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16 (토) 09:34
분 류 사전3
ㆍ조회: 1021      
[일본] 일본 중세사
일본의 역사 2

관련 문서

1. 원시ㆍ고대
2. 중세
3. 근세
4. 근대
5. 현대

Ⅱ. 중세

1. 무가사회의 형성

(1)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성립

타이라(平)씨 일족정치에 대한 반감이 무사단·귀족·사원사이에서 커지자,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는 타이라씨타도의 병을 일으켰다. 요리토모는 1183년 동국의 행정권을 장악, 카마쿠라(鎌倉)를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간다. 1185년 단노우라(壇の浦)의 싸움으로 타이라씨를 멸망시키고, 칙허로 슈고(守護)·지토(地頭)의 설치권을 얻어내어 군사경찰권을 장악하였고, 1192년에는 무사의 통솔자를 의미하는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된다. 이 무가정권을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라 하는데, 이후 약140년간 계속되었다.

카마쿠라막부에는 쇼군(將軍)의 밑에 중앙의 조직으로 사무라이토코로(侍所)와 쿠몬죠(公文所)·만도코로(政所)·몬츄죠(問注所) 등이 있었다. 또한 각지의 공령과 장원에는 쇼군의 가신을 슈고·지토로 파견하여, 치안유지와 연공징수를 담당케 하였다. 막부지배의 근본은 토지에 대한 권리(式)을 매개로 한 장군과 가신과의 주종관계에 있었으므로, 카마쿠라막부는 봉건제도에 기초한 일본최초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천황조정의 코쿠시(國司)와 장원영주들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무사들은 토지의 일부권리만을 가졌으므로, 그 지배체제는 무가와 천황조정 귀족의 이원적 지배체제로, 봉건제도는 아직 미숙하였다.

(2) 집권(執權)정치

카마쿠라 막부의 실권은 초기에는 쇼군에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사후, 부인 마사코(政子)의 부친 호죠 토키마사(北條時政)가  싯켄(執權)으로서 쇼군을 보좌하였으나, 3대장군의 암살로 미나모토씨의 쇼군(將軍)시대는 끝나고, 호죠씨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쿄토조정에서 세력을 만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221년 고토바(後鳥羽)상황이 군대를 일으켰지만,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承久의 난). 이후 막부는 황위계승에 개입하고 쿄토조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으며, 상황측에 가담한 귀족·무사의 영지를 몰수하고 새로 지토를 임명하였다. 그 결과 막부는 전국지배를 확대하여, 천황조정에 대한 막부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승구의 난후 막부는 집권 밑에 랜쇼(連署)와 효죠슈(評定衆)를 두어 합의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무가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무가최초의 체계적 법전인 정영식목(貞永式目) 51개조을 제정하였다. 당시의 무사는 집(館) 주위에 흙으로 소성곽을 쌓고 주변에 해자를 두르고 살면서,  하인이나 농민을 써서 직영지를 경작케 하는 한편, 쇼칸(莊官)이나 지토로서 연공징수를 담당하고 연공의 일부를 받았다. 무사사회에서는 혈족의 결합이 공고하여 일족의 장을 대표로하여 막부에 봉사하였으며, 여자도 포함한 분할상속이 일반적이었다. 주인에 대한 [봉공]을 위해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검소·무용(武勇)·충성·명예 등을 중시하였다. 이 무가의 도덕은 에도시대의 무사도(武士道)로 이어진다.

그러나 지토들 중에서 년공을 횡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자, 장원영주는 장원의 지배권을 지토와 나누어 갖는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 결과 장원의 현지지배는 점차 무사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카마쿠라 중기에는 기내와 서일본에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고, 비료가 이용되고 우마의 사용과 농구의 보급이 늘어났으며, 종이·염료·등유등의 원료가 재배되었다. 또한 주물사·옹기장이등의 전문수공업자가 농촌에 등장하였다. 농촌의 생산물의 교역을 위해 정기시가 열려, 지토와 쇼칸은 상인에게 세를 거두고, 년공미 등을 여기서 팔아 돈으로 만들어 쿄토나 나라의 장원영주에게 보냈다. 도시에서는 장원영주들을 대상으로 한 양조·고급직물·무기·공예품 등 수공업생산이 이루어졌다. 제조와 판매의 독점을 위해 [자(座)]라는 상공업자 동업조합이 있었으며, 원격지간 거래에는 어음(爲替)이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어, 고리대금융업자([借上]·[土倉])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당시의 화폐로는 무역을 통해 수입한 송의 화폐가 사용되었다.

(3) 카마쿠라(鎌倉)문화

막부성립 초기에는 오랜전통을 지닌 공가문화가 우세했으나, 송·원 문화의 영향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찬 무가 문화가 생겨났다.  전란과 재해, 귀족세력의 몰락과 타이라(平)씨의 성쇠를 본 사람들은 더욱 더 현실부정의 말법사상을 가지게 되어 종교에 구원을 구하였다. 이러한 때 나타난 것이 카마쿠라신불교(鎌倉新佛敎)다.

신불교는 계율·학문·기진(寄進)등을 중시하는 구불교를 배척하고 염불·선·제목(題目)중에서 한 길을 정진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정토교계·선종·니치랜종(日蓮宗)으로 나눌 수 있다. 정토교계통에는, 정토종·정토진종·시종(時宗)이 있는데 모두 염불을 중시하여, 무사·서민층에 퍼졌다. 니치랜종은 니치랜이 창시한 것으로 관동의 무사층에 퍼졌는데, 제목(南無妙法蓮華經 7글자)를 외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송에 유학한 승려에 의해 선종도 전해졌는데, 공안(公案)을 중시하였던 임제종과 좌선을 중시한 조동종이 있었다. 신불교의 등장으로 나라의 구불교계에서도 혁신이 일어나, 빈민·병자를 구제하고, 도로·다리를 건설하였다.

카마쿠라시대의 문학으로는 군기물({平家物語})·설화집({古今著聞集})·수필({徒然草})들이
발전하였다. 학문도 발달하여 공가사회에서는 고전연구({釋日本紀}), 송학(宋學), 역사({愚管抄})의 편찬이 있었으며, 무가사회에서도 카마쿠라막부의 역사({吾妻鏡})가 편찬되고, 호죠씨는 카나자와문고(金澤文庫)를 설치하였다.

카마쿠라시대에는 예술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조각은 힘있고 인간미 넘쳤으며,초상을 조각하기도 하였으며, 그림은 두루말이 그림(繪卷物)과 초상화가 발달하였다. 공예품으로는 도검과 도기·갑주의 생산이 발달하였다.

(4) 원구(元寇)와 막부의 쇠퇴

12세기 초 강남의 남송과 일본사이에 국교는 열리지 않았으나, 사무역과 승려·상인의 왕래는 활발하였다. 13세기 후반 원의 후비라이의 조공요구를 싯켄 토키무네(時宗)가 거절하자, 원은 고려와 연합군을 만들어 1274년 큐슈북부를 침략하였다. 원군의 화약과 집단전법에 일본군은 고전하였으나, 때마침 폭풍이 불어 원군이 물러갔다. 그후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1281년 다시큐슈북부에 침입하였으나, 일본군의 분전과 폭풍우로 다시 패퇴하였다. 이 두차례의 원의 침입을 [겐코(元寇)]라 한다.

[겐코]때에 조정과 사원·신사에서는 신불(神佛)의 가호를 비는 기도가 계속되었는데 원이 퇴각하자, 일본에는 신국사상이 강화되었다.  전시하 막부의 호죠씨는 독재체제를 통해, 전국 지배를 강화하게 되었으나, 전비를 부담하였으면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은 막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분할상속제도로 궁핍해진 무사들은, 영지를 팔든가 빚을 지게 되었다. 막부는 1297년 무사들이 판 영지를 원상회복케 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별로 효과는 없었으며, 기내부근에서 장원영주나 막부·슈고의 지배에 반항하는 무사들의 집단행동이 일어나면서 막부체제는 동요하게 되었다.

2. 무가사회의 성장

(1)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성립

1324년과 1331년에 고다이고(後醍 )천황이 벌인 막부타도운동을 계기로하여, 무사들이 각지에서 거병하였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와 닛타 요시타카(新田義貞)도 막부에 반기를 들고 호죠(北條)씨일족을 공격하여 1333년 카마쿠라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타카우지가 무가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1336년 쿄토조정을 공격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 요시노(吉野)로 도망갔다. 이후 1392년까지 타카우지가 세운 쿄토의 천황(北朝)과 요시노의 천황(南朝)이 병존하여, 전국의 무사들도 둘로 나뉘어 싸웠다. 이 50여년의 쟁란기를 남북조시대라 한다.

북조의 타카우지는 켄무식목(建武式目)을 제정하여 정치의 기본을 정하고 1338년 세이다이쇼군에 임명되어 막부정치가 부활했다. 3대장군 요시미츠(義滿)때에 남북조가 통일되고(1392), 막부기구가 정비되었다. 막부는 장군 밑에 정무를 총괄하는 3인의 칸래이(管領)를 두고, 그 밑에 카마쿠라시대이래의 사무라이도코로(侍所)등의 지배기구를 두었다. 지방에는 슈고를 설치하고 관동에 카마쿠라부(鎌倉府), 구주에 큐슈탐제(九州探題)등을 두었다. 요시미츠는 막부를 쿄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두었으므로, 이 아시카가씨의 막부는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 불리운다.

남북조시대에 막부는 슈고(守護)에게 군사·경비권 외에 년공의 반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수호는 장원을 지배하고 무사들을 가신으로 삼아 영주가 되었다. 이렇게 영주로 변한 강력한 수호를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한다. 유력한 슈고다이묘는 관래이(管領)와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이 되었으므로 이 시대의 막부는 수교다이묘의 연합정권과 같았다.

[겐코] 이후 원과 정식국교는 없었으나, 무역은 활발하여 상인·승려들이 왕래하였다. 카마쿠라시대말부터  큐슈북부와 세토(瀨戶)내해 연안의 무사와 어민들이 중국과 한국의 연안에 진출하여 무역을 하거나 해적이 되었는데, 이들을 중국과 조선에서는 왜구(倭寇)라 불렀다. 명의 왜구단속 요구를 받아들인 요시미츠(義滿)는, 정식무역선에 도항증명서(勘合)를 발행하였는데, 감합은 점차 슈고다이묘 호소가와(細川)·오우치(大內)씨가 발행하게 되었다.

1419년 조선은 쓰시마(對馬)를 공격하고, 왜구 금압을 일본측에 요구하는 한편, 쓰시마의 소(宗)씨에게 도항자의 통제와 특허무역을 허락하였으나, 1510년 삼포의 난이후에는 무역은 쇠퇴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염료와 후추등을 수출하고, 목면·대장경 등을 수입하였다.

15세기초 상씨가 등장하여 오키나와를 통일하고, 16세기에는 류큐(琉球)왕국이 건설되어, 중국·조선·일본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상선을 파견하여 향료등의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다.

(2) 막부의 쇠퇴와 서민의 대두

무로마치막부 초기에는 쇼군과 유력 다이묘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6대 쇼군은 슈고다이묘의 통제를 강화한 [만인공포]정치의 실시로 반발을 사서 결국 살해당하고, 막부의 쇼군의 권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8대쇼군 때에 쇼군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슈고다이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호소가와(細川)씨와 야마나(山名)씨의 막부내에서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는데, 여기에 쇼군가와 칸래이가의 상속다툼이 겹쳐 1467년(應仁 원년) 44개국 슈고다이묘의 27만 대군이 동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싸웠다. 이를 응인(應仁)의 난(1467-77)이라 한다.

응인의 난 이후 약 100년간 일본전국의 무사들이 싸우는 센코쿠(戰國)시대가 계속되었다.  센코쿠시대에 하극상의 전란 속에서 새로 세력을 확대한 유력영주를 센코코다이묘(戰國大名)라 한다. 센코쿠다이묘에는 이마가와(今川)·타케다(武田)씨 등와 같이 슈고다이묘(守護大名)출신도 있었으나, 오다(織田)·모리(毛利)씨 등 대부분은 다이묘의 가신 출신이었다.

센코쿠다이묘는 강력한 군대와 독자적인 법을 만들어 장원영주를 무시하고 무사·농민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위해, 경지개발, 관개·치수공사, 금은동산의 개발, 상공업자의 보호에 노력하였다. 센코쿠다이묘는 대개 성을 쌓고 부하와 상공업자를 모여 살게 해 도시(城下町)를 만들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마경·우경·비료 등이 널리 보급되고, 관개·배수기술의 발달로 이모작이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16세기에는 면화의 재배도 시작되었다. 유력농민 중에서 무사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 이들 지도하에 농민들은 촌마다 자치조직을 만들어 단결을 꾀하였다. 관개용수와 산야의 공동이용을 위한 규약을 정하고, 장원영주나 슈고다이묘와 연공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무사의 침략과 농민의 자립에 의해 장원영주의 지배는 붕괴하고 장원은 유명무실해졌다.

수공업도 각지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자들은 주문생산 뿐만 아니라 시장생산도 하게 되었다. 견직물·도기·술·도검 등의 제조기술이 진보하여 각지방의 특산품이 생겨났으며, 전문적인 직인도 많아져 이들의 동업조합도 발달하였다. 교통의 요지에는 상품거래 중개상이 생겨났으며, 운송업자들이 활약하였다. 수상교통도 발달하여 정기선(廻船)이 있었다. 물자의 유통도 활발해져 무로마치시대 중기이후 정기시는 5일마다 열리게 되었다.

송·원·명의 중국화폐와 과거의 일본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연공도 전납으로 변하고, 토지의 매매에도 화폐가 사용되었으며, 어음도 사용되었다. 화폐경제의 진전은 금융업자·고리대금업자를 부유하게 하였으나, 무사와 농민은 빚때문에 토지를 파는 사람들이 생겼다. 촌과 도시(町)의 자치가 발달하면서 연공감액·부채탕감 등을 요구하는 무사·농민·종교단체 등의 집단행동이 일어나, 막부와 슈고다이묘가 지배하는 사회를 동요시켰다.

(3) 무로마치(室町)문화

무로마치시대의 문화는 무가세력과 민중의 대두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성격은 카마쿠라시대의 무가문화에 선종을 매개로 하여 전해진 중국문화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었다. 3대쇼군이 쿄토의 키타야마(北山)에 세운 킨카쿠(金閣)는 귀족적인 신덴즈쿠리(寢殿造)양식과 선종사원의 양식을 채용한 건물로, 이를 대표로 하는 무로마치초기의 문화를 카타야마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임제종이 막부의 보호로 번영하였고, 선종의 영향으로 수묵화가 유행하고 선종 경전 및 한시문집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또한 가무연극인 노(能)의 전문예능집단이 등장하여 막부의 보호로 발전하였다. 8대쇼군이 쿄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는 선종사원양식을 무사의 주거양식에 도입한 것으로, 이것으로 대표되는 무로마치 후기의 문화를 히가시야마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응신의 난으로 지방으로 피난간 공가와 승려들에 의해 쿄토문화가 지방에 파급되었으며, 상공업자나 농민 중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무로마치시대문화의 특징은  무사와 귀족뿐만 아니라  민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복수의 사람들이 와카(和歌)를 계속 이어 간  랜가(連歌)라든가, 노(能)의 막간에 상연되었던 쿄겐(狂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었던 봉오도리(盆踊り)등이 그것이다. 또한 이 시대문화에는 다다미·후스마·토코노마 등 일본식 건축과 다도·화도(花道)등의 전통문화에서, 오늘날 일본 생활문화의 원류가 많다. 카마쿠라시대의 신불교도 무사·농민·상공업자들의 신앙에 의해 도시와 농촌에 퍼져 더욱 교세를 확장하였다.

센코쿠(戰國)시대에는 유력한 다이묘들의 죠카마치(城下町)를 중심으로  각지에 문화의 중심이 생겨났다. 유학이 다이묘들의 필수학문이 되었고, 무사자제는 주로 사원에서 교육받았는데, 특히 우에스기(上杉)씨의 아시카가(足利)학교는 전국의 선승과 무사들이 모여들었던 학교로,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부유한 상공업자나 촌락의 유력자들도 읽고 쓰고 계산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출전 : 안도사의 홈
   
윗글 [일본] 일본 근세사
아래글 [일본] 일본 고대사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8 사전3 [조선] 임상옥 (한메) 이창호 2002-11-21 942
27 사전3 [조선] 임상옥 (두산) 이창호 2002-11-21 858
26 사전3 [조선] 임상옥 (민족) 이창호 2002-11-21 1007
25 사전3 [일본] 일본 현대사 이창호 2002-11-18 619
24 사전3 [일본] 일본 근대사 이창호 2002-11-18 1896
23 사전3 [일본] 일본 근세사 이창호 2002-11-18 1420
22 사전3 [일본] 일본 중세사 이창호 2002-11-16 1021
21 사전3 [일본] 일본 고대사 이창호 2002-11-16 1313
20 사전3 [현대] 신탁통치반대운동 (한메) 이창호 2002-11-11 1260
19 사전3 [현대] 신탁통치반대운동 (두산) 이창호 2002-11-11 1038
1,,,301302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