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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18 (월)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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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432      
[일본] 일본 근세사
일본의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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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시ㆍ고대
2. 중세
3. 근세
4. 근대
5. 현대

Ⅲ. 근세

1. 막번(幕藩)체제의 확립

(1) 쇼쿠호(織豊)정권

1543년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포루투갈인이 대포를 전래한 후 포루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상선이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였다. 또한 1549년 예수회의 선교사 사비에르를 시초로, 많은 선교사가 일본에서 포교·교육·의료활동을 하여, 신자의 수는 급증하였다.

대포의 전래로 보병 대포부대가 활약하게 되면서, 통일사업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이어진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막부를 멸망시키고, 오우미(近江)의 아즈치(安土)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통일에 힘썼으나, 부하장수의 배반으로 1582년 자살하였다.

오다의 부하 토요토미는 1583년 오다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하고, 오사카(大坂)성을 축성하여 통일의 거점으로 삼아, 1590년에는 전국통일을 완수하였다. 토요토미정권은 토지조사를 통해 경작자를 연공부담자로 정하고, 농민의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분리를 꾀하였다. 한편 대외정책면에서는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고아·루손·대만의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1592년과 1597년에 조선을 침략하였다. 오다·토요토미시대의 문화는, 신흥다이묘·거상(巨商)들의 기풍을 반영하여 호화롭고 웅장하며 현세적·향락적이었다. 특히 성곽건축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대부터 사탕과 간장이 사용되었고 1일 3회의 식사와 간식이 일반적이 되었으나, 서민들은 여전히 잡곡을 주식으로 하였다.

(2)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성립

히데요시의 사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국지배권을 확립한다. 이에야스는 1603년에는 세이다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열고, 1615년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토요토미씨를 멸망시킨다. 과거의 어떤 무가정권보다도 강력하였던 에도막부는 260여년간 계속된다.

에도막부는 쇼군 밑에 로츄(老中)이하의 관직을 두어 쇼군의 부하무사를 임명하였다. 쇼군의 부하무사는 다이묘(大名)와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으로 나뉘어, 다이묘는 쇼군으로부터 1만석이상의 영지를 수여받은 무사로, 그 영지를 번(藩)이라 했다. 하타모토과 고케닌은 1만석미만의 영지를 받은 쇼군직속의 2만수천명 정도의 가신으로 막부 군사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특히 하타모토는 쇼군을 알현할 수 있었다.

에도막부의 쇼군은 다이묘의 영지내(藩)의 정치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으나, 막부에 대한 반란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여, 다이묘는 처자를 에도에 두고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왕복하면서 살게 하였다. 이 왕복비용과 에도 생활비용 및 막부의 토목공사 등의 부담으로 번(藩)의 재정은 궁핍해졌다.

에도시대에 쇼군(將軍)과 다이묘의 영주권에 의해 토지·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체제라 하는데, 이는 농민이 부담하는 연공과 부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막부의 경제력은  약 400만석의 직할지(天領)의 연공과 직할도시의 영업세, 주요광산과 도로,화폐의 주조권 등에 있었다.

에도막부는 사농공상·천민으로 나뉜 엄격한 신분제도를 확립하여, 집안대대로 전해온 직업과 가부장의 절대권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막부는 사원을 민중지배에 이용하기 위해, 혼인·여행·취직에 필요한 증서를 절에서 발부하게 하였다.

무사도라는 엄격한 도덕을 요구받았던 무사는, 성의 경비와 영지내의 행정을 맡아보고 봉록으로 토지나 쌀·화폐를 받았으나, 상급무사를 제외하고는 생활에 여유가 없었다. 전 인구의 80%이상이었던 농민은 수확량의 40%-50%의 연공을 바쳐서 무사의 생활을 지탱하였다. 농민은 전답의 매매·분할상속금지, 일상생활 등에서 규제를 받고 있었다. 농민에는 자작농과 소작농의 신분계층이 있어, 자작농은 연공·잡세·노역 등을 부담하였고, 유력한 자작농은 관리로 촌의 운영에 참가하였다.

(3) 쇄국정책

이에야스는 무역 이익때문에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상선의 내항을 환영하고  크리스트교 포교도 묵인하였으며, 무역선에는 도항허가증(朱印狀)을 주어 보호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신자가 70만명이나 되자, 막부는 이 종교의 인간평등사상과, 부유한 다이묘의 등장에 대해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영국·네델란드가 일본무역 독점을 위해,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영토확장 야심을 막부에 알리자, 막부는 포교를 금지시키고 무역을 단속하였다.

선교사나 신자는 국외에 추방되든가 처형당하였으며, 무역항은 히라토(平戶)와 나가사키(長崎)로 제한되고, 스페인선의 내항은 금지되었다. 또한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해외 거주 일본인의 귀국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트교 신자 중심의 시마바라(島原)의 난을 진압한 막부는, 모든 사람들을 절의 신자로 등록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고 1639년 포루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한 쇄국령을 발표한다. 이로서 네델란드·명·조선을 제외한 외국과의 통교는 금지되어 이후 200여년간의 쇄국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무역항 나가사키에서 네델란드·중국과의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이에야스때 국교를 수복한 조선과는 쓰시마의 소(宗)씨를 통해 외교·무역이 이루어졌고 쇼군의 교체시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또한 1년에 한번씩 내항하는 네델란드상선이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막부는 외국의 동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분적인 쇄국정책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서 막번체제가 안정되고 국민문화도 형성되어 갔으나, 세계정세에 뒤지게 되었다.

2. 막번체제의 전개

(1) 막정의 안정과 경제의 발전

3대쇼군때까지는 무단정치였으나, 4대쇼군때부터는 세상이 안정되면서 문치정치로 이행해간다. 4대쇼군 이에츠나(家綱)는 다이묘의 교체를 완화하였고, 순사(殉死)와 인질(人質)을 금지하고, 치수관개·식산흥업·문교진흥 등의 번정쇄신을 장려하여 17세기 후반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였다. 5대쇼군 츠나요시(綱吉)도 주자학과 불교를 장려하였으나 방만한 운영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6, 7대쇼군 때에는 유학자 아라이 학세키(新井白石)가 등용되어 문치정치의 최성기를 맞이하였다(正德의 治). 아라이는 재정악화를 막기 위해 조선사절 접대비를 절약하고 무역액을 제한하여 금은유출을 방지하려 하였다. 또한 번(藩)의 재정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무사의 봉록을 삭감하도록 하여 무사층의 불만을 사게 된다. 상인들은 신전개발·양조업·수공업 등으로 축재하는 반면, 농촌에서는 자작농이 몰락하고 기생지주가 성장하였다.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는 정치쇄신과 재정재건을 위해 검약령·다이묘의 쌀 헌납·연공증액·신전개발·식산흥업·쌀값조절 등의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쿄호(享保) 개혁이라 한다. 이 결과 막부재정은 회복하였으나, 농민의 궁핍화현상이 심해져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2) 경제발전과 쵸닌의 대두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막부와 번은 재정의 기초가 되는 농업수입의 증가를 꾀하였다. 신전개발로 18세기초에는 16세기의 2배정도로 전답이 늘어났으며, 농서의 보급으로 농업생산에 발전이 있었다. 18세기에 농촌에서도 화폐가 사용되자 농민들은 뽕·마·면화·유채·야채·담배 등의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도시의 시장에서 팔았다. 어업도 발달하여 정어리잡이가 활발하였다. 광업에서도 채광·정련기술의 발달로 금은동의 광산이 번성하였다.

도시직인에 의한 수공업은 15세기부터 16세기에 수입된 기술에 의해 철포·직물·야금 등을 중심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농촌에서도 직물·칠기·종이 등의 수공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재정수입증대를 위해 산업을 장려한 번에서는 여러 특산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농촌가내공업이 전대제(前貸制)가내공업으로 바뀌었으며, 도시에서도 목면·양조·견직·칠기·도자기·제지등의 각종산업이 발달하였다.

막부는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교통망을 만들었으므로, 5가도 등의 가도가 정비되고 숙박시설과 긴급통신(飛脚)제도 등이 설치되었다. 대량수송을 담당하였던 것은 해상교통으로, 에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연안항로에는 정기배편이 운항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자 가도에 도시가 발달하였다. 도시 중에서도 에도(江戶)·오사카(大阪)·쿄토(京都)는 3도로 불리면서 중시되었다.

쇼군의 도시 에도는, 18세기초에는 인구 100만이상에 무가인구만도 50만에 달하는 정치의 중심지였다.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 불리웠던 물자의 집산지였으며, 쿄토(京都)는 전통적 학예·종교도시로서, 공예산업이 발달하였다. 도시의 쵸닌(町人)은 자가를 소유한 사람과 임대한 사람(地借·店借)로 나뉘어져, 전자는 영업세를 부담하고 도시의 행정에 참가하였다.

(3) 에도전기의 문화

18세기전반까지의 에도시대 전기에 오사카(大阪)·쿄토(京都)에서 꽃피었던 쵸닌문화를, 그 절정기의 연호를 따서 겐로쿠(元祿)문화라 한다. 이 문화의 특징은 쵸닌의 현실주의적 경향과 인간미를 표현한 도시적이며 세련된 문화라는 점이다. 쵸닌의 생활과 감정을 반영한 문예가 일어나, 연애와 금전욕 등 쵸닌생활을 묘사한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가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에 의해 창시되었다.

또한 렌가(連歌)로부터 독립한 17자의 하이카이(俳諧)에서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예술성 높은작품을 남겼다. 구송예능 죠루리(淨瑠璃)는 인형극과 결합하였는데, 봉건제하의 인간의 의리와 인정을 묘사한 치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대본이 유명하다. 처음에 무용이 중심이었던 카부키(歌舞伎)도 점차 연극화하여 사카다 토쥬로(坂田藤十郞)· 이치가와 단쥬로(市川團十郞)와 같은 명배우가 등장하였다.

미술에서도 쵸닌 취향의 장식적인 화풍이 나왔으며, 민중 생활을 소재로 한 우키요에(浮世繪)가 등장하였다. 원래는 육필화였던 우키요에는 대량생산의 목판화로 변하면서 쵸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다. 쵸닌이 부유해지면서 도시의 풍속은 화려해져, 화려한 비단 의복이 유행하였다. 식생활에서도 1일 3식이 확대되고 도시에서는 쌀밥을 먹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면직물 의복을 입고 잡곡· 면류를 먹었으며, 기와사용도 금지되었다. 이 시기에 사원에서는  장례식과 재일행사·불상공개와 복권판매등으로 세속화가 일어났으며, 서민들 사이에서는 사원과 신사순례가 유행하였다.

3. 막번체제의 동요

(1) 막부·제번의 정치개혁

18세기후반이 되자 전국적으로 교통이 발달하고 화폐가 통일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활발한 화폐 유통으로 부를 축적한 금융업자들 중에는 막부나 번의 어용상인으로서 다이묘를 능가하는 재력을 가졌던  미츠이(三井)·코오노이케(鴻池)·수미토모(住友) 등의 대상인도 있었다. 오사카나 에도 등의 상공업자들은 동업자조합을 만들어, 막부로부터 영업독점권을 얻어 상품가격 등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남겼다. 한편 사치스러운 생활로 지출이 늘어난 쇼군과 다이묘는 금융업자로부터 부채를 지게 되었다.

18세기후반 10대쇼군 이에하루(家治)시대의 막부실권자 로츄(老中) 타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는 막부의 재정재건을 위해 상품경제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동·철을 전매하고 상공업자조합을 인정하는 대신  세를 납입하게 하고 나가사키 무역을 장려하여 재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의 힘이 커지면서, 뇌물이 횡행하고 정치기강이 문란해졌다. 기근도 겹쳐 농민반란과 약탈이 빈발하여 이에하루의 사후 타누마는 실각하게 되었다. 타누마의 실각 후에 11대 쇼군 이에나리(家齊)를 보좌한 로츄 마츠타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농촌부흥을 위해 농민을 귀향시키고 부업·곡식비축 등을 장려하였다.

또한 무사들의 빚을 탕감하고 검약을 장려하는 한편, 주자학이외의 학문을 금지하고 출판을 통제하였다. 이를 칸세이((寬政)개혁(1787-93)이라 하는데, 이 개혁은 당시의 실정에 맞지 않아 반발을 사게 되어 마츠타이라는 해임당한다. 번에서도 18세기중엽부터 재정난 타개를 위해 특산물장려, 전매제실시(50여번에서 70품목이상), 번학설립 등의 개혁을 하였으나 대부분은 실패하였다.

(2) 막부의 쇠퇴

18세기 말 구미제국의 배가 일본연해에 나타나 막부를 불안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락스만(1792)·래자노프(1804)등의 사절을 보내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막부는 거절하고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1808년 페튼호가 나가사키(長崎)에 침입한 이후 영국의 배도 일본근해에 출몰하게 된다. 이에 막부는 1825년 외국선의 일본열도 접근을 막는 명령(異國船打拂令)을 발표하였다. 1837년에는 미국의 모리슨호의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19세기초 막부와 제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1830년대에는 각지에서 천재와 기근이 계속되어 농민들의 반란과 약탈이 빈발하였다. 1837년에는 양명학자이며 막부관리였던 오오시오 헤하치로(大鹽平八朗)가 오사카에서 빈민구제를 위해 무장봉기하였다. 이 시대의 국내외 정세는 긴박했으나 쇼군 이에나리는 방만한 정치운영으로 정치의 부패만 가져왔다.

1841년 이에나리의 사후 실권을 장악한 로츄 미즈노 쿠니타다(水野忠邦)는  정치개혁을 하였다(天保改革). 검약령을 내리고 풍속을 단속하였으며, 농민들을 농촌에 돌려보냈고 영업을 독점하던 동업자조합을 해산하여 상품유통을 장악하였다. 또한 막부직할지를 늘려 재정수입을 늘이려 하였으나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쳐 2년여만에 실각하였다.

막부의 쇠퇴와는 달리 이 즈음 개혁을 하여 성공한 번도 등장하였다. 사츠마(薩摩)번과 쵸슈(長州)번은 재능있는 하급무사를 중용하여 재정난타개와 군제의 개혁을 하였다. 또한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도시와 농촌의 가공업도 발전하여 19세기에는 공장제수공업이 면직물과 견직물에서 등장하였으며, 막부말기에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한 공장이 제철과 조선등의 분야에서 등장하였다.

(3) 에도후기의 문화

18세기후반 이후의 에도후기에는 문화의 중심이 에도로 옮겨져, 특히 19세기 초를 정점으로 쵸닌문화가 더욱 성숙하였다. 쵸닌문화는 도시서민과 농촌에까지 파급되었는데, 사회의 동요를 반영하여 퇴폐적·향락적이고 사치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문·사상분야에서 과학적인 사고 방식과 비판적 정신이 눈 떠  근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움직임도 보였다.

에도후기에는 교육이 널리 서민층에게까지 보급되었다. 번에는 무사자제를 가르치는 번학과 민중교육을 담당한 향학(鄕學)이 있었다. 그밖에 오사카의 쵸닌이 설립한 회덕당(懷德堂)과 같은 사립 서민교육기관도 있었으나, 가장 일반적인 서민교육은 절의 테라코야(寺子屋)에서 이루어졌다. 이시다 바이안(石田梅岩)이 유교도덕을 평이하게 설명한 심학(心學)은 정직·근면·이윤추구의 정당성 등 상업을 긍정하였으므로 쵸닌층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세상을 풍자한 17자의 센류(川柳)와, 31자의 쿄카(狂歌)가 유행하였다. 소설에는 유곽의 쵸닌들의 대화, 서민생활을 코믹하게 묘사한 것, 연애소설과 교훈적 이야기책등이 있었다. 카부키의 양식이 완성되었고, 우키요에(浮世繪)는 아름다운 판화로 제작되어 후에 프랑스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키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카츠시카 혹사이(葛飾北齋)·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등이 유명하다.

문자를 아는 서민이 많아지자 세상 소식지(瓦版)가 널리 읽혔다. 서민의 오락장으로는 공중탕·이발소·극장등이 있었으며, 신사의 제사나 사원의 재일(齋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또한 친목모임(講)을 만들어 절과 신사 등을 순례하였는데, 1830년 이세진구(伊勢神宮) 참배자는 약 400만인이었다고 한다.

18세기중엽경 {고지키(古事記)}나 {만요슈(萬葉集)}등의 일본고전을 통해 일본문화와 민족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이 활발해진다. 이를 [코쿠가쿠(國學)]라 하는데, 지방의 부농과 쵸닌들 사이에서 천황을 숭배하는 존왕사상으로 발전하여, 막부말기에는 막부를 비판하는 정치사상이 되었다. 또한 18세기 중엽 안도 쇼에키(安藤昌益)는 무사가 농민을 수탈하는 봉건제 사회를 비판하였는데, 19세기에는 봉건제의 개량을 통해 중상부국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쇄국하에서 유럽의 말이나 지식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쇼군·로츄·나가사키의 통역 뿐이었으나, 8대 쇼군 요시무네 때 크리스트교와 관계없는 한역양서의 수입을 허락하여, 18세기에는 양서연구가 활발하게 되었다. 네델란드어본 해부서가 번역되었으며, 네델란드어사전도 만들어졌다. 네델란드어를 통한 서양학문연구를 [란가쿠(蘭學)]라 하는데, 이로서 의학·생물학·지리학·병학등 근대적인 학문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1823년 나가사키의 네델란드 상관 의사였던 독일인 시볼트는  사숙을 열어 많은  난학자를 양성하였다.

19세기 전반  막부는  쇄국정책을 비난하는 학자들을 탄압하는 한편(1839년 蠻社의 獄), 네델란드서적의 번역을 담당하는 관청을 두고, 페리제독의 내항이후에는 외교문서 번역을 위해 양학연구기관 겸 외교문서 번역소(蕃書調所)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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