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24 (일) 07:33
분 류 사전3
ㆍ조회: 1904      
[조선] 당쟁의 원인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관련 문서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1-2.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일본 학자들의 견해
1-3.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1-4.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2-1.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2-2.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3-1. 선조조의 당쟁 1
3-2. 선조조의 당쟁 2
4-1. 광해조의 당쟁 1
4-2. 광해조의 당쟁 2

4)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조선 후기 당쟁의 원인에 대해 광복 이후에는 중앙 집권적인 문치주의의 부산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역사를 감성적으로 보지 않고 구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입장에서였다. 또한 당쟁을 민족성에 말미암은 부정적인 것이라는 일제 학자들에 대한 반발도 없지 않았다. 당쟁을 구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일제 학자들의 부정적인 견해를 불식시키려는 의미에서 붕당정치론이 대두했고, 그보다는 당쟁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입장에서 사림정치론이 나왔다. 이 두 견해는 내용은 거의 같으면서도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놓고 한동안 논란된 바 있다.

이태진의 견해

일제 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당쟁'이라는 용어는 한국인을 폄하하기 위한 오염된 용어이니 써서는 안 되고, 그 대신 '붕당정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사람은 이태진(李泰鎭)이다. 그는 당쟁이란 용어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당쟁이란 용어를 거침없이 쓰고 있지만, 그것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한말ㆍ일제하에서 조선 왕조의 정치와 역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입장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져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조선왕조 당대에는 당쟁이 아니라 붕당(朋黨)이란 말이 주로 쓰였는데, 주로 일인 학자들이 파쟁성을 부각시켜 '붕당간의 싸움'이란 뜻으로 당쟁이란 용어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쟁이란 용어 자체에 이와 같은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 하나로서 규정지워지고 있는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다시 한 번 그 당부(當不)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조선 왕조 당대에 쓰였던 용어인 붕당의 개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14쪽, 범조사, 1985)

일단 이러한 주장은 당쟁이라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여기는 일반의 인식을 바구어 놓기 위한 긍정론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붕당정치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정치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당쟁이란 용어 이외에 따로 조선 후기 정치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있기만 하면 좋은데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므로 이에 해당하는 적절한 용어를 만들어 내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용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쟁'이라고 하면 의미가 너무 넓기 때문에 '붕당간의 다툼'이라는 뜻에서 당쟁이란 용어를 당분간 그대로 써도 되지 않을까 한다. 일제가 쓴 부정적인 의미의 용어를 피하기 위해 긍정적인 의미는 가지지만 온전히 맞지 않는 용어로 대치하는 것도 객관적인 연구 자세는 아니다. 당쟁에 관한 한 현대 중국 학자들도 그대로 쓰고 있는 만큼 의미를 공유하는 차원에서도 새로운 용어가 나올 때까지 그대로 써도 무방할 것 같다.

한편 이태진은 당쟁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학연성을 바탕으로 하여 공도(公道)를 실현하려는 사림게의 '붕당정치'를 16세기 이후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역사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정치세력으로서의 붕당의 분화가 학연성(學緣性)을 으뜸 요소로 하여 이루어져 나가는 것도 붕당정치하의 정파간 대립이 단순한 명목적 대립이 이니란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상호비판을 원리로 하는 이와 같은 사림계의 붕당정치는 그 나름의 단점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정치에서 공도(公道)의 실현을 위해 현실적으로 강구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엇다. 16세기 후반 이래의 붕당정치는 사실 그사이 파행적 형세도 적지않게 경험했지만, 그 경험이 축적된 단계인 17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정치 체제로서의 타당성을 의연히 재확인되어 다음과 같은 붕당정치론이 일반화하는 추세에 놓이고 있다. 즉 붕당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없애고자 하면 도리어 천하를 망하게 하는데 이른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6세기 후반 이후의 정치형태 '당쟁'의 성격],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그의 주장은 사화 시대에 훈구파와 대립하던 사림파가 16세기 이후 정계에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자체 분열해 사림간의 붕당이 생겼다는 이시이의 견해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붕당정치 초기인 선조조에는 아직도 훈구 계열의 인물이 남아 있어 구양수(歐陽修)의 군자소인론이 원용되었다. 즉 군자의 진붕(眞朋)은 부양하고 소인의 위붕(僞朋)은 억눌러야 한다는 일붕(一朋)의 원리가 유행했던 것이다. 그러넌 것이 훈구 계열의 인물들이 사라진 17세기 후반의 경신환국(庚申換局)을 전후해 붕당정치는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이 무렵부터 첨예한 정쟁 속에서 상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일당 전제의 추세가 현저해져 붕당정치의 기본이 깨지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태진은 붕당정치의 이와 같은 변화 과정에 주목하여 조선 후기 정치사를 다음과 같이 시대 구분하고 있다. 즉 선조조를 붕당정치의 성립기, 인조조를 붕당정치의 전성기, 효종 말에서 현종 초를 붕당간의 대립기, 숙종 초를 붕당정치의 파탄기, 영ㆍ정조조를 탕평기, 손조조 이후를 세도정치기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군권의 향배와 각 당파 정치 세력과의 관계를 밝혔으며, 사회 경제의 발달과 그에 따른 부의 쟁탈이 정쟁과 깊은 관계가 있음도 밝혔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 대한 이태진의 견해는 이 방면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붕당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붕당정치를 거론한 초기에는 당쟁과 붕당정치란 용어를 크게 구별해 쓴 것 같지 않다. 가령 앞의 책에서 이태진은 "조선조의 붕당정치, 곧 당쟁에 대한 종래의 인식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뒤의 당쟁이란 용어는 일인 학자들이 한국인의 당파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붕당정치라고 고쳐서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덕의 견해

이태진의 붕당정치론에 대한 비판은 김용덕(金龍德)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당쟁사를 새롭게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수긍하지만, 그렇다고 당쟁이 곧 붕당정치라는 주장에 찬성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붕당정치'가 곧 정당정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것과 아울러 무엇보다도 명확한 개념이 없다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당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서 '붕당정치'란 새로운 용어을 쓰려면 그에 대한 명확한 개념규정이 있어야겠는데,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붕당정치'란 개념이 당쟁시대, 즉 선조 8년으로부터 영조 원년에 이르는 시대(분당 1575년∼탕평 1725년) 약 150년 전부를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숙종대(1675∼1720)에 들면서 당쟁은 붕당정치라 할 수 없을 만큼 변질ㆍ가열되어 상대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추세가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숙종대야말로 당쟁의 전성시대요, 서인과 남인의 혈전이 절정에 달한 당쟁사의 황금시대임을 용인한다면 상대세력의 공존을 필수로 하며 상호비판과 견제를 내용으로 하는 붕당정치라는 개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없다." (['붕당정치론' 비판-조선시대 당쟁사의 성격-], 『정신문화연구』2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계속해서 그는 '붕당정치'라는 용어는 이시이가 처음 사용한 용어인데 그 개념이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이시이가 설정한 사화-붕당-탕평-척족의 네 시기 가운데 숙종ㆍ경종대가 어디에 속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고 했다. 또 당쟁의 태동기이자 과도기인 선조대에은 당쟁이 붕당정치여야 하는데,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난의 참상[己丑獄]을 보면 비판과 견제, 양당의 공존 같은 것은 관념이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미화된 공론(空論)인가를 통감한다고 했다. 따라서 당쟁이 곧 붕당정치라는 "새로운 이해"는 적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왜곡시킬 우려마져 있다고 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쟁사를 새롭게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수긍하지만 그렇다고 당쟁이 곧 붕당정치였다는 설에도 찬성하기 어렵다, 그것은 '붕당정치'가 곧 정당정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진실의 천명이 역사의 제일의적인 사명이지 자기 역사에 대한 미화나 정처(長處)의 과장은 세계 속의 한국을 사는 현대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할 것이다. 부끄러운 것, 어두운 면도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조상이 겪은 스라린 상황도 그대로 인식될 것이며, 지금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자기의 단점, 부끄러운 점을 직시하는 것은 자신과 용기와 저력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당쟁이란 용어가 일본인의 창작이라 하여 그와 대조적인 미화된 용어을 쓰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당쟁사에 있어서 일본인이 지적한대로 어두운 일면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그 긍정적인 면을 인식하는 것과 아울러 역사의 유기적이며 발전적인 이해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의 글)

이 반론도 잘못된 점이 많지만 붕당정치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히려 조선 후기의 정치를 구조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태진의 견해가 옳다. 다만 조선 후기의 붕당간의 싸움을 붕당정치라고 해야만 긍정적인지 하는 점에서는 김용덕의 주장이 타당하다.

정만조의 견해

정만도(鄭萬祚)도 '붕당정치'가 조선 후기의 정치 형태라고 보기가 어렵고 다음과 같이 '당쟁'을 그대로 써도 무방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우선 '당쟁'의 용어부터 보면 이것은 일인 시데하라에 의해 1908년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이래 일제시대를 거쳐 지금가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그 중에서도 17세기를 중심으로 한 시기의 정치현상이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대립상을 현저하게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달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 당쟁에 대해, 그것이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용어가 아니라든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비판되고 굳이 기피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조선시대의 사림정치-17세기의 정치 형태-], 『한국사의 정치형태』 일조각, 1993)

그는 우선 '붕당정치'가 과연 정치 형태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적당한가 하는 의문부터 제기한다. 즉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 형태란 정치 권력의 소재나 구성을 밝히는 형태를 의미하며, 대체로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 왕ㆍ귀족ㆍ민중ㆍ독재자 등을 기준으로 하여 군주저으 귀족정, 민주정(또는 민주적 공화정)과 전제정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주로 정치 운영 방식에서 나온 붕당정치를 정치 형태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붕당정치의 요건으로 '공론을 앞세운 붕당 사이의 상호 비판과 견제'를 내세우고 있는 데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사림 세력이 공론을 앞세워 비사림 세력을 비판ㆍ견제한 것은 붕당이 있기 이전부터의 일이며, 붕당정치의 전형적 구현기라는 인조조에도 서인과 남인의 대립보다는 같은 서인 중에서 공신 세력인 공서(功西)와 사림 세력인 청서(淸西)의 대결을 더 기본적인 대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7세기의 붕당들이 공존을 실현했다는 점을 들어 붕당정치라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권력의 속성상 어떤 당파도 공존이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서인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국왕이 남인 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정권 안정을 위해 집권 서인 세력이 남인을 끌어들여 일종의 거국내각을 구성한 데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붕당 공존은 단지 집권 세력이 상대 세력의 정치적 반대 의견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인은 인조반정이라는 비상 수단으로 정권을 차지한 만큼 여러 정치 세력의 폭넓은 지지가 필요했다. 광해군조의 북인(北人)이 권력을 독점하려다가 자체 분열해 몰락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집권 세력이던 대북(大北)을 제외한 남인과 소북(小北)의 일부(뒤에 남인이 되었다)를 받아들여 거국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인조조에 서인과 남인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조반정 이후의 정권은 서인이 주도하다시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조반정은 당쟁사에 있어서 실로 커다란 분수령이다. 고려 초기부터 계속 정권을 주도해 온 것은 기호(畿湖) 세력이었다. 그러다가 사림 정치 초기 단계인 선조ㆍ광해군조에 영남(嶺南) 세력의 정권이 들어섰고, 인조조부터 다시 기호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 활동한 남인 세력도 영남 남인이 아니라 기호 남인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 후기의 정치 형태는 사림정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붕당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상황임에도 붕당정치를 당시의 공식적인 정치 형태로 상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붕당의 형성은 사림정치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부산물로 보아야 한다.

사림의 개념과 사림정치

사림정치의 틀을 논하려면 우선 사림에 대한 개념부터 먼저 규정되어야 한다. '사림(士林)'이란 '사대부의 수풀(士大夫之林)', 즉 사대부의 무리를 지칭하는 일반 명사이다. 문관의 5품 이하를 '사(士)', 4품 이상을 '대부(大夫)'라고 했으니 사림은 문관 관료의 무리를 말한다.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문관과 무관을 통틀어 사대부라고 했으므로 사림이라면 문ㆍ무 양반 관료 모두를 지칭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물론 그 일족까지 양반의 범주에 들었기 때문에 사림은 벼슬하지 않는 선비들까지도 포괄하는 용어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사림은 사족(士族)ㆍ사류(士類)와 함께 다 같이 양반층을 지칭했으나 양반과 사족은 가족까지를, 사림과 사류는 유교 교양을 갖춘 양반의 남자들만을 지칭하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사림은 역사적인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세조의 집권으로부터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18년간에 배출된 250여 명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가 정권을 차지하자 여기에서 소외된 부류들을 사림파(士林派)라 불렀다. 그들은 주로 지방에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류들이었다. 세조는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대신해 신진 사류를 불러들였으며, 예종이나 성종도 훈구파를 누르기 위해 그들을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정계에 새로운 피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이태진은 이러한 정파로서의 '사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사림은 용어상으로 보아 문자 그대로 선비의 숲이란 뜻이며, 사족의 군집성(群集性)을 드러내는 표현인데 대개 15세기 말엽부터 사용되며, 사회적 존재로서는 현직관인보다는 진사층(進士層)을 중심으로 한 재야 지식인을 포괄하면서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 그리고 그것의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구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경제적으로는 재지중소지주적인 기반을 갖는 부류로서 서원을 향촌활동의 구심적으로 삼으며, 향약에 기초한 향당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적 갈등과 해결],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범조사, 1985)

이에 대해 정만조는 16세기의 사림은 지방에 근거를 두고 훈구 세력을 공격하지만, 17세기의 사림은 중앙 정계의 당로자(當路者)들이었으므로 이를 같은 수준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사림의 개념은 "마음 속으로 고도(古道)를 그리워하고, 몸으로 유행(儒行)에 힘쓰며, 입으로 법언(法言)을 말함으로써 공론(公論)을 가진 자"라고 한 율곡(栗谷)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그는 사림정치의 개념과 범주를 ① 시기적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말엽까지에 걸쳐 존속했던 정치 형태이며 ②주도 세력은 사림이라 불리는 집단이었고 ③ 그 정치 목표를 성리학적 정치 이념의 구현에 두면서 ④ 정치 운영 방식은 공론을 앞세운 언관권의 재상 비판과 견제, 즉 붕당정치에서 구한 정치 형태였다고 했다. (정만조, 앞의 글)

조선 왕조는 초기에 지방의 향리 세력을 누르고 토성사족(土姓士族)을 양반으로 편입시켜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육과 과거 시험을 통해 이들을 중앙 관료로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훨씬 넓어지게 되었다. 지방 사족들은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기르고, 향약(鄕約)과 사립학교[私學]를 통해 지방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한편, 성리학을 연구해 중앙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수신 교과서인 『소학(小學)』의 정신을 내세워 부패한 훈구 관료들을 공격했고, 훈구 세력을 누르려고 하는 국왕의 지원을 받아 속속 정계에 진출했다. 이들은 도학정치를 표방해 정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 이것은 16세기의 역사적 대세였다. 이들은 과거 시험에 경서 강독을 강화하고 추천제[薦擧制]를 실시해 신진 사류의 진출을 용이하게 했으며, 이조전랑ㆍ대간ㆍ홍문관ㆍ사관 등 엘리트 관직을 차지해 중견 관료로서 인사권과 언론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에 염증을 느낀 국왕이 반동적으로 훈구 세력과 협력해 몇 차례의 사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정권은 일시 외척ㆍ권신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외척ㆍ권신들은 자기 사람을 전랑과 언관에 기용해 정권을 독점하려고 했다. 그러나 외척의 한 사람인 심의겸이 이량(李樑)의 사림 제거 음모를 미연에 방지한 것을 끝으로, 권신들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그 결과 선조조부터는 사림들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훈구 세력과 권신이 물러나자 사림은 적대 세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사림은 스스로 분열해 붕당을 이루고 서로 다투게 된다. 이것이 당쟁이다. 선조 초년에는 비록 사림으로 전향하기는 했으나 명종조에 활동하던 구신 세력인 선배들과 새로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 사이에 당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동서분당(東西分黨)이다. 후배 사류들은 선배 사류들을 유속(流俗)이라 해서 소인이라 몰아 세우고 스스로를 군자라고 자처해, 이른바 군자소인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점차 선배 사류들이 사라지고 신지 사류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자 군자소인론은 퇴색하고, 각 붕당의 군자들만 뽑아 쓰면 된다는 이른바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이 유행하게 되었다. 조제보합론의 유행은 붕당을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특정 당파의 독주를 방지해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선조의 노력과도 관계가 있다. 또한 정권을 잡은 붕당이 자기 당의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고 비판 세력을 무마하려는 고도의 기미책(羈靡策)이기도 했다.

조제보합론은 주자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주자의 양시양비론은 이념을 달리하는 정파간의 연립 정권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17세기 사림의 조제보합론은 이념이 같은 붕당간의 연립 정권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조선 후기의 조제론은 다같이 성리학적인 도학론(道學論)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념이 서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이념이란 이시이가 말하는 이학지상주의 같은 것이었다. 사림은 이조전랑의 자대권과 당하통청권, 언론 3사의 언론권을 바탕으로 국왕이나 대신의 권력을 제약하고 국왕과 대신의 도덕적 타락이나 부패를 방지해 관직 세계에 청신한 기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가 500년간이나 지속되는 데 크게 공헌했다.

3사의 뒤에는 전랑이 있고, 전랑은 3사의 여론을 주도하는 주론자와 연결되어 국왕이나 고위 관료의 부정ㆍ부패를 공격할 수 있었다. 또 주론자 뒤에는 산림(山林)이 있어 이론적 뒷받침을 해 주었다. 산림은 학문적인 식견과 지조가 높은 학자로서, 고려의 왕사(王師)나 국사(國師)처럼 국왕의 존경을 받으면서 유교적 이념이나 명분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거나 고위 관직에 있을 필요도 없었다. 산림은 국왕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관직이 높아졌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자의(諮議)ㆍ진선(進善)이나 성균관의 좨주(祭主)ㆍ사업(司業)과 같은 관직은 아예 그들을 특별 대우하기 위해 설치된 자리였다.

사림정치가 실시되던 인조반정 이후 순종조까지는 산림이 당파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당쟁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탕평정국 하에서는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어 당론의 주모자로서 탕평을 저해했으며, 세도정치 하에서는 외척의 사인(私人)으로 전락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산림은 광해군조의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으로부터 시작해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과 윤휴ㆍ허목(許穆) 등의 남인이 번갈아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탕평정치시대에는 이재(李縡)ㆍ김창협(金昌協) 등 노론 낙론(洛論, 사람과 만물의 성품이 같다고 주장하는 경기도 노론학파)계의 인사들이 산림을 독차지했다. 세도정치시대에는 산림이 외척 세력에 포섭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만 했다.

이상에서 설명한 정치 형태를 사림정치라 한다. 붕당은 사림정치에서 파생한 부산물에 불과한데, 학통을 바탕으로 사림간에 생긴 정파를 말한다. 16세기에 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조식(曺植)ㆍ성혼(成渾)ㆍ김인후(金麟厚) 등의 학파가 생기면서부터 붕당은 학통을 바탕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국법에서는 붕당이 불법화되어 있었다. 국왕도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붕당을 지었다는 공방이 오갔지만 누구도 스스로 붕당을 지었다고 내놓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군약신강의 정국에서 붕당은 현실적으로 존재했다. 국왕도 이를 제압하지 못해 붕당간의 타협을 통한 정국 안정과 왕권의 상대적 강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한다면 조선 후기의 정치 형태를 붕당정치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정치(政治)'라는 말은 '바르게 다스린다'는 좋은 뜻이다. 사사로운 이익을 탐해 파당을 지어 대립하는 것을 정치라고 하기는 어렵다. 붕당은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정권 쟁탈전을 목적으로 한 편당(偏黨)이다.

다만 세계 어느 나라나 권력 투쟁은 있었다는 점에서 붕당은 사림정치기에 이루어진 권력 투쟁의 한 형태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치주의의 경우와는 달리 문치주의 정치 체제인 사림정치의 권력 투쟁은 정권 쟁탈자들간의 싸움일 뿐이었다. 따라서 희생자들도 소수에 불과하고 일부는 귀양을 보내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조선 후기의 당쟁은 한민족의 분열적인 민족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 조선 후기의 붕당이나 붕당간의 싸움인 당쟁은 이와 같은 선에서 이해야야 한다. 붕당간의 공존과 비판은 하나의 타협책으로서 형편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권력 투쟁은 오로지 정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권력을 잡고 나면 다시 정권 내부에서 새로 분파가 생기기 때문에 또다시 정쟁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부러 관제 야당을 육성하는 경우도 있다. 당쟁이 심해지면 상대 당을 말살하려 든다. 숙종조의 환국 사태나 경종ㆍ영조조의 충역시비가 그러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권력 투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림정치는 권력 배분에 의한 정치의 안정, 정치 이론의 정립을 바탕으로 한 정치 구도의 확립, 부정ㆍ부패 방지를 통한 정계의 참신한 기풍 진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정치'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다. 이러한 사림정치가 시행된 시기는 선조조부터 숙종조까지에 해당한다. 영조조부터는 탕평정치가 실시되기 때문에 전랑권과 당하통청권, 3사의 언론권, 사관의 한림회천권(翰林回薦權)이 제도적으로 철폐된 1741년(영조 17)까지를 사림정치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림 정치가 시대에 따라 편차가 있고 당쟁에 휘말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도 했으나, 이 때까지는 사림정치의 틀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미 숙종조에 가림의 종장(宗長)인 송시열ㆍ윤휴 등이 사약을 받는 사태에 이르러 사림정치의 틀은 붕괴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붕당은 그대로 남아서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었다. 노론 척신 세력에 눌려 더 이상 권력 투쟁에는 나서지 못했으나 그 명맥은 면면히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도 붕당과 사림정치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사림정치의 권력 구조

송찬식은 이중환의 다음과 같은 글에 착목해 사림정치의 권력 구조를 천명했다.

"대개 우리 나라의 관제가 상세(上世)와 달라 비록 삼공육경(三公六卿)을 두어 여러 관청을 통솔하고 있지만 대각(臺閣 : 臺諫)에 치중해 풍문(風聞, 직접 견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정보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ㆍ피혐(避嫌, 공격을 받은 사람이 혐의를 피해 사표를 내는 것)ㆍ처치(處置, 공격한 언론기관이 아닌 다른 언론기관에서 사실을 조사해 판결을 내리는 것)의 법규를 두어 오로지 의논으로서 정사를 삼고 있다. 무릇 내외의 제배(除拜)를 3공(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에게 시키지 않고 오로지 이조에게 귀속시켰으며, 또한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질까 염려해 3사의 임명은 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오로지 전랑에게 맡긴 까닭에 이조의 전랑ㆍ좌랑이 또한 대각의 권한을 주도해 3공 6경의 벼슬은 비록 고관대작이지만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으면, 3사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논하게 하는데, 조정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명절(名節)을 숭상하는 까닭에 한 번 탄핵을 받으면 부득불 벼슬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전라으이 권한이 바로 3공과 같다. 이것이 대관(大官)과 소관(小官)이 서로 유지하고, 상관(上官)과 하관(下官)이 서로 견제해 300년 동안 큰 권간(權奸)이 없고, 꼬리가 길어서 휘두르기 어려운 근심이 없는 까닭이다. 이는 조종조에 고려조의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폐단을 경험해 암묵중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기미를 붙여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반드시 3사 가운데서 이름과 덕망이 있는 자로서 엄선해 전랑으로 임명하되 또한 스스로 후임을 천거하게 하고 장관(長官)에게 귀속시키지 아니하며, 일의 권한을 무겁게 하고 한결 같이 공의(公議)에 붙이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무릇 승진이 있으면 반드시 전랑으로 먼저 하되 차례대로 승진시킨 뒤에 다른 관청에 미치니, 한 번 전랑을 지내면 참으로 다른 사고가 없는 한 쉽게 공경(公卿)에 오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름과 실리가 구비해 무릇 신진이면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를 시행한 지 오래 되니 전후의 (전랑을) 통색(通塞, 통하거나 막히게 함)하는 동안에 싸움의 꼬투리가[爭端]가 없을 수 없었다." ([擇里志] 人心)

이 글은 사림정치의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이조전랑은 3사의 언론을 주도해 3공 6경을 견제하게 함으로써 정치를 깨끗하게 하고 정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전랑의 권한이 비대해지자 그 자리를 둘러싼 붕당간의 쟁탈전이 벌어져 당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575년(선조 8)의동인과 서인의 갈림이 그 예이다.

송찬식은 사림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화기(士禍期)의 사림 세력은 3사를 거점으로 해서 비사림 세력에 대한 정치공세를 폈으며, 동서분당 이후에도 당인(黨人)들은 여전히 3사를 통해 반대파를 제거했던 것이다. 3사의 언론을 통해 공공연한 정치적 논쟁을 거친 다음에 정치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림정치의 기본 방법이었다. 따라서 3사는 사회기나 당쟁기를 막론하고 사림정치의 중심무대였다. 이러한 사림정치의 중심무대인 3사의 언론을 전랑이 주도했다면 전랑은 정국의 권력구조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조 사림정치의 권력구조], 『經濟史學』제2호, 경제사학회, 1978)

최이돈은 당쟁의 전단계에 형성되었던 사림정치의 틀을 낭관권(郎官權)ㆍ언관권(言官權)의 발달을 중심으로 살폈다. 그에 의하면 1491년(성종 22)에 홍문관이 언관화되면서부터 사림의 여론 정치 틀이 마련되었으며, 중종조부터 선조 초에 이르기까지 천거제(薦擧制)가 강화되어 사림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사림의 여론 정치가 정착되었다고 했다. (『조선 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일조각, 1994)

대간(사헌부와 사관원)ㆍ옥당(홍문관)ㆍ전랑은 모두 청직이었다. 그러나 전랑은 옥당보다 청현(淸顯)했고, 옥당은 대간보다 청현했다. 따라서 옥당은 대간으로부터 선발되었고, 전랑은 옥당으로부터 선발되었다. 그리하여 전랑ㆍ옥당ㆍ대간은 보이지 않는 지배 관계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간의 언론은 옥당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옥당의 언론은 전랑의 뜻을 참작해야만 했다.

또한 전랑은 자기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자대권과 대간ㆍ옥당 등 엘리트 관직을 추천할 수 있는 통청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상관(堂上官)의 통청은 판서가 참의와 함께 가부를 결정하지만, 당하관(堂下官)의 통청은 전랑과 함께 가부를 결정했다. 따라서 전랑은 신진 사류의 영수(領袖)요 통령(統領)으로서 야망이 있는 젊은 사람이면 누구나 차지해 보고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조전랑은 정5품인 정랑 3명과 정6품인 좌랑 3명, 도합 6명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741년(영조 17)에 전랑의 자대권과 당하통청권이 혁파될 때 각각 1명씩 줄어 정랑 2명, 좌랑 2명으로 되었다. 전랑은 병조에도 있었으나 이조전랑만큼 중시되지 못했다.

이조전랑이 되기 위해서는 전임 전랑의 추천을 받아야만 했고, 추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3사 특히 옥당 관원으로서 명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야 했다. 옥당에서는 제각(提學) 이상을 문임(文任)이라 하고, 정3품 부제학(副提學, 옥당의 장관) 이하에서만 선발되었다. 그러나 정랑은 정5품이고 좌랑은 정6품이었기 때문에 결국 정5품인 교리(校理)로부터 정6품인 수찬(修撰)에 이르는 옥당 관원에 한해 이조전랑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예외가 없지 않아서 정3품 당하관인 직제학(直提學)으로부터 종4품인 부응교(副應敎)에 이르는 옥당 관원도 추천될 수 있었고, 때로는 옥당 관원을 이미 역임한 사람이 추천되기도 했다.

옥당 관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홍문록(弘文錄)에 들어야만 했다. 옥당에서는 장관인 부제학의 주재 하에 대간 중에서 옥당 관원이 될 만한 인물을 추천한다. 이 중 투표 점수를 많이 받은 후보자를 골라 이조에 보내면 이조에서 다시 의정부로 보내는데, 별 무리가 없으면 그 이름을 홍문록에 기재했다. 홍문록에 든 사람은 옥당에 자리가 나는 대로 옥당 관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랑 자리를 둘러싼 당쟁이 심해지자 1741년에 전랑권을 혀가하고, 옥당 관원들을 차례로 전랑이 되게 했으며 대간의 관원도 전랑이 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전랑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뇌물이 생행해 1776년(정조 즉위년)에 전랑권을 일시 부활시켰다. 그러나 다시 1789년(정조 13)에 완전히 혁파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림정치의 꽃인 전랑권은 사라지고 사림정치도 퇴색되어 갔다.

그러면 전랑권과 대간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대간은 전랑이 추천했기 때문에 대간의 언론은 전랑의 뜻[風旨]에 따라 나오게 되어 대간의 언론은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일치했다. 이것은 옥당의 언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언론 3사를 통해 나오는 이른바 공론(公論)은 모두 전랑의 지휘를 받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3사 가운데서도 3사의 언론을 주도하는 영수를 주론자(主論者)라 했다. 조론자는 전랑의 인정 하에서 언론을 주도했고, 전랑은 3사의 언론에 으해 인사를 단행했다. 이에 전랑과주론자는 표리 관계에 있었지만 전랑의 지원이 없이는 3사의 공론도 부지할 수 없었다. 이것이 사림의 여론 정치의 실상이었다. 물론 여론 담당층은 3사 이외에도 관립학교 학생[官學儒生]ㆍ지방유림, 심지어는 사류 개개인에게까지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연론의 핵심은 재도 언론인 3사 언론이었고, 3사 언론은 전랑이 지휘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언론은 재상이나 대신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조선 후기의 언론은 당하 낭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54~72
   
윗글 [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이성무)
아래글 [조선] 당쟁의 원인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8 사전3 [조선] 선조조의 당쟁 1 (이성무) 이창호 2002-11-26 2873
7 사전3 [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이성무) 이창호 2002-11-08 3202
6 사전3 [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이성무) 이창호 2002-11-08 3745
5 사전3 [조선] 당쟁의 원인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이창호 2002-11-24 1904
4 사전3 [조선] 당쟁의 원인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이창호 2002-11-24 1966
3 사전3 [조선] 당쟁의 원인 : 일본 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이창호 2002-11-28 1849
2 사전3 [조선]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이성무) 이창호 2002-11-07 2522
1 사전3 [알림] 한국사 사전 2를 만듭니다. 이창호 2010-07-01 415
1,,,301302303

이창호의 역사교육