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28 (목) 21:38
분 류 사전3
ㆍ조회: 1842      
[조선] 당쟁의 원인 : 일본 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관련 문서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1-2.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일본 학자들의 견해
1-3.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1-4.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2-1.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2-2.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3-1. 선조조의 당쟁 1
3-2. 선조조의 당쟁 2
4-1. 광해조의 당쟁 1
4-2. 광해조의 당쟁 2

2)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일본 학자들의 견해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당쟁이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정치의 구조적인 산물이라는 견해이다. 전자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요, 후자는 한국 학자들의 견해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근대 사학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한국사 연구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왜곡이 많았다. 특히 조선 후기 당쟁에 대한 서술이 가장 많이 왜곡되어 있다. 한국인들의 분열적인 민족성 때문에 단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이웃 일본이 식민 통치를 통해 구제해 줄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일제시대에 당쟁의 원인을 거론한 학자로는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ㆍ가와이 히로다미(河合弘民)ㆍ호소이 하지메(細井肇)ㆍ미지나 쇼에이(三品彰英)ㆍ시카다 히로시(四方博) 등이 있다.

시데하라 히로시의 견해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일제 관학자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정치는 사권(私權)의 쟁탈에서 유래한다. 정가(政家)는 한번 정국을 담당해 일을 행하려 하면 여러 의론이 백 가지로 나오고 유언(流言)이 떠들썩하게 퍼지며, 음모를 꾸미면 암살을 꾀하고 한번 집권하면 정적을 일망타진하는 참화를 불사한다. 대신(大臣)의 교체가 주마등(走馬燈)과 같으니 국정을 개혁을 기할 수 없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일찍이 한국 정부의 초빙을 받아 그 학정(學政)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과거에 대한 조사는 현재의 착수에 자신을 주고 장래의 계획을 안전하게 하는 소이(所以)라는 것을 느껴 공사를 보는 여가에 국정의 연혁에 대해 탐구해 보았다. 본선의 정쟁에 관한 연구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 가운데 열의 하나도 글로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감히 대방(大方)의 고사(考査)에 비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조 500년의 현상순치(現狀馴致)의 주 원인 중 하나가 정쟁인 만큼 이에 관해 누군가는 그 연원을 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반도의 정치와 역사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일고(一顧)를 얻으면, 내 바람은 그것으로 족하다." ([韓國政爭志] 서언, 1907)

시데하라는 1893년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가고시마(鹿兒島) 조사관(造士館) 교수로 있으면서 오키나와(流球)의 역사를 전공해 [남도연혁사략(南島沿革史略)]이라는 책을 썼다. 그 후 도쿄고등사범학교 교수로 있다가, 1905년 30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학부참정관(學部參政官)으로 부임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입안하는 일을 맡았다. 1925년 경에 일본 일본 문부성 도서관장을 거쳐, 1928년에 타이페이대학(臺北大學) 초대 총장이 되어 7년간 근무했으며, 1942년에 흥남연성원(興南鍊成院) 원장이 되었다. 전후에는 일본 총리를 지낸 그의 형 시데하라 기쥬로(幣原喜重郞)의 후광으로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정쟁지』는 그가 학부참정관으로 있을 때 지은 책이다. 그는 이 책 외에 『조선교육론』ㆍ『식민지교육』도 썼다. 경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일제의 해외 식민지 교육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고, 그런 만큼 이 책도 그러한 업무의 일환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식민 통치를 위해 이 책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인의 오늘날의 작태를 이해하려면, 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실의 근원으로 고정적인 것은 당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대저 당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정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편리하고, 또 국정(國政)의 심사(審査)에 가장 유익하다." (앞의 책)

그는 당쟁의 기원을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로 올려잡고, 그 때의 사화를 유파(儒派)오하 비유파(非儒派)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리고 동인과 서인의 갈림, 노론과 소론의 갈림을 김효원과 심의겸, 송시열과 윤증의 개인간 감정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당쟁이 한국인의 심성에서부터 생긴 것이라고 보기 위해서이다.

가와이 히로다미의 견해

가와이 히로다미(河合弘民)는 당쟁의 원인에 대한 시데하라의 논의가 피상적인 고찰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그는 시데하라가 당쟁의 기원을 연산군대로 올려 잡고 그 때의 당쟁을 유파와 비유파간의 대결로 보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당쟁이 반드시 유파와 비유파의 대결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동인과 서인의 갈림을 구파와 신파의 대력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에도 반대했다. 신ㆍ구파라는 애매한 구분으로는 당쟁의 근본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당쟁의 원인을 좀더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와이는 됴쿄제국대학 문과를 나와, 1907년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의 교두(敎頭)로 부임해 조선 경제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당쟁의 원인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았다. [조선에 있어서의 당쟁의 원인 및 당시의 상황](史學雜誌 27-3, 1915)이란 논문에서 그는 조선의 당쟁은 경제 생활의 곤란, 사회 제도의 문란에서 생겼다고 주장했다.

가와이에 의하면, 조선은 자족(自足) 경제를 벗어나지 못해 생활 필수품을 각자의 손으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교환의 방법도 발달하지 못했다. 양반들조차 생활난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 집안에 40~50인의 대가족이 모여 살았고 그들을 부양하는 것이 문장(門長)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조선 사람들은 한 집안의 재산이 기껏해야 일본 돈 15원에 불과했으며 아무런 저축도 없는 불행한 처지였는데, 이제 천황 폐하의 신위(神威)를 받아 소생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해 양반들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했다. 양반들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토지와 노비를 가져야만 했는데, 이는 관직을 차지해야만 확보할 수 있었다. 더욱이 선조조 이후에는 관리 수가 증가하여 녹봉을 제대로 받기가 어려워졌으므로, 관권을 남용해 수입을 늘리려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그러자 제한된 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당파가 생기고 당쟁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족들은 많은 첩을 거느려 자녀가 많아졌고, 왕자들은 자기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양반의 당파와 연대해 정쟁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들에게 충군애국(忠軍愛國)과 같은 관념은 희박했고, 오로지 사우(師友) 관계와 자기 집안의 이익만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 후기 당쟁의 원인은 유파나 예론 혹은 개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경제 생활의 곤란과 사회 제도의 문란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마디로 조선 문화의 낮은 수준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반의 생활이 반드시 녹봉만으로 영위된 것은 아니다. 명종조부터는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하던 과전(科田)도 없어졌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당쟁이 사림의 공론(公論) 때문이 아니고 생활이 곤궁해서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는 조선의 사림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나온 논의라고 할 것이다.

호소이 하지메의 견해

가와이의 견해는 호소이 하지메(細井肇)에게 계승되었다. 호소이는 당쟁의 원인에 대한 가와이의 논리에 감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에 있어서 정권은 곧 생활이다. 정권을 잡지 못하면 생활을 확보하지 못한다. 권력을 잃는 것은 곧 굶어 죽는 것이다. 아사(餓死) 앞에서는 이(理)도 비(非)도 없고, 의리도 인정도 없고, 대의도 없고, 명분도 없다. 물러나서 굶어 죽느니 적당(敵黨)과 싸워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권을 빼앗아야 했다. 그리하여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 집단적으로 당파를 조직해 군중심리에 대한 책임 회피와 자기 최면으로 당쟁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들은 생활하기 위해 생활을 불안의 정점에 두는 것을 후회할 줄 몰랐다. ……이것이 당시의 가와이 씨의 논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탁견이라고 생각해 지금도 이 의견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朋黨ㆍ士禍의 檢討』, 自由討究社, 1921)

그는 프랑스 학자 르 봉(Le Bin, Gustave)의 겁 많고 비겁한 자야말로 때에 따라 놀라울 정도로 용감한 행위를 한다"는 군중심리 이론까지 원용하며 조선의 당쟁성을 부각시킨다. 즉 오직 생활을 위해 당파를 만들어 상대 당을 여지없이 몰아쳐 죽인다는 것이다.

자신이 배제(排除)와 구함(構陷) 같은 죄업으로 무리하게 빼앗은 자리는 결코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고침(高枕)이 안와(安臥)를 탐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방의 목숨뿐만 아니라 그 아들, 손자, 친구, 심지어는 상대방의 혈연 또는 동류로 보이는 자까지도 모두 절멸시켜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겁쟁이는 협박 관념에 떨면서 그 정적을 진살(塵殺)하는 맹악(猛惡)한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굶어 죽는 대신 눈앞 촌척(寸尺)의 생활의 안녕을 도모했다. 이러한 인간에게 국가적 관념이나 민생을 돌아보는 지성을 요구해도 이것은 요구하는 자가 무리이다. 이러한 인간은 자기의 생활 이외에 어떤 일도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타인이 자기 이상의 공을 세우면 이것을 질시해서 타도하는 운동을 벌인다. 산이 벗겨져도, 개울이 말라도 상관이 없다. 당쟁의 화[黨禍]는 날로 성해 갔다. 그리하여 나무 잎사귀가 벌레에게 파먹히고(조광조를 모함하기 위해 홍경주가 궁녀를 시켜 꿀로 나무 잎사귀에 '走肖爲王',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글을 써 놓아 벌레들이 파먹게 해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필자), 근거없는 사실로 무고하고, 터무니 없는 일로 인해 사림이 대학살당했다. 이리하여 약육강식이 자행되고 끝없이 동족의 피를 핥고 뼈를 씹는 수백 년간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앞의 책)

그리고 그는 당쟁의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호소이에 이르러 당쟁의 원인은 민족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돌변한다.

"나는 혈액이 굳어 버린 채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 사람의 혈액에는 이처럼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다는 것도 조선의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비(是非)를 함께 궁구해 둘 필요가 있다. 여하간 대 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 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는 없고, 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육성된 인격 도는 국격(國格)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꾸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앞의 책)

이와 같이 호소이는 당쟁이 한국인의 선천적인 민족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가령 영국의 매콜리(Macauly, Thomas Babington) 경이 인도 교육법안을 만들어 인도인을 영국화시키려고 애썼으나, 오날날까지 인도종(印度種)은 여전히 인도종일 뿐이다. 그것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인의 장단점을 알지 못하고 시행하는 정책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해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사실상 호소이가 『붕당ㆍ사화의 검토』를 쓴 목적은 당쟁을 통해 조선인의 심성을 파악하는 데 있었다.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이 책은 목포신보(木浦新報) 주간이었던 나가로 고지로(長野虎次郞)의 자료 지원을 받아 썼기 때문에 같이 지은 것[共著]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호소이 혼자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출판한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는 3ㆍ1 운동 이후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역사ㆍ문룰ㆍ풍속ㆍ습관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었다. 호소이는 자유토구사에서 기획한 『통속조선문고(通俗朝鮮文庫)』의 주무를 맡아 보면서 『정쟁과 당쟁』(1914)ㆍ『벌족죄악사』(1919)ㆍ『국태공의 비(國太公の毗)』(1932) 등 조선의 당쟁과 정쟁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미지나 쇼에이와 시카다 히로시의 견해

당쟁이 한민족의 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이론은 미지나 쇼에이(三品彰英)ㆍ시카다 히로시(四方博)에 이르러 한층 심화되었다. 미지나는 지리적 결정론에 근거를 둔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론을 주장한 장본인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은 반도로서 북쪽으로는 중국ㆍ만주,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일본 같은 대국들에 둘러사여 있어서 중국의 전례(典禮)주의적ㆍ주지(主知)주의적 지배를, 만주와 몽고의 정복(征服0주의적ㆍ주의(主意0주의적 지배를, 일본의 공존(共存)주의적ㆍ주정(主情)주의적 지배를 번갈아 받아 왔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는 타율적인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사의 타율성 때문에, 한국인은 독립성이 결여된 대신 의타성(依他性)ㆍ당여성(黨與性)ㆍ뇌동성(雷同性) 등의 민족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타율적 권위에 의존해 자기를 주장하는 정신은 독립성을 결여하고 그 곳의 사람이 서로 의존하는 당여적(黨與的) 성격이 육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력한 귄위 아래 모이고 혹은 특수한 자의 결합에 의존해 당벌(黨閥)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의 국민성으로서 정치ㆍ사회 면에서도 다같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 당여성은 경제 생활을 비롯해 제반 사회 생활을 통해 금융조합 및 각종의 상호 원조 조직을 발달시키고, 혹은 사회의 기본적인 결합력인 혈연 관계에 의존해 씨족적 도덕을 발달시키는 등 효과적 측면도 결코 적지 않다. 저 이조 500년간 대부분을 점하는 붕당 정쟁사, 혹은 사회 생활에서 소위 일문 일족에 의뢰하는 동족의뢰주의와 같은 것은 그 폐단의 대표적인 것이다. 붕당의 다툼은 스스로의 생활 의식의 대립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작학의 원리, 특히 예론에 의한 일종의 의식적 대립인 까닭에 종합되어 진전되는 때가 없고, 언제까지나 의미 없는 대안으로서 성과 없는 항쟁을 계속한다. 그 항쟁의 시간적 길이에 있어서는 세계적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실로 놀랄 만하다. 또 이 당벌성(黨閥性)이 임기적(臨機的)인 열정을 수반해 나타날 때, 그들의 민족적 특성의 하나인 뇌동성으로 되고, 조선의 정치적ㆍ사회적 사건이 획기적ㆍ조직적인 것보다 오히려 저반(這般)의 성격에 의해 특색 지어지고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 장의 격문, 교묘한 연설이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국민이다." (『조선사개설(朝鮮史槪說)』, 弘文堂, 1940)

이는 민족성론에 의거한 당파성론의 극치이다. 미지나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번역ㆍ주석했는 가 하면, 화랑도에 관한 글을 쓰는 등 한국 고대사 연구에 수준 있는 학자였다. 그러한 그가 한국인은 본성이 분열을 좋아하고 남에게 의지하기를 좋아하며 부화뇌동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강변함에 따라, 일제가 개발 유포하고자 했던 한국인의 당파성론은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시카가 히로시(四方博)도 "파벌성이 조선 민족의 특성"이라고 전제하고, 당쟁은 주자학의 결벽성을 기계적으로 강조한 데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舊來의 조선 사회의 역사적 성격], 朝鮮學報 2, 1951) 시카다의 견해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성론은 식민 통치를 합리화할 목적으로 이론화되었다는 점 외에도 당쟁을 사림정치의 구조적인 결과물로서 보지 않고 망국의 원인으로 전제하는 선입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단적으로 당쟁이 일어난 것은 조선 후기 200여 년간에 불과한데, 이를 5000년 역사에 뒤집어씌워 민족의 본성 때문이라고 규정한 것은 철저한 편견이 아닐 수 없다.

권력 투쟁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것이며, 권력 자체가 배타적인 것인 만큼 집권하면 핵심 세력과 소외 세력이 갈려 파당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파당이 자자손손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나 특색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당쟁이 대대로 계속되었던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학이 국가의 지배 사상으로 널리 보급되어 가족주의적인 연대가 강화되었고, 학통을 중시하다 보니 사우 관계가 절대시되어 분당의 시대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역사를 사실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역사 연구의 기본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서 좋고 나쁜 측면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서서, 선악을 기준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이다. 중앙 집권적 문치주의의 경우가 그렇다. 붓을 든 문신이 고도의 정치 이론과 기술을 가지고 사림정치와 같은 역사상 유례가 드문 정치 체제를 창출한 점이 긍정적인 측면이라 한다면, 그러한 정치 이론과 기술을 자기 당파에 유리하도록 견강부회해 당쟁에 이용한 점은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제 학자들은 식민 통치라는 목적을 위해 당쟁의 부정적인 측면을 과장해 주장했던 것이다.

이시이 가즈오의 견해

일제 학자들 중에 유일하게 당쟁의 긍정적 측면을 거론한 인물은 이시이 가즈오(石井壽夫)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를 비판하고 당쟁의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지금까지는 당쟁을 지나치게 혹평해 그것을 이기적ㆍ물욕적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의리라든가 학문이라든가 하는 것은 표면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의 근거는 대부분 당쟁이 고정되고 부패한 후대인들의 붕당관으로, 거기에는 오히려 그 필자의 시대적 제약이 작용하고 있어 그 시대 당쟁의 특색이 나타나 있다고 할 것이다. 붕당 300년을 통해서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는 관념을 부지불식간에 하나의 전제로 깔고, 곧 그것을 붕당 원인론의 전부로 삼으며, 나아가 그것을 가지고 초기 당쟁시대를 다루여 하는 데에는 찬성할 수가 없다." ([後期李朝黨爭史에 대한 一考察], 社會經濟史學 10-7ㆍ8, 1940)

이시이는 조선시대를 귀족주의적 전제정치 국가사회로 보고, 귀족 세력과 전제 왕권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만 건전한 국가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붕당이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출현했다고 보았다.

"사화(士禍) 시대에는 귀족 세력이 우월했기 때문에 왕권은 쇠약해져 양자의 조화가 깨졌다. 지방 하층 귀족 세력인 이학파(理學派)가 새로운 혁신 세력으로 성장해 간 것은 바로 이러한 혼란을 수정한 것으로 붕당은 그 결실이다. 붕당의 출현에 의해 고정ㆍ침체되었던 사회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귀족간에는 대립적인 여러 세력이 형성되어 서로 각축하였다. 여기서 저절로 일종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서 귀족 세력과 전제 왕권은 다시 모습을 바꾸어 이전의 조화를 되찾은 것이 아닐까? 당쟁의 출현은 대외적으로 국력의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내적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역사상 봉건주의적 지배 원칙-'민중을 분열시켜라! 그리고 지배하라!-은 아니었을까? 조선 후기 300년이 드물게도 태평 시대였던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앞의 글)

이와 같이 이시이는 사화지상(詞華至上) 시기의 사화(士禍)로부터 이학지상(理學至上) 시기의 붕당(朋黨)으로의 이행을 조선의 회춘(回春)으로 보고 있다. 붕당이란 100년에 달하는 사화 시대의 반목을 겪으면서 저절로 투쟁적ㆍ붕당적 정개심이 육성되어 이학파가 승리함과 동시에 동지간에 얼력이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붕당은 사화지상 시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적으로 삼을 목표를 잃어 버린 사류들의 자기 분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이학지상주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붕당정치 시대라는 것이다. 이학지상주의가 승리함에 따라 왕권은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최고ㆍ절대의 권위는 국왕이 아니라 가공의 '도(道)'이기 때문에 의리에 합치하는 한 국왕은 절대적이지만, 만일 양자가 괴리될 때에는 국왕이라도 폐위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광해군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붕당정치의 절대적 권위는 송학적(宋學的) 의리(義理)요 이법(理法)이라고 했다. 따라서 가족주의적 '정(情)'은 붕당의 '정(情)'이라는 새로운 사회 유대와 연결되어 잠재해 있었으나, 의리와 이법에 밀려 때로는 부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붕당의 출현이 '가(家)'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로부터 국가와 사회를 동시에 중시하는 현대적 국가 사회로 한 걸음 전진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리나 이법이 쇠퇴하게 되면 잠재해 있던 가족주의적인 '정'이 강화되어 벌열정치(閥閱政治)로 치닫게 된다고 했다. 세도정치가 그 예이다.

이시이에 의하면, 17세기 당쟁시대의 의리는 전반기에는 '춘추대의(春秋大義)'였다가 후반기에 '예론(禮論)'으로 바뀌었다. 17세기 당인(黨人)들도 의리에 대한 확신과 학문에 대한 정렬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시이는 이학지상주의에 바탕을 둔 17세기 초기 당쟁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붕당정치의 배후에 숨어 있는 공리적ㆍ물욕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17세기는 양반 관념의 확립기로서 양반들은 의리와 이법을 내세워 이학지상주의적 국가사회의 최고 구현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면 이들이 비생산 계급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식록(食祿)을 위해 심한 공리적ㆍ물욕적 싸움을 불사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붕당이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ㆍ사회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쟁이 격화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권을 유지하려는 양반 귀족의 격렬한 투쟁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오히려 이법에 맞게 사는 것 자체가 공리적ㆍ물욕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편으로 생각해 사회가 회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쟁은 개인의 능력을 존중했고 의리와 학문을 존중했으므로 자기 당의 당세를 확대하려면 유능한 인물, 탁월한 학자를 발탁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많은 훌륭한 인물ㆍ학자가 정계에 진출해 사회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국가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시이의 이론은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의 백미라 할 만하다. 그는 17세기의 당쟁을 사회사적인 입장에서 구조적으로 분석해 당쟁사 연구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이 나옴으로써 당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편견은 존립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비록 그가 17세기의 당쟁을 붕당정치로 규정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나타난 정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지 당쟁이라는 용어와 크게 구별해 쓴 것은 아니다. 그의 논의는 붕당정치를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17세기에 이르러 이학지상주의의 승리로 조선 사회가 회춘했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정파의 분열은 사화기에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져 있다가 사림파가 승리하자 사림파가 자기 분열해 붕당이 생기게 되어 이를 붕당정치라고 단순히 명명했을 뿐이다. 붕당간의 다툼이 당쟁이기 때문에 붕당정치와 당쟁을 구태여 구별해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논문 말미에 다음과 같은 사족을 붙이고 있다. 민중 봉기에 의한 귀족주의의 패퇴를 중세 동양적 국가로부터 민족 국가로 발전하는 과도기로 보고 "이것이 조선으로 하여금 황국 일본의 일군만민정치(一君萬民政治)의 은택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중재 역할을 담당했던 점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광채를 발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조선 후기 이학지상주의 국가사회의 붕괴를 알리는 애처로운 전주곡이야말로 실로 신생의 환희가 넘치는 행진곡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 것이다.

이 구절로 미루어 그도 결국 일제의 어용학자로서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으며, 조선 후기 당쟁에 대한 그의 구조적 분석도 한 방편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논문에서 임진란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그런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썼다면 17세기 조선 사회의 회춘도 임진란의 충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강변했을지 모르겠다. 그가 일본의 패전 이후 극우적인 강연을 많이 하고 다닌 사실로 보더라도 역사를 올바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는가에 대해 의문이 간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30~44
   
윗글 [조선] 당쟁의 원인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아래글 [조선]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이성무)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8 사전3 [조선] 선조조의 당쟁 1 (이성무) 이창호 2002-11-26 2860
7 사전3 [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이성무) 이창호 2002-11-08 3195
6 사전3 [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이성무) 이창호 2002-11-08 3714
5 사전3 [조선] 당쟁의 원인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이창호 2002-11-24 1893
4 사전3 [조선] 당쟁의 원인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이창호 2002-11-24 1931
3 사전3 [조선] 당쟁의 원인 : 일본 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이창호 2002-11-28 1842
2 사전3 [조선]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이성무) 이창호 2002-11-07 2510
1 사전3 [알림] 한국사 사전 2를 만듭니다. 이창호 2010-07-01 412
1,,,301302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