밖에 민속씨름이라는 명칭으로 프로씨름이 탄생하고 프로농구와 경륜이 시작되는 등 프로스포츠가 활성화되어 국민들의 건전한 여가활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편 프로스포츠의 국제적 교류도 활발하여 1996년 야구선수 박찬호가 미국 메이저리그에, 선동렬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여 좋은 성적을 올렸으며, 1998년에는 골프선수 박세리가 미국 여자프로골프 대회에서 4연승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주최하기로 하여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종교]

오늘날 한국의 종교는 크게 불교·유교·그리스도교·신흥종교의 4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대 한국문화는 종교적 복합사회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는 지금도 민중의 종교로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유교는 종교집단화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의 윤리 토대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사상적인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크게 가톨릭교과 개신교로 나뉘는데, 남한 인구의 1/4 가까운 신자들이 활발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천도교·대종교·원불교 등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활동하고 있으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슬람교도 차츰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샤머니즘은 특정 종교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으며, 정통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조차 그 의식의 근저에는 토속적·기복적 신앙 요소를 배제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의 종교생활과 한국화된 각 종교의 특징을 살펴볼 때에는 샤머니즘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

중국을 통하여 불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의 일이었고, 백제는 384년에, 신라는 527년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기복신앙 성격이 강했던 고구려와 백제 불교에 비하여 신라 불교는 정치적·윤리적 토대를 이루며 크게 발전하였다.

7세기에 이르자 자장(慈藏)·원효(元曉)·의상(義湘) 등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으며, 진속일여(眞俗一如)를 내건 대승불교의 발전은 호국불교와 불교의 민중화로 뻗어나가 현재까지 한국 불교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고려 때는 불교를 비호하여 크게 진흥되었고, 민중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권력·토속신앙과의 지나친 유착은 한편으로 고려불교를 쇠퇴시켰다. 지나친 속화(俗化)로 인한 민심의 외면과 신흥 유학자들의 배척으로 인하여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불교는 침체상태에 빠졌고, 불교진흥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게 부흥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많은 전란 가운데 한국불교는 호국의 굳은 정신으로 강산을 지켜왔으며, 지금도 많은 노력으로 불교진흥을 꾀하고 있다. 광복 후 한국불교가 맞이한 정세는 그리 좋지 않았고, 현재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이제부터 한국불교의 과제는 참된 보살도 정립에 따른 노력 경주와 인재 양성이라 하겠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종단으로는 최대 종단인 조계종(曹溪宗)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천태종(天台宗)·진각종(眞覺宗) 등 23개 종파가 있다.

<유교>

유교의 역사는 불교의 전래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고구려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太學)을 세웠고, 백제는 285년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다. 삼국시대 유학의 목적은 관료계층 문장교육에 있었고, 종교로서의 기능이나 다른 종교와의 알력은 없었다.

유교의 부흥은 고려말부터 시작되었다. 13세기 말 안향(安珦)은 주자학을 수입함으로써 이론 중심의 유교를 발전시켰으며, 불교의 쇠락은 유교의 디딤판격이 되었다. 유교는 새로이 일어난 조선 왕조의 정치 이념으로서 조선인의 의식 바탕이 되었다.

유교는 국가의 비호 아래 활발히 성장하였으나 정치현실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특성으로 인하여 항상 정치적 싸움에 말려들었다. 조선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으로서, 이것은 명종(明宗)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되어 퇴계와 율곡의 이론에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들의 추종자들이 주축이 된 번거로운 이기(理氣) 논쟁은 붕당정치와 결부되어 공리공론으로 타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한편 조선의 유교는 단순히 정치 이념이나 학문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전통적인 조상숭배 의례와 결합되어 보편화되었다. 유교의 복잡한 제사의례는 원래 의도한 심성도야를 간과하고 형식적 의례의 관습화만 촉진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현대에 와서도 유교 혁신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그 과제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한 유교철학의 재해석을 내림과 동시에 적절한 대안을 찾는 데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⑴ 가톨릭교

조선에 가톨릭교가 알려진 것은 베이징〔北京〕을 왕래하던 사신들의 손에 입수된 가톨릭 서적들을 통해서였다. 실학자 이수광(李수光)은 1614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가톨릭교를 소개했고, 이승훈(李承薰)은 베이징에서 한국인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선교활동을 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배치되는 제사의식 금지 등을 포함한 가톨릭 교리는 1801·39·46년에 모진 박해를 세 차례나 겪어야 했다. 한국가톨릭교가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은 1886년 5월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이후의 노정도 순탄치 않아 일제강점기에는 개신교와 함께 많은 교회가 신사참배 거부 등의 이유로 탄압당했으며, 6·25중에는 공산주의와의 대립으로 많은 신자들이 죽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가톨릭교는 광복 이후의 민족적 정통성을 강한 역사의식에서 찾았다.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세계적 조직과 국내의 일사불란한 교권기구를 통하여 강력한 신앙이념을 구현하였다. 로마의 제 2 차 바티칸공의회(1962~64)가 한국 가톨릭교의 체질전환을 실현하여 현대사회에 호응할 수 있는 신학적·교리적 혁신을 단행한 흐름을 타고 가톨릭교회는 사회의 여러 사건과 정치적 동향에 대응하여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⑵ 개신교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는 데 큰 박해는 없었다. 이는 한국이 구미 여러 나라와 수교한 이후 들어왔기 때문이다. 초기 개신교선교사들은 성서를 번역하는데 힘써, 포교와 한글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개국·개화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H.G. 언더우드(장로교)·H.G. 아펜젤러(감리교) 등 주로 미국 선교사들로서, 학교를 세워 문맹을 퇴치하며 병원을 설립하는 등 많은 활동을 벌였다. 한국의 개화에 큰 몫을 담당한 개신교는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천황제와 학도병 징병 등을 반대하여 핍박을 당했다.

중앙집권적이었던 가톨릭에 비하여 성격이 다원적인 개신교는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견해차이로 분열하였다(한국 최대 교단인 장로교회 안에는 25개 이상의 분파가 있다). 개신교는 분열현상, 신자의 양과 비례하지 못하는 교육문제, 도시 교회의 지나친 물질주의화, 교회의 샤머니즘화에 대항하여 사회의 윤리적 기둥 역할을 해나가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외에 신흥·유사종교의 신도는 300만명을 넘고 있다. 이 안에는 정상적인 종교들도 있으나 소위 유사종교라는 것도 많다. 이들은 사회의 한 병리현상일 수 있으나 이들의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사회와 기성종교에 대한 도전으로 생성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성종교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참된 구원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불안과 무력과 갈등을 해소하는 의미부여의 기능을 올바르게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

1945년 광복 당시 과학기술의 수준은 의학을 제외하고는 1910년대에 비하여 본질적으로 나아진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국토분단, 훈련된 과학기술자의 부족과 시설의 미비 등으로 과학기술도 심한 침체를 보였다. 그나마의 과학기술능력도 국토분단의 현실 속에서 양분되고 6·25는 또다시 과학기술의 발달을 정체시켰다.

피난지 부산에서 창설된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는 당시 유일한 종합과학연구소로서 61년 해군기술연구소로 개편될 때까지 비교적 좋은 연구시설을 갖추고 꽤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53년 휴전 후 활발한 복구사업과 미국원조기관의 도움, 또한 학자들의 해외유학으로 연구활동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국내 과학계의 가장 큰 화제는 국방부 과학연구소의 설립과 원자력연구소의 탄생이었다. 전자는 기초적인 과학과 공학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하여 많은 유능한 학자들이 좋은 연구 분위기 속에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하였고, 후자는 56년에 체결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한·미쌍무협정(韓美雙務協定)에 의거하여 순전히 한국정부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연구소이다.

이 무렵 국립연구소는 원자력연구소를 비롯하여 23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중 대부분이 생산품시험에 그쳤을 뿐, 연구·실험분야에는 손대지못하는 실정이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 국가적 차원에서 그 개발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밀고 나가게 된 때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였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과정에서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조정·진흥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행정부처로서 67년 과학기술처가 창설되었다. 또한 이보다 앞서 1966년에 산업기술개발의 핵심체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종래의 국립연구소들의 단점을 개선한 새로운 운영방식의 종합연구기관으로 발족되었다.

KIST는 그 설립과 더불어 재해외(在海外) 과학자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크게 활성화되자 정부는 1971년에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시하여 1974년에는 특수연구기관법을 제정해 여러 연구소를 세웠다. 그 외에도 장기 인력수급계획의 수립, 이공계 대학교육의 강화, 실업교육과 직업훈련의 확충, 기능대학의 설립 등 다각적인 인력양성과 활용시책을 펼쳐왔다.

1970년대에는 과학기술 개발방향을 ①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구축 ②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③ 과학기술 풍토조성에 두었다. 한편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이라는 면에서 보면 1960년대는 공업화의 시발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는 생산시설과 기술을 거의 전적으로 선진국에 의존하면서 일부 전략적 수입대체산업인 에너지·비료·시멘트 등과 수출지향적 경공업을 육성하였다. 1970년대는 성장단계로서 좀더 선택된 전략산업인 기계·철강·화학공업·조선·전자를 육성함으로써 산업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

1980년대에는 이와 같은 60∼70년대에 이룩한 공업화를 기반으로 선진공업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자주개발단계로 돌입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공업화의 추진에 의한 경제발전에 따라, 오늘날에는 그와 관련한 기계·조선·자동차·화학·전자·섬유·건설·농업 등 일반 산업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컴퓨터·반도체·통신 등 정보산업 기술과 정밀화학·생명공학·신소재 등 재료관련기술, 설계·기계자동화 등 산업요소기술, 그리고 원자력 등의 에너지·자원기술 등 각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서는 해양·우주·항공 등 대형복합기술도 부분적으로 보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00∼300년의 역사를 지닌 선진국에 비하여 우리의 과학기술의 역사는 겨우 20∼30년에 불과하여 다른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미약한 기술축적, 과학기술 인력부족, 과학기술 개발체제의 경험부족, 전근대적 사회구조 등의 장애를 안고 있다.

앞으로의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서 산업발전의 수단으로만 과학기술을 보는 나머지 응용기술에만 치중하여 기초과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지양해야 한다. 아울러 일반대중들도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심을 가지고 생활의 과학화를 실천해 나가는 과학의 대중화운동이 필요하다.

[언론·출판]

광복 이후 지금까지 언론이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언론이 통치행위의 한 방식으로서 정책화되어 온 경우 그것은 강한 정치적 성격을 띠어 정체(政體)의 변천과 깊은 관련을 맺게 마련이다.

<정책>

언론이 제반 법률에 의해 규제되었던 정책내용을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⑴ 제1기(미군정시대;1945.8∼48.8)

광복을 맞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당국이 언론자유를 선포하고 <출판법> 등의 언론단속법령을 즉시로 철폐함에 따라 한국 언론은 사상 처음으로 최대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특히, 군정법령 제19호(1945.10.30)에 따라 정기간행물 및 출판의 등록제가 이루어지면서 언론은 더욱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무질서한 각종 정기간행물의 범람과 좌익신문의 발호에 대한 조치로 군정법령 제88호(1946.5.29)가 공포되면서 신문발행은 등록제에서 다시 허가제로 환원됨에 따라 모처럼 꽃을 피웠던 언론자유는 위축되었다.

⑵ 제2기(제1공화국:1948.8∼60.4)

정부수립 후부터 1960년 4·19 이전까지의 언론정책은 반공이라는 국시(國是) 밑에서 이루어졌다. <국가보안법(1948.11)>과 이어 시달된 언론에 관한 7개항의 단속방침에 의하여 좌익 언론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러나 이 법제들은 단순히 좌익 언론뿐만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와 비판자에 대해서도 적용되어 언론자유는 위축되었다.

더욱이 이미 실효(失效)된 것으로 알려졌던 일제의 <광무신문지법>과 미군정법령 제88호가 정부측의 자의적인 운용에 따라 통제의 근거로 이용되었으며, 또한 <신국가보안법(1958.12.24)>에 따라 언론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⑶ 제3기(제2공화국;1960.4∼61.5)

4·19에의해 얻어진 자유의 물결이 언론분야에도 밀려와서 언론의 자유방임정책이 초래되었다. 특히 <신문 등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0.7.1)>과 앞서 제정된 헌법(1960.6.15)에서도 언론자유에 대한 법률유보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명시하였다.

⑷ 제4기(제3공화국:1961.5∼72.10)

5·16으로 등장한 혁명위원회는 군사계엄령 포고 제1호를 통해 사전검열제를 실시하였으며 포고 제11호와 공보부령 제1호를 공포하여 언론기관의 대폭적인 정비를 단행하였다. 새 헌법(1962.12.26)에는 언론의 책임조항이 새롭게 삽입되었으며 <반공법>에도 언론관졔 조항을 두어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서도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언론통제정책이 계속되어 제3공화국 전후 시기에 이에 대한 제반법률이 제정되었다.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3.12.12)>을 통해 신문·통신 등의 등록요건이 엄격히 제한되고, 방송에 대해서는 <전파관리법(1961.12.30)> <방송법(1963.12.16)>을 제정하여 그 등록요건을 강력히 규제하였다.

⑸ 제5기(제4공학국;1972.10∼81.2)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걸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개막된 유신시대에 와서는 언론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어 언론이 체제에 편입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신헌법(1972.12.27)에서는 그 전에 명문화되어 있던 언론의 허가제 불인정이라는 표현이 삭제되었고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도 없어졌다.

또한 필요한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도 가능하도록 규정하여 크게 위축되는 암흑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엄격한 언론통제를 위해 수많은 법률안이 제정·이용되었는데 그 중 특히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1974.1.8)와 제9호(1975.5.13)는 일체 반정부적인 비판과 보도, 출판을 금지하는 것으로 언론 자유를 원칙적으로 봉쇄하였다.

⑹ 제6기(제5공화국;1981.2∼88.2)

1980년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후 각 언론기관별로 단행된 언론인 정리작업에 따라 수많은 언론인들이 언론계를 떠났으며 시설미비와 부실경영이라는 이유로 172종의 정기간행물과 617개의 출판사 등록이 취소되는 등 실제적인 언론통제가 이루어졌다.

더욱이 같은 해 12월 통신사의 통합과 단일화, 지방지의 1도 1사(一道一社) 원칙, 신문과 방송의 공영화, 중앙일간지의 정비 및 재편 등을 골자로 한 대폭적인 언론통폐합이 단행됨에 따라 언론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의 법적 근거로 언론에 관한 종래의 제법률들을 단일체제로 개편한 <언론기본법(1980.12.31)>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제반조치들은 언론의 자유보장보다는 공공적 책임성을 강조한 것으로 다양성이 배제된 하나의 유기적인 틀 속에서 운용되는 언론현상을 낳아 결과적으로 일원화된 언론통제라는 악영향을 초래하였다.

⑺ 제7기(제6공화국;1988.2∼93.2)

제5공화국말 민주화의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기존의 언론구조 및 <언론기본법>의 해악적 요소에 대한 비판이 강해짐에 따라 1987년 11월 제137회정기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고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방송법> <한국방송공사 개정법률안> 등을 통과시킴으로써 새로운 언론정책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법률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당한 언론통제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공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한 기존의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도 등록 및 등록취소의 엄격성과 임의성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서 그 개정이 요구되고 있다.

<실태>

8·15 이후 현재까지의 주요 언론·출판 각 매체의 실태를 시간적 흐름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신문

8·15 후 최초로 《조선인민보》가 창간된 뒤 건국 전까지 약 200여 종의 신문이 생겨났다. 제1공화국 기간에는 엄격한 언론통제로 인해 많은 신문이 등장하지 못하여 4·19 직전에 등록된 신문을 보면 일간지 41종, 주간지 136종에 불과하였다.

제2공화국에 들어와 신문 창간이 급증, 5·16 직전에는 일간지 115종, 주간지 487종으로 대폭 늘어났으나 5·16 직후 언론정비작업에 따라 일간지 9종, 주간지 32종으로 크게 감소하였다. 1962년을 최저선으로 다시 증가 추세를 보였으나 1972·73년에 1도 1사주의에 따라 통폐합과 자진폐간으로 다시 줄어들었고, 그 뒤 1980년 대대적인 언론통폐합에 따라 일간지 및 주간지가 각각 29종, 97종으로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8년에 접어들면서 언론자율화 추세에 따라 언론통폐합 때 사라진 신문의 복간과 창간 작업 붐이 일어나 새로운 자유경쟁시대를 맞게 되었다. 1993년 3월 말 현재 중앙종합일간신문 9종, 경제신문 10종, 외국어신문 3종, 문화·스포츠신문 4종, 지방종합일간신문 45종 등이 발행되고 있다. 한편, 일간신문의 발행면수도 언론통폐합 이후 주 72면으로 매우 빈약했으나 언론자율화 이후부터 증면을 거듭하여 94년 현재 매일 28∼32면으로 발행되는 신문이 많다.

⑵ 통신

8·15 후 최초로 해방통신사(解放通信社)가 생긴 뒤 많은 통신사들이 생기고 폐쇄되어 오다가 4·19 이후 언론을 통제하던 많은 법령이 폐지되자 그 전에 14개이던 통신사가 1년 사이에 308개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5·16 이후 시설기준령이 내려지자 305개사가 정리되어 11개사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뒤 1971년 말에는 8개사로 줄어들었다가 1980년말 언론통폐합이 되면서 종합통신사로서의 연합통신(聯合通信)과 전문특수통신사로서의 내외통신(內外通信) 등 2개사가 1993년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⑶ 방송

8·15 직후 9월 경성중앙방송국은 미군정청 공보부에 예속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건국이 되면서 정부 산하의 독립기관이 되었다. 1954년까지 한국의 모든 방송은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54년 12월 민간방송인 기독교중앙방송국(CBS)이 개국되면서 민간방송시대가 열리고 1959년 4월 부산문화방송국이 창설되면서 본격적인 상업방송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뒤 1961년 12월 한국문화방송(MBC), 1963년 4월 동아방송국(DBS), 1964년 5월 라디오서울(RSB)이 등장함에 따라 상업방송의 열기는 더해 갔다.

한편 텔레비전의 경우 최초의 방송국은 1956년 5월 개국된 HLKZ-TV였으나 화재로 인해 중단되었으므로 본격적인 텔레비전방송시대는 1961년 12월 서울텔레비전방송국(KBS―TV)이 개국되면서 시작되어 1964년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TBC―TV), 1966년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MBC―TV)가 개국되어 3대 텔레비전방송시대로 돌입하였다.

그러나 1980년 12월 언론통폐합에 따라 종래의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으로 이원화되었던 방송구조를 공익우선의 공영방송체제로 전환시켜 KBS와 MBC의 2대 방송망으로 재편성하였으며 그 밖에 특수라디오방송으로 기독교방송국 등 3개 방송만 남게 되었다.

1988년이 되면서 방송은 새로운 부흥시대를 맞게 되었으며 1990년 라디오방송인 가톨릭의 평화방송(PBS), FM종교방송인 불교방송(BBS)과 교통방송(TBS) 등이 개국되어 FM방송을 시작하였다. 또한 한국방송의 구조를 국영·공영·상업 방송으로 3원화하는 새로운 방송법의 공포에 따라 교육방송(EBS)이 KBS에서 독립하였고 1991년 민영방송인 서울방송(SBS)이 개국하였다.

⑷ 잡지

8·15 후 최초로 《조선주보(朝鮮週報)》가 창간된 뒤 잡지의 홍수시대를 이루어 곧 200여 종의 잡지가 발행되었다. 6·25 이후 잡지 창간이 활발해져 1961년 5·16 직전에는 월간 464종, 기타 193종이 간행되었으나 5·16 직후 정비작업에 따라 그 수가 대폭 감소되었다. 그뒤 다시 증가하여 1979년 월간 768종, 기타 544종이 간행되었으나 1980년 정기간행물 정비작업에 따라 월간 659종, 기타 428종으로 다시 격감하였다.

그러다가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잡지발행이 활발해져 1988년 한 해 동안 등록된 잡지만도 무려 987종이었다. 이후 정기간행물은 매년 24%씩 증가추세를 보여 왔는데 문민정부 출범 후 감소하기 시작, 신규등록은 1992년 672종에서 93년에는 182종으로 73%가 줄었고, 폐간은 1992년 227종에 비해 1993년 270종이었다.

⑸ 출판

8·15를 맞이하면서 출판계도 활기를 띠어 1946년에는 150여 개의 출판사가 1000여 종에 달하는 500만 부의 도서를 출간하였다. 용지난과 좌우익의 충돌로 잠시 주춤하였으나, 건국 후 다시 활발해져서 1949년에는 847개의 출판사가 1700여 종에 이르는 도서를 발간하였다.

6·25 이후 다시 공백기에 들어가 어려움을 겪다가 58년경에 와서 전집 및 문고본과 같은 기획출판물의 등장에 따라 소생하였으나 5·16 직후 출판사 정비작업이 단행되어 800여 개의 출판사가 등록을 취소당하였다. 그 뒤 침체와 재기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1970년대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나 1972년과 1980년에도 출판사 정비작업이 이루어져 각기 1000여 개, 600여 개의 출판사가 등록을 취소당하였다.

1980년에는 2088개의 출판사가 2만 985종 6460만 부 이상(초판·중판 포함)의 도서를 출간하였다. 1980년 이후 사실상 허가제로 이루어진 까닭에 신규출판사의 등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1987년 10월 출판사등록 자율화조치로 활성화되어 1993년 현재 8380개의 출판사가 2만 6304종 1억 3922만 1724부의 도서를 출간하였다.

[문학]

정부수립 후의 문학의 방향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배격하였고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수문단은 분열, 조선중앙문화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가 대립했는데, 이것은 1920년대에 등장한 선배들과 일제강점기 말에 신인으로 등장한 청년문인들과의 세대적 문단대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유치환(柳致環)·서정주(徐廷柱)·박두진(朴斗鎭)·조지훈(趙芝薰)·박목월(朴木月) 등이 시의 순수성을 고수하면서 광복 후의 시단을 다졌다. 한편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시집으로 서정주는 《귀촉도(歸蜀途, 1948)》를 냈으며 윤동주(尹東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치환의 《울릉도》, 그리고 납·월북 시인으로는 설정식(薛貞植)의 《도포》 《제신의 분노》, 김기림(金起林)의 《기상도》 《새노래》 등이 간행되었다.

광복후 특히 활동이 많았던 작가들은 채만식(蔡萬植)·김동리(金東里)·황순원(黃順元)·염상섭(廉想涉)·김송(金松)·계용묵(桂鎔默) 등이라 할 수 있다. 몇 사람의 순수작가를 제외한 이들의 작품에는 당시 사회적 현실과 가난한 생활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김동리는 좌익문학인과의 이론 투쟁에도 선봉이 되어 민족진영의 문인을 주도하고 순수문학의 진의(眞義), 문학과 자유의 옹호, 본격문학과 제3세계관, 민족문학론 등의 평론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이병기(李秉岐)·이은상(李殷相)을 필두로 한 현대시조문학과 유치진(柳致眞)·오영진(吳泳鎭) 등의 희곡문학이 정립기를 맞이하였으며, 특히 좌익계열의 문학가들이 희곡에 관심을 보여 많은 소설가들이 희곡을 내놓았다. 수필·아동문학·번역문학 등은 대체로 부진하였다.

그 뒤 6·25를 거치면서 1950년대의 한국문학은 전쟁과 전쟁체험 그리고 전후의식 등 일련의 전쟁 상황과 밀접해 있다. 특히 1953년 휴전 후의 문학을 <전후문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주로 <문총구국대 (文總救國隊)>를 비롯한 종군문인들에 의해 주도된 전쟁참여문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그 성격은 후방성과 적대방에 대한 관용과 동포애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1950년대 문단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작가로는 박종화(朴鍾和)·황순원·염상섭·박영준·최정희(崔貞熙)·김동리·박화성(朴花城)·이무영(李無影)·전영택(田榮澤)·안수길(安壽吉) 등을 들 수 있다. 6·25를 통해 이광수(李光洙)·김동환(金東煥)·김진섭(金晉燮)·김기림·김억(金億) 등이 납북되었고, 설정식·이용악(李庸岳) 등 좌익계 시인들은 월북하였으며, 김이석(金利錫)·강소천(姜小泉)·박남수(朴南秀)·양명문(楊明文) 등이 월남하였다.

한편 1954년에 예술원이 발족되고 《문예(文藝)》를 비롯해 《현대문학》 《자유문학》 《사상계》 《문학예술》 등의 각종 문예지와 《후반기(後半期)》를 비롯한 《흑산호(黑珊瑚)》 《호서문학(湖西文學)》 《시문학(詩文學)》 《시작품》 《시와 평론》 외 다수의 동인지들이 발간되었다. 문학단체로는 한국문학가협회·한국자유문학가협회·한국시인협회가 결성되었다.

삼대문예지(三大文藝誌)의 정립시대(鼎立時代)에 있어 시인들의 창작의욕과 활동이 왕성하였고 각 잡지의 추천제를 통하여 유능한 신인들이 나와 문단을 풍요롭게 했고 작품도 괄목할 만하게 되었다. 또한 시조문학, 평론문학, 희곡문학 및 수필문학 등이 부흥기를 맞이하여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실참여의 문제가 문단에 대두되어 현실참여문학론이 소설이나 비평문학 분야에서 활발히 전개되었고, 시에서는 1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보다 활발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반체제사상과 결탁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번져 갔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시의 난해성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여 시의 언어실험·형식실험이라고 불리는 것까지 실험을 시도하였으며, 또한 시조문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960년대는 본격적으로 복수의 문단시대, 즉 문학의 다양화가 전개된 시기였다. 전에 없이 많은 동인지들이 출현하고 여류문단이 풍성해져 현대시의 실험·모색기라 할 수 있다. 한편 소설은 전통적 서정주의와, 현대의 모순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조명해 보려는 사실주의적 경향과, 파괴된 인간의 심성에 대한 감각적 반응으로서의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크게 대립되었다. 이 시기의 문제작으로는 최인훈(崔仁勳)의 《광장》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김승옥(金承鈺)·이청준(李淸俊)·최인호(崔仁浩)·신상웅(辛相雄)·이문구(李文求) 등이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대 한국문학의 특성은 민족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 이에 곁들인 민중문학의 확산, 산업시대적 특성, 새로운 실험문학의 개화 등으로 정의할 수 있고, 이런 특성은 모두 이 시대의 사회구성원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의 갈등을 반영한다. 1970년대는 김수영(金洙暎)·신동엽(申東曄)에 이은 신경림(申庚林) 등의 참여시와 김춘수(金春洙)가 대표하는 무의미성 지향시로 대표될 수 있다. 이 시기에 민중시·사실주의시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소설에서는 <소설의 시대>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정도로 세태소설·역사소설·이념소설·전쟁소설·종교소설·중간소설 등의 다양한 소설 유형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시조문학·수필문학·희곡문학 등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며, 아동문학과 번역문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는 1987년 10·19조치로 월북·재북 문인에 대한 논의의 전면적인 해금, 1988년 3·31조치로 정지용(鄭芝溶)·김기림 작품의 해금, 같은 해 7·19조치로서 5명을 제외한 광복 전의 월북·재북 문인의 전면해금을 단행하였다. 이는 분단극복 의지가 쌓여 이룬 큰 성과라 할 것이다.

[음악]

<국악>

광복 이후 외래음악의 범람 속에서 국악은 그저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으나, 1951년 국립국악원이 정식 발족하여 연주활동의 태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국악교육기관은 1919년부터 실시해 온 아악부원 양성소가 효시가 되어 1954년에 덕성여자대학에서 처음으로 국악과를 설치한 이래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1964년 서라벌예술대학, 1972년 한양대학교, 1974년 이화여자대학교와 추계예술학교에 각각 국악과가 신설되었다(덕성여대 국악과는 2년 만에 폐과되고 서라벌예술대학도 2회 졸업생을 낸 뒤 폐과되었다).

이에 따라 각급 중·고등학교에서도 국악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늘어가는 추세에 있고 55년 국악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사회적인 추세에 부응하여 1975년 6월 <한국국악연구회>가 발족되어 각급 학교에서의 국악교육 실천의 촉진과 국악이론의 체계화를 목표로 거국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악의 학술 및 창작 활동인 1947년부터 본격화되어 1948년 한국국악학회는 이혜구(李惠求)·성경린(成慶麟)·장사훈(張師勛) 등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이래 현재까지 200여 회의 발표회를 가졌고, 1971년도부터는 연구논문집인 《한국음악연구》를 매년 1책씩 발간하는 한편 고악보(古樂譜)의 영인(影印)과 채보(採譜) 발간 등 많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국립국악원에서는 1969년 이래 현재까지 아악곡을 채보 발간, 한국음악학자료총서를 계속 발간중이다. 국악 이론의 체계화의 선구자는 1930년대의 함화진(咸和鎭)·안확(安廓)을 손꼽을 수 있고, 1945년 이후로는 이혜구·성경린·장사훈 등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국악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70년대 이후 국악학연구가 확산되어 권오성(權五聖)·이재숙(李在淑)·조위민(曺偉敏)·한명희(韓明熙) 등의 소장 학자들의 학술활동이 괄목할 만큼 크게 진작되고 있다.

1980년대 말에는 국악 생활화의 정착을 의미하는 아마추어와 민간 수준의 국악활동도 주목할 만한 것으로, 국악기 강습과 꾸준한 연주활동을 해온 풍류회·한소리회 등 아마추어 국악인 모임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국악보급의 자극제 역할을 했고, 1987년 중앙국악관현악단 창단 이후 정악원 연주단과 한국국악관현악단, 1988년에는 최초로 국악전용연주장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기존의 작곡과 연주 풍토에 대해서는 국악의 현대화와 민족음악 창출이라는 개념이 9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추구할 문제로 대두되었다. 1993년 국악계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 《서편제》의 열풍이 문화계를 강타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었다. 영화를 통하여 고조된 국민적 관심이 전통음악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1994년은 국악의 해로 지정되기도 하였고 상설공연의 확대와 소극장 중심의 공연문화가 정착하는 흐름을 나타냈다.

<양악>

한국의 양악은 갑신정변 이후 외국 문호가 개방되어 기독교 선교활동으로 인한 찬송가 보급과 군악대의 창설이라는 2가지 큰 계기에 의해 널리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해군정훈음악대(海軍政訓音樂隊)가 창설되어 1957년까지 한국 양악의 구심점을 이루었다.

1952년은 현대음악에 눈뜬다는 의미에서 한국음악의 전기를 이루었는데 첫째는 임원식(林元植)이 실험악회를 조직, 후의 창악회 발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둘째는 나운영(羅運榮)에 의해서 <현대>라는 어휘가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은 무조음악(無調音樂)에 본격적으로 사로잡히기 시작하였다.

1957년에는 해군정훈음악대가 민간단체로서 서울교향악단으로 복귀, 1960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시립교향악단으로 발전하였다. 인천·부산·대구에서도 교향악단이 창설되었고, 1965년 영필하모니, 1966년 바로크합주단에 이어 서울대학교·경희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관현악단이 부정기적으로 연주활동을 벌이고 있다.

1983년에 이르러 KBS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완전한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하고 있고, 1985년 코리언심포니가 발족하여 기대를 모았다. 합창운동을 보면 1950년 창단한 한국남성합창단, 1959년 아가페합창단, 1966년 대학합창단·마드리갈합창단, 1972년 메시아합창단, 1973년 국립오페라합창단·KBS합창단, 1973년 서울교향합창단 등이 있고 가톨릭교회합창단·숭실OB합창단이 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립합창단·중대매스터코랄·대우합창단 및 인천의 장로합창단의 활동이 뚜렷하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오페라운동이 시작된 것은 1948년 국제오페라사의 《춘희》 공연을 통해서이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창작오페라에도 관심을 나타내 현제명(玄濟明)이 주축이 되어 《춘향전》 《왕자호동》이 공연되었고 청중들의 반응도 높았다. 김자경(金慈璟)오페라단은 1968년 창단 이후 현재까지 한국오페라의 최장수 기록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국립오페라단·시립오페라단 등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한편 안익태(安益泰)·윤이상(尹伊桑)·정경화(鄭京和)·정명훈(鄭明勳)·김영욱(金永旭) 등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세계적 음악가도 속출하였다. 한편 레코드·라디오·텔레비전 등 대중전달매체의 보급과 함께 대중가요도 크게 성장하였다.

[미술]

광복 후의 한국미술계는 조선미술가협회와 조선미술가동맹의 두 진영으로 양립되어 있었는데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좌·우익의 투쟁과 혼란은 일단 해소되고 조선미술가동맹은 해체되었다. 1949년 9월 좌·우익간의 미술논쟁을 수단으로 하는 정치적 대립을 종식시키고 미술 본연의 자율적인 행사로 순환시킨다는 목적 아래 조선미술협회 산하에 있던 우익 진영의 미술가들에 의해 국전이 개막되고 사실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50년 6·25로 국제적인 현대미술과의 접촉이 활발해져 추상미술이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미술정보가 직접 들어와 새로운 조형이념의 수용이 가능해졌다. 한편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로 양분된 세력권 형성에 초연하려는 일부 중견작가들에 의한 순수한 조형이념의 결속과 광복 후 성장한 신인작가들에 의한 기성미학에 대한 도전의식이 1950년대 후반에 두드러졌다.

각 유파의 단체전·그룹전·개인전 등이 활발해졌으며, 프랑스·미국 등지로 건너가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하는 것이 하나의 풍조처럼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의 미술교육도 더욱 활기를 띠는 한편, 신진작가들의 국전반대 움직임도 이른바 <현대미술운동>으로 확대, 심화되어 갔다.

이 시기의 주요 그룹전으로는 <모던아트전> <창작미술전> <신조형파전> 등을 꼽을 수 있고, <현대작가 초대전>은 개별적인 그룹활동과 개인활동을 하나의 공동의식으로 묶어주는 추진체로서 차츰 현대미술운동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6·25의 경험들을 주관적인 심상(心像)의 표현으로 표출하려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60년대를 전후, 등장하여 새로운 미술세대를 구성하였다. 이들의 표현은 비정형의 추상미술과 실험미술의 유형에 해당된다.

그러나 비정형이라는 경향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형식을 이루게 되어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극복 방법이 모색되어 1967·68년에 <청년작가 연립전>이 열리게 되었다. 1968년부터 국전이 미술계의 전체적인 경향을 참작하여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상과 비구상의 두 경향으로 분리되어 실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국전은 명칭을 대한민국 미술대전으로 개칭하고 1986년부터는 미술협회가 주관하고 있다. 1968년 가을 한국현대회화전이 일본 도쿄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공식적인 첫 전시이자 국가적 차원에서의 미술 교류였다.

1980년대의 특기할 만한 미술전시는 1983년 일본국제교류기금과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기념전으로 전시한 서울 아시아현대미술전,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현대미국미술전(와이즈만컬렉션), 프랑스 20세기미술전 등이다.

1980년대에는 새롭게 민중미술이 등장하였다. 사회주의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이 운동은 젊은 미술가들에 의해서 추진되었고, 여러 상반된 해석이 진행중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는 서양화부문에서 유영국(劉永國)·김영주(金永周)·권옥연(權玉淵)·변종하(卞鍾夏)·박석호(朴錫鎬)·전성우(全盛雨)·박서보(朴栖甫)·김서봉(金瑞鳳)·윤명로(尹明老) 등이며, 전통적 동양화를 지향하는 이상범(李象範)·장우성(張遇聖)·배렴(裵廉)·노수현(盧壽鉉), 동양화에 새로운 재료나 표현기법으로 현대적인 조형을 받아들여 구미의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김기창(金基昶)·서세옥(徐世鈺)·박노수(朴魯壽)·천경자(千鏡子) 등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1950년대에 순수창작조각 외에 모뉴망조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자가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미술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따라 추상적 조형의 추구가 크게 부각되었고,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금속재가 조각에 이용되는 조각개념을 혁신시켰다.

1960년대 후반에는 장르 개념을 초월한 대담한 실험들이 추진되었고, 또한 조각가 그룹이 잇따라 등장하고 신진조각가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한편 각 분야에서 민족주의운동의 발흥과 함께 전통미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영화]

<광복과 6·25의 영화(1945.8∼54)>

이 시기는 한국영화 공백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중의 특징은 첫째, 광복영화의 물결로서 애국열사의 애화(哀話)와 독립투쟁을 다룬 영화가 속출하였고, 대표작으로 1946년 제작된 《자유만세》가 있다. 둘째, 반공영화로서 1949년 제작된 《성벽을 뚫고》가 대표작이다.

1950년까지 제작된 영화는 110여 편에 이르며, 6·25와 더불어 주로 미군이 제작한 <리버티뉴스>에 참여하거나,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공보처의 <대한뉴스> 제작 등에 관여하였다.

<한국 영화의 중흥기(1955∼70)>

영화제작산업이 본격화된 황금기이다. 1959년에는 영화제작이 108편으로 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 대를 뛰어넘었다. 영화인들의 직능별 조직화가 이루어져 1954년 제작협회를 시작으로 1955년 배우협회·감독협회·배급협회가 결성되고, 다음해에는 한국영화인단체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55년에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하였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이병일(李炳逸)의 《시집가는 날》이 특별희극상을 받았다.

이 시기의 특징은 문제성이 강한 작품의 대거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이규환(李圭煥)의 《춘향전》, 이강천(李康天)의 《피아골》, 김기영(金綺泳)의 《10대의 반항》, 유현목(兪賢穆)의 《잃어버린 청춘》 《오발탄》, 김수용(金洙容)의 《갯마을》 《안개》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강대진(姜大振)의 《마부(1961)》는 서민의 애환을 영상화하는 데 성공하여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금곰상을 타기도 하였다.

1960년대의 한국영화가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제도적 측면에서 나타났다. 1960년대 전반까지는 창작정신이 왕성한 수준 높은 예술작품을 볼 수가 있었으나, 1962년에 제정된 영화법개정으로 강화된 검열과 제작조건의 정책적인 유도 등으로 인하여 문제의식이나 사실주의 추구를 담은 작품이 줄어들고, 대체로 저속희극이나 오락적 멜로 드라마·액션영화·사극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명암의 교차기(1971∼)>

TV의 급속한 보급에 따라 영화관객의 현저한 감소와 1973년 제4차 영화법으로 영화의 질적 향상이나 창작 정신의 고취는 외면당하고 정책홍보와 사회계몽적 성격이 강한 영화가 장려되었는데 그 결과 우수영화란 기껏해야 문예영화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하길종(河吉鍾)의 《화분(1972)》, 최하원(崔夏園)의 《무녀도(1972)》, 김수용의 《토지(1974)》, 이장호(李長鎬)의 《별들의 고향(1974)》, 김호선(金鎬善)의 《영자의 전성시대(l975)》, 이만희의 《삼포가는 길(1975)》 등은 오락 일변도적인 상업영화의 범람에서 한국영화를 구출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으나 영화 본연의 자세를 경직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산업사회화과정 속에서의 풍속의 변모를 젊은 영화작가의 예리한 감성으로 포착하여 새로운 관객층을 얻는 데 성공한 작품들의 출현이다. 구태의연한 영화계 풍토에서 새싹이 태동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주요작으로는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임권택(林權澤)의 《만다라》, 이두용(李斗鏞)의 《물레야 물레야》, 배창호(裵昶浩)의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이 있다.

1988년 사회 전반에 밀어닥친 민주화의 물결에 편승하여 영화의 사전 검열문제에 관한 공륜(公倫)의 심의 완화, 공산권 영화 수입 자유화 등이 단행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제무대로의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이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한편 국내적으로도 《장군의 아들》이 한국영화 70년사상 최다관객을 동원한 것을 시작으로, 《서편제》는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신기원을 이루었다. 또한 1990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영화제가 열렸다.

[연극]

8·15를 맞이한 한국 연극은 일제의 문화수탈정책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과 국토의 분단이 몰고온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극복해야 하는 2가지 과제를 안고 있있다.

1949년 10월 창설된 국립극장은 창작극 《원술랑(元述郎)》과 번역극 《뇌우(雷雨)》를 상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6·25 발발 후 극단 신헙(新協)이 51년 《햄릿》을 시작으로 셰익스피어와 미국 작가들의 화제작을 공연해 1950년대 한국연극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를 분기점으로 비직업적 동인제 극단이 전성기를 이루어 실험극장·극단산하·민중극장·동인극장·자유극장 등이 무력화된 1950년대의 신협·제작극회를 대신해 연극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주로 창작극에 열의를 보여 차범석(車凡錫)·이근삼(李根三)·하유상(河有祥)과 같은 극작가들이 배출되었다.

1960년대는 연극의 대중화에는 실패했지만 저질화는 막은 시기로 볼 수 있다. 유치진(柳致眞)은 1958년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를 창설함으로써 한국연극의 국제교류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64년에는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기념연극제가 열려 연극의 문화적 가치를 인식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70년대에는 새로운 극작가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주목을 끌었다. 1960년대 후반에 출연한 오태석(吳泰錫)·윤대성(尹大星)·이재현(李載賢)·윤조병(尹朝炳) 등과 1970년대 초에 등장한 이강백(李康白)·이현화(李鉉和)·최인훈(崔仁勳)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신극사상 창작극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가 서구연극에 대한 정통적 수용기였다면, 1970년대 이후에는 보다 실험적이며 반(反)기성적 연극에 치중하고, 문화적 주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가면극의 기법, 판소리 형태의 도입, 마당극의 성행 등은 모두 연극의 문화주체성 확립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특기할 점은 문예진흥법이 제정되고, 1974년 문화예술진흥원이 개원하여 예술분야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그 일환으로 1977년부터 대한민국연극제가 창작극의 활성화와 거기에 연계한 극단활동의 지원을 목표로 열리고 있는데 11회부터는 서울연극제로 개칭되었다. 이 연극제는 1980년대 들어 창작극과 번역극의 비율을 종전의 번역극 절대 우세에서 적정선으로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80년초 유신체제의 붕괴로 해빙을 맞았다고 생각한 연극인들은 새 시대를 여는 연극창조로서 마당극과 시극운동을 벌였다. 한편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경직된 상황의 반작용으로 연극계에는 신파극의 재현이라는 복고의 바람과 희극물의 범람 경향이 나타났다.

그런 가운데 이 땅에서 처음 열린 국제연극제전으로 제5차 제3세계연극제가 열려 일본 전통극과 인도네시아의 그림자극, 프랑스의 인형극이 수준 높은 공연을 보였는데 <동서 연극의 상호영향>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여 작품공연보다는 학술모임의 성격이 강했다.

1981년말 공연법이 개정되어 극장 설치부터 극단조직·공연활동 등 대부분이 연극인들 자율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소형 영화관의 등장과 기획제작 시스템의 등장, 소극장의 대폭 증가, 극단의 핵분열에 의한 난립현상이 일어났다. 또 실험극이 고개를 들어 무세중(巫世衆)이 1982년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라는 자작연출의 전위극을 선보였고 1985년 남북교류의 일환으로 북한의 무대예술이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졌다.

1990년대 들어서 1970·80년대의 화제작 및 기념작의 리바이벌무대가 유난히 많았으며, 옛 소련 등 동구권과의 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992년에는 문제의식 있는 작품보다 연극적 기교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에 관객이 몰려들면서 뮤지컬이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한편 창작극진흥을 위한 운동이 펄쳐졌으나 뚜렷한 성과를 보지 못하다가 1993년 주요극단의 잇따른 창작극시리즈 무대에 의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무용]

8·15 후에 젊은층들이 주축이 된 조선무용예술협회와 기성중진들의 모임인 조선무용협회가 창립되었다. 6·25까지 5년간 한동인(韓東人)이 이끌던 서울발레단은 본격적 발레운동을 주창하고 무용의 기업화를 꾀했다. 1·4후퇴후 송범(宋范) 등 현대무용에 속하는 20여 명이 한국무용단을 조직하여 공연활동을 했으며, 이후 한국무용계를 움직이는 실질적 주류를 형성하였다.

1954년 해방 9주년 기념 무용발표회, 김백봉(金白峰)무용발표회, 1956년 임성남(林聖男)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등은 큰 호평을 받고 한국무용의 수준을 전전(戰前)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보여주었고 1959년 한국무용협회의 결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무용계는 1962년 국립무용단이 발족되어 새로운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69년까지 11회에 걸쳐 무용 공연을 가졌고 1973년 국립극장 준공 기념공연 이후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이 분리·발족하여 무용계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편 <리틀 엔젤스>가 창설되어 1962년부터 1976년까지 11회에 걸쳐 민간외교사절단으로서 해외공연을 가진 공적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의 문화예술제전에 한국민속예술단이 정식 참가하여 큰 호평을 받은 뒤 거의 정례화되어 세계 각지를 순회공연하며 한국민속예술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에는 이화여자대학교·경희대학교·한양대학교 등에서 무용인재의 양성에 힘썼으며, 평론계에서는 조동화(趙東華)·박용구(朴容九)·김경옥(金京鈺) 등 한국 무용 현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인사들의 활동이 왕성하였다. 1973년 국립극장의 장충동 이전, 1974년 서울시립무용단의 발족, 1978년 세종문화회관과 공간 사랑의 설립 등으로 무용발표의 공간이 넓어지고 한국무용계는 다채로움을 더해갈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홍정희·육완순(陸完順)·홍신자(洪信子)·문일지(文一枝)·정승희(鄭承姬)·김복희(金福喜)·김화숙(金和淑)·김옥진(金玉振)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인간문화재급으로는 이매방(李梅芳)·김숙자(金淑子) 등이 활동하였고, 정병호(鄭昞浩)가 중심이 된 전통무용연구회는 이동안(李東安)의 한량(閑良)굿이나 농악의 새로운 발굴에 열성을 기울였다. 또한 문예진흥원에 의한 대한민국무용제는 무용계를 자극, 무용에 창작적 의미를 부여하여 한국무용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90년도에는 활발한 공연과 함께 무용의 대중화가 적극 시도되어 한국무용은 세계무대로까지 확대되었다. 91년에는 스케일이 커짐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를 의식있게 제기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93년 무용계의 특징은 공연감소, 이론연구 활발, 무용단체 증가, 젊은 춤꾼들의 성장, 전통무용공연 증가 등으로 축약할 수 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윗글 [근대] 개항 (브리)
아래글 [현대] 대한민국2-자연환경 (브리)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08 사전3 [현대] 대한민국10-문화 (한메) 이창호 2003-11-28 3327
3007 사전3 [현대] 대한민국2-자연환경 (브리) 이창호 2003-11-29 3274
3006 사전3 [근대] 최시형 (두산) 이창호 2004-01-24 3268
3005 사전3 [현대] 대한민국6-경제 (두산) 이창호 2003-11-28 3249
3004 사전3 [근대] 세브란스병원=연세대학교의료원 (두산) 이창호 2003-05-08 3220
3003 사전3 [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이성무) 이창호 2002-11-08 3210
3002 사전3 [현대]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의 대응 3 (김태경) 이창호 2004-01-20 3142
3001 사전3 [현대] 서울올림픽대회-개회식 및 폐회식 (민족) 이창호 2004-01-11 3139
3000 사전3 [조선] 광해조의 당쟁 1 (이성무) 이창호 2003-08-15 3133
2999 사전3 [근대/현대] 올림픽경기대회 (두산) 이창호 2004-01-10 3112
1234567891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