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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30 (토)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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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130      
[조선] 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그의 패트론 (유홍준)
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그의 패트론 Patrons & Art in Korea

유홍준 (영남대학교 교수)

글머리에 : 북학파와 김정희

한국회화사에서 18세기는 정선과 김홍도의 시대였다. 이 시기 회화는 진경산수(眞景山水)와 속화(俗畵) 그리고 문인화풍의 한국적 정착이 실현되었다. 한국서예사에서 18세기는 윤순(尹淳)과 이광사(李匡師)의 시대였다. 이 시기 글씨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왕희지 서체의 한국적 토착화가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18세기는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민족적 경향이 우위를 점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19세기로 들어서면 이러한 민족적 경향은 점차 매너리즘에 빠져 더 이상 참신한 예술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향토적인 분위기'가 살아있던 예술이 점차 '촌스러운' 경향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그림과 글씨에서 국제적인 감각의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김정희(金正喜: 1789∼1856)가 일으킨 신문인화풍과 추사체(秋史體)로 대표되는 개성적인 서체였다.1)

19세기에 신문인화풍과 개성적인 서체가 등장하는 배경에는 조선후기 사상계의 동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8세기는 여전히 주자학이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치민(經世治民)을 모토로 내세운 실학(實學)이 일어나 이 시기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이 18세기 회화와 글씨의 한 사상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이 되면 그 동안 근 100년간의 청나라와 불편한 관계로 제대로 수용되지 못한 건륭시대의 발달한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화적 개방론이 일어났다. 이런 신사상을 이끈 것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그 제자들이었으며 이를 흔히 '북학파(北學派: 北京學派의 준말)'라고 부른다. 북학파중에서도 북경의 학문과 예술동향에 대하여 가장 정통한 학자는 초정(楚亭) 박제가(朴濟家)였다. 그는 3차례 북경에 다녀왔고 그가 교류한 청나라 학자와 예술가는 무려 2백명이나 되었다.2) 그 박제가의 수제자가 바로 김정희였다. 김정희는 이제까지 북학파들이 북경의 학예계와 교류하던 것을 한 차원 끌어올려 19세기 조선의 그림과 글씨를 국제화시키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1. 김정희의 북경행과 고증학

추사 김정희는 1786년 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경주김씨로 당대의 명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영조의 사위였으며, 아버지는 판서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순조시대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과 함께 세도정치의 한 문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집안 배경은 김정희가 정치적으로 출세하고 학문과 예술의 실현에서 많은 편의를 제공받는 계기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어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요인이기도 했다.3)

김정희는 이런 좋은 가문에서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쌓아갔다. 그러나 그의 나이 20세 때 스승 박제가는 세상을 떠났다. 김정희는 24살에 과거 예비시험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때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호조참판이었는데, 마침 해마다 동지날에 맞춰 북경으로 떠나는 외교사절의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김정희는 외교관의 아들로서 따라갈 수 있는 자격이 생겨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1809년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를 통하여 익히 들어온 북경에 가서 그곳 학자와 예술가들을 직접 만나 교류하는 계기를 갖게 됐다.

북경에서 40여일을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그곳의 대표적인 학자인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사제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경학자(經學者)로 고전의 원류를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의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글씨 또한 교과서적인 법첩(法帖)을 뛰어넘어 한(漢)나라·남북조(南北朝)시대의 비문에 기초를 둔 가운데 개성을 찾고 있었다. 이들의 글씨는 입고출신(入古出新), 즉 고전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것이 모토였다. 따라서 이들의 학문과 글씨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작업이기도 했다.

당시 47세의 완원은 훗날 "청나라 학문을 완성하고 선양한 절대적 공로자"로 칭송되는 학자였는데, 그는 김정희의 학문적 자질을 사랑하여 제자로 삼고 자신의 성을 따서 '완당(阮堂)' 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완원은 중국의 고전 13경에 대한 역대의 주석(footnote)를 집대성한 물경 245권짜리 책을 만난 자리에서 선물하였다.4)

한편 옹방강은 당시 78세로 금석학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고서(古書)·탁본(拓本)의 대수장가였다. 김정희는 옹방강과도 사제의 인연을 맺고 그의 서고인 '석묵서루(石墨書樓)에서 희귀한 옛 글씨와 구하기 힘든 옛 비문의 탁본을 직접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가졌다.

김정희는 이외에도 북경학계의 명사들인 이림송(李林松), 주학년(朱鶴年), 옹수곤(翁樹堒), 조강(曹江), 오숭량(吳崇梁), 섭지선(葉志詵) 등과 만나 이후 죽을 때까지 학문과 예술을 교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들과의 교류가 얼마나 진지하고 뜨거웠는가는 김정희가 북경을 떠날 때 열린 송별연에서 주학년이 그린 <추사전별도> <도판1>만으로도 엿볼 수 있다.5)

그리고 김정희는 귀국 후에도 이들과 끊임없이 교류하여 학문과 예술에서 북경의 학예계에서 크게 칭송되었다. 그가 얼마나 큰 명성을 얻게 되었는가는 훗날 정조경(程祖慶)이 김정희에게 보낸 한폭의 그림 선물로 알 수 있다. <도판2> 정조경은 김정희가 북경에 체류할 때 만나지 못했으나 하도 그 이름이 높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 인사드린다며 다음과 같은 글을 그림 상단에 써 넣었다.6)

김정희 선생을 나는 비록 아직 그 얼굴을 대하지 못했으나 문장과 학문을 존경하여 사모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려 바치오니 그림이 치졸하고 혹 잘못 그려진 것이 있을지라도 수염 한번 쓰다듬으시고 한바탕 웃어주십시오.

북경의 학문과 예술을 직접 경험한 김정희는 귀국후 금석학과 고증학 그리고 고전적 글씨체의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북경 학계의 동향을 단순히 국내에 소개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학문적·예술적 경향을 조선사회 속에 뿌리내리는 토착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김정희는 외래경향에 심취하여 거기 몰입하고 마는 몰주체적인 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31세 때 조인영(趙寅永)과 서울 북한산에 올라, 여기에 세워져 있는 비는 6세기 신라시대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고 세운 순수비(巡狩碑)임을 증명한다. 또 32세 때는 경주 무장사(鍪藏寺)터를 찾아 여기에 있던 비는 9세기에 김육진(金陸珍)이 왕희지의 글씨체로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풀섶에서 깨진 비편을 주워 이것을 탁본하여 옹방강에게도 보내주었다.

또 김정희는 벗 권돈인(權敦仁)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 탁본을 부탁하여 이를 분석하고 고증하는 장문의 논문을 쓰게 되니 이것이 유명한「진흥2비고(眞興二碑攷)」이다.7)

김정희는 자신의 이런 학문 자세를 스스로 밝힌 글도 발표하였다. 그 대표적인 논문이「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로 내용인즉, "학문의 길은 사실에 근거하여 진실을 찾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김정희의 이런 노력은 동시대 문인·학자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북경으로 떠나는 사신과 통역관 등은 김정희의 소개를 받고, 이들은 교류했으며 돌아올 때는 북경의 책과 그림·글씨 등을 구해오곤 했다. 신위(申緯) 같은 분은 북경에 갈 때 김정희에게 옹방강에게 보내는 소개편지를 받아가고 그곳을 다녀온 뒤에는 지난날 쓴 시를 모두 태워버리고 이 신경향에 동참하게 된다.8)

김정희는 이처럼 조선후기 고증학의 리더이었다.

2. 김정희와 그 추종자들

그림과 글씨에 있어서도 김정희는 개성적인 신문인화풍의 리더였다. 그는 시·서·화 모두에 달인이었으며 이론가이기도 하였다.

김정희의 예술론은 글씨나 그림 모두에서 높은 정신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라고 했다. 당시 화원들의 매너리즘에 빠진 아카데미즘이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 근본을 둔 것임에 반하여 그는 높은 교양과 정신에 입각한 개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예서(隸書)쓰는 법은 가슴속에 고아(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고아한 뜻은 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끝에 발현되지 않는다.9)

뿐만 아니라 그는 당대의 감식가(鑑識家)였다. 그는 중국의 역대 그림과 글씨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저서인 『완당전집』을 보면 그가 중국의 서화를 논한 범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대단한 미술사가였다. 또 감정에도 능하여 권돈인의 중국 서화 콜렉션은 거의 다 김정희의 감정을 거친 것이었다.

김정희는 또한 탁월한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그가 주창한 새로운 개성적인 문인화풍에 동조하는 화가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허련(許鍊) 등인데, 이들은 대개 중인(中人)출신이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사이에 기술직(技術職)을 담당하는 중인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하급관리, 통역관, 의사, 화가 등 전문직을 갖고 있었다. 이 중인들이 사회적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18세기부터이지만, 이들이 양반계급 문인과 긴밀한 유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정희가 엄격한 신분질서를 넘어서 중인들과 동인을 형성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의 스승인 박제가도 중인출신이었다. 이리하여 김정희의 시대로 들어서면 중인계층이 미술계를 석권하는 인상을 준다.

김정희가 중인 출신 화가들을 이끌어간 모습은 무엇보다도「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잘 나타나 있다. 1839년 여름 어느날 김정희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그림과 글씨에 대해 품평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8명의 글씨와 8명의 그림에 하나 하나 품평을 내렸다. 이때 평한 그림 위에는 조희룡이 대필한 김정희의 화평(畵評)으로 쓰여져 있다. <도판3> 이때 참가한 화가는 김수철(金秀哲), 이한철(李漢喆), 허련(許練), 전기(田琦), 박헌석(朴憲碩), 유숙(劉淑), 조중묵(趙重默), 유재소(劉在韶) 등이다.10)

3. 추사체의 성립과 개성으로서 '괴(怪)'

김정희가 벼슬길에 들어선 것은 34세 때인 1819년 과거시험 본과에 합격하고 부터이다. 이후 그는 규장각(奎章閣)의 대교(待敎), 충청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54세 때는 병조참판이 된다. 그러나 김정희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것은 정권다툼에서 아버지 김노경이 정쟁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45세 때는 아버지가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어 4년간 귀양살이를 하는 바람에 그 기간동안은 김정희도 관직에서 물러나는 공백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벼슬을 얻어 54세 때 김정희는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리고 1840년 그는 동지사의 부단장으로 북경에 가는 임명을 받았다. 그는 30년만에 북경에 다시 찾아가는 벅찬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정변이 일어나 10년전 아버지 사건이 다시 터지면서 김정희는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있었다. 이때 친구인 조인영의 도움으로 김정희는 죽음을 간신히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만 8년3개월 동안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김정희는 말할 수 없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나쁜 기후, 나쁜 벌레, 낮선 음식에 설사병과 가래끊는 기침 그리고 안질까지 겹쳤다. 그 고통을 동생이나 벗에게 하소연한 편지를 보면 애처롭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귀양온 3년째는 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있었고, 환갑이 되어도 가족 하나 곁에 있지 못하는 외로움을 겪어야 했다.

허련, 강위(姜偉)같은 제자와 초의(草衣)스님같은 벗이 찾아오는것이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서 김정희는 제주 유배시절에 수없이 많은 편지를 썼다.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그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 <도판4>도 사실은 그런 외로움의 표현인 것이었다. 이 작품은 제자인 이상적이 변치않고 북경학계의 신간 서적을 멀리 제주도까지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린 것이었다.

바로 이 외로운 8년간 김정희는 이제까지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김정희를 위해서 또 한국미술사를 위하여 여간 복된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 유배시절 김정희는 비로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 것이다. 입고출신(入古出新)을 실현함에 귀양살이 이전이 고전을 익히기에 힘쓴 때라면 그 이후는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개성의 발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김정희와 동시대에 살았던 박규수(朴珪壽)의 다음과 같은 평으로도 알 수 있다.

… 김정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童基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는 옹방강을 열심히 본받았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과 … 구양순(歐陽詢)을 따랐다. 그러나 만년에(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되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었다.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11)

이런 개성적인 그의 글씨를 세상 사람들은 추사체라고 불렀다.

1848년, 63세 때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서울 용산 한강변에 새로 집을 마련하고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서울 경복궁 옆에 있던 월성위궁(月城尉宮)은 몰수되어 초라한 강변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12)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도 그는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무수한 명작을 낳게 된다.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얻은 개성을 더욱 밀고 나아가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 낡은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집> <도판5> 같은 명작을 제작했다. 이러한 김정희의 개성은 한마디로 '괴(怪)'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13) 김정희의 제자뻘되는 유최진(柳最鎭)은 추사체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정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진실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김정희가 소사(蕭寺)에서 남에게 써준 영어산방(潁漁山房)이라는 편액을 보니 거의 말(斗)말한 크기의 큰 글씨인데, 혹은 몸체가 가늘고 곁가지가 굵으며, 혹은 윗부분은 넓은데 아랫쪽은 좁으며, 털처럼 가는 획이 있는가 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잘못이 없고 마음을 격동시키며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게 불가하다.14)

김정희는 자신의 글씨가 이처럼 '괴(怪)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김병학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근자에 들으니 제 글씨가 크게 세상 사람 눈에 괴이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 글씨 같은 것도 혹시 괴이하다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오. 이는 당신이 판단할 일이외다. 웃고 웃으며 이만 줄입니다.15)

그러면서 김정희는 어느 제자에게 개성으로서 '괴'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요구해온 서체는 본시 처음부터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氣)가 섞여 나왔습니다. ……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들에게 달린 것이니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하지 않으면 글씨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16)

김정희는 난초그림에서도 이와 같은 개성으로서 '괴'를 구사하였다. 그 대표작이 <부작란(不作蘭)> <도판6>인데, 부드러운 난초잎을 갈대잎처럼 그려놓는 대담성을 보이면서 화제(畵題)에는 스스로 선적(禪的)인 경지임을 자부했다.

난초를 안 그린지 벌써 스무 해                                不作蘭畵二十年
우연히 흥이 나서 그렸는데 천연의 본성이 드러났네    偶然寫出性中天
문 닫고서 찾고 찾고 또 찾은 곳이니                         閉門覓覓尋尋處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이라네                         此是維摩不二禪

김정희의 한강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 3년 째 되던 해인 1851년, 다시 정치적 다툼이 일어나 벗 권돈인이 순흥으로 유배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 배후에 김정희가 있었다는 혐의를 받아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1년간 귀양살이 끝에 풀려났다. 이때 김정희는 67세의 고령이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예 서울을 떠나 한강 남쪽 청계산 과천에 살면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게 된다. 이때 김정희는 스스로  '늙은 과천사람' 이라는 뜻으로 '노과(老果)'라는 호를 자주 사용하였다.

과천시절에도 김정희는 변함없이 벗들과 어울리고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 탐구와 시·서·화로 세월을 여유롭게 살았다. 북경으로 가는 인편이 있으면 책을 구해 보았고, 권돈인, 정학연, 초의 스님 같은 벗 그리고 윤정현(尹定鉉), 심희순(沈熙淳), 조면호(趙冕鎬), 김석준(金奭準), 오경석(吳京錫) 같은 제자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여전히 그는 새로운 학예의 리더이었다. 그리고 주위의 요구에 따라 많은 글씨를 써주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봉은사(奉恩寺)라는 절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지내기도 하다가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만년 작품을 보면 여전히 개성으로서 괴(怪)가 강하다. 그러나 만년에 이를수록 그의 글씨는 고졸(古拙)한 경지에로 나아간 것을 볼 수 있다.

김정희는 개성이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괴'일 때 그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런 자세는 꾸임없고 욕심없는 허화(虛和)'의 경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의 제자 김석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써낸 글씨를 보니 다 허화(虛和)하지 못하고 사뭇 악착같은 뜻만 많아서 별로 경지가 높지 못하니 한탄스러운 일이로세. 이 글씨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한 곳에 있다네.17)

이런 허화의 경지, 졸(拙한) 가운데 괴(怪)가 자연스럽게 살아난 김정희의 대표작은 그의 두 개의 마지막 작품인 봉은사 <판전(板殿)> <도판7>과 대련 <대팽두부(大烹豆腐)> <도판8>이다.
<판전>은 스스럼없는 졸한 맛이 강한 가운데 "71세 된 과천사람이 아픈 중 쓰다" 라고 하여 더욱 이 글씨의 허화로운 멋을 보여준다. <대팽두부> 역시 욕심없는 순구한 멋이 한껏 풍기는데 협서로 쓴 글 내용이 이 글씨의 정신을 더욱 높여준다.

최고가는 좋은 반찬은 두부와 생강과 나물
최고가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과 손자18)

4. 김정희의 패트론과 패트론으로서 김정희

이처럼 김정희는 19세기 2/4분기 그림과 글씨에서 새로운 경향을 이끌어간 뛰어난 서화가였다. 그는 이 경향을 기존의 양반 문인들, 중인계급의 신 지식인, 그리고 국외자인 스님들의 세계까지 전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정희는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의 예술활동을 위한 패트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 점은 정선, 김홍도 또는 여느 화원과는 다른 처지였다. 오히려 그는 동료와 제자들의 패트론 역할을 할 위치에 있었다.

양반으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권돈인, 조인영, 신위, 김유근, 흥선대원군인 이하응, 신관호, 윤정현, 심희순, 조면호 등이다. 중인으로서 그를 따른 서화가는 조희룡, 전기, 조삼수, 허련, 이재관, 유재소, 조중묵, 박혜백, 오규일, 김석준, 오경석 등이다. 스님으로서는 초의, 혼허(混虛), 영하(映河), 만허(晩虛) 등이다.

김정희는 이들을 위하여 수많은 작품을 제작해 주었으며, 그때마다 작품에 받는 이의 이름과 기증하는 마음을 적곤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정희 명작들은 거의 다 이런 제작내력을 갖고 있다.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부작란>은 달준이에게, <잔서완석루>는 소후에게, <명선>은 초의에게 <퇴촌>은 권돈인에게, <침계> <도판9>는 윤정현에게, <대팽두부>는 고농에게, <운외몽중(雲外夢中)>은 홍현주에게19) 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김정희에게 작품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이름없는 서생(書生)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허련의 증언에 의하면 궁궐의 많은 현판이 김정희의 글씨였다고 하는데20)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도 임금은 김정희의 글씨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이토록 주문이 쇄도하여 김정희는 미처 주문에 다 응하지 못하고 미루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시절 그곳 관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 것이 있다.

편액 글자는 이렇게 않은 몸이 수일 사이에는 도저히 팔힘을 쓸 수 없으니 … 조금만 늦춰잡고 용서하면 어떻겠소.21)

그러나 김정희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는 벗과 제자들이 반대로 김정희의 패트론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김정희의 예술을 지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정희는 인복이 참으로 많은 분이었다. 이런 도움을 준 분이 하나 둘이 아닌데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에는 강경의 뱃사람 양봉신이라는 사람이 자원해서 물품과 편지를 심부름해 줄 정도 였다.22) 정치적으로 곤궁에 몰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서 조인영이 보여준 도움, 제주도 귀양살이 이후 집안 형편이 어려울 때 권돈인, 윤정현, 홍현보, 심희순이 도와준 것은 지극한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김정희가 보낸 감사의 편지는 눈물겨운 것이다.

설을 가까이 둔 한 차레 추위는 유난히 심하여 강기슭의 얼음 기둥과 설차(雪車)가 다시금 살갗을 에는 듯하여 아무리 따뜻한 털방석으로도 막아 낼 도리가 없을 것 같았으니 하물며 종이창과 밑바닥까지 거칠고 쓸쓸한 대나무 바닥에서야 어떻했겠는가. ……  보내준 여러 물품에 너무도 마음 써주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네. 눈이 침침하여 간신히 적네.23)

결국 이들이 김정희의 패트론이었고 또 김정희의 예술적 동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5. 김정희 작품의 판매상황

근대적인 의미의 패트론이라면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을 구입하여 주는 상인이나 콜렉터를 생각하게 되는데 김정희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약간은 있었던 것 같다. 아직 화상(畵商)이 나타날 시기는 아니었고, 대단한 콜렉터가 등장할 정도로 시장경제가 활성화된 시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시중에서 곧잘 판매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김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모씨(某氏)가 내 글씨를 시중에서 구입하여 수장했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입 안에 든 밥알이 벌 나오듯 튀어나왔다. 그래서 붓을 쥐고 쓰며 부끄러움을 기록함과 동시에 서도(書道)를 약술하고 또 이로써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24)

당시 그림과 글씨의 판매 상황에 대하여는 김정희의 제자인 전기가 역시 김정희의 제가인 조희룡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두당척소(杜堂尺素)>라는 제목이 붙은 16통의 편지는 거의 다 서화의 판매에 관계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25)

8폭 족자는 모두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마침 그것을 한꺼번에 몰아서 사시려합니까? 당신은 물건에 대한 탐욕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격은 본래 온 사람이 40냥을 부른 것을 여러번의 흥정으로 24냥이 되었으니 이 이상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울 것이나 한번 물어보기는 하겠습니다.

<눈 개인 풍경> 족자는 값이 15냥이라 합니다.26)

여기서 당시에는 이런 정도의 미술시장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물가와 화페가치로 그림값의 고하를 따져볼 정확한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으나 19세기 2/4분기의 중간층 월소득은 평균 10냥 정도로 알려져 있다.27) 그런 중 김정희의 글씨가 비싸게 팔린다는 증언도 있다.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김정희를 찾아간 다음 <추사 방문기>를 쓴 상유현(尙有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나라 근세 명필은 김정희를 제일로 꼽는다. 사람들이 다 그 서체를 좋아하고 그 첩(帖)을 귀중히 여긴다. 청나라 사람들이 그 글씨를 많이 사기 시작하여 일본 사람들도 또 많이 거두어 요즘은 이것을 더 귀히 여겨 첩(帖)하나의 값이 백여 원에 이르는 것도 있다. 내 얕은 안목으로 무엇이 그리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어 그런지 알 수 없다.28)

특히 김정희는 과천시절에 글씨를 많이 썼는데, 대개는 제자 김석준에게 써준 것이었다.

김석준이 … 나의 글씨 대자(大字)·소자(小字)를 막론하고 모두 거두어들여 상자에 가득 찼는데도 오히려 부족을 느껴 또 아이 종의 어깨를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메게 하였다. 그 후 한달이 지나서 또 나막신을 챙겨가지고 청계산(淸溪山)으로 나를 찾아와 …… 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29)

이런 사실을 미루어볼 때 생활이 궁핍했던 김정희가 혹시 김석준을 통하여 내다 팔게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명성은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는데 이들 또한 김정희 글씨를 사간일이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김정희는 양문신이라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일본사람이 나의 글씨를 요구해 왔는데 먼 데 사람의 정중한 뜻을 저버릴 수도 없는 일일세. 다만 팔이 강하고 붓이 건장할 때는 약간 힘을 쓰면 마칠 수 있지만 이렇게 여지없이 쇠퇴하여 …… 아무래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 같네.30)

또 <추사방문기>에서는 그의 글씨가 중국인에게도 인기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들이 어떤 면을 좋아하였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있는 증언을 남겼다.

청나라 사람으로 김정희의 글씨를 사는 자는 글씨를 아는 서가였다. 그러나 오직 김정희의 예서(隸書)만 구하고 행서·초서(行草)는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한 중국인은 말하기를, "김정희의 행·초는 편획(偏劃)이 있어 서예가는 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 예서는 옛스러운 멋이 있고, 법식(法式)에 합하여 참으로 대가였다. 이를 중국에 두어도 족히 대가라 칭할 만하였다. 김정희의 글씨는 …… 넉넉히 판교(板橋) 정섭(鄭燮)과 자웅을 겨눌 만하다. 김정희와 정섭은 다 중국과 동국의 기괴한 글자의 대가요 비조(鼻祖)다.31)

맺음말

김정희는 19세기 2/4분기에 예술가로 할동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조선적인 화풍에 국제적인 감각의 새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이 사조의 리더이자 많은 추종자들의 패트론이기도 하였다. 결국 김정희의 예술은 이제까지의 민족적인 성향을 국제적 경향으로 바꾸는 결과를 낳아 그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김정희는 조선의 그림과 글씨가 고루한 향토성에 머물지 않고 폭넓은 국제적 지평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단계 끌어올린 공로자였던 것이다.

김정희는 조선의 그림과 글씨를 국제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 시각에서 볼 때도 당대의 최고가는 예술가였다. 청나라 시대의 글씨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개성을 추구했다. 그 대표적인 서예가가 판교 정섭이다. 그후 금석학이 일어나면서 고전에 근거한 개성을 요구하게 되어 이병수(伊秉受), 등석여(鄧石如) 등이 나왔다.32) 그러나 정섭은 개성이 강한 만큼 고전의 근거를 잃었고, 이병수·등석여는 고전에 충실한만큼 개성이 약했다. 그러나 김정희는 이 모두를 한 몸에 지닌 서예가였다.

일찍이 일본의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린(齌塚隣)은 김정희의 고증학·금석학을 일컬어 "청나라 학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다" 33)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는데 이는 그의 글씨에 대해서도 똑같이 대입시켜 말할 수 있다.



1) 李東洲, 「완당바람」, 『우리나라의 옛 그림』, 1995, 학고재, pp.314∼354
2) 후지츠카 린, 『淸朝文化東 の硏究』,1975, 國書刊行會, 日本, pp.104∼119
3) 최완수, 『김추사 연구초』, 1976, 지식산업사, pp.14∼16
4) 후지츠카 린, 앞의 책, p. 112
5) 후지츠카 린, 앞의 책, p. 119
6) 古美術同人會, 『추사탄생 200주년 기념전』, 1986, 백악미술관
7) 김정희, 『국역 완당전집』제1권, 1995, 민족문화추진회, pp.26∼46
8) 손팔주, 『자하 신위 연구』, 1983, 태학사
9) 김정희, 「우아에게 써서 보이다.」, 『국역 완당전집』제2권, p.336
10) 안휘준, 「조선왕조 말기의 회화」,『한국근대회화 100년전』, 1987, 국립중앙박물관, pp.194∼198
11) 박규수, 『박규수전집』상권, 1978, 아세아문화사, pp.792∼793
12) 유홍준, 「추사 김정희-제5부」,『역사비평』1999, 가을호
13) 임창순, 「한국서예에서 추사의 위치」,『한국의 미-추사 김정희』, 1985, 중앙일보사, pp.178∼181
14) 柳最鎭, 『樵山雜著』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15) 김정희, 「김병학에게」, 『국역 완당전집』제2권, p.14
16) 김정희, 「심희순에게」, 『국역 완당전집』제2권, p.44
17) 김정희, 「김석준에게」, 『국역 완당전집』제2권, p.109
18) ------, 『간송미술관소장 추사정화』, 1983, 지식산업사, p.235
19) 유홍준, 「추사 김정희 필 <운외몽중>첩 고중」, 『인문연구』제18집, 1997,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pp.211∼231
20) 허련, 『소치실록』, 1976, 지식산업사, p.18
21) 김정희, 「장인식에게」, 『국역 완당전집』제2권, p.56
22) 유홍준, 「추사 김정희-제3부」, 『역사비평』1998, 겨울호, p.310
23) 김정희, 「홍보현에게」, 『국역 완당전집』제2권, p.111
24) 김정희, 『국역 완당전집』제3권, p.15
25) 임창순, 「해제 杜堂尺素」,『서지학보』제3호, 1990, 한국서지학회, pp.167∼177
26) 임창순,  앞의 글, p.174
27) 안병욱, 『조선시대 鄕會와 民亂』, 2000,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8) 김약슬, 「추사방현기」, 『도서』, 1966, 을유문화사, p.35
29) 김정희, 「김석준에게 써 보이다.」,『국역 완당전집』제2권, p. 329
30) 김정희, 「양문신에게」,『국역 완당전집』제2권, p.126
31) 김약슬,  앞의 글, p.38
32) 宇野聖村, 「中國書道史(下)」, 1982, 本耳社, 東京, pp.231∼233
33) 齋藤塚,  『淸朝文化東 の 硏究』, 1975, 日本, 國書刊行會, p.48

출전 : 경북대학교박물관 2000년 강의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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