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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17 (토) 21:53
분 류 사전3
ㆍ조회: 312      
[근대] 의병 사료 모음 (역사교실)
의병전쟁(義兵戰爭)

자료 1)

오늘 병사를 일으키려는 것은 또한 자위하려는 것이 아니고 국모1)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대개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버지의 군사를 부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며 大義이다. 만약에 아들이 어머니의 원수가 있으면 아버지의 명을 기다린 후 복수한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이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것이겠는가? 지아비도 지어미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재주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시세를 살피지 않은 까닭이다. 호연히 결속하여 동지와 더불어 약속하고 마음으로 복수를 맹세할 따름이며 삼가 여기에 게시한다. (『關東倡義錄』)

자료 2)

……병신년[1896] 이후 왜적의 행패는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니, 노무자를 징발하여 서도(西道)와 삼남의 철도공사에 강제노동을 시켰고, 임금을 위협하여 민적(民籍)과 토지문부(土地文簿)를 앗아갔다. 화폐제도를 변경하여 재산을 빼앗고 세금을 갑절로 올리며, 난적(亂賊)을 사주하여 흉당(凶黨)을 만들게 하였으니 이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인 것이다.

하물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대신을 죽이고 국권을 마음대로 조종하여 마침내 천만고에 없었던 괴변을 자아냈는데도, 정권을 잡은 대신들은 도리어 왜적과 부화뇌동하여 범의 날개를 달아주고 용에게 구름을 안겨주는 셈이 되었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도다.

이번 한 때의 의병모집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우리 동포들이 함께 응할 것이다. 이에 동포에게 삼가 고하노니 이 창의에 함께 도와 호응해 준다면 천만다행이로다.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제1권 자료편)

자료 3) 의병장 허위의 통감부에 대한 30개조 요구

1. 태황제[고종]를 복위시켜라.
2. 외교권을 환귀(還歸)시켜라.
3. 통감부를 철거하라.
4. 일본인의 서임(敍任)을 시행치 말라.
5. 형벌권의 자유를 회복하라.
6. 통신권의 자유를 회복하라.
7. 경찰권의 자유를 회복하라.
8. 정부조직의 자유를 회복하라.
9. 군대시설의 자유를 회복하라.
10. 의관을 복고하라.
11. 을미·을사·정미의 국적을 자유로이 처참케 하라.
12. 내지의 산림·천택·금·은·동광을 침해하지 마라.
13. 내지의 부동산을 매매하지 말라.
14. 항해권을 환귀시켜라.
15. 어채(魚採)의 이익을 침해하지 말라.
16. 교육권의 자유를 회복하라.
17. 출판권의 자유를 회복하라.
18. 군용지를 환귀시켜라.
19. 일본인의 거류지를 환귀시켜라
20. 철도를 환귀시키고 물러가라.
21. 학회 이외를 자유롭게 해산시켜라.
22. 해관세법의 자유를 회복하라.
23. 일본인의 상업을 제한하라.
24. 일본인의 상업 물품울 제한하라.
25. 일본인의 상륙을 제한하라.
26. 국채를 시행하지 말라.
27. 인민의 손해를 배상하라.
28. 일본 은행권을 시행하지 말라.
29. 지방의 일본군 병참을 철거하라.
30. 일본에 현재 있는 망명객 등을 체포하여 보내라. (『駐韓日本公使基調經費』 제189호)

자료 4)

연래 폭도[의병]의 橫行이 심하고 지금 진정에 이르지 아니하므로써 일반으로 그 영향을 입지 않은 바 적지 않다. 나아가 지방에 투자사업을 경영하는 자가 없고, 게다가 금융의 핍박을 초래하여 각 시장에서의 물자의 집산액에도 영향이 적지 않다. (『韓國經濟月報』, 1909년 2월)

자료 5)

특히 임진강 하간(河干) 지방 즉 황해 동남부 및 경기 서 북부 일대, 소백산 즉 강원도·충청북도 및 경상북도의 경계 부근, 그리고 섬진강 이서 지방 즉 전라북도 서남부 및 전라남도에서는 그 출몰이 빈번하였고, 그 집단 역시 1백 내지 수백을 헤아리는 자 있었으나, 그 밖의 다른 지방은 거의 진정으로 돌아가 폭도의 세력은 이상 세 지방에 국한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전년[1908] 7월 이후 본년 6월에 이르는 1개년 동안은 매달 충돌한 폭도의 총수는 시종 3천 전후로서 적세(賊勢)는 거의 고정된 경황을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연월을 경과함에 따라 더욱더 교묘함을 극하였다. 또한 그들의 첩보 근무 및 경계법 등은 놀랄 만큼 진보되고 그 행동도 더욱더 민첩하여, 때로는 우리 토벌대를 우롱하는 듯한 태도로 나올 때도 있어, 그 세력에 때로 소장(消長)이 있다 하여도 결코 경시할 수 없으나 과연 어느 때 완전 평정이 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우려하게 되었다. (『朝鮮暴徒討伐誌』)

자료 6)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일국지 안에서 수색을 실행하여 전후 좌우로 왕복을 계속하고, 또 奇兵적 수단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엿볼 틈을 주지 않는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정, 경비선 및 소수 부대로서 연안 도서 등으로 도피하는 폭도에 대비하는 등, 포위망을 농밀하게 하여 드디어는 그들이 진퇴양난에 걸려 자멸 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 (『朝鮮暴徒討伐誌』)

해설 : 의병전쟁(義兵戰爭)

의병전쟁은 한말 시기 일제에 맞서서 벌인 척사유생층과 민인들의 반일구국운동이었다. 비록 양반 유생과 평민 의병들이 신분과 처지에 따라 사회내부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랐을지라도 둘 다 국권 회복 운동에 진력했다.

의병전쟁의 효시는 척사유생들이 1895년 일제가 자행한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 등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을미의병운동까지 소급된다 [자료1]. 대표적으로 춘천의 이소응(李昭應) 의병부대와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의병 부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의병운동은 아관파천을 거쳐 고종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자진 해산하였다.

한말 의병 투쟁의 제2의 파동은 1905년 을미 늑약 전후의 투쟁이었다. 1904년 7월 교외의 군인들이 반일의병활동을 시작한 가운데, 1905년 4월에 들어와서는 활빈당 등 농민 무장세력의 주요 활동지였던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이러한 민중의 반일의병항쟁에 자극을 받은 양반유생들도 각지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1905년 5월 원주에서 원용팔(元容八)·박정수(朴貞洙), 단양에서 정운경(鄭雲慶), 지평에서 이문호(李文鎬), 광주에서 구만서(具萬書)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3월 충남 정산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6월에는 전북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 유생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포위당하자 곧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자신도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한 차례도 전투도 하지 못한 채 의병항쟁을 끝내고 말았다. [자료 2]

한편 이들 유생의 봉기는 전국 각지의 유림과 민중을 자극하여 평민의병장이 등장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 의병투쟁은 유생의병장의 경우와 달랐다. 강원, 경북, 충청 접경지대에서는 신돌석(申乭石), 정순현, 이하현 등이 그 동안 '폭도', '적도'로 불려오던 농민 무장집단과 결합하여 태백산 줄기에서 맹렬하게 반일항전을 벌여 나갔다. 특히 평민출신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강원도와 경북의 접경지대와 동해안 일대를 누비며 일제 침략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항일 의병투쟁의 제3의 파동은 1907년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조선 군대마저 해산시키자 수많은 군인들이 일제의 해산조치에 반대하여 의병대열에 참여하였다. 8월 1일 서울 시위대가 해산되던 날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하였다.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소식에 곧 서울 시위대가 봉기하였고, 이어서 원주, 홍천, 충주, 강화도 등지의 지방진위대가 동조하였다. 이처럼 해산 군인이 의병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전쟁을 전국으로, 전계층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의병은 구체적인 강령을 마련하여 일본에게 정식 요구하였다. 즉 일제의 주권 침탈은 물론 경제침략과 군사 점령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를 물리력을 통해 격퇴할 것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자료 3]

이러한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의병부대의 구성에서도 민중적 성격이 강화되어 갔다. 유생과 농민, 해산군인 뿐만아니라 노동자, 소상인, 지식인, 승려, 화적 등 여러 계층의 민인이 참여하였고, 의병장에도 양반의병장 대신 평민 의병장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민중의 참여와 지지로 의병항쟁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양반유생 의병장들은 1907년 12월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의병을 결성하여 서울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양주에 집결한 연합의병은 이듬해 1월 동대문을 통해 서울을 공격하여 일제와 친일파가 장악한 서울을 탈환하여 일제와 담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군사장 허위(許葦)가 이끄는 부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배함으로써 서울 진공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서울 진공계획이 실패된 뒤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지역 의병들이 일본 군경과 벌인 전투횟수는 1908년 전체 전투수의 25%에 1909년에는 47.3%로, 참가 의병수는 1908년 전체 의병수의 24.7%에서 60.1%로 각각 늘어났다. 또한 호남의병은 민인들의 광범한 지원 속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적극 활용하여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자료 4]

그 결과 호남 의병의 끈질기고도 강력한 저항은 정예의 일본군을 호남이라는 한 지역에 묶어둠으로써 다른 지역의 의병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고, 한일 병합을 서둘려는 일제의 발목을 붙잡았다. [자료 5]

이에 일제는 조선 병합을 위해서는 호남 의병을 완전히 토벌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대규모 토벌을 단행했다. 1909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호남지방을 해안과 육지에서 완전히 봉쇄한 뒤 마치 빗질을 하듯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자료 6]

호남지방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살륙·방화·약탈 등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1907년 8월부터 1914년 말까지 일본군이 학살한 의병수는 1만 6,700명, 부상자는 3만 6,770여 명에 이르는데, 2개월의 토벌기간에 체포·학살된 의병수가 의병장 103명, 의병 4,138명이었다는 데서도 그 잔혹상을 알 수 있다.

1910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의병은 궁지에 몰리게 되어 국내에서는 잔존 세력이 소규모 부대 작전을 펼 뿐이었고, 의병부대의 많은 병력은 동포들과 후일을 기약하고 만주·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다. 만주에는 홍범도(洪範圖), 차도선(車道善), 이동휘(李東輝) 등이 연해주에서는 이범윤(李範允), 최재형(崔在亨) 등의 독립군 세력이 자라게 되었다.

<출전>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 1895년 閔龍鎬 의병부대의 陣中日記. 이는 강원도 을미의병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朴成壽, 『韓國獨立運動史硏究』, 創作과批評社, 1980.
趙東杰, 『韓末義兵戰爭』, 독립기념관, 1989.
洪順權, 『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 硏究』, 서울대출판부, 1994.
金祥起, 『東學과 甲午農民戰爭硏究』, 一潮閣, 1993.
이상찬, [1896년 의병운동의 정치적 성격],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

출전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역사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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