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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18 (월)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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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904      
[일본] 일본 근대사
일본의 역사 4

관련 문서

1. 원시ㆍ고대
2. 중세
3. 근세
4. 근대
5. 현대

Ⅳ. 근대문화의 형성과 발전

1. 서구문화의 수입과 메이지유신

(1) 개국과 막말의 동란

1840년대에 청이 영국에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이 완화되던 중, 1853년 6월과 1854년 1월 두차례에 걸쳐 미국동인도함대사령관 페리제독이 내항하여 함대의 위력을 배경으로 막부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하자, 막부는 이 문제를 천황 조정과 다이묘들과 의논하였다. 당시 여론은 개국반대의 양이(攘夷)론이 우세하였으나,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막부는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어 시모다(下田)·하코다테(箱館)의 개항과 미국대표의 일본주재를 인정하였다. 이어 영국·러시아·네델란드등과도 같은 조약을 맺어 일본의 쇄국체제는 끝나게 되었다.

1856년에 총영사로 부임한 해리스는 중국정세를 막부에 설명하여, 1858년 6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은 영사재판권이 인정되고 일본에게는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막부는 이어서 네델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59년 무역이 개시되어,  생사나 차·금등이 수출되고 모직물·면직물·함선·무기등이 수입되었다. 수출품의 격증과 대량의 금의 유출로 인한 경제의 혼란은 하급무사와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였다.  일부 다이묘와 무사들은 외세를 배격하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을 주장하였다. 막부의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반대파를 처벌하여 막부독재를 강화하였으나, 반대파에 살해되고, 막부는 천황 조정과 결합하여 막부정치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1863년 이후 영국 등의 함대와 전투를 통해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 사츠마(薩摩)번과 쵸슈번(長州藩)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실권을 잡고 영국과 제휴하여 근대적인 군비를 갖추어, 막부를 타도한 후 천황중심의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막부는 프랑스의 원조로 군사개혁을 추진하고 쵸슈정토를 꾀하였으나, 쵸슈번과 동맹을 맺은 사츠마번은 막부의 출병명령에 불응하였고, 물가상승으로 전국에서 약탈행위와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막부는 쵸슈정토에 실패하여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867년 10월 막부의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천황 밑에서 계속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하였으나, 12월 토막파 번과 천황조정은 막부의 폐지와 신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를 공표하였다.

(2) 유신정부의 발족

신정부의 영지반환 요구에 반발한 막부측은 1868년 1월 쿄토를 공격하였으나, 사츠마번과 쵸슈번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군은 1869년까지 구막부군을 모두 항복시켰다. 이 싸움을 무진(戊辰)전쟁이라한다.

무진전쟁이 계속되던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親政)과 여론의 존중·개국화친등, 신정부의 기본 정치이념을 선언하였다. 신정부는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에도(江戶)를 토쿄(東京)으로 고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하였다. 1869년에는 천황조정이 쿄토(京都)에서 토쿄로 천도하였다. 이후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한다.

개혁과정을 살펴 보면, 우선 1869년 신정부는 토지와 인민에 대한 다이묘(大名)의 지배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하고, 1871년에 신정부는 다시 번을 폐지하고 부(府)·현(縣)을 두어 부지사와 현령을 파견하였다. 막부말기의 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했던 번들은 이 개혁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봉건제도는 붕괴하고 중앙집권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신정부의 구성원은 대부분 사츠마·쵸슈·토사(土佐)·비젠(肥前)의 4번 출신의 실력자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번벌(藩閥)정부라 부른다. 정부는 신분제도를 고쳐, 황족·화족(다이묘와 천황조정의 귀족)·사족(무사)·평민(농공상민) 등으로 하여, 결혼과 직업선택의 자유·평민의 성(姓) 소유 등, [사민평등]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천민도 해방하여 평민에 편입시켰다.

(3) 유신정치의 전개

신정부는 1873년 1월, 만 20세의 남자를 징병하는 징병령을 공포하여, 구미열강을 모방한 국민군대를 창설하였다. 이로서 국력의 군사적 기초가 만들어졌다. 사민평등과 징병령에 의해 특권을 상실한 사족들의 불만은 반란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반란인 1877년의 세이난(西南)전쟁도 국민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신정부는 재원의 안정을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지주가 토지세를 국가에 납부하게 하였다.

한편 신정부는 외국기술자를 초빙하고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산업의 육성을 꾀하였다. 조선소·병기공장·광산·생사공장·면사방적공장등, 많은 관영공장을 만들어, 정부의 공 부성·내무성을 통해 산업을 보호·육성하였다. 또한 교통·통신의 발달을 위해 1871년에 서양식 우편제도를 발족시키고 1872년에는 철도를 부설하였고,  일본근해의 해운권의 확립과 군사수송을 위해 해운회사를 보호하였다. 또한 원·전을 단위로 하는 새 경화를 만들고 국립은행을 설립하였으며, 1882년에는 일본은행을 만들어 금융과 지폐발행을 맡긴다.

그러나 재정부담에 허덕이던 정부는 1880년대에 민영공장이 성공하자, 관영공장을 불하하고 민영 사업을 보호하였다. 따라서 1890년대에는 민영의 방적·철도회사가 계속 설립되었으며, 미츠이(三井)·이와자키(岩崎, 후에 三菱)등과 같은 정상(政商)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4) 유신초기의 서구화

신정부가 국민교육을 위해 문부성을 신설하여 소학교 교육에 주력한 결과 전국에 2만 이상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국립대학에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학문의 발달을 꾀하였으며, 사범교육·여자교육·산업교육을 위한 전문학교도 설립하였다. 한편 케이오(慶應)의숙, 도시샤(同志社)등의 사립학교도 세워졌다.

1873년부터는 태양력을 채용하고, 1일 24시간, 1주7일제,일요휴일제를 확립하였다.  단발과 군인·관리들의 양복착용을 추진하였다.   대도시에서는 벽돌집에 가스등이 늘어선 가로를 마차와 인력거가 달려가는 모습이 새로운 풍물이 되었다.

신정부는 신도(神道)의 국교화를 추진하면서 크리스트교 금지를 해제한다. 사상계에서는 자유주의·개인주의·천부인권사상 등의 서구근대사상이 유행하였고, 1870년 일일신문({橫濱每日新聞})이, 1873년에 잡지({明六雜誌})가 등장하여, 봉건사상의 배제와 근대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71년 이후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은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제도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실패한다. 1871년에는 청과도 조약을 맺었으나, 류큐왕국의 귀속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대립하게 된다. 메이지정부는 류큐왕국을 류큐번(藩)으로 하고, 류큐어민 피살 사건을 핑계로 1874년 대만에 출병하여 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낸다.

한편 메이지 초기 개국요구를 거절한 조선에 대한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였으나, 국내개혁 선행론에 패배하고 정한론자는 정부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1875년 메이지정부는 무력시위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다음해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어 개국시켰다. 또한 러시아와 국경에 관한 조약을 맺어 일본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2. 근대국가의 형성

(1) 자유민권운동

정한논쟁으로 사퇴한 구정부관료등을 중심으로 1874년이후 의회개설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진다. 이 운동이 사족을 중심으로 신문·잡지등을 통해 추진되자, 정부는 장래의 입헌정치 실시를 약속하는 한편  참방률등을 제정하여 언론활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은 점차 지주·도시상공업자를 포함하는 국민 운동으로 확대되어, 1880년 국회기성동맹(國會期成同盟)이 결성되어 국회개설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집회조례를 제정하여 언론·집회·결사를 탄압하였다. 정부내부에도 국회개설 시기를 둘러싸고 급진론과 점진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마침 1881년 개척사 관유물 불하사건으로 정부공격이 격화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등 점진론자들은 급진론자를 추방하고 1890년에 국회를 열 것을 약속하였다.  정부의 국회개설 약속을 계기로,  급진적 자유주의의 자유당과 영국적 의회주의의 입헌개진당등이 결성되었다.

1877년의 세이난전쟁 비용조달을 위해 정부는 불환지폐를 남발하였으므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물가가 상승하였다. 1881년 오오쿠라쿄(大藏卿) 마츠카다 마사요시(松方正義)는 긴축재정으로 세출을 줄이고, 은본위 화폐제도를 확립하고, 관영공장을 민간에 불하하였다.  이로써 인플레이션은 진정되고 화폐·금융제도가 정비되어 근대산업 발전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불경기와 쌀값 하락으로, 급진 자유당원과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2) 대일본제국헌법의 제정과 의회의 개설

1882년이래 군주권이 강한 헌법제정을 목표로, 이토 히로부미 등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등의 헌법과 국가제도를 연구하였다. 이토가 작성한 초안을 추밀원의 심의를 거쳐, 1889년 천황이 하사하는 형식으로 발표된 것이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이다.

이 헌법에 의하면 주권은 천황에게 있으며, 천황은 관제제정·문무관의 임면·선전과 강화·조약체결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의회의 권한은 약했으며, 내각은 천황을 보좌하고 천황에게만 책임을 졌다. 헌법과 함께 형법·민법등의 제법전도 만들어졌다.

1890년 제1회 중의원 총선거를 통해 최초의 제국의회가 열렸다.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의 이원제로, 귀족원은 황족·다액납세자·칙선의원등 지배층의 최상층부 특권계급으로 구성되며, 중의원은 국민이 뽑은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선거 결과 자유민권파 정당들이 중의원의 다수당이 되어, 민생안정을 위해 예산안 삭감을 주장하였다. 번벌관료·군인세력의 정부는 중의원 해산과 선거간섭등을 통해 자유민권파세력을 억누르려 하였으므로 중의원은 청일전쟁 직전까지 정부와 대립하였다.

3. 일본의 근대화와 아시아

(1) 청일전쟁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청국군의 출동으로 실패한 후, 자유민권파는 무력에 의한 조선개혁을 계획(오사카사건)하고, 메이지정부는 해군의 확장을 추진하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국이 출병하자, 일본정부는 이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7월말 양국군은 충돌하였다. 정부와 정당이 정쟁을 멈추고 거국일치로 전쟁에 임한 일본은, 정치적 대립 등으로 전력을 발휘하지 못한 청국에 승리하여, 1895년 청일강화조약(下關조약)이 맺어졌다. 이로서 청은 일본에게 요동반도·대만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이 중 요동반도는, 러시아등 삼국의 간섭으로 청국에 반환하게 되어, 일본국내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국가주의가 고양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가세입의 약 3배정도였던 배상금 덕분에 일본정부는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군사공업과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청일전쟁후 중국·조선시장이 개척되어 방적업과 직물업이 급속히 발달하였으며,  미국수출을 중심으로 제사업이 발달하여, 1900년경까지 방적업·제사업 등 경공업 부문에서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2) 러일전쟁

청일전쟁의 승리와 삼국간섭으로 일본국내 정치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정부와 정당이 손을 잡고 군비확장·산업진흥에 나서게 된 것이다. 1898년에는 일본최초의 정당내각이 성립하였으며, 1899년에는 관료의 신분보장을 강화하고, 1900년에는 치안경찰법과 군부대신 현역무관제가 만들어졌다. 번벌관료 이토 히로부미도 1900년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내각을 조직하였는데,  이후 입헌정우회는 지주·실업가를 지지기반으로 일본의 대표적 정당이 되었다.

1899년-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열강과 함께 청국북부에 출병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대군을 만주에 계속 주둔시키고 한국에도 영향력을 강화하자, 카츠라 타로(桂太郞)내각은 1902년 영일동맹조약을 맺고 입헌정우회의 협력으로 군비확장을 추진하였다.

영일동맹 체결후 일본국내에서는 유력 신문들이 대러주전론을 이끌었다. 1904년 2월 일본과 러시아는 전쟁에 돌입하였는데, 영국·미국의 지지와 러시아의 국내혼란등으로 전황은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905년 일본육군은 여순과 봉천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해군도 일본해해전에서 러시아함대를 격파하였다.

미국의 중개로 1905년 9월 포츠머드강화조약이 체결되어, 그 결과 일본은 여순·대련의 조차권과 장춘·여순간의 철도권익, 카라후토(華太) 남부의 할양등을 인정받았으나, 배상금은 없었다. 전사상자 40만이상에, 20억원의 전비를 외채·공채·증세로 감당하였는데, 배상금이 없자 신문과 군중들은 강화조약 폐기와 전쟁계속을 주장하였다.

러일전쟁후 일본은 미국·영국의 승인하에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외교·내정·군사의 실권을 계속 빼앗아 갔으며, 통감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을 계기로 1910년 한국을 병합하여 조선총독부를 두고 식민지지배를 시작하였다. 또한 일본은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식민지로 경영하였다.

불평등조약 개정문제는 일본국력의 향상과 함께 가능해졌다. 1894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영사재판제도의 철폐와 관세자주권의 일부회복을 인정하였으며, 1911년에는 미국이 일본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하여, 일본은 구미제국과 대등한 지위에 서게 되었다.

4. 자본주의의 발달과 국민의 생활

(1) 자본주의경제의 형성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공업의 중심은 여전히 경공업에 있었으나, 중공업도 발전하여,  관영 하치만(八幡)제철소가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고 민영 제강회사가 설립되었다. 조선업과 공작기계공업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한편 정부는 철도의 군사적 이용 목적에서 1906년 주요철도를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군비확장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의 전후경영은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군수품과 중공업자재의 수입·외국채의 이자지불 등으로  일본의 국제수지는 극심한 적자였고, 국민들의 세금부담증가로 사회모순은 심각하였다. 1907년부터 공황·불황이 이어졌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정체로 농촌은 빈곤해졌다. 재벌은 금융·무역·운수·광산업등을 중심으로 다각적 경영을 하여 콘체른의 형태를 정비해갔다.

정부 지도하에 단시간에 발달한 일본 자본주의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큰 격차,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국내소비수준등 문제점도 많았으나,  정부는 치안경찰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특히 1910년 천황암살을 계획했다는 [대역(大逆)사건]을 계기로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대탄압을 받는다.

(2) 교육과 국민문화의 발전

메이지중기이후에는 교육의 보급, 교통·통신·출판등의 발달로 새로운 국민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1886년이후 국가주의적 교육제도가 체계화되어, 충군애국정신과 가족도덕을 강조하는 교육이 국정교과서제도에 의해 학생들에게 주입되었다. 1900년 수업료 철폐로 의무교육 취학률은 크게 증가하여 1910년에는 95%를 넘었으며, 최초에 3-4년이었던 의무교육기간도 1907년에는 6년으로 증가하였다.

일간신문은 1880년대에 정치평론 중심의 신문으로 발전하고, 1890년전후에는 뉴스보도 중심의 상업신문이 나왔으며, 메이지 말기에는 1일 발행부수 십여만부의 유력신문도 등장하였다. 1880년대후반의 {국민의 벗}과 {일본인}의 창간으로 잡지도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메이지헌법제정과 청일전쟁을 계기로 인문·사회과학에서도 국가주의적인 학문이 우세해 졌으며, 청년·지식인층에도 대외팽창을 지지하는 국가주의적 풍조가 유행하였다. 대학을 중심으로 근대 자연과학 연구도 이루어져,  메이지후기가 되자 원자모형이론, 파상풍균의 순수배양과 이질균의 발견, 아드레날린 발견과 타카디아스타제의 제조등, 일본인에 의한 연구도 나오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사실주의 문학을 주장한 츠보우치 쇼요(坪內逍遙)는 근대문학이론의 선구가 되었으며, 청일전쟁전후에 로만주의가, 러일전쟁전후에는 자연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사회적 모순과 자아의 문제를 다룬 문학도 등장하였다.

연극에서는 청일전쟁전후에 신파극이 시작되어 인기를 끌었으며, 러일전쟁후에는 서양의 번역극이 상연되었다. 처음에 군대용으로 수용된 서양음악은 소학교 교육에도 도입되었으며, 전문적인 음악학교도 설립되었다.

철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서양건축이 시작되었으며, 1880년대에 공공시설을 시작으로 전등이, 1890년대에는 전차와 전화가 보급되었다. 교통·통신의 발달은 지방민들간의 교류를 확대하여 일본국가의 국민의식을 갖게 하였다.

5.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일본

(1) 제1차세계대전과 일본

제1차세계대전을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확대의 기회로 생각한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하고 산동반도와 남양제도의 독일군사기지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1915년 산동성의 독일이권의 계승을 비롯한 중국내 일본권익을 강화하는 내용의 21개조의 요구를 원세 개정부에 강요하여, 대부분을 인정받았고, 북방군벌에 대한 차관제공 등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러시아혁명으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하자, 1918년 혁명진압 연합국군의 일원으로 일본군을 시베리아에 파병하여, 연합국의 철병후도 1922년까지 계속 주둔케 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 일본의 조선·해운업·화학공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으며, 유럽의 수출감소와 미국경제의 호황으로 일본의 면사·면직물·생사수출이 격증하여  국제수지는 큰 폭의 흑자를 이루었고, 중국에 대한 자본수출도 활발해졌다.

제1차세계대전 후 한국에서 독립운동(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였다. 또한 일본의 산동반도의 권익을 파리평화회의에서 인정할 것이 확실해 지자 중국에서 대규모 반일운동이 일어났다(5·4운동). 파리평화회의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 되어, 산동반도의 독일이권의 계승·구독일령 남양제도의 통치를 인정받았으나, 중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한편 미국은 1921-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를 주최하여, 군비축소와 일본세력의 견제에 노력하였다. 회의 결과 주력함의 10년간 건조중지와 각국의 보유량 등이 정해졌으며, 일본의 산동성 이권의 중국 반환·시베리아철병등이 결정되었다. 일본정부는 재정파탄을 피하기 위해 미국·영국과의 [협조외교]에 주력하였는데, 이로서 동아시아에는 미·영·일 3개국의 협력관계를 축으로 워싱턴체제라 불리는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해군과 육군의 군축으로 재정긴축에 도움이 되었으나, 군부의 일부와 국가주의단체는 일본의 대외발전이 저해된다고 비난하였다.

(2) 정당정치의 발달

메이지이후 번벌중심의 관료정치가 계속되었으나, 1912(大正1)년, 번벌 정치를 반대하고 정당정치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제1차 헌정옹호운동이  정당·언론을 중심으로 벌어져 1913년 카츠라 타로(桂太郞)내각이 물러났다. 이는 민중운동으로 내각을 타도한 최초의 일로, 다이쇼(大正)정변이라 한다.

1차세계대전의 호경기로 임금은 올랐으나 인플레이션이 계속되어 서민생활은 어려웠고, 1918년에는 상인의 매점 매석으로 쌀값이 급등하자 쌀값인하를 요구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 쌀소동 이후 중의원의 제1당 입헌정우회의 총재 하라 타카시(原敬)가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 내각은 육·해군과 외무대신을 제외한 전각료가 입헌정우회 출신으로 구성된 일본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이었다. [평민재상]이라 불리웠던 하라는 1921년 암살당할 때까지 선거권의 확대·산업진흥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하라 암살이후 귀족원 중심의 내각이 이어지자 1924년 1월 정당들은 협력하여 제 2차 헌정옹호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그해 6월 헌정회의 카토 타카아키(加藤高明)의 연립내각이 성립하여, 협조외교·군축정책·보통선거 실현을 추진하였다. 1925년에는 25세이상의 남자의 선거권을 인정하는 보통선거법이 성립하였으나, 치안유지법으로 무산 정당의 활동은 제약당하였다.

카토내각이후 1932년 5·15사건 때까지 의회의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정치가 계속되었으나, 의회의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며, 군부·관료 세력도 계속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권획득을 위한 정당의 대립은 격화되어, 정치자금의 조달을 위해 정당과 재계와 결합하면서 [금권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높아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군부와 국가주의단체등에 의한 정당정치배격의 움직임이 늘어갔다.

(3) 자본주의의 발전과 대중문화

제1차대전 종결로 유럽경제가 부흥하자 일본경제는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1919년부터 무역은 수입초과가 되고 1920년에는 주식의 폭락으로 전후공황이 발생하여 면사·생사의 가격이 반값이하로 폭락하였다. 1923년에는 관동대진재로 경제는 더욱 타격을 입어 불황이 계속되었으나, 불황속에서 미츠이·미츠비시·야스다(安田)·스미토모(住友)의 4대재벌은 금융·유통부문의 지배를 강화하고 정당과 밀착하여 발언권을 확대하였다.

제1차대전중 세계의 데모크라시 풍조의 유행으로  일본에서도 천황기관설(美濃部達吉)과 민본주의(吉野作造)등이 주장되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운동도 활발해졌다. 여기에 물가고에 의한 생활불안이 겹쳐 노동운동은 크게 발전하였다. 전국적인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점차 계급투쟁노선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작쟁의가 빈발하면서 1922년에는 전국적 농민조합이 결성되었고, 부락민의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는 부락해방운동도 활발하였다. 사회주의자들도 활동을 재개하여, 1922년에 일본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신부인협회 등이 결성되어 부인참정권 요구운동을 벌였다.

또한 고등교육기관이 증설되었으며, 자유교육운동이 확대되었다.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인도주의적인 입장에 의한 사회연구, 문헌비판에 의한 실증적인 역사연구등이 등장하였으며, 자연과학에서는 중공업의 발전과 함께 여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문학에서는  인도주의·이상주의·탐미주의 문학 등이 대두하였으며,  사회운동의 고양과 함께 프로레타리아문학이 생겼다. 또한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등의 신감각파 문학도 일어났다. 자본주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고 백화점·택시·레스트랑등에 서양풍이 채용되었으며, 보트·야구 등 서양 스포츠도 보급하였다. 1925년에 시작된 라디오방송은 신문·잡지·문고본·영화와 함께 문화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4) 경제계의 불황

1차세계대전후 만성적인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에, 1927년에는 금융공황이 일어나자,  타나카 기이치(田中義一)내각은 지불유예령을 내리고  일본은행의 비상대출로 이를 진정시켰다.

1926년 장개석의 국민정부의 북벌이 재개되자, 타나카 내각은 북상하는 북벌군을 저지하여 만주를 계속 지배하에 유지하기 위해 1927-8년 산동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1928년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을 만주주둔 일본군(관동군)이 폭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새로 성립한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내각은 협조외교노선을 부활하여, 1930년 런던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로서 해군 강경파와 국가주의 단체의 비난을 사게 된다.

또한 하마구치내각은 긴축재정과 산업합리화로 물가인하와 국제경쟁력의 강화를 꾀하였다. 그런데 1929년의 세계공황으로 수출은 안 되고, 1930년의 금수출해금 조치로 금이 다량 해외에 유출되어 불황이 심화되었다. 경제정책의 실패는 정당정치와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을 확대시켜, 1931년 하마구치수상은 암살당하고 협조외교노선은 끝난다.

(5) 군부의 대두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 국민정부측에 가담하자 군부에서는 만주점령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1931년 9월 관동군은 봉천근교의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柳條湖사건) 이를 중국의 행위라고 하면서 만주를 점령하였다. 이것이 만주사변이다.

이후 육군은 내각을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확대하였으며, 져널리즘은 군부의 행동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다. 일본은 반년만에 만주 주요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청조최후의 황제 부의를 집정으로 맞아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1932년 5월에는 해군청년장교들이 수상관저 등을 습격하여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수상을 암살한 5·15사건이 일어났다. 군부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수상으로 군부·관료출신등을 등용한 [거국일치내각]을 조직하였다.

한편,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국제연맹은 1932년 릿튼 조사단을 파견하여, 1933년 국제연맹 임시총회에서 일본군의 만주철수를 요구하는 권고안을 압도적 다수로 가결하였다.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워싱턴 해군군축조약 폐기·런던 해군군축회의 탈퇴 등을 통해 군비확장을 꾀하였다.

1936년 2월 26일 급진적인 육군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부요인을 암살한  2·26사건이 일어나자, 군부는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부활시켜 군부의 지지가 없이는 내각을 조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만주사변이후 언론·학문연구의 자유가 없어져, [천황기관설]이 반국체적 학설로 공격을 받고, 자유주의·사회주의 입장의 대학교수·연구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6) 중일전쟁과 전시체제의 강화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은 1936년 독일, 1937년에 이탈리아와 방공(防共)협정을 맺어, 추축진영을 형성하였다. 1937년 일본군은 노구교(蘆溝橋)사건을 일으켜 중국과 전면전을 개시하여, 남경에서 20-30만명을 학살하였다.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을 통해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미국·영국·소련등의 원조로 항일전쟁을 계속하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자 일본정부는 1938년 의회의 승인없이 물자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군사비는 증가하여 1938년도에는 국가세출의 4분의 3을 차지하였다.

1939년 9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전쟁불개입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40년 5월-6월에 독일이 대승리를 계기로, 석유·고무등의 물자 확보를 위해 열강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여론이 육군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940년 7월, 전체주의적 일당조직을 만들려는 신체제운동이 육군을 중심으로 추진되면서 정당이 해체되었다. 일본정부는 1940년 9월 남진정책을 결정, 북부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고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조약을 맺었다. 10월 수상을 총재로 하는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발족하여 의회제도는 유명무실해졌으며, 노동조합은 해산되고 전쟁 협력을 위한 산업보국회가 결성되었다.

1940-41년에는 생활필수품의 배급제와 쌀의 공출제도가 실시되었다. 소비물자 부족으로 국민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정부와 군부는 군국주의·국가주의 선전에 주력하여, 1941년에는 전시교육체제를 만들었으며,  전쟁이 격화되자 노동력과 전투력확보를 위해 중학교 이상의 수업연한을 단축하였다.

(7) 태평양전쟁

일본정부는 1941년 4월 소일중립조약을 맺었으나,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소련과의 전쟁도 각오하면서, 7월에 남부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영국·중국·네델란드등과 함께 경제봉쇄를 강화하여 일본군의 대외침략을 막으려 하였다. 큰 타격을 입은 일본에서는 육군·해군에서 대미개전론이 대두되었다.

1941년 10월 미국이  중국대륙·인도차이나 일본군의 철수·삼국동맹의 폐기등을 요구하자, 일본은 개전을 결정하고, 12월 일본해군이 하와이의 진주만 미국해군기지를 공격하면서 미국·영국에 선전 포고하였다. 이로서 태평양전쟁이 개시되고, 삼국동맹에 의거하여 독일·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하였다.

개전후 반년동안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1942년 미드웨이해전을 계기로 전황은 역전한다. 1943년의 연합국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각지에서 패배하였으며, 1944년 7월에는 남양의 군사기지 사이판이 미국군에 점령되었다.

통제된 언론과 필수물자의 결핍 속에서 일본국민들은 거국일치하여 전쟁에 협력하였으나, 생산능력을 총동원해서도 미국의 생산력에 대항할 수 없었다. 중학이상의 남녀학생과 노인까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한국인들과 중국인들도 강제징용되었으며, 1943년에는 학도병이 동원되었다.

1944년이후 미공군의 일본본토 공습이 본격화하였다. 1945년 6월에는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점령되었다. 유럽에서도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였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는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였으나, 일본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미국은 동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으며, 소련은 대일선전을 포고하고 만주와 치시마에 침입하였다. 일본정부는 결국 군부의 전쟁계속론을 천황의 결단이라는 형태로 눌렀다.

1945년 8월 14일 포츠담선언 수락을 연합국에 통고하고 15일에 라디오방송을 통해 천황이 이를 국민에게 알렸으며, 9월2일에는 항복문서를 조인하였다. 이로서 제2차세계대전은 추측진영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출전 : 안도사의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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